6년여 함께 한 유명희 신부의 회고
6일은 ‘예수원지기’ 대천덕 신부가 이 땅에 묻힌 지 9년째 되는 날이다. 그의 84년 인생은 한마디로 개인 영성을 사회 정의로 연결시키려는 몸부림이었다. 가까이서 대 신부를 지켜봤던 성공회포항교회 유명희(53) 신부가 대 신부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 장문을 본보로 보내왔다.
유 신부는 1996년부터 2002년 7월까지 예수원 생활을 했다. 98년 5월부터 2002년 2월까지는 예수원 사무담당을 했다.
대 신부의 공식 일과는 오전 6시 아침기도로 시작했다.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으면 시편, 구약, 신약을 한 장씩 돌아가면서 읽었다. 그 후 대화시간. 은혜를 나누고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대 신부는 빠뜨리지 않고 ‘의와 공의’에 대해 강조했다. “의(義), 그냥 의(righteousness)가 아니고 공의(justice)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토지법을 이 땅에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킹제임스성경이 그렇게 번역했는데, 정치하는 사람들이 지주이기 때문에 공의라는 말을 안 쓰고 애매하게 그냥 ‘의’라고 쓴 것입니다.”
대 신부는 이 아침기도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외국에 나가도 하루 전날 귀원하든지 지방에 가더라도 반드시 아침기도 30분 전에는 도착했다. 아침기도가 끝나면 예수원 가족들과 공동식사를 한 뒤 오전 8시까지 잠시 휴식시간을 갖고 일상 업무를 시작했다.
대 신부의 책상 위에는 늘 파일 철과 온갖 서류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선교사들의 기도나 상담편지, 강의나 인터뷰 요청, 원고청탁 자료들이다. 대 신부는 한 사람 한 사람 정성스럽게 상담을 하고 답변을 했다.
2000년 안식년을 앞두고 왼쪽 고관절 통증 때문에 X선 촬영을 한 적이 있다. 고관절에 금이 간 상태로 시간이 흘러 두 뼈가 영겨붙은 심각한 상태였다. 10여년 전 예수원 뒷
산 바위에서 굴렀지만 별다른 조치 없이 그냥 이겨왔던 것이다. 유 신부는 “통증이 얼마나 심하셨던지 타이레놀 하루 기준치인 여섯 알 외에도 또 다른 진통제를 드셔야 했다”며 “하지만 신부님 얼굴의 미소는 변함이 없으셨기에 누구도 눈치를 못했었다”고 말했다.
대 신부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청와대에 편지를 썼다. 토지문제를 개혁해 부동산투기를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되뇌곤 했다. “정부가 나를 나가라 하면 갈 수도 있겠죠. 미국에 집이 있으니까….” 추방까지도 각오한 채 사역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주일 미사(예배) 때면 대 신부는 어김없이 죄를 고백했다. 그 고백은 너무 구체적이어서 어린아이 같았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고백한 적도 있다. 유 신부는 “신부님의 죄고백을 들으며 울고 웃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면서 “자신을 활짝 열어놓으셨던 신부님의 모습은 사역자인 나에게 롤모델이자 여전히 커다란 숙제”라고 말했다.
김성원 기자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