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윌리엄 틴데일 <최초 영어 성경번역>

유테레사 2012. 1. 19. 18:26


왕명으로 영어성경 출간… 死後에 마지막 소원을 이루다

윌리엄 틴데일은 1531년에 ‘토머스 경의 대화에 대한 응답’을 썼다. 토머스 모어가 쓴 ‘이단에 관한 대화’를 반박하는 책이었다. 책의 여백에다 그는 모어를 ‘거짓의 교황!’이라고 명시해 놓았다. 모어가 전통을 성경보다 더 높게 평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틴데일은 책에서 고백성사, 순례, 사죄경, 연옥, 십자가 기둥에 기도하기 등을 모두 바보스러운 의식과 성사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런 가톨릭을 옹호하는 모어를 “예수를 배신한 유다”라고 불렀다. 그는 모어가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는 이유를 “성직자의 관을 쓴 자들의 도움으로 명예와 높은 자리, 권력과 돈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야유했다.

당연히 모어는 분노했다. 그 사이에 그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영국 대법관의 자리에 올랐다. 낮에는 대법관의 일을 처리했지만, 첼시에 있는 집으로 퇴근해서는 틴데일을 반박하기 위한 집필에 몰두했다. 1532년에 그는 장장 6권으로 된 책 ‘틴데일의 응답을 논박함’을 펴냈다. 책의 분량으로 볼 때 그가 틴데일을 논박하기 위해 얼마나 정열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

모어는 틴테일을 “대(大)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그는 하나의 신앙만이 있으며, 이 신앙은 모든 사람이 아는 가톨릭교회에만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교회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며, 교회에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으며, 교회의 관습과 관례는 하나님의 진리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틴데일과 그 무리는 이러한 교회를 부정하고, 교회의 전통과 의식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조롱했다. 그는 책에서 틴데일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틴데일의 가르침을 따라서 고백성사 없이 회개하고 거짓된 이단에 빠져서 거룩한 교회를 배반하고 죽은 사람은 이 세상이 지어지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버리시기로 작정한 사람이며 참회의 과정 없이 영원히 멸망할 존재이다.”

모어는 책으로만 틴데일과 그 추종자들을 저주하지 않았다. 틴데일과 그 추종자들을 색출해 화형에 처하는 행동에도 앞장섰다. 그는 틴데일이 쓴 책 ‘그리스도인의 순종’에서도 왕에 대한 반역 혐의를 찾아냈다. 그 책에서 틴데일은 왕이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어길 것을 명령하면 순교를 달게 받을 각오로 불순종해야 한다고 썼다. 모어는 틴데일을 교회법으로나 세속법으로 옭아매어 빠져 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 틴데일과 그 추종자들은 색출되면 화형 당할 이유만 남았다. 모어는 실제로 틴데일의 추종자였던 ‘작은 빌니’, 틴데일의 책을 영국으로 반입했던 베이필드, 런던의 가죽 상인 존 튜크스베리를 화형시켰다.

그리고 틴데일의 영어성경과 저작들을 가지고 있던 법률가 제임스 베인햄을 잡아 모진 고문과 심문을 가했다. 그러나 베인햄은 ‘악한 마몬의 비유’ ‘그리스도인의 순종’ ‘고위 성직자들의 행태’ ‘토머스 모어의 대화에 의한 응답’ 등 자기가 가진 틴데일의 모든 저작들에 오류가 없으며, 영어성경이 너무도 좋다고 했다. 또 틴데일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진술했다. 그는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신념을 철회하지 않았다. 화형대에서도 모국어 성경을 갖는 것은 정당하며, 로마의 주교는 적그리스도이며, 연옥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하나님께 토머스 모어를 용서하라고 기도까지 하며 의연하게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이렇게 틴데일과 그 추종자들을 색출해 고문하고, 화형을 시키기도 한 말년의 토머스 모어를 보면, 젊었을 적 ‘유토피아’를 저술한 인문주의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는 가톨릭 구교에 대한 비판과 신랄한 풍자를 담은 ‘우신예찬’을 쓴 에라스무스와 절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었던가. 모어가 이렇게 변한 까닭을 틴데일은 탐욕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본 것이다. 사실 모어는 대법관으로 청렴했고, 가톨릭 성직자들이 후원금을 주고자 했을 때도 거부한 사람이었다.

헨리 8세는 1531년 가을, 영국에 반역적인 책을 보내는 틴데일과 그 일당들을 영국으로 넘겨 줄 것을 카를 5세 황제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의 이모 캐서린을 능멸한 헨리 8세의 청을 거부했다.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천일의 앤의 주인공 앤 불린과 결혼하고자 했다. 틴데일은 성서에 근거해 헨리 8세의 이혼을 반대하고 캐서린의 입장을 들었다. 헨리 8세는 납치를 해서라도 틴데일을 잡아서 영국으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토머스 모어의 틴데일과 그 추종자들 색출 작업에 날개가 달린 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모어도 자신의 신앙 때문에 왕의 희생물로 전락하고 만다. 헨리 8세는 메리 공주밖에 못 낳은 캐서린과 이혼하고 아들을 얻을 욕심으로 앤 불린과 결혼했다. 그는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이혼 허락을 요청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클레멘스 7세는 이혼을 금하는 가톨릭교회의 원칙에 따라 거절을 했지만, 캐서린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 황제의 이모라는 점도 고려했다.

헨리 8세는 1533년 1월 25일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과 비밀 결혼을 했다. 동시에 가톨릭교회와 결별할 것을 꾀해 1534년 수장령으로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수장령이란 국왕을 영국 교회 유일의 최고 수장으로 규정한 법령이다. 이제 영국교회는 교황의 지배가 아니라 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를 옹호하던 토머스 모어는 정세의 불리함을 알고 대법관직을 사임하였다.

1534년 모어는 앤의 소생을 왕위계승자로 한다는 왕위계승법에 서약하지 않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왕위계승법에 서약하면 그것은 캐서린과의 이혼을 인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로마 가톨릭의 입장을 반대하는 일이 될 것이며, 결국 그가 주장해 온 신앙을 배반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입장이기는 하지만 모어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참수형을 당했다. 모어는 런던탑에 갇혀 사형을 기다릴 때까지 이단자들을 반박하는 글을 쓰는 데 시간을 보냈다.

토머스 모어가 죽고 나서도 틴데일에 대한 수배는 그치지 않았다. 틴데일은 급작스럽게 변한 영국 사정을 몰랐다. 이제 영국은 종교개혁가들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유럽 대륙에서는 종교개혁가들이 위협 받고 있었다. 틴데일은 엔트베르펜에서 숨어 살았다. 그는 엔트베르펜에 오기 전 함부르크에서 1529년에 모세 5경을 번역했다. 엔트베르펜에 1년간 숨어 지내다가 영국인 밀고자의 고발로 황제의 대리인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는 황제의 법령에 의해 1536년 10월초에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목졸려 죽임을 당한 후 화형 당하는 형을 언도받았는데, 형 집행인의 실수로 화형 때까지 살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길 수 있었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하소서!”

틴데일의 마지막 소원은 제임스 1세에 가서야 실현된다. 왕명으로 성경의 영어 번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54명의 성직자와 학자가 참여해 번역한 ‘킹 제임스 성경’이 1611년에 출간되었다. 이 성경은 대부분 틴데일의 영어성경을 따른 것이다. 그는 형장의 불꽃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불꽃은 이후 영국인들의 언어와 신앙 속에 꺼지지 않는 불이 되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