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

[스크랩] 어떤 기념비

유테레사 2014. 6. 4. 11:33

어떤 기념비
(고_래 / 언니네트워크 편집팀 , enantios@hotmail.com)
얼마 전 전 늦은 여름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마침 아는 언니 H가 전해준 소식을 듣고 쉬기도 할 겸, 언니가 준비해왔던 행사에도 참가할 겸, 오키나와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또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지나서 도착한 미야코라는 섬. 그 섬에서 겪었던 며칠 간의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미야코는 작은 섬이었어요. 섬 주민이 5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3만 명이 주둔했다고 하네요. 태평양 전쟁 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일어났던 곳이 오키나와지요. 오키나와는 실제 전투로 인한 사망자보다 집단 자결 혹은 굶주림으로 인한 사망자도 많아서 이런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평화의 메세지를 나누고자 하는 기념비들이 몇 곳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민간인 추모 기념비에서도 추모되지 않았던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있었다던 '위안소'에 끌려온 어린 조선인 여성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이 작은 미야코 섬에도 '위안소'는 있었습니다.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 오키나와에 130여개, 미야코에도 16여개의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미야코에 도착한 첫째 날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따라 '위안소'의 흔적을 살펴보는 기행에 참가했습니다. 미야코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억 속 위안소는 실로 구체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집을 일본군이 강압적으로 차지하고 '위안소'를 차렸다는 증언을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 작은 섬에도 조선인 '위안부'가 끌려왔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해졌습니다. 사탕수수가 많이 난다는 빨간 흙의 열대의 섬인 미야코에서 '위안부'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빨래를 했다는 우물터를 보면서 점점 더 마음이 묵직해져만 갔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멀리까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저나 미야코를 방문한 연구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미야코 주민들은 얼굴이 하얀 조선인 여성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모두가 밭일로 까만 얼굴일 때, 건물에 갇혀 있었던 탓으로 얼굴이 하얗던 조선인 여성들을 말입니다.

그 여성들이 그저 마을 주민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었다면, 제가 이 공간으로 날아갈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야코의 주민 중 요나하 히로토시라는 분은 어린 시절 우물터에서 빨래하고 돌아오다 바위에 앉아 쉬어가던 그 조선 여성들을 기억하고, 추모의 비를 만들겠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자주 쉬어가던 그 터에 큰 돌을 가져다 놓고, 언젠가는 그 여성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후세에 전하겠다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이 요나하씨와 오키나와 필드워크 중이었던 H언니가 만남으로서 드디어 그 염원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지요.

한일 양국의 미야코 일본군 '위안부' 추모비 건립위원회,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미야코 주민들의 실행모임 등 다양한 단체가 참여하여 미야코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모금 활동을 했고, 드디어 9월 7일 드디어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행사를 위하여 한국 사무국의 윤정옥 선생님을 비롯한 정대협의 실무진 선생님들과 특별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신 박정희 할머니가 직접 방문을 하셨습니다. 할머니의 방문으로 미야코에서는 처음인 피해자의 증언회도 열렸습니다. 증언회에서 많은 미야코 주민과 학생 그리고 기념비 제막식에 참가하기 위해 온 사람들은 함께 슬퍼하고, 또 함께 분노하는 공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둘째 날, 기행과 증언회 참가하고나서 저는 스나야마 해변으로 향했습니다. 그 파랗디 파란 물에 몸을 담근 채,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몸이 두둥실 떠오르면서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렇게 파랗고 아름다운 곳에서 전쟁이 있었단 말인가. 이런 자연을 두고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싸울 수 있는 것일까. 이 이역 만리에 끌려온 여성들은 이 바다를 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을까. 이 바다가 지옥같이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장애물일뿐인 아름다운 이 바다가 저주스러웠을까. 아니, 섬을 들어올 때 말고 이 바다를 두 번 다시 만나지도 못했던 것은 아닐까. 떠 있는 몸이 푹 가라앉았으면하고 바라는 제 자신이 아주 우습게 느껴졌습니다.

드디어 제막식 날이었습니다. 인근 고교의 오케스트라가 아리랑을 연주했습니다. 당시 조선인 여성들과 비슷한 또래였을 고교생들은 약간은 긴장된 표정이었습니다. 당시의 조선인 위안부 여성을 기억하던 할머니 세 분이 나란히 휠체어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부르셨습니다. 그 시절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기에 거의 50여년도 더 지난 노래를 그렇게 부르시는지 놀랍고도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아리랑을 모두가 함께 따라부르고, 박정희 할머니가 기념비를 쓰다듬으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실 때, 저 역시 제대로 그 장면을 바라보기 힘들었습니다.

기념비에는 '여성들에게'라는 제목으로'일본군에 의한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을 나누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무력 분쟁에 따르는 성폭행이 그칠 것과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가 오기를 염원합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일본에 점령당하거나, 식민 지배 당했던 11개국의 언어와 또 다른 현대의 전쟁으로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당했던 국가인 베트남의 언어까지 추가된 기념비, 그리고 요나하씨의 아리랑비가 모습을 드러낼 때 모두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아픔이되, 아픔을 기억하는 방식이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기념식에 참가한 나카하라 미치코 선생님은 '미야코섬도, 오키나와 인으로서 차별 받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조선인 여성들의 아픔을 이해한 것이겠지요.'라며 그 지옥같은 전장을 살아낸, 주민들과, 조선인 '위안부'를 추모하는 비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진정 '차별'이라는 것은, 중심에 있는자들은 깨닫지 못하는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작은 섬에서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을 만들어 나가야할 우리에게도 많은 용기를 주는 것 같습니다.

오케스트라에서 아리랑을 연주했던 소녀들을 하나 하나 껴안아 주었던 박정희 할머니의 모습, 그리고 요나하씨의 희미한 웃음, 마을 실행위원들의 에너지를 보면서 저는 오키나와의 바다가 왜 아름다운 지 깨닫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외로웠던 조선인 여성들이 조금은 위안을 받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출처 : 서귀포여성회
글쓴이 : 단무지처럼살아요(순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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