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영국 토마스 크랜머-오른손을 불태우며 죽어간 종교개혁가

유테레사 2012. 1. 19. 18:45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불화빚던 헨리 8세 도왔다가 끝내…

화형대에는 화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쇠줄에 묶여 있었다. 집행관이 화형대 아래 쌓아 놓은 장작더미에 불을 지피자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대개 불이 피어오르면, 화형 당하는 사람은 기둥에 묶여서도 본능적으로 불을 피하려고 이리 저리 몸을 뒤트는 법이다. 그러나 화형대에 쇠줄로 묶인 이 사람은 자신의 오른손을 먼저 불길 속으로 내밀었다. 엄청난 기세로 불이 붙기 시작한 장작불은 그의 오른손을 휘감으며 타기 시작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몸서리쳤다. 구경하는 사람조차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런 끔찍한 고통을 참으며 화형대에 묶인 사람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다. “이게 그것을 썼던 손이오.”

그는 오른손이 다 탈 때까지 그 손을 쓸 데 없는 손이라며 저주했다. 화형장에 와 있던 사람들은 그 오른손을 잊을 수 없었다.

이 날 화형을 당한 사람은 성공회의 공동기도서를 만든 영국의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였다. 도대체 그는 왜 자기 오른손을 저주하며 화형을 당한 것일까?

크랜머는 죽기 전 회유에 넘어 가 자기 신앙을 포기하는 문서에 서명하였다. 그때 그 문서에 서명한 손이 그의 오른손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오른손을 저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서명한 것이 잘못된 것을 알고, 곧바로 회개하고 그것을 부정했다. 그 대가로 그는 화형을 당했다. 화형 당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한때 신앙을 배반했던 자신에게 스스로 벌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행위를 한 자기의 오른손을 스스로 화형시킨 것이다.

화형을 당한 크랜머는 런던의 대주교였다. 그의 화형은 소위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메리 여왕 통치 기간에 일어났다. 메리 여왕을 왜 피의 메리라고 부르는가? 메리 여왕은 즉위하자마자 로마 가톨릭을 부활시키기 위한 정책을 꾀하며 종교개혁가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메리 여왕의 통치 기간에 화형 당한 사람만 288명이었다. 종교개혁 진영의 중요한 지도자 크랜머도 이런 박해를 받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메리 여왕은 부왕 헨리 8세와 자신의 선대 왕인 에드워드 6세가 추진했던 종교개혁을 어떤 이유로 한 순간에 다 뒤집어버린 것일까? 그리고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대 왕들이 총애했던 크랜머 대주교를 화형에 처한 것일까?

메리 여왕이 즉위할 때부터 그녀의 복수는 예고된 것이었다. 메리가 헨리 8세에게 버림받은 캐서린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캐서린은 아들 둘을 포함해 여섯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죽고 딸 메리밖에 없었다.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왕조를 이을 아들이 필요했다. 그는 폐경기가 되어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캐서린과 강제로 이혼했다. 그는 그녀의 시녀인 앤 불린과 결혼하고 캐서린을 왕비의 지위에서 끌어내렸다. 그녀의 딸 메리는 사생아 취급을 받았다.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 8세가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잘 알다시피, 1527년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결혼은 무효라고 하면서 합법적 이혼 승인을 교황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캐서린과의 이혼은 복잡한 문제였다. 그것은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라 유럽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그녀의 조카였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헨리 8세는 어떻게 하면 캐서린과 이혼할 수 있을까 골몰했다. 그때 헨리 8세에게 궁정에서 일을 하던 가디언과 폭스가 크랜머를 추천하였다. 그들은 헨리 8세와 만나기 전에 결혼 문제에 대해 크랜머와 논의했었다. 그 때 크랜머는 왕의 이혼 문제에 대해 영국과 유럽 대학을 대상으로 의견을 구할 것을 제안했다. 이미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는 전 유럽의 관심사이자 신학적 논쟁거리였다.

이 제안을 들은 헨리 8세는 크랜머를 왕궁으로 불러 들였다. 헨리 8세와 만난 크랜머는 이 문제를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의 가장 학식이 뛰어난 신학자들에게 맡기라고 권유했다. 본인은 그 복잡한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헨리 8세는 필요한 편의를 모두 제공하면서 그에게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해 문서로 작성할 것을 명령했다. 크랜머는 이혼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 모든 공의회, 고대 교부 철학자들의 사례를 언급하며 성경과 하나님 말씀 이외에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담은 문서를 작성했다.

헨리 8세는 크랜머의 주장을 맘에 들어 했다. 그는 로마 교황을 설득하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크랜머를 유럽 여러 나라와 로마로 보냈다. 로마 교황을 만난 크랜머는 이혼의 정당성을 위한 자신의 책을 제시하며 공개토론을 요구했다. 그러나 공개토론은 로마 교황청의 연기로 무산되어 버렸다.

그러던 도중에 캔터베리의 대주교 워햄이 1532년 8월 22일에 사망하였다. 헨리 8세는 크랜머를 후계자로 내정하고 런던으로 소환했다. 크랜머는 1533년 3월 30일에 대주교의 자리에 올랐다. 헨리 8세가 그를 대주교에 오르게 했던 것은 어찌 보면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하루 빨리 결혼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러나 1531년에 로마교황청에서는 이혼을 불허하였다. 이에 대해 헨리 8세는 1533년 1월 25일 앤 불린과 비밀 결혼을 하고 1534년에는 수장령을 만들어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수장령이란 국왕을 영국 교회 유일한 최고 수장(首長)으로 규정한 법령이다. 수장령에 이어 앤 불린의 후손이 왕위를 잇는다는 왕위계승법도 마련되었다. 이 법들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반란죄로 목이 달아났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가톨릭을 지지했던 토머스 모어였다.

대주교 크랜머는 1533년 5월 23일에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신의 법에 어긋나는 것이며 헨리 8세와 앤과의 결혼은 적법한 것이라는 종교적 선언을 했다. 그러자 로마 교황은 헨리 8세와 크랜머를 파문했고, 그의 대주교직을 박탈했다. 물론 영국과의 외교 관계도 단절했다. 헨리 8세도 영국 의회를 통해 로마 가톨릭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로마 측의 저주나 파문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례를 집행하겠다는 약속을 성직자들로부터 받아냈다.

이제 영국의 성직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영향을 벗어나 움직였다. 새로운 왕비 앤 불린은 자신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일에 앞장 선 크랜머를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왕의 변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앤 불린도 딸밖에 낳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왕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그녀를 간통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사형시켰다. 당연히 앤 불린과 가까웠던 크랜머도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이미 크랜머의 친한 친구이자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크롬웰 경은 런던탑에 갇혔다가 1540년에 사망했다. 대주교 크랜머에 대해서도 많은 모함이 쏟아졌다. 헨리 8세는 크랜머를 조사했지만 의심할 만한 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

헨리 8세는 세 번째로 결혼한 제인 세이머에게서 소망하던 아들 에드워드를 얻게 된다. 그가 죽자 당시 9세의 소년 에드워드가 영국 국왕으로 즉위한다. 소년 왕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크랜머는 1542년에 ‘성공회 기도서(Books of Common Prayer)’를, 1552년에는 42개 신조를 선언해 영국의 종교개혁을 가속화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통치 기간은 너무나 짧았다.

에드워드가 사망한 후 누가 왕위를 이을 것인지가 문제였다. 논란 끝에 캐서린의 소생인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가톨릭 교도였던 그녀가 왕위에 오르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곧 바로 가톨릭 복고 정책이 시행되면서 한을 푸는 듯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메리는 어머니를 이혼시키고, 어머니의 시녀였던 앤 불린과 아버지를 결혼시켰던 크랜머를 단순히 죽이는 것으론 제대로 된 복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떤 복수극을 펼쳐야 할까 고민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