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냉혈한 종교개혁가 - 칼벵

유테레사 2012. 1. 19. 18:55

 

[크리스천 인문학] 냉혹한 열정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 (上)

 

 


박해받는 신교도 위해 ‘기독교 강요’ 저술… 유럽 역사를 새로 쓰다

“쾅, 쾅, 쾅.” 누군가 문을 부술 모양으로 두들겼다. “빨리 문을 열라.” 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방문은 아직 잠겨 있다. 그렇지만 곧 열릴 것이다. 도망갈 수 있는 길은 창문 아래 정원 쪽이었다. 창문에서 내려다보니 정원은 한참 아래에 있었다. 이미 문이 덜컹대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청년은 커튼을 꼬아 정원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정원 쪽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청년은 가까스로 정원으로 내려와 도주에 성공했다. 커튼을 타고 내려와 도주에 성공한 이 청년은 얼마 전 파리 대학 학장이 행한 연설의 실제 작성자로 의심받고 있었다. 이 청년의 친구인 파리대학 학장 니콜라 콥은 1533년 11월 1일 만성절에 관례대로 새 학기를 여는 연설에서 마태복음 5장 3∼8절의 팔복에 관해 설교를 했다. 설교 내용은 인문주의적이고, 종교개혁적이었다.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영향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소르본 신학교는 이 연설을 이단적이라고 비난했다. 프랑스 남부에 있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이 사실을 보고받고, 즉각 체포하라는 조치를 내렸다. 파리대학 학장 콥의 연설문의 배후로 드러난 이 청년도 몸을 숨겨야 했다. 실제로 파리대학 학장의 연설문을 작성했을 것이라 의심받은 이 청년은 존 칼뱅이었다. 그때 나이 24세였다.

칼뱅은 체포령을 피해 새로운 사상이 불어오고 있는 앙굴렘으로 갔다. 앙굴렘은 프랑수아 1세의 여동생이자 나바르 여왕인 마르게리트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마르게르트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읽을 수 있었고,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영어,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여성이었다. 그녀 주변으로 인문주의적 지식을 갖춘 종교개혁적 성향의 진보적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칼뱅은 앙굴렘에 사는 친구 루이 뒤 틸레의 집을 은신처로 삼았다. 앙굴렘에는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기에 그곳을 이용해 계속 학문을 할 수 있었다. 1534년 5월 그는 고향 누아용을 방문해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받는 성직록을 포기했다. 이로써 그는 구교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 성직록을 포기한 까닭은 그의 종교개혁을 향한 회심 때문이었다. 그의 회심은 파리대학 학장 콥의 연설 이전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557년에 쓴 ‘시편 주석’의 서두에서 회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이 교황청의 미신에 매우 집요하게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깊은 나락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깨우침과 수용력으로 인도한 직접적인 변화(subita conversione ad docilitatem)를 통하여’ 나이가 들어 이미 제법 완고해진 마음을 변화시키셔서 개종하도록 인도하셨다. 참된 개혁주의 신앙의 확실한 맛을 보고나자마자 그 신앙 안으로 더 나아가고자 하는 열정이 나에게 불타올랐다.”

회심에 대한 칼뱅의 진술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라틴어 ‘subita’라는 말이다. subita는 갑작스러운 뜻도 있지만, 매개가 없는 직접적인 뜻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subita라는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갑작스럽고도 직접적인 변화가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칼뱅은 회심 이전에도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회심은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이나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일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회심 이전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통렬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나는 하느님의 대적이었다. 나는 하느님께 절대 순종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만과 악이 가득 차 있었다. 또한 하느님께 대적하여 영원한 죽음으로 뛰어드는 악독하고 완고함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하느님이 긍휼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고 무궁한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나는 분명 멸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칼뱅의 회심은 진정한 신앙을 위한 ‘터닝 포인트’였다. 그는 회심 이후 종교개혁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 길은 가시가 널려 있는 고달픈 길이었다.

칼뱅이 숨어 지내며, 그래도 한편으로 자유를 누렸던 앙굴렘에서의 짧은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칼뱅이 고국 프랑스를 떠나 평생 외국을 떠돌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종교개혁 성향의 독일 선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전략적 차원에서 종교개혁에 대해 제한적이지만 관용정책을 펴왔다. 그러나 그러한 관용정책을 접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1543년 10월 17일 밤, 프랑수아 1세의 침실 밖에 팸플릿이 붙었다. 그것은 미사를 용서할 수 없는 영적 남용으로 비난하는 글이었다. 팸플릿은 왕의 침실에만 붙은 게 아니었다. 성의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다. 팸플릿이 붙여진 다음 날, 왕은 자신이 자는 곳까지 누군가 몰래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프랑수아 1세는 이런 상황을 영적인 전투상황이자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독일 선제후들과의 전략적 제휴는 이미 물 건너간 일이 되었다. 그는 미사와 교회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행위를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종교개혁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끔찍한 탄압을 당했다. 프랑스에 남아 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칼뱅도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스트라스부르로 갔다가 1535년에 스위스의 바젤로 건너갔다. 바젤은 1529년 종교개혁에 이미 동참했고,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지 않는 도시였다. 인문주의 성향의 대학이 있었고, 새로운 사상을 접하고 또한 전파하기 좋은 출판의 중심지였다.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프랑스의 소식을 계속 들을 수 있었다. 칼뱅은 이미 프랑스에서 도망쳐 온 친구 콥을 이곳에서 만나 언어 훈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칼뱅이 존경했던 에라스무스도 그해에 바젤에 정착했다. 그가 에라스무스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바젤은 칼뱅이 종교개혁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젤에서도 칼뱅은 불안했다. 마르티누스 루시아누스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의 박해받는 신교도들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박해받는 프랑스의 신교도들을 옹호하기 위해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1536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의 이름은 ‘기독교 강요’였다. 칼뱅은 대담하게 ‘기독교 강요’를 프랑수아 1세에 헌정하며 프랑스의 신교도들을 옹호했다. 이 책에서 그는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자들이 비판한 중세교회의 잘못된 모든 과정을 밝히고, 종교개혁은 성경적 원리로 돌아가려는 운동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 책으로 칼뱅은 유명세를 얻었다. 이 책은 앞으로 유럽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고, 유럽의 얼굴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이 책은 종교개혁가로서 칼뱅이 걸어가야 할 운명도 함께 결정지었다. 그러나 칼뱅은 제네바에서 기욤 파렐을 만나기 전까지 그러한 운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