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회유당한 것 회개, 종교개혁에 자신을 불사르다
메리 여왕은 토머스 크랜머를 자신의 등극에 반대하는 반역죄로 기소했다. 메리 여왕은 등극하기 전에 한 바탕 권력쟁탈전을 치렀다. 에드워드 6세가 죽고 나서 강력한 왕위계승자임에도 섭정 노섬벌랜드 공에게 밀려 서포크 지방의 프레밍턴 성에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녀 대신에 에드워드 6세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헨리 7세의 증손녀였던 그레이 제인이었다. 그러나 제인은 9일 동안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가 참수되고 만다.
원래 제인은 왕위를 원하지 않았다. 이름 없던 그녀가 왕위를 계승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은 모두 섭정 노섬벌랜드 공의 야심 때문이었다. 그녀는 노섬벌랜드 공의 며느리였다. 원래 제인은 노섬벌랜드 공의 아들과의 결혼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섭정 노섬벌랜드 공과 부모인 그레이 후작 부부는 에드워드 6세가 죽으면 제인을 왕위에 올릴 생각으로 결혼을 종용했다. 에드워드 6세가 세상을 뜨자 노섬벌랜드 공과 그레이 후작 부부는 강력한 왕위계승권자인 메리 1세를 제치고 제인을 왕위에 올렸다.
시아버지 노섬벌랜드 공은 계속해서 섭정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민심은 섭정에게서 멀어졌고, 동정과 새로운 기대로 헨리 8세의 장녀 메리에게 기울어 있었다. 섭정은 메리의 런던 입성을 저지했지만, 메리는 런던 시민의 지지를 받으며 런던에 입성했다. 제인은 반역죄로 런던탑에 유폐되었다가 처형되었고 노섬벌랜드 공도 처형당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여왕에 등극한 메리는 자신의 등극을 반대하고 제인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반역죄로 기소했다. 크랜머는 메리 여왕의 등극을 반대하지 않았다. 적대자들은 크랜머가 메리 여왕의 등극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지고도 그를 비난했다. 그가 메리 여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로마 가톨릭의 의식을 따라 행동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러한 모함에 맞서 그런 사실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 개조들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메리 여왕은 그런 크랜머를 1553년 11월 13일에 반역죄로 기소하였다. 그러나 크랜머에게 반역죄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메리 여왕의 등극을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왕의 등극을 반대한 사람들은 약간의 벌금을 무는 대가로 면직에 그쳤다. 그러나 크랜머는 반역죄로 대주교의 직위를 잃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여왕은 크랜머와 함께 라티머, 리들리, 카버데일 등 종교개혁 지도자들도 처벌했다. 동시에 에드워드 6세 때 만든 교회법 등 종교개혁 정책도 모두 폐기했다. 그녀는 1554년 12월에 종교개혁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종교개혁 금지와 더불어 추방과 박해가 가해졌다.
메리 여왕은 크랜머에게 철저하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몸도 영혼도 모두 파괴하고자 했다. 크랜머는 화형 당하기까지 3년 동안 고통스러운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감옥 생활 동안 자신의 신앙을 철회하라는 고문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돌아서게 만든 것은 회유였다. 두 명의 구교측 수사들은 그를 감옥에서 교회 사제관으로 옮겨 대접하면서 그에게 편의를 베풀기 시작했다. 그가 믿음을 철회하기만 한다면 여왕의 호의는 물론 예전의 자리까지 회복시켜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첫 번째 문서에 서명할 것을 종용했다. 오랜 수형 생활에 지치고, 화형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는 다음과 같은 문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전 캔터베리 주교인 나 토머스 크랜머는 루터와 츠빙글리가 벌여 놓은 온갖 형태의 이단들과 오류들은 물론이거니와 건전하고 참된 교회에 역행하는 다른 모든 가르침들을 진정으로 거부하고 혐오하고 증오하는 바이다. 그리고 나는 늘 언제나 내 마음을 믿으며, 내 입으로는 하나밖에 없는 거룩한 가톨릭 교회, 즉 그곳 밖에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그 교회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로마의 주교를 지상에서 최고 권위를 가진 머리로 인정하고, 그가 고결하기 그지없는 주교와 교황이요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시인하나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에게 복종하리라.”
이 문서 외에도 그는 종교개혁을 부인하는 다섯 개의 문서에 서명하였다. 메리의 복수극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복수의 최후를 어떻게 장식할까 고심했다. ‘그냥 그를 불태워 죽이는 것만으로는 너무 관대하다. 그가 어머니에게 저지른 죄가 있지 않은가. 불에 태워 죽이기 전에 자신의 입으로 죄를 고백해야 하지 않는가.’
그녀는 사람을 보내 크랜머에게 자신이 서명했던 것에 대해 설교를 준비하도록 했다. 그녀는 그가 추구해 왔던 신앙을 만인 앞에서 자신의 입으로 배반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큰 실수였다. 크랜머는 그 설교의 시간을 회개의 시간으로 잡았다. 집행관들은 그를 성 마리아 성당으로 데려갔다. 다 찢겨지고 더러운 옷을 입은 채 그가 설교단 맞은편에 세워진 볼품없는 연단에 오르자 사람들은 연민을 느꼈다. 그는 먼저 무릎을 꿇고 하느님 아버지에게 통회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신도들이 왜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 신도로서 왕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 부자들이 왜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하는지 설교를 해 나갔다. 메리 여왕 측의 사람들은 이때만 해도 크랜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설교를 마무리지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크랜머가 설교 마지막에 자신이 서명한 것을 뉘우치고 종교개혁적 신앙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지금 난 여기서 그 글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바입니다. 거기에 쓰인 것들은 비록 내 손으로 쓰였다 해도 내 맘 속에 품고 있던 진리와는 상반되는 것이었고, 죽음이 두려워 행여나 목숨을 건질까 해서 썼던 것입니다. 즉 내가 강직된 이후로 직접 쓰거나 서명했던 그 모든 증서들과 문서들 속에는 진실이 아닌 것들이 수없이 들어 있습니다. 내 마음과 어긋나는 글을 쓴 대가로 내 손을 가장 먼저 처벌하겠습니다. 내가 불에 다가가면 내 손을 제일 먼저 불태워 버리겠습니다.”
계속 이어진 설교에서 그는 교황을 그리스도의 원수요 적그리스도라 지칭하고, 로마 가톨릭 교리를 거짓교리로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그가 이렇게 선언하자, 교회는 놀람과 동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크랜머의 설교로 여왕과 가톨릭 측은 낭패를 맛보아야 했다. 메리 여왕의 복수극도 한 방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적대자들은 크랜머를 연단에서 강제로 끌어내려 6개월 전에 종교개혁자 라티머와 리들리가 처형당한 곳으로 끌고 갔다. 이전에 그를 설득해 신앙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두 명의 구교 측 수사가 다시 그의 마음을 돌리고자 했으나 그는 끝까지 거부했다. 화형대에 쇠사슬로 묶인 그는 설교에서 했던 말대로 오른 손을 내밀었다. 그는 화형대에 묶여 숯덩이가 될 때까지 오른손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크랜머가 순교하지 않고 배교했더라면, 지금의 영국 국교회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순교는 영국을 다시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메리 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44년의 통치 기간 크랜머가 만들어 놓은 종교 의식과 종교 신조 등 종교개혁 정책들을 다시 실시해 영국 국교회를 반석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크랜머가 헨리 8세와 결혼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앤 블런의 딸이다.
크랜머 ‘마지막 회개 연설’
신도들이 왜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 신도로서 왕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 부자들이 왜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 역설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부인하는 문서에 서명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 행여나 목숨을 건질까 해서 썼던 것이며(중략), 내 마음과 어긋나는 글을 쓴 대가로 내 손을 제일 먼저 불 태워 버리겠다고 말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