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관련

[스크랩] 부산 속의 6.25<3> 한국전쟁과 부산시민

유테레사 2016. 1. 2. 15:40

[기획시리즈] 한국전쟁 60년 - 부산 속의 6.25<3> 한국전쟁과 부산시민/ 국제신문
작성자 :
작성일 : 10-07-22 13:33

[기획시리즈] 한국전쟁 60년 - 부산 속의 6.25<3> 한국전쟁과 부산시민/ 국제신문/2010.06.23/ 조민희 기자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대한민국의 국민 대부분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피란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강제로 이주되거나 수용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1951년 1·4후퇴 이후 최후방이 된 부산에는 수십만 명의 피란민들로 넘쳐났으며 끼니를 때우지 못해 허덕이는 이들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전쟁이 중단된 후에도 다수의 피란민들은 부산에 정착해 삶을 이어갔다. 3년간의 임시수도 시절과 전국 각지에서 온 수십만 명의 피란민을 포용했던 상황은 부산시민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전국에서 밀려든 피란민… 곳곳에 움막, 판잣집

1951년 초 부산 동구 부산진역 뒷편 해안가에 줄지어 들어선 움막과 천막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란민들이 지은 것이다.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밀려들어왔다. 전쟁기간 부산에 몰려든 피란민들은 70만 명을 훌쩍 넘었다. 특히 정부는 1·4후퇴 이후 부산으로 들어오는 피란민들을 감당할 수 없었고 제대로 된 대책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만이 정부가 마련한 수용소에서 생활할 수 있었고 대부분은 중구 광복동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한 용두산, 복병산, 대청동, 부두주변,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범일동, 영도 바닷가 주변인 태평동 서구 아미동과 부산진구 당감동 등 부산 곳곳에 천막이나 움집,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함경도와 황해도 등 이북 지역 월남 피란민들은 전쟁 초반 일찍 부산에 자리를 잡은 동향 피란민들을 찾아왔고 기존 피란민들은 자신들의 천막 옆 빈 공간을 내주었다. 이러다 보니 부산진구 당감동만 하더라도 당감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함경도마을과 황해도마을 등이 생겨났다.

피란민들은 가마니로 천막을 만들었고 담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생존해 있는 피란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천막 한 가운데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통로 양쪽에 가마니로 출입문을 만드는 식이었다. 통로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총 12~16가구가 생활했기 때문에 한 가족이 배정받은 공간은 성인 2, 3명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 크기의 6.6㎡에 불과했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소속 차철욱 공윤경 차윤정 교수가 지난 4월 발표한 연구자료 '아미동 산동네의 형성과 문화변화'에 따르면 이때 만들어진 판잣집은 1953년 3만 호를 훨씬 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다소 규모가 큰 판자촌은 영주동 산기슭, 영도대교로 해안가, 보수동 등 주로 부두나 시장과 가까운 곳이었다.

집단수용소에서는 구호식량을 공급받았지만 이외의 피란민들은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됐기 때문에 부두노동자 행상 지게꾼 등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 때문에 피란민들이 대거 거주했던 지역에는 시장이 형성되거나 기존 시장이 확대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피란민+토박이, 부산시민 정체성 성에 영향

1951년 6월 한국전쟁 당시 부산 남구 감만동으로 피란와 있던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표정. 참전 미군 병사가 촬영한 것이다.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한국전쟁이 중단된 뒤 일부 피란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다수의 피란민들은 부산에 그대로 자리를 잡았다. 전쟁 발발 전인 1948년 50만 명을 조금 넘었던 부산 인구는 1955년 105만 명으로 배가량 급증했다. 증가한 인구 50만 명가량은 기존 피란민에다 거제 등 경남 각 지역에 수용됐던 피란민들과 농촌에서 몰락한 유랑민 등이 더해진 것으로 분석된다.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부산에 적응해 살아야 했다. 피란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동향 사람들보다는 부산에서 만난 동네 이웃이나 직장 동료와의 관계를 우선시하며 고향의 사투리를 고치는 등 자연스럽게 부산에 동화돼갔다. 전라도 출신으로 전쟁 때 서구 아미동에 정착한 신모(여·80) 씨는 "명절 상차림도 전라도식은 다 잊어버렸고 그냥 여기 식대로 음식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란민들만 부산 토박이 문화에 적응만 한 것은 아니었다. 토박이들도 전국 각지 출신의 피란민의 문화를 흡수했다. 생선 위주의 식생활을 했던 부산 사람들이 돼지국밥 등 육고기 식문화를 수용하고, 냉면과 빈대떡을 즐겨 먹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과 피란민들로 인해 부산시민의 주요 특징으로 꼽히는 '개방성'과 '포용성'이 길러졌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정착에 대해 연구해온 차철욱 교수는 "피란민들과 부산 토박이들이 수십년간 함께 부대끼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았다"며 "이런 과정에서 서로 혼종(뒤섞임)이 일어나면서 타인과 타지에 대한 '개방'과 타 문화에 대한 '포용'이라는 부산시민의 정체성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부산시민들이 민중성에 눈을 뜨고 비민주주의에 항거하는 저항의식이 형성됐다는 분석도 있다. 타 문화의 수용에 익숙한 부산시민들이 획일적·일방적인 독재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나라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시민들은 들불처럼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광호 민주공원 관장은 "전쟁으로 인해 빈부의 차이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가난하고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때 '민중'이라는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부산은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포용성과 개방성을 갖게 되지만 한국전쟁 시기를 겪으면서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런 성향들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 당시의 예술활동

- 중구 일대 '밀다원다방' 등 문인·화가들 아지트 생겨나
- 부산문화에 미친 영향은 적어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온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찾았던 중구 광복동 춘추다방 자리(왼쪽·현 빈폴 매장). 오른쪽 퓨마매장 자리 건물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사무실과 밀다원 다방(2층)이 있었다. 김동하 기자 kimdh@kookje.co.kr
전쟁을 피해 전국 각지에서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 중 문화예술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은 1950년부터 전쟁이 중단된 1953년까지 3년간 부산에서 머물면서 활발한 예술활동을 펼쳤다.

신상옥 유현목 감독 등 많은 영화인들이 부산으로 유입됐으며 '낙동강' '고향의 등불' 등 26편의 한국영화가 부산에서 만들어졌고 또 중구 동광동 부민관에서 상영됐다. 김동리 황순원 박종화 등 유명 문인들도 밀려들어왔다. 이들의 작품은 전쟁기간 중이었지만 월간지 '문예'와 '신천지' 등에 실렸다. 황순원은 '곡예사'라는 작품을 집필했으며 김동리는 당시 문학인들이 자주 모이던 밀다원다방을 배경으로 '밀다원 시대'를 쓰기도 했다. 이중섭 임호 등의 미술인들은 종군화가단으로 활약했으며 중구 일대의 밀다원 금강다방 등 다방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대중음악도 크게 유행했다. 전쟁직전 '빈대떡 신사'로 인기를 끌었던 작곡가 한복남 씨는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내려와 '도미도레코드사'를 설립, '페류샤왕자' '백마강' 등을 히트시켰다. 또 임정수 씨가 서구 남부민동에 '미도파레코드사'를 설립해 '40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으로 시작하는 '경상도 아가씨'와 '해운대에레지' '청춘에레지'를 발표해 인기를 모았다.

2005년 부산대 차철욱 교수가 부산 중구청의 의뢰를 받아 중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문화예술인의 자료를 수집, 학문적으로 정리한 '피란시절, 부산의 문화'에 따르면 임시수도시절 중구 일대에서는 119차례의 악·가극공연과 40차례의 극공연, 35회의 음악회 등이 열렸으며 26편의 한국영화와 170편의 외화가 개봉됐다. 32회의 단체 미술전과 27회의 개인전이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의 왕성했던 예술활동이 부산의 문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제한적이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갑자기 부산으로 내려와야 했던 예술인들 역시 다른 피란민과 마찬가지로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웠다. 당시 악극단의 최고 인기가수와 연주단이 일본으로 밀항하기도 했으며 화가들은 도기회사에서 도기 풍속화를 그리거나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문학계의 경우 김말봉과 오영수 유치환 등 부산의 문인들이 서울지역 문인들의 거처와 생계를 보살펴주면서 인간적·문학적 친분을 쌓기도 했다. 또 이것이 결과적으로 부산 문단이 일정부분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부산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궁핍한 데다 정부의 제재가 많다 보니 예술인들은 원하는 대로 작품활동을 할 수 없었고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 돼버렸다.

소설 속에 등장한 부산의 곳곳을 찾아보고 쓴 '이야기를 걷다'를 펴낸 경성대 조갑상 교수는 "당시 서울작가들이 쓴 작품들을 보면 서울지역 문인들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었다"며 "문인들의 경우 어느 정도 상호관계가 형성됐지만 문화 전반적으로 봤을 때 지역 간 문화예술인들의 교류가 상당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출처 : 品 石 齋
글쓴이 : 구산(九山)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