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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03.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

유테레사 2018. 8. 22. 00:21

 

03.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

 

 

 

 

 

2. 고대/중세 아프리카

 

 

고대 아프리카 역사는 기록이 별로 남지 않아 언제나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의 역사라 할 수 있다.

 

1) 고대이집트 문화와 아프리카

 

기원전 3~14000년 아프리카 대륙은 기온의 변화로 차고 건조한 기후였다. 건조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습한 기후를 가진 이집트 나일 강 주변에는 정착문화가 발달하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가장 권위주의적인 중앙집권체제를 통해 로마에 정복될 때까지 아프리카 역사와 문화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그러나 이집트왕조가 성립되고 번성하기 이전부터 아프리카 북부지역은 흑인 아프리카인뿐만 아니라 서아시아에서 건너온 다양한 인종이 있었으며 이들은 아프로-아시아어를 구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집단들은 이집트와 같은 커다란 국가체제를 갖추지는 못했어도 도시를 발달시키고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 2천 년대 초반 경 누비아의 쿠시왕국이 건설되기까지 아프리카에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갖춘 유일한 국가는 이집트뿐이었다. 또한 문자의 존재는 아프리카 문명의 기원이 이집트 문명과 연관되었음을 어느 정도 시사하기도 한다.

 

 

2) 아프리카 왕국의 성장과 쇠퇴

 

쉽게 왕래할 수 없는 고저 변화가 심한 계곡, 낙타가 도입되기 전 왕래할 수 없었던 사막, 여러 가지 질병을 발병시키는 삼림 등 천태만별의 자연환경과 고르지 못한 인구 분포로 고대 아프리카 왕국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적어도 18세기 이전까지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들은 - 북아프리카, 이집트, 악숨왕국을 제외하고 - 문화적 정체성과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통한 사회적 통제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과 통제는 국가 유지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환경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무역의 쇠퇴는 곧바로 국가의 쇠퇴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악숨 왕국을 제외하고 근대세계에 들어서기까지 독립적으로 살아남은 아프리카 국가는 거의 없었으며, 이는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인구가 없는 빈 대륙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집트를 제외하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의 왕국 위치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기원전 약 2000년대에 케르마(Kerma)지역(현재 수단의 북부지역)에 수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에서 아프로-아시아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으로 알려진 누비아의 쿠쉬족은 쿠쉬왕국을 건설하였으나 첫 번째 혼란기인 기원전 2280~2060년을 제외하고는 이집트에 복속되었다가 기원전 1500년경에 멸망한다. 기원전 730년경, 쿠쉬왕국은 약 2세기동안 이집트를 정복하고 있던 리비아 인들을 아몬 신()의 이름으로 몰아내고 이집트를 정복했다. 쿠쉬왕국은 이집트를 점령한 아시리아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수도 나파타를 메로에로 옮기면서 기원전 225년경 메로에 왕조를 열었다. 메로에 왕국은 비록 이집트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아프리카 방식으로 모후와 지도자들을 모두 왕실의 혈통을 가진 자들 중에서 선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 상형문자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메로에 문자를 발명할 정도로 아프리카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메로에 왕국은 350년경부터 인도양에 이르는 메로에 무역루트를 점령한 악숨 왕국에 의해서 멸망하지만 메로에 문화는 악숨에 이어진다. 현재 에티오피아 전신인 악숨 왕국은 기원전 700년경에 홍해로부터 건너와 정착한 셈족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4세기경 메로에 왕국을 멸망시킨 악숨 왕국은 홍해지역에서 실질적인 무역국가로 성장하였으며 주로 금, 상아를 수출하여 상업적으로 부유한 왕국이었고, 7~8세기 이슬람 침입 이후에도 동아프리카에서 유일한 기독교왕국으로 남았으며, 1974년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서기까지 아프리카 고대 왕국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재했다.

 

 

동아프리카에 비해 서아프리카에서의 국가 출현은 매우 늦었다. 광대한 평원과 삼림지대로 이루어진 서아프리카에서는 희박한 인구와 상이한 지역 환경에 따라 각기 독특한 문화를 보유하여 공통의 문화와 언어를 가진 대규모의 집단이 형성되지 못했으며 통치자가 넓은 지역을 관장할 수 없었다. 서아프리카 지역 대부분의 사회구조는 혈통으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이며, 부족민들은 주로 단거리 무역을 하고 있었다. 외부 침입에 대한 대응은 상황에 따라서 여러 집단들이 모여 저항하는 형태를 띠었다. 서아프리카에서 최초의 고대 흑인왕국은 북아프리카보다 훨씬 늦은 8세기가 되어야 나타난다.

 

 

지금은 사막이 되었으나 11세기까지는 가축을 방목할 수 있었던 지역에 니제르-콩고어를 사용하는 가나왕국(현재의 모리타니 지역)이 고대 서아프리카를 대표하였다. 아랍인들의 역사서술에 의하면 가나는 황금의 나라로 불리울 정도로 부유한 왕국이었으며,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금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무역의 대상은 주로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산하자로 불리는 베르베르 무역 상인이었다. 아프리카 북쪽을 통치하는 여러 이슬람왕조가 부와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금화를 주조하게 되면서 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다. 가나는 니제르 강 상류와 세네갈 강을 끼고 있는 넓은 경작지와 금생산지를 가지고 있는 경제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640년부터 이슬람의 북아프리카 침입이 본격화되면서 사막의 원주민 베르베르인을 중계로 하는 사하라사막 횡단무역이 서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중요한 경제행위가 되었다.

 

 

전반적으로 서아프리카에서 왕국이 출현하는 데에는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원거리 무역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금 무역이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게 됨에 따라 무역이권을 둘러싼 경쟁이 심해지면서 이웃 부족들과의 마찰로 인한 서아프리카 지역의 정치적 지각변동이 자주 일어났다. 13세기경 말리왕국이 가나왕국을 복속시켜 대서양연안까지 영토를 확장시키면서 서부지역을 지배하는 중심세력이 되었다. 왕위승계문제로 혼란해진 말리제국의 허약을 틈타 1464년경 송가이 왕국이 건국되었으나 1590년 모로코의 침입을 받고 멸망한다. 서아프리카를 지배하던 강력한 국가가 붕괴되면서 새로운 경쟁적 부족들이 여러 개의 소왕국들을 건국하여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최초의 가나 왕국과 송가이 제국의 멸망과정에서 나타난 공동적인 특징은 사하라횡단무역이 국가의 주요한 자원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지배적인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경제적 이익을 위한 국가의 활동이 대부분을 자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역에 대한 다른 국가의 위협 혹은 무역의 쇠퇴가 이들 국가의 존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런 점에서 이 국가들의 주요 멸망 원인은 국가와 국민 간에 공유하는 이데올로기나 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이들은 외세나 주변 국가들에 의해 쉽게 정복당하였을 뿐 아니라 그 문화적 유산을 정복국가나 이웃국가에 전파하지 못하고 대부분 소멸시키게 된다.

 

 

고대 서아프리카에 대한 역사가 주로 이슬람에 의해 기록되었고 동아프리카에 대한 역사는 그리스로마인 그리고 아랍인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면, 이들과 지리적으로 동떨어져 있는 남아프리카에 대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고고학적으로 남아프리카의 인종적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오래된 인종은 부시맨과 호텐토트인종으로 구성된 코이산 족이며 이들은 약 1200년대까지 신석기시대의 수렵과 채집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채 소규모의 집단생활을 하고 있다. 10세기 경부터 반투어족이 이동하면서 기존의 코이산 족은 추방되고 큰 규모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은 지금의 앙골라 북부와 콩고 민주공화국 남부 지역에서 창궐한 콩고(Kongo)왕국으로서 약 13~14세기 정착지를 찾아 북쪽에서 내려온 반투족에 의해서 건국되었다. 농업과 목축문화를 가지고 있는 콩고왕국은 1480년대 초 포르투갈의 침입으로 노예무역지가 되었으며 1884년 베를린회의에서 포르투갈, 벨기에, 프랑스령으로 분할되어 완전히 멸망했다. 몇 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아프리카의 국가형태는 대략 1500~1800년대 사이에 형성되었으나 유럽의 노예무역과 식민지배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북아프리카는 지중해와 인접한 지정학적 이유로 기원전 1200년경부터 페니키아, 카르타고, 로마 등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지중해 문화의 영향을 받아왔다. 북아프리카는 기원전 마지막 1000년 동안 지중해 해상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822년 페니키아인이 세운 카르타고 제국은 금, ,구리를 통해서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였으며 아프리카 내륙 탕헤르까지 무역기지를 설치하였다. 기원전 300년경 북아프리카의 첫 번째 흑인 왕국인 누미디아 (현재 알제리지역)가 세워졌으나 로마의 침입 이후 북아프리카는 로마의 한 지방으로 귀속된다. 로마가 멸망하는 4세기까지 북아프리카 전 지역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아프리카 문화에 영향을 주는 독립된 아프리카 왕국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된다.

 

북아프리카는 로마에 보내는 곡물의 60%이상을 담당하였고, 이 시기에 튀니지, 알제리 북부, 모로코 등에서는 도시화가 가속되고 토착 원주민 공동체가 번성하였지만 새로운 국가건설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7세기 이후 약 6세기동안 계속된 이슬람화로 인한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사이의 문화적 융합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문화와 다른 북아프리카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 문화는 중동문화와 다르다- 창출해냈다.

 

646년부터 시작된 이슬람정복으로 10여개가 넘는 이슬람왕조들이 부분적으로 북아프리카 전지역을 15세기말까지 지배하면서 사하라 이남지역까지 이슬람문화 및 스페인 남부의 이슬람 문화를 전파하는데 공헌한다. 이집트를 제외하고 아프리카 일부 지역이 광대한 영토로 통일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며, 북아프리카에서 아랍문화가 베르베르 문화를 추월했으며, 신학, 법학, 철학, 문학 등의 학문이 발달하고 있었다. 오랜 이슬람지배로 베르베르 문화의 흔적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고, 사하라사막을 사이에 두고 북아프리카 문화와 사하라 이남의 문화가 다른 역사적 발전을 하고 있다. 현재도 북아프리카를 중동으로 보느냐 아프리카로 보느냐하는 문제로 아프리카에서의 북아프리카 정체성 문제가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3) 이슬람의 침입

 

6세기 동안 이슬람은 아프리카에서 종교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규범과 문화적 요소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슬람은 7세기 이래 15세기까지 약 8세기동안 북아프리카전역, 동아프리카 그리고 서아프리카 지역까지 하나의 문화적 영역으로 묶어 놓았다. 아프리카는 인종적, 문화적, 사회적 환경이 서로 다른만큼 이슬람의 침투과정과 그 영향도 매우 다양하다. 로마 치하 313년 기독교 국가가 된 이집트의 이슬람화에는 395년 비잔틴 정복이후 비잔틴 통치자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단성론자 신민(臣民)들 간의 갈등으로 인한 콥트 교인들의 빠른 이슬람 개종이 역할한 바 있다. 644년 이슬람은 커다란 저항 없이 이집트를 칼리프(이슬람의 최고지도자를 뜻함)의 지배하에 두었다. 정치사회적으로 복잡하고 문화적으로 월등한 이집트를 통치하기 위하여 이슬람은 이집트에서 사용되고 있는 콥트어 대신 아랍어 사용을 강요하였고, 행정기구를 강화하여 세금, 재정, 행정 등을 직접 통제했다.

 

이집트를 제외한 다른 북부 아프리카 지역에서의 이슬람의 확산은 매우 복잡했다. 북아프리카 지역의 이슬람화는 정복에 의한 결과로서, 7세기에 시작하여 12세기 모로코와 스페인으로 확산됨으로써 절정기를 맞이하기까지 약 500여년이 걸렸다. 북아프리카 지역은 이슬람이 침입하기 이전에 아랍어를 구사하는 아랍인들이 거주했으며 아프리카인들과는 물론이거니와 로마제국시대에는 로마인들과 무역관계를 맺었기때문에 이슬람 팽창에 도움을 주었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화에는 아프리카 원주민과 아랍상인들 사이에서 중계적인 역할을 했던 사하라 원주민인 베르베르인들의 역할이 컸다. 초기 이슬람화의 과정에서 베르베르인들이 제일 먼저 개종했지만 이슬람군대가 약해지거나 혹은 점령지역에서 철수하면, 개종한 베르베르인들은 다시 자신의 종교로 돌아가기를 수십 번 반복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이슬람의 정복지역이 칼리프로부터 독립하려는 지역에서 자주 일어났다. 현재 튀니지와 알제리 북부지역은 로마 기독교지역이며, 내륙에 정착하고 있는 북아프리카 원주민 베르베르인들은 그들의 전통종교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많지는 않지만 산악지대의 베르베르인들은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다.

 

서아프리카의 이슬람화는 이슬람왕조를 건설한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와는 달리 식민지 개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사막과 대서양이 천연의 요새로서 한 동안 아프리카 전통종교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낙타를 이용한 카라반무역은 이슬람의 사하라 사막의 횡단을 용이하게 해주었으며, 북아프리카 특히 모로코 지역의 이슬람화는 대서양연안을 통해 세네갈까지 이슬람이 전파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인들의 최초의 이슬람 접촉은 이슬람부대가 들어오기 전부터 남쪽으로는 소금을, 북쪽으로는 향신료, , 노예를 거래하면서 사하라 및 서아프리카와의 중계 무역을 담당했던 베르베르인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하라 이남 지역은 이슬람인들이 찾는 주요 거래지역이 되었던 것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들의 종교는 신의 보호와 신의 기적을 제일의 신앙으로 하고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이슬람을 통해서 어떤 마술적인 것을 찾을 뿐이었다. 이슬람의 알라신을 그들이 섬기는 여러 신과 동일하게 간주했고, 마호메트를 이슬람 신 알라와 아프리카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죽음사이에서 중계하는 주술사 혹은 제사장 같은 존재로 알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효험이 없다고 느낄 때 과감히 자신들의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거나 자신들이 믿는 주술과 오브제를 이슬람 종교의식에 추가 시켰다.

 

서아프리카의 이슬람화는 점차 통치자들이 주도해 나갔다. 대부분의 왕들은 자신들의 지배이념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이슬람으로 재빨리 개종했으나 이슬람 규정에는 별관심이 없었고, 이슬람 예식에 전통적인 의례를 결합하여 신민들의 불만을 완화시켜나갔다. 물론 아프리카 원주민의 저항도 있었지만 북아프리카 지역과 달리 서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과 전통종교의 요소가 혼재하여 존재할 수 있었으며, 이슬람교가 아프리카 전통사회를 새롭게 개혁하려하거나 아프리카인들에게 이슬람종교의식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 1세기경부터 아라비아 남부 상인들은 이미 동아프리카 연안지역에서 무역을 하며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해안도시에는 아랍 무슬림들이 일부 정착하여 주변을 개종시켜 나갔지만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와 같은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인 이슬람화는 없었다. 현재, 소말리아 인구의 99%가 이슬람교도인데 반해, 케냐인 10%, 탄자니아인 5%, 모잠비크인 20%만이 이슬람을 믿고 있다. 이슬람군대와 왕조를 통한 대규모적인 이슬람화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아프리카 원주민과 이슬람의 문화적 융합이 이 지역의 무역언어인 스와힐리어를 만들어 냈다.

 

18세기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유럽의 식민지배는 이슬람의 확산을 저지하는 역할을 했지만 이슬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아프리카인들은 이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들 두 종교로 말미암아 일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서로 다른 문화가 대립하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세네갈 동서부 지역, 나이지리아 남북 지역, 차드 남북 지역, 수단 남북 지역이 문화적 갈등의 진원지 역할을 했으며, 현재까지도 이 지역에서는 종교적 대립이 끊이지 않고 있다.

    

출처 : 오디오와 컴퓨터
글쓴이 : 관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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