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대천덕 신부님
[역경의 열매] 고 대천덕 신부님
[역경의 열매] 고 대천덕 신부님 1
"「신학은 과학의 여왕」 지론 거친 삶의 현장 속에서 구현”
누가 청춘은 일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했는가. 내 나이 어느덧 80.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한 이치겠지만 인생 80에 나는 청춘을 꿈꾼다. 선교사의 자녀로서 산동성 제남에서 생활했던 어린시절, 미지의 나라 한국으로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 젊은시절, 그리고 강원도 태백 하사미리에서 예수원 공동체를 시작하던 중년의 시기…어느 때나 나는 청춘이었다. 하나님 안에서 꿈을 가졌던 그 시기 모두가 내게는 청춘이었던 것이다. 해서 나는 80의 나이에도 마음의 상태인 청춘을 예찬하며 「새출발」을 계획한다.
내 이름은 루벤 아처 토리이.
18년 중국 산동성 제남출생.
산동성과 평양 외국인 학교에서 고등학교과정 이수.
무디 성경학교,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하버드 대학교, 영국 성 어거스틴 중앙신학대학원에서 수학.
46년 성공회 사제 서품 받아 12년간 목회활동.
건축 노동자 선원노동조합활동.
57년 한국에 건너와 성공회 미카엘신학원 재건립.
65년 예수원설립.
마른 막대기 같은 나를 이만큼 사용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결코 간단치 않았던 나의 이력가운데 역시 나의 인생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한국과의 인연이다.
57년 나는 40의 나이에 아내 제인, 7살난 큰아들 벤과 함께 한국에 건너왔다. 당시 한국은 6·25의 상흔이 아물지 않은 때 였고 따라서 모든 한국민들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미카엘 신학원 재건립을 위해서 한국에 건너왔을 당시 나는 한국에서 강한 활력을 느꼈다. 국가 전체가 재건설로 북적거렸다. 그것은 설렘과 약간의 두려움으로 한국을 밟은 이방인에게 긍정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어려운 가운데서 한국인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국가 재건설의 강한 의지를 가지고 일을 해 나갔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믿는다. IMF한파로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이 50년대 당시와 같은 활력을 가지고 나갈 때 능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신학교 재건 작업을 하면서 교수를 모집하고 동시에 한국어를 습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촉망받던 화가였던 제인은 신학교건설을 감독하기 위해서 언어공부를 포기해야만 했다.
당시 나는 신학교 근처에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신학은 과학의 여왕」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과학이 책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치열한 연구를 거쳐 열매를 얻는 것처럼 신학 역시 거친 삶의 현장 속에서 구현돼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를 얻는 중보 기도의 집 예수원 공동체는 「신학의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다.
불혹의 나이에 찾은 한국에서 나는 환경을 넘어 역사하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체험하며 나누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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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떠나라” 뜻밖 음성 충격/아내도 "그날 들었다” 후일 증언
인생을 뒤 돌아 볼 때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하셨고 내게 최상의 것을 선사하셨다. 신학교를 시작할 무렵 하나님은 나에게 7년간 그곳에서 사역할 것을 명하셨다. 신학교를 재건한 뒤 6년이 지났을 때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성공회회의에 성공회 한국담당 주교와 함께 참석하게 됐다. 캐나다에 머물던 어느날아침 주교는 내게 전화를 걸어 아침회의 이전에 숙소로 오도록 요청했다.
내가 주교가 머물던 숙소로 걸어갈 때 갑자기 하나님이 명확하게 내게 명령하셨다. 『신학교를 떠나라;나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에 빠졌다. 즉시 되물었다. 『하나님, 당신은 내게 7년을 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은 6년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단호했다. 『나와 다투려고 생각하지 마라. 신학교를 떠나라; 거역할 수 없는 그의 명령에 나는 다시 말했다. 『무릇 남편은 아내와 상의하기 전까지 직업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나는 한국에 아내와 아이가 있고 결정을 내리기 전 그들과 상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명하셨다. 『그 여인은 내가 책임지겠다. 떠나라;
이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사건은 주교의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을 때까지의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의자에 앉자마자 주교에게 나는 말했다.
『신학교에서 떠나려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평신도사역을 하기 원하십니다』「평신도사역」이라는 두 번째 문장은 갑자기 내뱉어진 말이었다. 그 말은 심지어 내 마음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문장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의 말씀이었다.
물론 주교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곧 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아처. 그러나 지금은 학기 중이니 이번 학기가 끝날 때까지 1년간만 더 머무를 수 없는가요?』 그때 하나님은 빙긋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거봐라. 정확히 7년이지;
나는 주교에게 내가 아내와 상의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한국으로 되돌아와 나는 가을학기 수업으로 분주했다. 어느날 제인은 내게 물었다. 『신학교를 사임하려 하세요?』이번에는 내가 놀랐다. 대답은 못하고 그저 머뭇거리기만 했다. 『아처, 언제 그 생각을 갖게 됐지요?』나는 노트를 뒤져 정확한 일시를 제인에게 말했다.그녀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렇군요. 하나님이 똑 같은 사실을 내게 말씀하신 바로 그날이에요』그때 하나님이 속삭였다. 『아처, 거봐라. 내가 책임져준다고 하지 않았니?』
그 해가 지나고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갖고 예수원 공동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에 대한 한올 만큼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그 같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34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숱한 역경과 고난을 이기게 한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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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행” 선언에 12명 따라와/기적의 연속… 빈틈없는 「작품」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하셨다. 어제나 오늘이나 그 정확하심은 변함이 없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단지 바람에 나는 겨처럼 스스로 판단하며 요동할 뿐.
「신학의 실험실」인 예수원은 빈틈없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기적을 체험해 왔다. 나는 매일 「기적일기」를 쓴다. 아침마다 『하나님 오늘 기적하나를 보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곤 한다. 현재 예수원의 재정자립도는 55%정도다. 나머지 45%는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서 채워진다.
우리가 처음 예수원 공동체를 건립하려고 계획했을 때 과연 누가 우리와 함께 가는 모험을 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커다란 군대용 텐트를 한 개 사고 지인들에게 선언했다.
『우리는 강원도로 갑니다! 거기서 중보 기도의 집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12명이 우리와 함께 가겠다고 자원해왔다. 그들은 내가 신학교 근처에 개척한 교회의 신자이거나 신학교건설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과 강원도 태백 하사미리의 왜나무 골로 함께 왔을 때 나는 12명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분을 찬양했다. 왜나무골에서 우리는 먼저 집을 짓고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12명중 정확히 6명이 건설 노동자였고 6명은 농부였다. 하나님은 결코 나와 가족들을 거친 산골짜기에 혼자 내버려 두시지 않고 훌륭한 동역자들을 주셨던 것이다. 예수원 집을 지으면서 12명 중 제일 젊은 청년이 예수원 공동체를 자신의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하며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나는 열정적인 그에게 『아직 공동체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어리니 심사숙고 하라』고 권면했다. 몇 달이 지난 후 아직 우리가 텐트생활을 할 때 그 청년은 내게 예수원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나는 섭섭하기는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내가 그의 처음 약속을 상기시키자 그는 『그래요. 하지만 공동체생활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별다른 언급 없이 그를 축복하고 떠나 보냈다. 그 순간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날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어쩌면 나와 가족들 외에는 이 골짜기에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 청년이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 놀랍게도 또 다른 한 사람이 언덕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신부님! 여기 일하러 왔어요』 그때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했는지….
이 같은 패턴은 지금까지 계속됐다. 한 사람이 떠나면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왔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정확히 필요한 만큼 공급됐다. 12명으로 시작한 예수원에 지금은 30여명의 어린이를 제외한 60여명의 어른들이 생활하고 매년 1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위로를 얻고 기도하러 찾아오고 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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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가족들 때론 격렬논쟁/난롯가 대화는 멋진 신앙수업
예수원 공동체를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텐트 속에서 기도의 생활을 시작했다. 매일 아침 기도회를 갖고 성경공부를 했다. 기도는 결코 중단할 수 없는 대명제다. 교회와 국가, 문제를 겪고있는 지인들을 위한 별도의 중보 기도의 시간도 가졌다.
사실 예수원은 목가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랑의 언어만이 교환되는 에덴동산이 아니다. 예수원가족들은 물론 매년 찾아오는 1만여명의 손님들 모두 나름대로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침묵가운데, 때로는 산 속에서의 뜨거운 기도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민족의 장래와 세계의 안위, 오지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의 사역 등을 위해서 기도하는 예수원의 삶은 치열하기까지 하다.
65년의 봄과 여름과 가을이 지나가면서 우리는 서리가 내리기 전 텐트생활을 청산하고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서리는 물론 첫눈이 내릴 때까지 집을 완성하지 못했다. 결국 1월말에서야 건축이 끝났다. 강원도 산골짜기에 그럴듯한 온돌 집이 탄생했다.
나무를 태우는 커다란 난로 주위에 모여 앉아 우리는 기도했고 성령 안에서의 코이노니아를 나눴다. 사실 나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코이노니아를 중시한다. 「교제」「사귐」「교통」으로 번역될 수 있는 코이노니아를 통해 나와 하나님, 나와 우리와의 관계가 올바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다.
처음 함께 생활했던 가족들 가운데는 초심자들도 많아 때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난로 주위에서의 대화는 우리의 귀중한 신앙수업이었다. 산골짜기에서의 수업을 통해 우리는 성숙해 나갔다. 「신학의 실험실」로 예수원 공동체를 운영하겠다는 생각이 점차 현실화되는 느낌이 나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12월말에 우리는 두 번째 온돌방을 만들었고 황지에 머물던 제인과 벤, 아벨 형제의 부인 등이 우리와 합류했다. 이어서 몇 명의 자매들이 예수원에 찾아와 가정 일을 거들었다. 그런 가운데 텐트에 불이 붙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예수원은 점차 모습을 갖춰나갔다.
예수원 건립과정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리석어 실수할 때에도 내버려두시지 않고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인정 많은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초창기에 음식이 없어 호박만 몇 날 며칠을 먹다 호박마저 떨어져 낙심해 있을 때 쌀을 지고 올라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환호한 적이 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체험한다.
매순간 하나님을 체험하는 예수원에서의 삶. 그것은 우리의 아름다운 로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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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12년째 낯선 한국서 초청/“신학교 재건 7년간 사역” 응답
지난 인생을 되돌아 볼 때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 열쇠를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에 따라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비교적 빠른 시간에 선교지에 나갈 부르심을 받는다. 신학교에 다닐 때 해외선교에 대한 소명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교사의 가정에서 태어난 나 역시 하루라도 빨리 선교 현지에 나갈 생각을 가졌으나 하나님은 46년 성공회 사제서품을 받은 뒤 12년 동안 목회 활동을 하도록 나를 인도하셨다.
사실 나는 어린시절을 중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일반 미국인들의 문화적인 관점과는 다소 동떨어진 생각을 갖고있었다. 따라서 첫번째 목회지에서의 목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나는 일반적인 목회와는 다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를 담임하게 됐다. 그것은 나의 관심과 일치된 교회였고 따라서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나름대로 목회에 재미와 의미를 느끼던 중 갑자기 나는 한국으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목회 12년째의 일이었다. 해외선교에 대한 열망들이 점차 현실적인 목회 생활 속에서 희미해 지던 때에 그것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나와 제인은 그 초청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을 깨달았다.
성공회 한국 담당 주교인 존 댈리 신부는 내가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또한 12년 동안 목회 활동을 한 것을 감안, 한국에서 신학교재건의 적임자로 나를 지목했다. 나는 선교현지에 빨리 나오고 싶었지만 하나님은 12년 동안의 목회 활동을 통해서 미지의 세계였던 한국과 나를 연결시키셨던 것이다.
나와 제인은 57년 한국에 왔다. 신학교 사역 외에 분명 한국에서 내가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과연 얼마나 신학교에서 사역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7년간이라는 응답이 왔다.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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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후 예수원 공동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성경말씀처럼 내가 아무리 인간적인 생각으로 발버둥쳐도 하나님의 장대한 계획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처음 한국에 와서 나는 언어공부에 집중했다. 아내 제인은 한국어 공부를 뒤로 미루고 내대신 신학교 건축을 총지휘했다. 신학교 건축과정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셨다. 제인은 성심껏 건축 노동자들을 대했다 훗날 우리가 예수원을 시작했을 때 동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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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중 절반이 이때 신학교건축에 동참했던 사람들이었다. 예수원의 아름다운 건물은 이들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위대한 건축가이신 하나님은 미리부터 건물을 설계하시고 각 자재들을 어디에 쓸 것인지를 생각하고 준비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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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 선교 위해 배웠던 터키어/한국어 익히는데 도움될 줄이야”
선교사에게 가장 부담되는 항목 중의 하나는 사역 현지의 언어 습득이 아닌가 싶다. 한국에 건너온 많은 서양 선교사들은 각종 형용사가 발달한 한국어를 배우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나는 하나님이 나를 자신의 선교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시키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분께 영광을 돌렸다. 다른 서구 선교사들에 비해 나는 한국어를 비교적 쉽게 배웠다.
나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시절 중앙 아시아로 선교를 떠날 작정으로 터키어를 공부했었다. 고대 실크로드였던 이 지역은 동서양을 연결시켜주는 교통의 요지로 복음이 전파될 경우 파급효과가 상대적으로 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이 공산화됨에 따라 선교의 길이 막혀버렸다. 그 때 나는 이를 하나님이 잠시 내게 중앙아시아 선교를 보류하고 기다리라는 의미로 생각했다. 공산화가 장기화됨에 따라 결국 나는 중앙아시아에 가지 못했다. 그때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체험을 했다.
한국에 건너와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이 왜 내게 터키어 공부를 하게 하셨는지를 깨닫고 무릎을 쳤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어와 터키어는 똑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따라서 터키어를 공부한 내게 한국어가 다른 언어보다 쉬웠다는 것은 당연했다. 중앙 아시아선교의 길이 막혀 대학시절 터키어를 공부한 시간은 낭비였다고 생각하며 후회했었는데 그것은 결코 허비한 시간이 아니라 한국어습득을 위한 준비된 기간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나는 중국 선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시절을 중국 산동성에서 지냈다. 따라서 서양인들이 동양을 공부할 때 가장 난감해 하는 한자에 익숙해 있었다. 한국어를 공부할 때 나는 한국어 억양을 잘 표현하기만 하면 됐다. 나는 아직도 어색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강연을 한국어로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나는 비록 중앙 아시아에 가지 못했으나 공산 주의가 몰락돼 문이 열린 중앙 아시아지역의 선교에 한국 크리스천들이 많은 관심을 갖기 바란다. 중앙아시아는 다른 지역에 비해 한국 선교사들이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언어습득이 용이한데다 한국과 비슷한 문화적정서를 가지고 있어서 세계 어느 지역보다 한국 선교사들이 활동하기에 편하고 효과적이다.
아무튼 한국어공부를 통해 『주를 믿는 자 그 뜻대로 행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경말씀은 일점일획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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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고생 아내 평생의 동역자로/반세기 삶… 아직도 뜨겁게 사랑
아내 제인은 7세의 나이에도 내적7·외적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는 여인이다. 본명이 제인 그레이 토레이인 그녀는 한국에 와서 현 재인이란 한국이름을 가졌다. 선교사의 아내로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난 시절을 지냈지만 불평한번 하지 않은 그녀를 평생의 동역자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지난 시절 그녀는 단지 내조자로서뿐만 아니라 예수원 식구 및 방문자들의 상담자로서 스스로의 선교사역을 담당해 나갔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처음 한국에 와서 신학교를 건설할 때 제인이 나 대신 건설현장을 총지휘했던 일이다. 당시 나는 한국어공부에 집중하기 위해서 건설현장을 맡을 사람이 필요했는데 제인은 자신의 언어공부를 뒤로 미루고 학교 건설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녀가 얼마나 성심껏 인부들을 대했는지는 나중에 예수원 공동체를 시작할 때 건설현장의 노동자중 6명이 우리와 함께 살러 강원도에 온 것으로도 잘 나타난다. (현재인 사모님에 대한 다른 글들을 읽어보니까 아직 우리말을 익히지 못하신 것 같은데 말이 안통하는데도 어떻게 건설 현장 지휘를 하실 수 있었을까? 정말 하나님 은혜다.)
본래 그녀는 화가다. 취미 삼아 그리는 그림이 아니다 제인은 한국으로 건너오기 전 미국전역의 40여개주에서 60여 회의 전시회를 할 정도로 역량 있는 화가였다. 그러나 그녀는 선교사인 나와의 결혼을 통해서 자신의 화가로서 성공하려던 꿈을 버리고 또 하나의 선교사로 미지의 땅 한국으로 건너오는 모험을 기쁘게 감행했다.
우리는 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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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결혼했다. 그녀 가족은 당시 내가 사역하던 교회에 출석했고 우리는 7년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 후 함께 살기를 결정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쉽게 만나 쉽게 헤어지는데 크리스천들은 결혼이란 인생의 커다란 문제를 놓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볼 때 결혼은 사랑의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위한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결혼한 우리는 반세기를 함께 살았지만 아직도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와 같이 아름다웠고 정결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샬럿시 퀸즈 대에 다닐 때는 메이퀸으로 뽑히기도 했다.
예수원의 어디 한구석 그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다. 산골에서 그녀는 그림을 그렸다. 화려한 화랑에 전시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그림은 예수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제인은 늘 꿈으로만 생각했던 예수원이 실제로 이뤄진 데 경이를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똑같은 삶을 살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녀는 나를 「Idol Breaker (우상을 깨뜨리는 사람)」라고 부른다. 우리는 함께 우상을 파괴하며 지내왔다. 하나님안에 꿈을 공유하는 부부. 그래서 우리는 동역자다.
[역경의 열매] 고 대천덕 신부님 8
"토지세 올리고 노동 세는 없애야/정의사회의 필수… 대만이 모델”
나는 복음은 항상 저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신학이 강단과 연구실에서 만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구현돼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있다.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지내면서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당시 전 중국에 퍼져있는 가난의 문제 등 사회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린 나이에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단지 몇 푼의 돈을 줌으로써 그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이고 영원한 해결책을 모색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시절 자연히 나는 사회주의에 열광했다. 대학교에 다니면서 많은 중국 관련서적을 읽으면서 모택동과 홍군 그리고 대장정에 대해서 깊이 연구했다. 점차 나는 사회주의보다는 공산주의가 보다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으며 마르크스와 레닌 스탈린의 전서적을 섭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선원노동 조합활동을 하면서 나는 많은 사회 운동가들이 내가 가지고 있는 소외된 자들을 위한 영원한 해결책 마련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알게됐다. 나는 동일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려 노력했으나 결국 한명도 인도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나는 교회에서 사회와 경제 문제에 대해 나와 같은 관념을 가진 사람이나 그룹들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것이 나를 괴롭게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모든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인갱라는 물음은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어느날 성공회 여성대회에 참석했던 제인에게 어떤 사람이 헨리 조지라는 사상가에 대해 소개했다. 제인은 내게 헨리 조지와 함께 그의 책 「진보와 빈곤」을 가져다줬다. 나는 그 책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헨리 조지의 사상이 성경말씀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경건한 성공회 가정에서 태어난 헨리 조지는 책에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묘사했다.
헨리 조지의 사상을 통해 나는 토지문제에 대한 확고한 정립을 하게됐다. 토지가 없는 자는 토지를 가진 자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토지문제 해결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이루는 기본이라는 확신을 그때 본격적으로 갖게됐다. 토지세는 올리고 노동세를 받지 말아야 정의로운 사회가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도 정립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조지이즘」이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적인 몽상가의 소리가 아니라 실제의 사회 체계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현실적인 것임을 깨달았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헨리 조지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장 개석은 대만에서 헨리 조지의 사상을 구현한 바 있다. 나는 토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있는 한국도 이 사상을 도입할 것을 이 지면을 빌려서 간절히 권유한다.
[역경의 열매] 고 대천덕 신부님9·끝
또다시 청춘을 생각해본다. 마음의 상태인 청춘.
19일이면 정확히 80이되지만 나는 새 출발을 꿈꾼다. 하나님 안에서 늘 새로운 꿈을 갖는 자는 언제나 젊은이다. 분명 육신은 노쇠해지고 있으나 고목나무에 찬란히 빛나는 내면이 있듯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며 하나님 뜻을 찾는데 진력할 때 나는 늘 청춘이다.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성령과 코이노니아, 토지문제. 그리고 신학의 실험실인 공동체 예수원. 내게 평생 몰두할 문제를 던져주고 또한 그 마당을 펼쳐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강원도 산골짜기에 박혀있는 예수원을 그리워하고 기도해준 많은 동역자들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복잡다기한 도시 생활 속에서 많은 현대인들은 절대가치에 목말라있다. 창조섭리에 배치된 삶을 살면서도 창조 주를 추구한다. 내게 매년 1천통 이상의 상담편지가 도달하고 1만여명의 사람들이 예수원을 방문하고 있는 사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현대인의 갈구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는다.
나는 성경말씀 중에서 요한복음 7장17절 말씀을 특히 좋아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라는 구절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한다면 먼저 그의 뜻을 실행하려는 강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한다. 내일의 삶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 오늘을 성실히 사는 사람들은 자연 충만한 내일을 산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찾기를 갈구하는 사람들은 바로 오늘 그가 명하신 삶을 살 때 자연히 장래에 임할 그의 뜻을 찾게 된다.
사랑하는 한국 형제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바로 『돈을 사랑하면 남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지금의 IMF위기도 돈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파생된 문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찢으며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고쳐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를 바란다.
더불어 신앙과 생활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에게는 기쁨을,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예배는 천국 가기 위한 통과의례가 아니다. 성경은 천국보다는 생활과 사회문제를 더 많이 거론하고 있다. 크리스천들이 참 신앙을 갖고 참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한국사회에서도 이뤄지리라 확신한다.
예수원 공동체는 산골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치열하고 거친 삶 속에서도 예수원의 정신은 구현될 수 있다. 세파에 낙담 될 때 강원도 산골 한 자락에서 사회의 회복과 푸르디 푸른 예수의 계절을 위해 기도하는 동역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힘을 얻기 바란다.
<정리=이태형〉
[출처] [역경의 열매] 고 대천덕 신부님|작성자 Boaz 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