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녹스 (하)

유테레사 2012. 3. 20. 22:49

[크리스천 인문학] 갤리선의 노예에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로 존 녹스 (下)

 

 


“나는 결코 부패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하나님 정의위해 열정의 삶

메리 스튜어트의 퇴위와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존 녹스의 종교개혁은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톨릭 측의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된 계기는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이었다. 그것은 무적함대를 보유한 강력한 가톨릭 국가 스페인과 신생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영국의 일전이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와 펠리페 2세의 싸움이기도 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의 이복 언니인 ‘피의 메리’의 남편이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형부와 처제 사이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은 무엇보다 가톨릭과 개신교 두 진영을 대표하는 싸움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에 대해 매우 신중하고도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광적인 것은 싫어했다. 그 광적인 믿음이 불러온 피바람을 극도로 경계했다. ‘피의 메리’ 시절 혹독하게 탄압받았던 경험도 작용했다.

그녀는 가톨릭 신도로 위장해서 겨우 살아남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올랐지만, 영국의 종교 상황은 항상 일촉즉발이었다. 영국 국민의 3분의 2가 가톨릭이었고, 이에 반대하는 종교개혁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영국 국교회 중심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대해 양측 모두 불만을 쏟아냈다. 천주교회는 엘리자베스를 인정하지 않았고, 종교개혁자들은 아직도 교회제도가 너무 가톨릭적이라고 불평을 나타냈다. 그러나 여왕은 흔들리지 않았고 단호했다.

1559년 1월 그녀는 수장령을 내려 왕이 교회와 국가의 최고책임자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에드워드 6세 때 만들어진 ‘제2공동기도서’를 수정 보완해 통일적인 예배지침서를 만들어 보급했다. 또한 ‘42개 신조’를 칼뱅의 가르침을 따른 ‘39개 신조’로 만들어 신앙의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엘리자베스의 교회 개혁은 영국의 종교적 상황에 안정을 가져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종교개혁은 로마 교황청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왔다. 엘리자베스는 수장령을 선포한 뒤 로마에의 소송을 금지하고, 가톨릭 교회의 사제나 예수회 회원을 반역자로 정죄하고 벌을 내리는 법을 공포하며 반로마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또한 녹스와의 종교전쟁에서 패배하고 영국으로 도주한 메리 스튜어트를 가톨릭 인사들과 함께 반역죄로 처형한 것도 문제가 됐다. 로마 교황은 죽은 메리 튜더의 남편이자 스페인의 황제였던 펠리페 2세를 부추겨 영국을 침략하게 하였다.

1588년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Armada)’를 보유한 당시 유럽 최강의 해양 국가였다. 그는 무적함대를 출동시켜 영국을 제압하려 했다. 전함 127척, 수병 8000명, 육군 1만9000명, 대포 2000문을 가진 대함대였다. 이 무적함대의 사령관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었다. 1588년 5월 28일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발한 대함대는 네덜란드 육군 1만8000명과 합류해 영국 본토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병력은 전함 80척, 병력 8000명밖에 되지 않았다. 영국 국민들은 공포에 질렸다. 영국 함대는 수적으로 열세였다. 그것도 상인과 해적들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그러나 기동력이 뛰어났고 유효사거리가 긴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항해 경험이 많고 영국의 해협을 잘 알았다.

영국함대는 8월 7일 칼레 해전에서 전함 5∼6척에 불을 질러 밀집대형으로 모여 있던 무적함대로 돌진시켰다. 갑작스런 화공에 놀란 무적함대는 혼비백산해 대열을 이탈했다. 화공을 피해 흩어진 무적함대는 통제되지 않은 채 그라블린 해전에서 결정적 타격을 받아 54척만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패한 스페인은 해상무역권을 영국에 넘겨주고 유럽의 주도권을 상실했다. 이렇게 가톨릭 측의 위협이 사라지고 나서야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은 존 녹스가 사망한 이후에 발생한 것이다. 아마 스페인이 영국을 이겼더라면 영국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도 모두 무위로 돌아갔을지 모른다. 만약 존 녹스가 성서에 어긋난다고 맹렬하게 비난한 ‘여성의 통치’가 없었더라면 그가 평생 이루려 했던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쫓겨난 후 스코틀랜드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을까?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은 계속 추진되었지만, 여왕 지지자와 반대파 사이의 정치적 혼란과 폭동은 그치지 않았다.

녹스는 제임스 6세의 대관식 설교에서 여왕을 규탄하고 그녀의 죽음까지 요구했다. 그러나 녹스의 다른 오랜 친구인 아가일 영주와 월리엄 커콜디는 메리 여왕을 지지했다. 어쨌든 메리는 죽지 않고 영국으로 도주해 스코틀랜드의 반동종교개혁을 계속해서 사주해 혼란은 지속되었다.

제임스 6세의 섭정이 된 머레이 경은 1570년 1월에 암살되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섭정 레넉스 백작 역시 메리 여왕의 지지자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1571년 4월 30일 여왕의 지지자였던 에든버러 성의 성주 커콜디 경은 여왕을 반대하는 모든 적은 도시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이전 친구이자 프랑스 갤리선에 함께 끌려갔던 옛 동료 녹스는 에든버러에 남아 있을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성에 억류되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결국 녹스는 에든버러를 떠나 세인트 앤드류스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계속해서 설교를 했고, 그의 유명한 저작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의 집필에 매달렸다. 이 책은 1559년 개신교 측 귀족들에게 요청 받은 이래 계속해서 써오던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운동의 시작에서부터 메리의 귀국과 메리의 퇴위에 이르기까지 기술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스코틀랜드를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에 비유했다. 그리고 그는 스코틀랜드의 모든 사건을 성서의 사건들과 연결시켰다. 그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싸움, 교회와 국가의 싸움, 독재와 백성의 싸움을 정치적 시각에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종교적 시각에서 해석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운동을 하나님의 성도와 스스로 성직자라는 탈을 쓴 이리와의 무서운 전쟁의 시기로 묘사했다. 이 거룩한 전쟁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하나님의 정의는 무한하고 불변하기에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에서도 작용한다.

존 녹스는 모든 면에서 칼뱅을 추종했지만, 정치적 저항에서는 칼뱅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그는 칼뱅처럼 하나님에 의한 신정 통치를 주장했지만, 더 나아가 과감하게 불의한 왕에 대한 백성의 무장 혁명을 주장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사’를 한창 쓰던 시기인 1564년에 그는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존 녹스는 첫 번째 아내와 사별했다. 첫 번째 아내는 초창기 에든버러의 사역 시절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런 그녀를 그는 무척 사랑했었다. 그녀는 그에게 두 명의 아들을 낳아 주었다. 녹스의 두 번째 결혼식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정도로 화제였다. 그때 신랑 나이는 50세이고, 신부는 17세였다. 신부의 나이가 너무 어린 것도 그랬지만, 신부의 출신도 화젯거리였다. 신부는 먼 친척이기는 하지만 로열 패밀리였다. 신부의 이름은 마가렛 스튜어트였고, 아버지는 오킬트리의 영주였다. 아버지는 녹스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에게 3명의 딸을 낳아주었다.

1572년 7월 말에 휴전이 선언되자 그는 에든버러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때 그의 몸은 매우 쇠약해져 있었다.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목소리가 약해졌지만, 그는 성 자일스 교회에서 계속해 설교했다. 녹스는 거의 마지막 날까지 설교를 했다. 1572년 11월 4일 임종시에 그의 친구들과 스코틀랜드의 유력 귀족들이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성경을 소리 높여 읽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젊은 아내는 고린도전서를 소리 높여 읽었다. 그가 남긴 유언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위해 그가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보여주었다. “나는 결코 부패하지 않았고, 결코 사기를 치지 않았으며, 거래를 하지 않았다.”

존 녹스는 처형당한 메리 스튜어트 여왕보다 오래 살지 못했다. 그는 일찍 죽었지만 그가 폭정에 반대해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불었던 ‘트럼펫’은 계속해서 소리를 내고 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