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페르시아 고레스(키루스)왕

유테레사 2019. 11. 29. 22:43

가난한 소국을 페르시아 대제국으로 만들어낸 '이 사람'


[DBR/동아비즈니스리뷰] 페르시아는 지금의 페르시아만 연안 시리아 산지에 있던 가난하고 작은 나라였다. 그러나, 이후 페르시아는 리디아(소아시아)와 메디아, 메소포타미아(이라크)를 차례로 정복하고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지나 인도에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페르시아가 이집트, 소아시아, 이란 등을 통합하고 고대 이집트 다음으로 가장 오랫동안 세계를 호령했던 문명으로 부흥할 수 있었던 데에는 '키루스(Cyrus) 대왕'의 리더십과 전술이 크게 기여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실질적인 설립자이자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데에 단초를 마련한 인물인 키루스는 기원전 6세기 '인류 최초로 제국을 만든 위대한 리더'라는 평가를 받는다.

페르시아 제국 판도

출처동아일보

또,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던 그리스의 전술가이자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적국의 리더인 키루스를 제왕과 리더십의 모범으로 극찬하고 그의 일대기를 정리한 <키로파에디아>를 저술했다. 크세노폰은 키루스를 '고대 그리스인이 흠모하고 배워야 할 이상적인 리더'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적국에서도 극찬했던 키루스. 그가 작고 가난했던 나라를 넓은 영토를 호령하는 페르시아 대제국으로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DBR 120호를 요약해 소개한다. ☞원문 기사 더보기(링크)

효율을 높이는 일차적 요소는 '도전'과 '용기'

키루스 대제

출처위키피디아

키루스는 본격적인 정복전쟁에 나서기 전, 활과 창을 활용해 원거리 전투에 주력하던 기존의 전투 전술을 개력한다. 당시 적국이었던 그리스는 중장갑을 하고 방패와 창으로 대결하는 백병전술에 능했다. 반면, 중동지역은 경무장한 경보병 위주의 군대가 투창과 활을 사용해 싸우는 원거리 전투를 선호했다. 그러나, 투척전과 사격전은 병력이 많은 군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전투 방식이었다.


병력이 많지 않았던 페르시아는 기존의 전술을 고수했다간 필패할 것이 뻔했다. 이에 키루스는 소수로 다수를 격파하기 위한 전술을 고민하며 단위 전투력과 효율성을 높이는 전투 방식을 모색했다. 키루스가 주목한 건 '백병전'이었다. 


원거리 전투에서는 모든 병력이 사격에 가담할 수 있지만 백병전이 벌어지는 동안 뒤에 있는 병사는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수의 적을 각개격파하기에 용이하다. 그러나 적의 사격을 뚫고 적 대형 앞까지 접근해 공격하는 백병전은 누구에게나 공포스러운 전투 방식이었다.


병사들은 기존 원거리 전투 방식에서 백병전으로 바꿔야 한다는 키루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에 키루스는 독특한 훈련 방식을 고안한다. 병사들을 두 패로 나눠서 모의 전투를 벌이도록 했다. 한쪽에게는 몽둥이를 들려주고 다른 한쪽은 진흙덩이를 던지게 했다.



진흙에 맞아봤자 별로 아프지 않으니 몽둥이 부대는 용감하게 돌격해서 상대를 두들겨 패고 승리를 거뒀다. 말도 안 되는 불공평한 전투였고 병사들도 이를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승리한 병사들의 가슴속에는 백병전에 대한 자신감이 솟구쳤다. 나무에 오르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과실을 따게 하려면 먼저 과실의 달콤한 맛을 보게 하라는 방식이었다.

키루스 2세의 무덤

출처동아일보

키루스가 병사들에게 가르친 것은 백병전의 효용성이 아니라 도전의 가치와 도전에 따른 성취의 쾌감이었다. 병사들은 진흙 공격을 통해 원거리에서 투척 공격을 쉽게 피할 수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위험한 순간은 적에게 최고로 근접했을 때, 바로 그때 날아오는 단 한 번의 투척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전투 방식을 통해 페르시아는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승리가 연속됐음에도 소득은 적었다. 페르시아 병사들은 산악지대 출신이라 말 타는 법을 몰랐는데 적을 추격하고 전리품을 획득하는 건 기병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에 키루스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을 벌인다. 병사들에게 말 타는 법을 배워 기병이 되어보자는 대담한 제안을 한 것. 뒤늦게 기마술을 배우는 건 정말 위험하고 힘든 일이지만 한 번 도전과 성취의 쾌감을 맛본 병사들은 기꺼이 기병 모집에 자원했다. 이후 페르시아는 전투에서의 승리뿐만 아니라 소득도 챙길 수 있었고 기병을 활용한 다양한 전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태도로 10배가 넘는 적군으로부터 승리를 거두다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의 궁전인 '페르세폴리스 궁전'에서 출토된 '상상의 동물'

출처동아일보

키루스의 부대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진출하자 신바빌로니아 왕국은 이집트까지 끌어들여 대군을 편성했다. 바빌로니아의 병력은 키루스 군의 무려 10배가 넘었다. 키루스는 또 다른 혁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무기가 전차였다. 전차는 가장 오래된 무기 중 하나로 기원전 6세기에는 이미 고물 취급을 받고 있었다. 기병에 비해 기동성도 떨어지고 지형에 따른 제약도 많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효율성을 중시하던 키루스는 전차의 위상이 추락한 이유를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고대의 전차는 한 명이 운전하면 동승한 한두 명의 전투병이 활과 투창으로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운전병은 전투를 하지 못하니 병사 1명을 낭비하는 셈이었다. 또, 달리는 전차에서 쏘는 화살은 살상 확률도 떨어졌다. 인적 효율성과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키루스는 이전보다 크고 무거운 전차를 고안한다. 전차병에게 갑옷을 입히고 전차 바퀴에 창날을, 몸체에는 낫을 달았다. 이로 인해 살상력이 높아졌고 방호력도 높아졌다.

키루스가 처음 도입한 것으로 알려지는 낫전차는 이후 여러 왕국들에서도 활용됐다

출처위키피디아

기원전 539년 최후의 결전이 시작됐다. 키루스는 소수가 다수를 상대하기 위해선 '효율성'을 높여야 하고 이를 위해선 '기동력'과 '집중력'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키루스는 단위부대를 작고 슬림하게 만들고 서로 가까이 붙여 집중 타격과 상호 지원을 용이하게 했다. 반면, 바빌로니아군은 대군의 장점을 살린답시고 단위부대를 크게 만들고 부대를 넓게 벌렸다. 병력과 규모, 자본의 우위에 있는 집단들이 물량공세로 나가거나 외형을 키우는 것은 전쟁사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실수 중 하나다.


바빌로니아군은 병력의 우위를 믿고 삼면에서 키루스 군을 포위하며 들어왔다. 압도적인 군세였지만 대형이 너무 커서 뒤에 있는 병사들은 사실상 할 일이 없었다. 또, 부대 간 거리가 너무 멀어 효과적인 상호 지원이 불가능했다. 진흙덩이를 맞으며 백병 능력을 키웠던 키루스 군은 병력의 열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과 부딪혔다. 적이 밀리기 시작하자 작은 대형이 주는 신속성을 십분 활용해 키루스는 작은 대형을 또 한 번 분리했다. 적은 병력을 또 나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이 역시 외형상의 규모보다 '효율'이라는 관점에 따른 행동이었다. 키루스는 군을 둘로 나누어 적의 양 측면을 동시에 공격했고, 협공을 당한 적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뒤에 있던 바빌로니아 병사들은 그저 아군이 죽는 것을 지켜보다가 패닉에 빠져 도망쳤다.

단단히 뭉친 이집트 대군과 대치... 공성탑을 8마리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야전에 투입해 중동의 패자 되다

중세 시대의 공성탑

출처위키피디아

그렇게 키루스 군은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지만, 이집트 군과의 전투에선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집트 군은 병력이 많기도 많았지만 이국 땅에서 싸우므로 달아날 곳이 없었다. 이탈 없이 단단히 뭉친 이집트 군은 방패가 크고 창이 길어 공격력은 약해도 수비가 강했다. 전차부대가 돌입해서 적을 난도질했지만 병력이 너무 많은 탓에 시체 속에 갇혀 기동 불능의 상태가 됐다. 전투는 정체 상태에 빠졌고 이집트 군과의 대치는 한동안 지속됐다.


키루스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한다. 바로 공성탑이다. 공성탑은 성을 공격할 때 쓰는 무기지만 키루스는 공성탑을 8마리의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야전에 투입했다. 보통 3층에서 4층 정도인 공성탑에는 한 층당 20명의 궁수가 배치된다. 빽빽하게 뭉쳐 있는 이집트 군은 공성탑에서 보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표적이었다. 이집트 군은 방패로 화살로 막으려고 했지만 화살이 위에서 아래로 쏟아졌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었다. 방패를 들면 전방에서 가해지는 공격에 또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집트 군은 항복했고 키루스는 중동의 패자가 된다.

페르시아 왕조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 궁전

출처게티이미지뱅크

키루스는 현실적이고 효율을 추구하는 실용적인 사고로 수많은 난제를 해결했다. 기존에 고수했던 전술의 단점과 상대의 전술을 치밀하게 파악해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세웠다. 또, 병사들이 이를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효과적인 훈련 방식을 고안했다. 나아가 고루한 무기로 전락해버린 전차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결국 적진을 헤집었고, 비슷한 형세의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를 호령하는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키루스는 오늘날 대기업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하는 소기업들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소기업이 대기업이 되려면 세부적인 경영방식만이 아니라 사물을 보는 관점, 사고하는 방식, 가치는 물론이고 생활방식까지 바꾸어야 한다. 이것은 기업의 성장만이 아니라 개인의 성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혼자만의 변화로는 안 된다. 키루스의 병사들이 독특한 훈련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때 맛본 도전의 성취를 통해 뒤늦게 기마술에 도전하고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것처럼 기업의 구성원도 함께 변해야 한다. 이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리더는 구성원을 변화시키는 방법과 요령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20호

필자 임용힌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인터비즈 김동섭 장재웅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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