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의 기원
< 침례교의 기원>
침례교의 기원은 자유교회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유교회는 국가교회와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 당시, 교회와 국가는 연합되어 있었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셸리의 지적처럼, “교회는 영적 구원의 문제를, 국가는 지상에서의 복리 추구”를 위해 함께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종교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받아들였다. 한 사람이 출생하면, 그 사람은 국가의 시민이 되는 동시에 유아세례를 통해 교회의 회원이 된다. 종교를 선택할 자유나, 개인의 양심에 따라 신앙적인 행동을 할 자유를 갖지 못했다. 이것은 교회가 국가의 법률적인 통제 아래 놓여 있다는 의미가 된다.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국가가 신앙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앙의 있어서 궁극적인 권위는 하나님께 있음을 선포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강조했다. 자유교회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90-1526)과 펠릭스 만츠(Felix Manz)가 이끄는 스위스 형제단이 국가교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자신들만의 교회를 조직한 1525년이었다. 셸리의 지적처럼, “그리하여 이들은 세례 사건 직후 취리히를 떠나 인근의 졸리콘(Zolikon)촌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일월 말경 최초의 아나뱁티스트(Ana- baptist)교회가 조직되었으니, 현대 역사상 최초의 자유교회(국가와 연계되지 않은 교회)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물론, 자유교회의 전통이 16세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 이전 세기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독특하게 나타난 것은 16세기에 대륙의 아나뱁티스트 전통과 영국의 청교도 분리주의 전통”이었다. 대륙의 아나뱁티스트가 영국의 분리주의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증명할만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 그렇지만, 동시대에 같은 지역에 살았던 아나뱁티스트가 영국의 분리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17세기 영국의 침례교인들이 추구하였던 신앙의 사상에서 아나뱁티스트가 추구한 신앙사상과의 유사성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527년 슐라이트하임(Schleitheim)에서 아나뱁티스트가 모여서 합의한 오늘날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으로 불려지는 것에는 몇 가지 중요한 사상들이 나타난다. 셸리는 이들의 신앙고백문에 나타난 사상을 네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 번째는 흔히 재세례파에서 “제자도”라 일컫는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는 내부적 경험이나 신조의 수용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과의 매일 동행하는 것이어야 하는바,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모범이 신자의 변화된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한다고 하였다....두 번째 원칙인 사랑의 원칙은 첫 번째 원칙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자연스레 파생되었다. 이들을 비재세례파들과의 관계에서 비폭력주의를 고수하였다. 이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았으며, 박해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도 않았으며, 국가의 강제적 성격을 띤 행위들에 참여하지도 않았다....세 번째 원칙은 우리가 현재, 교회 권위에 관한 “회중주의적 이해”라 부르는 것인데, 실제로 루터나 쯔빙글리의 경우에도 개혁 초기에는 이러한 경향을 띤 바 있었다. 재세례파 집단은 오직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 기초하여 세례받는 자들로만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각 신자는 그의 동료 신자들을 위한 제사장이었으며, 불신자들을 향해선 선교사의 역할을 하였다. 일체의 교회 문제에 관한 결정은 회중 전체의 의견을 좇도록 하였다.... 네 번째 원칙은 철저한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 할 수 있겠다. 기독교 신자들은 “자유롭고, 강제 당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신앙을 결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최초, 자유교회의 사람들이 고백한 신앙고백문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침례교인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들 가운데 일부를 발견할 수 있다. 개인의 신앙체험, 회중주의, 종교의 자유 등은 약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례교인들은 그들의 원칙을 자신들의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처럼 아나뱁티스트가 국가교회로부터 자신들만의 노선을 걸을 수 있었던 배후에는 신약성서연구를 통한 권위에 대한 새로운 확신이 있었다. 이들은 성서연구를 통해 교회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신약성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야말로 그들이 따라야 할 교회의 모델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침례교인들이 성서해석에 대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은 16세기의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를 포함한 종교개혁의 결과로 주어진 혜택이다. 토벳의 지적처럼 “성서를 통해 하나님께 순종할 자유”를 갈망하지 않았다면, 국가교회로부터의 과감한 분리를 추구할 수 있는 동기를 공급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초기의 자유교회를 탄생시킨 16세기 대륙의 아나뱁티스트의 헌신은 침례교인들에게 자유로운 국가 안에서의 자유로운 교회로 존재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추구할 수 있도록 자유에 대한 기초를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참된 권위 아래에서 진정한 순종을 실천하고자 노력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참된 신앙공동체 회복을 위해 신학적 신앙과 거대한 교회적 배경을 수정하려고 시도하여 온 개혁자들 가운데 개혁자들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