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엄마
어버이날 을 맞으며(그리운 부모님)
조회 91 11.05.06 22:59 댓글 2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15년
하느님께서 나를 태백의 문곡교회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고 난 후, 그곳으로 가기까지는 두 달이 채 안 걸렸다. 서울 수유리교회(현 도봉교회) 근처에 방을 얻어 몇 달간 기거하던 내 모든 생활의 근거지를 태백으로 옮기던 날은 91년 3월 8일이었다. 하느님과 동행하며 전도사로 새로운 시작을 이곳 문곡교회에서 하는 거다! 그런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며칠을 지냈다. 가끔 예산 집에서 엄마나 예산교회 사모님으로부터 안부전화겸 들려주시는 소식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버지 상태가 심각해지셨다고 왔다 갔으면 하는 소식이었다.
아버지는 1년 전에 중풍이 오는 중에도 무리해서 일하러 가신다고 자전거를 타고 가시다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시면서 척추도 다치시고 온몸에 마비가 와서 누워계셨다. 그날 난 마침 집에 있었는데 어떤 분이 우리 집에 와서 다급하게 알려주었고 그곳으로 달려갔을 때 아버지는 다리 아래 냇가에 반은 물에 반은 자갈밭으로 걸쳐 누워 계셨다. 아버지의 눈은 다리 위에서 쳐다보는 나를 보고 계셨다. 이날부터 아버지는 자리에 누워 엄마의 손길이 없으면 꼼짝도 못하는 상태로 지내셨다. 아버지는 이때 영세를 받으셨다. 신부님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누우신채로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셨다. 문곡교회에 오던 그해 태백 날씨는 매일 잔뜩 흐리고 진눈깨비가 내리던 을씨년스런 분위기였다. 아버지 소식을 들어도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던 것은 거리도 거리이려니와 3월 31일이 부활주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주하는 성직자가 오래동안 없던 교회에 그동안 교회를 지키시던 연로하신 교회 어머니들에게도 그렇고, 나의 삶을 하느님께 드리기로 헌신하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인도하신 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첫 교회에서 맞이하는 부활절이였기에 이 절기를 마친 후 4월에 아버지를 뵈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쌀쌀한 날씨에 부활절은 그런대로 잘 지냈다. 태백선을 타고 제천에서 충북선으로 조치원에서 경부선으로 천안에서 장항선을 타고 예산 집에 가서 아버지를 뵈었다. 아버지는 천장을 쳐다보시는지 허공을 쳐다보시는지 소리를 못들으시는 건지 내가 왔다고 하는데도 전혀 인식하지 못하셨다. 그 곁에 있으면서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어드리고 한 거 같다. 어느 순간에 정신이 드셨는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실 때도 있어 ‘아버지’하고 부르면 알아들으시는 거 같기도 했다. 지난 1월에 뵙고 그 사이에 무척 야위시고 쇠약해지신 모습이었다. 나에게 새로운 사역지인 교회로 가야하는 결정을 하고 이사하는 등 분주한 변화로 지내는 동안, 아버지에게도 이런 변화가 있었던 거다. 아버지 곁에서 한주간 지내고 다시 태백으로 돌아왔다. 태백에 돌아와서 한주가 지난 후, 4월 17일 새벽녘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선산에 가는 길 내내 벚꽃과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핀 따뜻한 봄날에 아버지는 가셨다. 우리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교회 장례로 치러지는 복을 입고 가셨다. 문곡교회를 거쳐 대전대성당과 충주교회에서 전도사로 5년간 섬겼다. 그 다음 예수원에서 7년간 공동체생활을 하고 2002년 7월에 부산교구 상주교회로 오면서 다시 교회 사역을 시작하였다. 문곡교회와 대전, 충주교회에서 있을 때는 엄마가 가끔씩 오셨다. 한 일주일정도 지내시다 집으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예산교회에서 어머니회장도 하시고 사제회장도 하시고 이때는 회계를 담당하셨다. 예수원에 있을 때는 오신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동생한테 가거나 어디를 가셔도 교회 때문에 집에 가야한다고 서울 가셔도 하루 지나면 바로 내려가신다고 가족들한테 여러 번 얘기를 들었다. 상주교회에 왔을 때 일본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함께 가셨던 분이 엄마 연세가 81세라고 하니까 “효도많이 해야겠네, 그런데 그럴 시간도 얼마 없겠다”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실감이 되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에 그 여운이 남아있었다. 집에 갔을 때 엄마는 사람 얼굴도 잘 못 알아보시는 상태가 되었다. 가족들 이름도 다 모르셨다. 동생이름도 모르셨다. 유일하게 내 이름만 기억하셨다. 그리고 밖에 전혀 나가지 않으셨다. 상주에서는 한 달에 한번 엄마를 보러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시간을 내려고 노력하였다. 상주에 온 다음 해에 부제서품(안수)을 받게 되었다. 부제성직고시를 89년 4월에 여성 첫응시자로 응시하였는데 결과는 판정보류로 매겨지면서 언제 이뤄질런지 알 수 없는 미래이기에 죽 미뤄놨었다. 그로부터 8년 후, 내 생일 전날에 합격인정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6년 지나서 서품(안수)식을 하는 거다. 시험본지 14,5년 지나서 서품(안수)을 받게 되었다. 가족들 몇 분은 오겠지만 엄마! 엄마는 어떻게 하나, 얘기해도 무슨 얘기인지 모르실텐데... 어떻게 하나.... 전화를 했다. “엄마 내가 부제가 되는데 상주에 꼭 오세요” “난 안가” “아이 엄마 꼭 오시라니까요. 엄마가 오셔야되요” “난 못가” “엄마 와야돼-” 딸끄락 끊는소리가 들렸다. 몇 번이나 전화하고 하다가 예산 신부님이 모시고 오겠다고 해서 안도가 되었다. 서품(안수)식날 아침에 안개가 굵게 내린 거처럼 비가 왔다. 동생내외와 작은어머니와 사촌동생, 그리고 예산신부님이 운전하신 승용차에 엷은 옥색 치마저고리를 입으신 엄마가 타고 오셨다. 엄마는 웃는 표정으로 시종일관 계셨다. 예식이 진행되고 평화의 인사 하는 시간에 나는 엄마에게 가서 절을 하였다. 엄마는 알고 계시는지 모르시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날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아침 안개는 먼지 안나게 물뿌려놓으신 하느님의 센스이려니... 그리고 나는 안동으로 갔다. 처음부터 안동에 교회개척을 해야한다는 임무를 받았다. 안동에서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엄마한테 가봐야겠다 생각했다. 안동에서 예산까지는 일곱 시간이나 여덟 시간걸렸는데 정작 예산집에서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은 얼마 안되고 차타고 오고 가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때 오가는 차안에서 사랑은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하루종일 텔레비전만 보고 계셨다. 식사는 그런대로 하시는 편이었다. 이제는 밖에 나가시는 일도 전혀 없이 지내셨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걷는 것도 점차 어려워져서 걸음연습을 해야하는 상태로 빠르게 달라지셨다. 사람들의 모습도 기억못하셨지만 딸의 얼굴만 완전히 기억하시고 동생도 몰라보고 매일 보는 오빠에 대해서도 아들인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랬다. 엄마를 보고 다시 돌아올 때 내 마음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마음이 꽉 막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엄마는 더 이상 내 엄마가 아니라 돌봐줘야만 하는 아이가 되어갔다. 또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엄마가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하신다는 사실은 너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음 해에 사제서품(안수)받았다. 엄마는 오시지 않았다. 밖에 외출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딸이 성직자가 되는 모습을 보시면서 많이 기뻐하셨을 텐데.... 참 아쉬움이 많았다. 그리고 가끔 집에 갔다오고 했는데 안동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할 때 한숨이 푹푹 나왔다. 교회를 위해서 여러 기도를 하면서도 마음 한가운데 자리잡고 나를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묶고 있는 것이 있었다. 엄마였다. 하느님, 엄마 어떻게 하나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엄마 어떻게 해요. 이런 하소연이 늘 마음에 있었고 기도할 때마다 엄마를 위해서는 기도보다는 신음처럼 되뇌었다. 2005년 유월 초여름에 이르러 영어회화를 배우러 다닌다고 안동대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문구점에 들렀다가 시장에 가서 점심을 먹고 차있는 곳에 왔더니 열쇠가 없다. 되돌아가서 갔던 순서대로 시장을 세 번을 돌았다. 마음은 평안한데 열쇠는 안보이고 주님, 무슨 일입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러면서 하느님 보시기에 언짢은 것을 살피고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나서 혹시 문구점에? 하면서 갔더니 거기에 있었다. 안동에 돌아와서 기도할 때 그 묶임이 없었다. 오래동안 묶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던 그 묶임이 없어졌다. 날개를 단 듯이 자유롭기도 하고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사역들이 활짝 열렸다. 이전부터 하기는 했지만 그만그만했던 것이 본궤도에 들어갔다. 아버지를 떠나 보내드리고 15년이 지나 엄마를 떠나 보내드렸다. 지금 두 분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든든하다.
에필로그 : 엄마가 돌아가시던 그해 2005년 어버이날에 엄마한테 카네이션꽃을 소포로 보내드렸는데 조화를 보내드렸다. 소포로 보내드리는 거라 당연히 조화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분이 생화를 하지 그랬느냐는 말을 들을 때 아뿔싸! 미처 생각지 못한 거였다. 그게 엄마에게 보내드린 마지막 카네이션이었고 생화를 보내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여전히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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