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섬김과 나눔으로 이겨냅시다
2월14일 연중6주일
열왕하 5:1-14, 시30, 1고린 9:24-27, 마르 1:40-45
<코로나 시대, 섬김과 나눔으로 이겨냅시다>
1.
여기 계신 분들의 평균 연령이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70대 초반 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살아오시는 동안 가장 힘드셨던 때를 여쭈어본다면 곧바로 눈 앞에 스쳐지나가듯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힘들었던 그런 시간을 통해서 인생을 배우고 신앙 생활을 하게 되면서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훗날에 고백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잠언에는 백발은 빛나는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개역성경에는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 삶의 아픔과 고난의 시간을 통해서 얻으신 백발은 빛나는 면류관이고 영화의 면류관이라는 인생의 상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런 과정을 통과 하셨을 여러분들께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방법으로 칭찬하시고 위로하시리라 믿습니다.
마르코복음 1장에서
인생에 닥친 나병이라는 시련과 위기 앞에서 절망에 빠졌던 한 사람을 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이기도 하고
어려움이나 고통에 처했을 때 더 절실하게 자신의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게 되는 이들을 봅니다.
그 안에는 저와 여러분도 들어있을 것입니다.
2.
나병환자는 구약 율법에서 보면 부정한 자로서 그가 사는 공동체에서 격리되고 차단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소록도를 중심으로 나환자 보호구역이 전국에 걸쳐 있습니다.
현재는 약 만명 가까이 치료받고 있다고 합니다. 20대 미만은 한명도 없는 걸로 보면 감소하는 질병에 속합니다.
많은 질병 가운데 나환자는 하늘의 형벌이나 저주로 불리고 본인들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상당한 심적인 고통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어릴 때 장날이면 이 분들이 시장에 옵니다. 몇 분을 볼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전부 피하고 아이들은 아주 무서워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사회와 가족에게서 거부당하고 차단당한 채 살아가야 했던 것이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에나 동일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코복음 1장에서 나병환자 한 사람이 자신에게 닥쳐온 모든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서 격리된 곳을 나와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나환자가 정신적, 심적으로 견뎌야했던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던지 일반 사람들의 주거지역에 임의로 온다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위임에도 그것을 어기고 찾았습니다.
율법에서 나병환자는 사람들의 일반 거주지역에 오면 “나는 부정한 자입니다.”큰소리를 지르면서 알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듯이 그간 마음에 쌓여온 고통과 아픔과 상처들, 거절감과 상실감 이 마음의 짐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 달려왔습니다.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깨끗하게 하다. 공동번역에는 깨끗하게 고칠 수 있다. 로 나왔는데
다른 번역들에는 깨끗하게 하다. clean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깨끗하게 하다’는 이 말은 성전 예배와 관련됩니다.
이스라엘에서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이므로 성전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또 이스라엘 남자로서의 자격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 ‘선생님은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요청은 다시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드릴 수 있기를 바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남자로서 자격을 찾고 싶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소록도의 역사를 살펴봤는데 너무나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나병환자기 때문에 산 사람이 아닌 죽은 목숨처럼 억울한 누명을 쓰고, 84명이 학살되는 가슴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인격이 무시되고 억압받으며, 때로는 죽임도 당하면서 살아야했다는 것이 어디에서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릎을 끓고 주님을 올려다 보면서 간청을 하는 나병환자를 주님께서 고쳐주십니다.
고쳐주실 때 예수님이 그를 어떻게 바라보셨는지에 대한 표현이
‘예수님께서 그를 바라보시고 측은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 동정심, 연민
그가 겪어온 모든 슬픔과 아픔, 분노, 상처와 울분에 나도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고 분노한다. 공감을 넘어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을 영어로 컴패션, 어머니와 아이의 원초적인 관계와 같습니다.
어머니에게 아이나, 아이에게 어머니는 어떤 계산이나 조건이 없이 서로 순수하게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에게 가르침을 들으려고 온 수많은 사람들이 3일이나 끼니를 거르면서 돌아가지 않을 때 그들을 측은히 보시고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면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쳔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려고 몰려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목자없는 양처럼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측은지심, 동정심, 연민, 컴패션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시는 주님,
하느님의 측은지심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는 내게 결핍된 것을 알 때 주님을 찾게 됩니다.
나를 낮추고 나를 직면하고 인정하면서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마음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인 불완전한 인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합니다.
제아무리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그 나름의 고민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시편 42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함이니이다.
목 마른 갈급한 상태입니다.
이 갈급함으로 주님을 찾으면 측은히 보시고 측은히 여기십니다.
주님께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드시면 손을 내미시고 상처를 만지십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드시면 손을 내미시고 일을 하십니다.
골로사이서 3장 12-13절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 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주십시오.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주라고 말씀합니다.
3.
요즘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코로나에 언제 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두통, 불면, 소화불량, 어지러움, 집중이 안됨 등이 증상입니다.
우리 사회 대가족제도에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누구에게 가장 많았는가 보면 할머니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허물을 덮어주고 따뜻한 마음으로 용납해주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 이것이 사랑입니다.
로마서와 마태복음 한 구절씩 보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로마서13:10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5:17
여러분, 사랑은 율법을 완성케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어기고 격리를 어기고 임의로 밖으로 나온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고 손을 내밀어서 부정한 그의 몸을 만졌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굴레를 깨뜨리고 나병은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격리에서 해방되어서 공동체에 편입 되었고 성전에 제사드리는 이스라엘 남자의 자격을 회복했습니다.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질서와 규칙을 지켜가기 위해서
법과 규범을 만듭니다. 인간이 연약한지라 이런 체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규범과 제도를 들이대면서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에게 측은지심으로 베푸신 사랑은 세상과 인간의 제도와 규범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하시고 그러기를 바라십니다.
4.
요한교회 공동체 여러분,
측은지심,
다른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 동정하고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 마음이 가득하고 풍성한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따뜻한 마음으로 이 지역 독거노인, 노인 부부, 결손가정 아이들,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을 섬기고 작은 것이라도 나눔으로 이 지역에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측은지심이 쌓이고 쌓이면 하느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고
우리공동체에 일어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