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삼위일체 신앙으로 건강하고 풍성한 교회생활을

유테레사 2021. 5. 30. 22:10

530일 성삼위일체주일

이사6:1-9, 29, 8:12-17, 3:1-17

 

<삼위일체 신앙으로 건강하고 풍성한 교회생활>

1. 삼위일체주일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아멘, 하며 십자성호를 긋는 성호경일 것입니다.

좀 더 생각해 본다면 구약은 성부 하느님, 복음서는 예수님, 사도행전부터 서신은 성령님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력으로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이후 십자가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승천

지난 주일이 성령이 오신 성령강림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삼위일체 축일, 어떤 면으로는 교회력의 완성과 같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가 어떤 분이신지 알고 계시겠지만 정리해봅니다.

* 성부 하느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 요한복음 316절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은 세상에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주셨습니다.

 

* 성자 예수님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함께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필립비 2:6-8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본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여서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비 2:5-11은 그리스도의 찬가라고 칭하는 구절입니다.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지만 동등한 본체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인간이 되셨다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의 의지가 나타나있습니다.

예수님의 의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희생을 하기로하신 것입니다.

* 성령은 천지가 창조될 때 하느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 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셔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협조자, 보혜사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아무도 돌봐줄 이 없는 고아와 같다는 것을 아시고, 연약한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시는 분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고 다른 인격을 갖고 있는 세 인격으로서, 삼위이지만 하나의 본체, 하나의 본질이신 것이 삼위일체입니다.

 

2. 삼위일체의 배경과 니케아회의

삼위일체가 성립되던 배경은 기독교사, 교회사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성경에 정확하게 나와있지 않습니다.

2세기 중반부터 삼위일체가 거론되기 시작했는데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학자가 터툴리안입니다.

라티어 트리니타스, 영어로는 잘 아시듯이 트리니티, 삼위일체 용어가 등장합니다.

터툴리안은 성부, 성자, 성령, 세 인격이 하나의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공식을 만들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삼위일체를 중요시했습니다.

로마서 815-17 아빠 아버지, 성령, 그리스도, 삼위가 다 들어있는 이 구절에서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는 노예제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평생 종의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데 하느님을 아버지로, 하느님의 상속자라는 언급은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구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 110-11절 예수님이 세례받으시는 구절에 비둘기 모양의 성령, 성부 하느님, 성자 예수님, 삼위가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2819절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고전13:13-14, 성부의 사랑, 성자의 은혜, 성령의 친교를 기원하는 축도입니다.

세례와 축도를 통해서 기독교 언어생활에 성부 성자 성령이란 용어가 친숙해지고 깊숙이 들어옵니다.

 

교회에 삼위일체론이 등장하게 된 것은 유일신 사상인 유대교에서 기독교를 하느님 말고 다른 신을 섬긴다고 보고 우상숭배다. 신성모둑이다. 하면서 교회가 도전을 받던 것에 방어하는 차원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교부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삼위일체 논쟁이 시작된 것은 2세기 중반부터입니다.

이 논란의 중심에는 예수가 과연 누구냐 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예수는 과연 인간인가? 신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 예수가 인간일 뿐이라면 우리는 예수를 예배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예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가 신일 뿐이라면 예수를 따라 살라는 요구는 불가능한 요구가 됩니다.

인간이 신처럼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기독교의 본질을 흔드는 논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종속론적 논리를 펼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아리우스란 학자입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다. 하느님께서 만드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던 공백기가 있었다. 면서 성부에게 종속된 성자로서 신성을 부인합니다.

아리우스의 이 논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리스도론을 규정하기 위해서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5년 터키의 니케아에서 첫 번째 종교회의를 소집합니다.

이 회의에 318명의 대표들(주교, 감독)이 모여서 회의를 하게 됩니다.

이때는 기독교 박해가 끝난지 불과 12년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박해기간에 장애(다리를 절던지, 팔을 다쳐서 못쓰던지 등)를 입은 모습을 하고 왔다고 합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에 따르고자하는 사람은 5,

이 주장에 반박한 신학자가 아타나시우스입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 일부입니다.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육신하시었고 사람이 되시었다.

아리우스는 니케아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았고 유배를 갑니다.

니케아신경에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오 빛에서 나신 빛이시오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시며 만물이 다 이 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후반부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며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같은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니케아 회의에서 삼위일체론은 모든 교회에 부각되었고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정형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삼위일체는 기독교 정체성입니다.

설교 후 니케아신경을 고백하실 때마다 문구 하나 하나가 이단으로부터 기독교의 신앙과 본질을 지키고자 애쓴 믿음의 선조들의 마음을 느껴보시길 축복합니다.

 

3. 삼위일체의 신학적 의미

삼위일체론에서 핵심은 하늘에 계신 창조주 아버지,

이 땅에 오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협력자로 보내주신 성령이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용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지침이 되게 하느냐 이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단일군주론적 지배체제를 쥐고 있는 단 한 분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사귐 속에서 하나를 이루는 분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탐욕과 불의로 무너져가는 우리의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정의, 평화, 생명의 공동체로 부활시키도록 영감을 줍니다.

기독교인의 사회윤리는 이러한 삼위일체 신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4. 삼위일체의 신앙

삼위일체 교리를 해석하는 많은 글들이 삼위일체의 의미에 점유와 순환이라고 하는 어려운 단어들로 설명합니다.(페리 코레시스적 존재의미)

이 단어의 의미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로서 성숙한 관계를 지향하고 목표로 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삼위이면서 하나의 본질을 이루는 관계가 교회 안에서

오늘 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사랑의 사귐, 성령의 코이노니아입니다.

그 첫 번째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사귐을 하도록 지켜야할 지침은 공감이라고 봅니다. 현대사회에서 문명이 발달하고 물질이 풍요롭지만 그 가운데 정신적으로는 더욱 황폐화하고 고독합니다. 누군가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고 내 얘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성 어거스틴이 인간을 관찰함으로 삼위일체 흔적을 찾고자 한 것처럼

공감이 필요한자, 공감하는 자, 그리고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

삼위일체는 이렇게 우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 우리가 지켜야할 것은 균형을 갖추는 것입니다. 생각에도 행동에도 관계에서도 균형감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분별력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분은 분별력을 힘을 써야 할 때 힘쓰고, 힘을 써야 하지 않을 때 힘쓰지 않는 것이다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삼위일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가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서로 서로가 각각의 인격을 가진 독립된 인간으로서 각각의 영역에 대해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인격에 대해 침범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삼위일체는 어려운 교리입니다.

삼위일체를 잘 설명하려고 하다보면 이단이 된다는 말도 있듯이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알기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거제교회 여러분,

성부 성자 성령, 각각 다른 인격을 가진 삼위이지만 본질은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의 신비와 신앙이 우리 안에서 지속적인 관심과 실펑으로 이루어지셔서 풍성하고 건강한 교회생활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