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에 엘레이손,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7월 18일 연중16주일
삼하7:1-14, 시89:20-36, 엡2:11-22, 마르6:30-34,53-56
<기리에 엘레이손,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코로나가 네 번째 확산기에 접어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배 가운데 성령의 충만한 새 힘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간에는 40도까지 예상되는 폭염이라 하는데
넉넉히 감당할 건강주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
마르코복음 6장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입니다.
한 마디로 눈 코뜰새 없이 너무나 바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바쁘셨는지 파송한 제자들이 돌아와서 이런 일 저런 일, 사역하며 경험 한 일을 서로 나누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을 보내는 그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연이어서 주님을 찾아오는 바람에 식사할 틈도 없었습니다.
많이 걷고 돌아다녀서 피곤하고 지쳐있는데
거기에 그대로 있다가는 식사도 못하고 쉴 수도 없으니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가는데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인 줄을 알아보고 여러 동네에 소문을 내고 모두 달음박질을 하면서 ‘저쪽으로 가셨다. 저 넘어 가신다.’ 소리를 질러대면서 사력을 다해서 달려가서 예수님 일행을 앞질렀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곳에 먼저 도착해서 배가 닿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교회를 이렇게 찾아오던 때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6.25 전쟁 후부터 60년대 70년대까지 새마을운동 하던 시절에는 개척교회 간판을 달면 봉사할 사람들이 찾아와서 새벽기도, 철야기도, 교회 청소, 주일학교 반사 등 교회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봉사했습니다.
기도원에서도 하루에 예배를 대여섯 번 드리고 매 예배마다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질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에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컸던 것 같습니다.
반면 물질이 넉넉해진 요즘엔 이처럼 순수한 열망을 갖고 교회를 찾는 사람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또한 교회는 사회로부터 외면받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2. 목자없는 양같은 인생
현대사회의 가장 큰 적은 편리함, 이라고 합니다.
모든 문명의 이기가 편리를 추구합니다.
새로 나오는 핸드폰이나 전자제품은 스위치키고 작동하는데
몇 초라도 빨라야 신제품이라고 할 정도로 발전의 기준을 스피드에 두는 것 같습니다. 과다하게 사용하는 일회용품과 플라스틱도 편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환경오염을 가져왔습니다.
편리한 것을 찾고 추구하다보니 불편한 것을 못 참고 못 견딥니다.
편리한 것에 익숙해지면 다시 예전의 불편한 생활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물질이 풍부하고 생활이 편리해진 오늘날에
정신적인 질병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공황장애, 우울증, 조현병, 중독 같은 내면적인 문제, 정신질환이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새로나온 인사가 숙면하세요~ 라고 합니다.
잠을 잘 못자는 사람들, 불면증이 많아서 잠을 푹 자는 것을 소원이라고 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잠을 잘자도록 도움을 주는 매트, 베개, 조명 등 이런 것이 하나의 산업으로 되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갈바를 알지 못하고 혼란과 방황으로 헤매는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영혼들을 보시면서 목자없는 양과 같이 측은히 여기실 것입니다.
마르코복음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죽자 살자 달려왔다면
현대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무기력과 무력감으로 절망과 체념, 좌절에 빠진 채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모습이 다를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치는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목자’란 말이 70번 이상 나온다고 합니다.
‘다스리는 사람’이면 목자라고 했습니다.
왕, 정치인, 관리인, 제사장 등이 목자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백성을 지도하는 사람들이나 정치적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서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에게 끊임없이 이르신 말씀입니다.
3.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
아모스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 아모스8:11
하느님께서 아모스 예언자를 통해 구약시대에 종교지도자들의 잘못을 책망하십니다.
목자 없는 양이란 표현은 전적으로 목자의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야 할 목회자들이
다른 것에 관심갖고 다른 것을 가르치고 바르게 인도하지 않는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던 목회자, 목자의 책임이 가장 큰 것입니다.
코로나19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지금 네 번째 확산이 되고 있는데
이것을 위해 기도할 때 하느님은 목회자, 성직자의 회개, 교회의 회개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제 마음에 다가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모든 허물과 부족함을 인류의 목자이신 하느님의 자비에 간구할 수 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성공회 성찬례 가운데 여러 기원송가가 있습니다.
이 중에 사순절에 부르는 기원송가로 ‘기리에 엘레이손, 그리스데 엘레이손’이 있습니다.
기리에는 라틴어로 퀴리오스, 영어로 Lord, 주님, 주인을 뜻합니다.
크리스테는 그리스도님입니다
측은히 여기셨다. 측은하다, 이 말이 엘레이손 입니다.
영어로는 컴패션,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깊은 동정심 이란 뜻입니다.
엘레이손은 예수님 당시에 높은 지위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청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기리에 엘레이손,’ ‘주님 긍휼히 여기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마태복음 12장 20절에
그는 상한 갈대도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
예수님의 측은지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렇게 보십니다.
우리는 늘 시간에 쫓기면서, 뭔가 다 채우지 못한 채 마감해야 하는
아쉬움을 느끼고, 후회를 많이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쉽게 하는 말 가운데 ‘다음 생에는 지금 배우자하고 결혼하겠냐, 다음 생에는 이것 말고 뭘 하겠다.‘
이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여러분
한번 인생이지 다음 생이 어디에 있다고, 있지도 않은 다음 생 운운하는 것은 말로나마 아쉬움을 달래보고자 이렇게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상한 갈대와 같이 쓸모없고, 희미하게 불을 밝히는 있으나 마나한 등불과 같은 존재일지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잠잠히 곁에서 바라봐 주십니다. ‘그래 애썼다.’
하느님은 늘 부족하고 아쉬워하는 인생을 위로해주시고 보듬어 주시는 목자이고,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려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시고
눈만 감으면 곧 잠드실 것 같은 고단함이 밀려왔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을 보시면서 그들을 받아주십니다.
목자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민망히,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나인성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눅 7:13).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 지르는 바르티메오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
병자들, 어린이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셔서 고쳐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주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은혜는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긍휼하심에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기도가 라틴어로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고 무익한 존재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4. 공감, 위로, 응원, 지지하는 공동체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든지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병자를 눕혀가지고 오고, 부축해오고 병자를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자 모두 나았습니다.
오늘날 전에 없이 정신적 영적인 어려움을 겪는 시대입니다.
우리의 목자되시는 예수님이 더 간절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거나 만날 때 공감하는 능력이 풍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주변을 오가면서 이웃을 잘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안소니 드멜로 란 가톨릭영성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에게 천주교신자가 영적이란 것이 뭐냐고 질문했습니다.
이 분이 답하길 잘 보는 것이다. 이렇게 대답하는 강의를 본적이 있습니다.
뭘 잘보느냐면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표면적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체, 실제적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약속하신대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을 보내주시고 갈 길을 인도해주십니다.
예수님의 몸 되신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필립보1장 6절’
여러분,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갑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많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코로나 시대, 지치고 상한 심령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복하고 치유하는
착한 목자의 사역을 이루어 가는 거제요한교회가 되기를 소망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