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2월20일 연중7주일
창세 45:3-11, 15, 시편 37:1-11, 39-40, 1고린 15:35-38, 42-50, 루가 6:27-38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 사람의 성직자로 꽉 채워져있던 제단이 비어있는 것 같네요.
오늘은 흔치 않은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모두 회복되어서 다함께 만나 예배드리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 예수님께서 평지에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는 가르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 상황과 말씀이 계속 이어집니다.
1. 크리스챤의 도덕적 기준
크리스챤의 도덕적 기준, 윤리적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 한다면
‘원수를 사랑하라.’가 그 대표적인 말씀일 것입니다.
정말 원수까지 사랑하며 사신 분으로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일컬어지는 손양원목사님 같은 분이 계시고, 장기려박사님 등 더러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를 빗대어 그 반대의 의미로 사용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루가복음 6장 27절에서 38절까지 본문 말씀 가운데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가 27절인데
다른 구절들은 이 구절을 실천에 대해서 자세하게 풀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1절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황금률로 불려지는 구절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문의 모든 구절이 우리가 남에게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구절들이 익히 들어온 말씀이지만 들으실 때 익숙하게 소화된다기보다는 좀부대끼는 느낌이 드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속 마음이 어쩌면 이렇게 속속들이 자세하게 드러나게 하셨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표현들이고 내 마음을 다 들킨 듯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남이 나에게 해주기만을 바라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남에게 해주려고 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를 좋아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에게는 잘 해주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게 하는데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음 속에 앙심을 품고 의도적으로 좋은 말을 안하려고 합니다.
또 뭔가 해줬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는 마음을 계속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루가복음 본문을 통해서 내 생각과 내 마음이 이렇습니다. 인정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신 루가복음 6장은
인간의 본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그에 대해서 크리스챤이 해야할 기본적인 도리와 베풀어야 할 덕을 말씀합니다.
2. 원수도 사랑하라는 이웃 사랑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새 술은 새 부대에’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새 부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살려는 사람은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 삶의 수준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은 우리나라 정서와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정서는 전해오는 ‘전설 따라 삼천리’에 각 지방에 전해오는 전설을 보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원한과 미움, 복수가 주를 이룹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그렇게 미워해서 구박하다가 죽어서 새가 되어
한을 토해내는 소리를 외쳐댄다든지,
밥을 입에 물고 죽었는데 그 무덤에 꽃이 피어서 그 형태가 밥을 입에 물고 있는 며느리 같다든지,
해를 입힌 사람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하던가,
아니면 죽어서라도 귀신으로 복수를 하는 내용들입니다.
우리 정서에 용서라는 것이 맞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1독서 창세기45장 말씀입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집트로 팔아 넘겼지요. 5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 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으로 에집트에 종으로 팔렸다가 총리가 돼서 형들을 만나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형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이라고 자신의 지난 날을 하느님과 관계로 해석을 합니다.
나중에 야곱이 죽으면서 형들이 아버지가 안계시니까 요셉이 우리에게 앙갚음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할 때 다시 한번 안심시키는 장면이 50장에 나옵니다.
바람막이 해주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제 우리를 종으로 삼아다오.’ 형들이 요셉에게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어린 것들을 돌봐 드리리다.’ 요셉이 끝까지 하느님과 관계로 형들을 안심시키고 함께 삽니다.
요셉의 하느님을 향한 충성심이 새 부대의 역할을 해서
에집트에서 형제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시고 하신 말씀 가운데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기독교 첫 순교자인 스테반도 돌에 맞으면서 이 말을 했습니다.
말씀이 인간의 몸으로 육화되시어 오신 성육신도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뺨을 돌려대주라는 것은 폭력을 당하는 경우라도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
이것은 하느님께 꾸어드리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고 잠언19장17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도의 폭행을 방관하거나 절도하는 사람조차도 제지하지 말라는 무분별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물질의 손실이나 이해 타산에 급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영혼에 해를 입히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하느님과 관계 안에서 모든 문제를 해석하면 좋으련만 현실로는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끼리도 그렇고, 교인과 믿지 않는 사람들하고 관계에서 생긴 문제를 소송하고 재판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법원에 교회 다니는 신자들이 있는데 창피해 죽을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3. 하느님 나라의 생활
고린도전서6장에 송사에 대해서 세상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라고 하면서 차라리 억울한 일을 그대로 당하는 것, 그대로 사기를 당하는 것이 어떻냐하고 말씀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대신부님은 아가페사랑이 의지적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대천덕신부님의 아버지는 미국 장로교에서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어서
중국 황하강 유역에서 사역하셨습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중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고 선교사를 추방해서 미국에 돌아가서 교회를 순회하면서 중국사역을 나누는 시간을 갖다가 장개석총통이 미국에 요청으로 영어와 중국어하는 연락관으로 뽑혀서 중국에 들어갑니다. 가서 얼마 후에 교통사고로 팔을 심하게 다쳐서 후방으로 이송되어
병원에 수술받는데 의식이 없자 본인의 동의 없이 팔을 절단합니다.
깨어났을 때 팔이 절단된 것을 보고서 로마서 8장 28절, 하고 외치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다시 미국에 들어왔다가 얼마 후 한국전이 발발하고 52년 6월말에 한국에 들어옵니다. 전쟁의 폭격으로 팔 다리를 장애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수족을 만들어 주는 선교를 합니다.
한국전쟁 중 타임지에 선교활동이 보도되고 루벤선교사의 얼굴이 표지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루가복음 6장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생활을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본문의 마지막 38절로 마무리합니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남에게 주기를 즐겨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남에게 주기를 즐겨하시면 하느님 나라 가운데 사시는 기쁨과 축복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