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의 신비로 한 몸인 교회 공동체
설교 22년 4월 10일 성지, 고난주일,
이사50:4-9, 시31:9-16, 필립2:5-11, 룩22:14-23
<성체성사로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
성지, 고난 주일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 공생애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합니다.
오늘 복음은 일년 중 가장 길게 낭독합니다.
성지축복한 후에 낭독한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예루살렘에 예수님은 남다른 심정으로 들어가시는데 이때 예수님 주변에 가장 많은 제자들과 군중들이 모여서 환호합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가시는 주변에 사람들은 종려가지를 흔들며 환호를 외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예루살렘은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수난과 영광을 입는 왕으로써 행차하시는 것입니다.
몰려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3년 동안 행하신 기적과 능력을 보고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다니에서 죽은 나자로를 살리신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들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환호의 대열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 앞에 겉옷을 펴놓고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다윗의 아들 호산나~
환영받으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을 반대하는 바리새인과 대제사장은 이런 상황에 조용하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서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왕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게 집중되었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지주일은 예수님을 새 예루살렘인 교회의 왕으로서 기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수난 본문은 우리가 신앙고백할 때 되뇌이는 중요한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하시고, 겟세마네에서 피 땀흘리며 기도하신 후, 유다가 앞장선 무리들에게 잡혀가시고, 심문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져, 유다지도자들의 음모에 따라 십자가형을 언도받고 채찍에 맞으신 후, 골고다 언덕길로 향하여 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숨을 거두십니다.
삼일간 이루어지는 이런 사건이 기독교 이천년 동안 진리이자 교리로 전해지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를 마무리하면서 많은 군중들 가운데에서 함께 동고동락한 제자들과 성찬을 나누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15절에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왔는지 모른다.”
‘얼마나 별러왔는지 모른다’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마음에 늘 그리셨던 제자들과 만찬은 그동안 수난에 대한 언급을 세 번 하시면서 그 의지를 다지셨습니다.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마련한 장소에서 만찬이 드디어 시작되자 벅찬 감동에 차서 ‘얼마나 별러왔는지 모른다.’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14절에는 제자라는 호칭이 사도로 바뀌어서 기록된 것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찬, 그 자리, 그 시간이 특별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 전에 제자들과의 만찬이란 벅차고 감동적인 순서가
주님의 마음을 크게 위로하고 용기를 갖게 했을 것입니다.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잔을 들어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성찬을 제정하실 때 수난의 모든 과정, 과정을 생생하게 느끼시면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30년간 일반인처럼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들과 함께 사시고 3년간의 공생애, 길지 않은 시간을 하느님 나라 선포와 제자를 양육하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의 생애는 언제나 신묘막측합니다.
필립비 2장에서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지만 동등한 존재가 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자신을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과 같은 분이 하늘의 영화를 다 포기하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다는 것은 겉모습만 종으로 보이게 가장한 것이 아니라 종의 본질적 속성을 취하셔서 종 그 자체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것은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운 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수난 당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뱉는 침을 얼굴에 맞고, 두 눈을 가린 채 뺨을 맞고, 주먹으로 린치를 당하고, 머리를 맞았습니다. 옷을 다 벗긴 몸을 채찍으로 사정없이 내리치고 등에 꽂힌 채찍을 잡아챌 때 살덩이가 찢겨나고 39대를 맞아(사형수에게 40에서 하나를 뺀 39대를 때림) 뼈가 드러나고 피를 철철 흘림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태가 되셨을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권세와 능력을 전혀 주장하지 않으시고 신성(神性)을 포기하고 하찮은 종의 모습이 되시기로 뜻하신 것을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그 마음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닮아가라고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시고 종으로 오시어 이 세상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어린 양
그 분은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겸손한 마음이 담긴 성찬을 교회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은 성찬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찢기고 흘리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이를 먹는 이들이, 이것을 먹음으로 한 몸을 이루라는 예수님의 강력한 의지이고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나의 몸이라고 하시는 데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축성한 빵은 희생 제물로 바쳐질 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임, 즉 제자들의 모임, 다시 말해서 교회 공동체가 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인정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나의 지체로 여기며 성체성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고전11:29>
성체와 보혈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기에 예수님께서 겪으신 처절한 수난이 있고
자신을 비우신 지극한 겸손이 있고
하느님의 뜻에 끝까지 따르신 순종이 있습니다.
홀로 외로이 감당하셔야 했던 겸손과 순종,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이 모든 것
그것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십자가에 못박혀죽는 것입니다.
오늘 성지 고난 주일, 그 중심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우고 기념하는 주일 입니다.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가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나와 너, 내가 있고 다른 사람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서로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신 후에
수건을 두르시고 한 사람 한 사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세족례, 세족식 자주 듣다보니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데
왕이 백성들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예수님은 교회와 세상이 이렇게 다르다.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권력과 힘이 우선이고 가진 사람이 군림하는 세상에서
교회는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신 그 정신과 마음으로
교회 안에서 서로 섬기고, 교회 밖에 이웃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가 하나되어 함께 나가려면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를 내고 성과를 위해서 서두르고 급하게 몰아붙이다보면 갈등이 생기고 하나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일이 왕왕 있습니다.
그런데 급하게 빨리 해야 할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사단의 속임수로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되어 함께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되어 함께 할 때 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성령의 능력은 폭발적이고 모두에게 기쁨이 되고 평화가 넘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을 잔잔히 바라면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종려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한 군중은 대제사장과 바리사이들의 음모에 함께 하면서 빌라도 총독을 향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미받으소서. 하던 입술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살기와 악의에 가득한 소리를 외쳐댔습니다.
그 자리에 우리도 군중 가운데 있었다면
종려가지를 들고 환호하기도 했다가
빌라도와 대제사장, 바리사이들 위압적인 상황 속에서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이끌려 주먹을 쥐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함께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900미터 골고다 길을 십자가형에 쓰일 나무를 메고가다 세 번을 쓰러지면서 가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2003년에 나온 패숀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에 예수 역할을 한 짐 카비젤이란 배우가
그 영화를 찍을 때 십자가 처형장면을 몇일간 촬영했는데
그 배우도 왼쪽 팔 어깨관절이 빠지고 저체온에다 벼락을 세 번 맞았고, 촬영끝나고 심장수술까지 하는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촬영이었다고 합니다.
세상 죄를 지신 어린 양으로
우리 죄를 위해, 내 죄를 위해서
죄인이 되시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신 예수님
이사야 53장5-6절로 마무리합니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