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익숙해져야할 끝자리

유테레사 2022. 8. 28. 23:38

828일 연중22주일

예레 2:4-13, 시편 81:1, 10-16, 히브 13:1-8, 15-16, 루가 14:1, 7-14

 

<익숙해져야할 끝자리>

1.

제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은 좋은 대학 나와서 잘 풀렸습니다.

고위직에 올라서 텔레비전에도 가끔 나오고 아주 잘나갑니다.

그런데 부모님한테 용돈을 챙겨 드린다던지 부모님 계신 시골에 자주 내려와서 찾아뵙던지 그런 것은 잘 못해요. 바쁘다는 핑계일 수도 있고 관심이 덜 합니다.

그런 반면에 작은 아들은 아버지 가업을 물려받아서 농사지으면서 나름대로 지역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부모님 용돈도 잘 드리고 자주 찾아와 뵙고 돌봐드리고 합니다.

두 아들 중에서 효도하는 아들은 어떤 아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 많은 어르신들이 첫째 아들이라고 대답하신다고 합니다.

입신양명,

출세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이름을 널리 알린다는 고사성어입니다.

이 말에는 부모의 이름을 알려서 효도한다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아들이 출세하면 부모가 아들을 잘 가리켰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동물의 왕국이 한동안 인기였을 때가 있었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동물의 세계가 평화로울 때도 있지만 다툴 때도 많습니다.

동물들이 다툴 때는 서열 때문에 그렇게 싸웁니다.

끊임없이 서열싸움하느라 으르렁거리고 치고받고 합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도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서로 더 많은 힘을 갖으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나라가 대학 진학률이 상당히 높은데 학벌이 좋아야 좋은 대우받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니까 대학 들어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영향은 학문을 중요시하고 농 공 상에 대해 천하게 여기는 유교의 영향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안동에서 교회개척하느라 6년 살았습니다.

안동에 대해서 조사도 하고 관심있게 살펴봤습니다.

안동은 소백산줄기 끝자락에 경상도 북부 내륙산간지대입니다.

그래서 농경시대에 경작지가 적은 지역이다보니

논밭의 소출이 적으니까 가난했습니다. 먹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려말부터 유학에 입문하고 과거 준비하는 출세지향적인 풍토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안동 김씨들의 세도가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유교의 문화 가운데 개신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학교를 많이 세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학교 세우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하는 일이라고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서학이라고 했습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으로 알았어요.

교회를 가르칠 교로 한 것도 6세기에 중국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유학자들이 그렇게 붙인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가르치고 배우고, 그래서 지위가 높아진다는

인식이 초기부터 있어왔습니다.

배웠다. 많이 배웠다 하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배워야한다. 대학 가야한다.

우리나라의 이런 풍토는 유교와 함께 기독교의 영향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원래 기독교의 정신과 다르게, 선교사들의 본의와 다르게 유교의 영향은 기독교를 약간 왜곡되게 이해했던 것입니다.

 

2.

주님은 높아지려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이 말씀은 기독교 정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필립비 25-7절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찬가라고 불려집니다.

이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우월하다’, ‘내가 너보다 좀 낫다는 것을 나타내보이겨고 하거나 증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루가복음 14장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은 바리사이파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온 손님들이 자기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의 음식상은 디귿자형으로 배열되어있는데

세 면이 있다면 각 세 면의 중앙자리가 상좌, 높은 자리이고 섬김받는 자리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에 앉으면 높은 자리에 앉은 것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 서로 앉으려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권위는 스스로 주장할 때 이미 그 힘을 잃어버립니다.

스스로 힘을 주장하려고 하면 할수록 인정받지 못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권위는 다른 사람들이, 남들이 인정하고 세워져야 진정한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 자체는 문제가 아닌데 권위를 주장하는 권위주의에 대해서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직자의 권위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세워질 때, 진정한 권위가 있습니다.

 

이제 잔치집에 온 손님들이 저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데

그곳에 온 유대인들이 집에서 출발할 때 부터 높은 자리 앉을 마음을 먹고 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인하고 상관없이 들어오더니 저마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고 앉아있고 하는 잔치집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것이 아니라 살벌해졌겠지요.

표정들이 굳어졌고 긴장감이 도는 무거운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이 집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잔치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들이었을 것 같습니다.

보고계시던 예수님께서 딱하게 여기시고 한 가지 제안을 말씀하십니다.

(14장에서) 먼저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초대를 받았을 때 차라리 가장 끝에 있는 자리에 가서 앉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이 와서 당신 자리는 여기오하면서 더 높은 자리로 안내해주고 영화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잔치집에서 각 자리마다 앉을 사람을 결정하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면 주인에게 있습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앉고 싶다고 해서 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결정하기에 따라서 앉는 자리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3..

여러분,

이처럼 잔치 집에서 앉을 자리를 주인이 결정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관심이 하느님께서 관심하시는 것에 따르시기를 원하십니다.

저 자리에 내가 앉아야겠다. 또는 내가 앉아야지,

우리의 관심과 마음이 온통 이런 정치적인 것에 가 있는 것에 대해서

예레미야서에서 말씀합니다.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생수가 솟는 샘인 나를 버리고

갈라져 새기만하여 물이 괴지 않는 웅덩이를 팠다.”

우리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지 않으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리거나,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리 다툼이나, 자리 차지 하려고 열심히 힘써서 시간을 보내고

시간을 보내지만 삶 속에 아무런 결실이 없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라고 하지요.

어떤 분은 교회위원에 선출 안되었다고 안 나오는 분도 있어요.

다음 달에 교회위원 선거하는 총회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나와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나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만남, 시간을 갖으면서 나만이 아는 하느님,

나만이 경험한 하느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는 성경구절이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골방은 혼자 들어가는, 누가 들어간지도 잘 모를 수 있는

골방에 들어간 것은 하느님을 일대일로 만나러 혼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 하느님은 나를 훤히 아십니다.

시편 139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시고

멀리 있어도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 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 할지 다 아시고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고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그 오른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

 

도무지 우리 능력으로는 하느님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4.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가장 관심갖으시는 사람은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

잔치에 초대하면 와서 먹고만 갈 수 밖에 없는 형편과 처지의 사람들,

이런 분들은 잔치에 초대해도 잘 안올려고 할 수 있어요.

늘 무시당하고 소외되어 왔기 때문에 거절받아왔기 때문에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에 익숙해있습니다.

실제로 식사한끼 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무료급식하는 곳이 곳곳에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마음은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아프리카 우간다에 가서 만난 한 부부는 부인은 한국인1.5세미국교포이고 남편은 중국계 미국인인데 부인이 20대 때인지 필립비서2장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이렇게 살아야겠다.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 그래서 낮은 곳을 찾아서 매년 우간다에 와서 봉사를 해요.

결혼할 때 축의금받은 걸로 우간다 시골에 학교를 지었어요.

이 분이 예일대에서 신학, 예배학, 합창, 피아노 네 과목을 전공한 석학이에요.

그 말씀에 감동을 받고 깨달아서 매년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서 거기를 와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행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께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합니다.

너희 주변에, 너희가 사는 지역에서, 잔치에 초대받을 수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으라고 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따뜻하게 사랑을 베풀어

한 끼라도 따뜻하게 배부르게 먹이는 너는 행복하다.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에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식사만 있겠어요? 식사만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와 같은 사랑과 정성으로 주변에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나의 손을 내밀어주고 귀를 기울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인드, 사고방식이 교회생활의 기본이고 시작이며 출발입니다.

2독서 히브리서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십시오. 2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3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학대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같은 학대를 받고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하늘 나라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돌아갈 본향, 지금 여기에서 하늘나라에서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그때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더위에 냉수 마시는 것처럼

하느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은혜가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