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자와 라자로

유테레사 2022. 9. 26. 23:56

22925

6:4-7, 146, 딤전6:6-19, 16:19-31

 

<하느님의 법을 따릅시다>

9월 마지막주일인 오늘은 연중26주일이면서 대한성공회가 관구설립축일로 지키는 기념축일입니다.

9월 첫째주일은 여성선교주일이고 마지막주일은 관구설립기념축일에다

10월 첫째주일까지 창조절기간입니다.

관구설립기념일 복음은 잘 아시는 새 술은 새 부대에이 말씀입니다.

저는 연중26주일 복음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너무나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재물에 대해서 서로 판이하게 살아온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1.

재물이 많은 부자 한 사람이 있는데 자색옷과 고운베옷을 입었다고 개역성경과 영어성경에는 나와 있습니다. 자색옷은 신분이 높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고운 베옷도 아주 부자들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라고 합니다.

부자는 고급 옷,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향연을 베풀며 삽니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잘 차린 고급진미에다 갖가지 술이 식사 때마다 상에 올라옵니다.

이 집에는 손님들이 늘 끊이지 않고 찾아와서 음식을 먹고 유희를 즐기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집 대문간에는 자기 힘으로도 다닐 수 없는 거지 한 사람이 있는데

이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영양실조로 온 몸에 부스럼이 생겨서 헐고 사람꼴 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이 나사로한테 심지어는 개들이 와서 피부가 헐어서 진물나고 고름이 나는 그 살갗을 핥습니다. 이 사람은 개들을 쫓을 기력조차 없어서 무기력하게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래도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해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의호식하면서 이 사람 저사람 초대해서 잔치를 베풀고 유흥을 즐겼지만 자기 집 대문간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한번도 그에게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먹다 남은 거라도 가져다 배불리 먹도록 전혀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2.

본문에서 부자는 매일 잔치를 벌이고 호사스런 생활을 하며 살았음에도

주위에 가난한 거지 나자로에게 무관심한 것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루가복음은 복음서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구절이 루가복음 418-19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회당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낭독하신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성령이 오시는 목적은 회복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의 해, 희년 선포입니다.

성령과 희년, 어떻게 연관이 될까요?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성령이 오신 후 생겨난 교회는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희년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부자가 어떻게 부를 축적했는지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인데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불의한 청지기나, 오늘 본문의 부자는 구약 신명기15장에 이자를 금하고 있는 율법을 어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희년에는 유대인들 안에서 빌린 원금을 탕감해주라는 율법을 어기고 탕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부를 쌓은 것으로 루가복음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부자는 이름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무시하는 표현이지요. 율법을 지키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부자가 되었다고 대놓고 일종의 비판을 한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히브리어로 라자로는 하느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라자로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한 사람으로 봅니다.

부자와 많이 비교됩니다.

3.

성경에서 죽은 후에 대해서 나온 말씀이 살짝살짝 내비치듯 하고 있는데 비해서 16장 후반인 본문에서는 이 부분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지 라자로가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온 몸이 헐어서 고생하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에게 인도를 받으면서 어디로 갔다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고 했는데 이것은 천국으로 갔다는 말입니다.

라자로는 비록 가진 것이 없어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너무나 어렵고 고달프게 살았지만 그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았습니다.

죽은 후에 천사들이 인도하여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라자로는 왜 죽은 후에 위로를 받았을까요?

이 세상에서 먹고 입을 것이 없었지만 하느님을 의지하고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에게 받았던 멸시와 천대와 모욕, 굶주림을 천국에서 다 위로받습니다. 부자집 대문간에서 있으면서 그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소리도 듣고, 냄새도 맡고, 오가는 사람들이 휙휙 던지는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수치스럽고 모욕감과 굴욕감을 느꼈을까요?

거기다 개들이 와서 그 상처를 핥아요. 개들이 상대하던 인간이하의 삶을 산 사람이에요.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하냐면 불의한 이들에게 이자로 뺏기고 가진 것을 빼앗겼다고 봅니다. 또 부자가 나누지 않아서 굶주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고생한 것을 천국에서 위로받고 소외받았던 것을 다 보상받습니다.

그러면 가난하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냐, 천국에서 다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냐고 할 수 있겠죠. 이 라자로는 하느님을 믿고 경건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천국에서 안락하게 쉬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부자도 죽었는데 그는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합니다.

그는 음부에 갔다.’ 이 곳은 지옥입니다.

그 부자는 하느님과는 상관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율법을 들어도 건성으로 듣고 지나쳤고, 지켜야할 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자를 받고 빚을 꿔주고 7년째에는 탕감해주지 않고 원금을 계속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는 온갖 것을 다 가지고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지옥에 가서 보니 너무나 뜨겁고 고통뿐이에요.

유튭 찾아서 지옥에 잠깐 갔다온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았는데요.

지옥하면 불가마, 훨훨타는 불연못이 있고 불길이 늘 낼름낼름 나오는데

우리가 느끼는 느낌을 다 느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지 않을 뿐 우리가 지금 여기서 화상을 입으면 느끼는 것, 다리를 다치면 느끼는 고통, 목 마른 갈증,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어둠 속에 있는 공포, 소름끼치는 소리, 무시무시하게 생긴 마귀나 짐승들이 수시로 와서 괴롭힐 때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와 고통 등

이런 것을 다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물이 정말 한방울도 없다고 합니다.

부자가 말하길, ‘아브라함 할아버지, 나를 긍휼히 여기시어 라자로를 내게로 보내셔서 손가락 끝에 물 한방울이라도 내 혀에 축이게 해주세요.’

이 말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살았을 때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은 다 겪었지 않느냐? 그래서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겪는 것이다.’

완전히 반대 상황입니다.

 

지옥에서는 이 끔찍한 고통이 한 달 두 달간 된다 해도 끔찍할텐데요. 얼마동안이나 지속되느냐면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지옥에는 안가도록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지옥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가 없어요. 영원히 나올 수가 없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번 간청을 합니다.

라자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서 내 다섯 형제에게 지옥에 오지 않도록 가서 증거하게 해주세요.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보내시면 듣지 않겠습니까,’ 다시 간청합니다.

아브라함이 다시, ‘모세와 선지자들을 보냈는데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는데 라자로를 보낸다고 한들 그의 말을 듣겠느냐,’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인데 어떤 사람이 가서 무슨 말을 해도 듣겠느냐, 이미 때는 늦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돈이 최고라면서 부를 쌓아가는 방법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이웃에 나누지 않고 자신의 창고에 쌓아놓기를 힘쓴 결과라는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틍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루가복음 1825절입니다.

이구절도 루가복음입니다.

4.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안식은 중요한 개념입니다.

엿새 일하고 일곱째 날 안식일입니다.

예배드리며 하느님 안에서 새 힘을 충전하고 한 주간을 시작합니다.

여섯해를 지나고 7년째 안식년에는 경작을 쉬고 땅을 안식케합니다. 땅이 쉬면 사람도 쉬겠지요. 안식년을 일곱 번지나고 그 다음해 오십년째해가 희년입니다.

희년에는 자기 지파에게 돌아가고 땅을 안식하고 노예를 해방하고 원금을 탕감해줍니다.

하느님의 법을 지켜야하는 것은 사람의 탐심과 탐욕은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끝없이 나아갑니다. 안식년, 희년을 통해서 우리의 욕심과 탐심을 제어하는 길은 하느님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재물이 많으면 하느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이웃에 굶주리는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렇듯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잠깐 나그네로 와서 살다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그 죽음에 대해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후에는 두 종류의 세계가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위로와 평안과 쉼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뜨거운 불길, 불 속에 있는 고통과 그럼에도 물 한방울이 없는 갈증이 있는데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라자로는 천국에서 편히 쉬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 부자는 지옥에서 뜨거운 고통을 겪으며 신음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잠시 사는 곳이고,

우리 모두는 나그네입니다.

잠깐 내게 맡겨주신 것을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을 거슬러 하느님을 경외하고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세상은 잠깐입니다. 여기가 전부도 아니고 모든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안락과 평안의 삶을 허락하는 영원한 세상이 있습니다.

그 세상에서 영원히 사시는 소망을 갖으시기 축복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