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우정 차원을 넘어서야>

유테레사 2023. 8. 19. 23:08

<우정차원을 넘어서야>

연중 20주일, 마태복음 15:21-28

 

여러분,

살다보면 누구나 큰 고난을 한 두 번은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장기간이냐 단기간이냐 그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닥쳐왔을 때 그 고난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 어떻게 해결하느냐,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대부분 평상시 갖고있던 사고방식으로 해결합니다.

교회다니는 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 아직도 점집을 찾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점쟁이가 하는 말이 교회 집사님들도 가끔씩 찾아 온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전통적 사고로는 시련에 대해서 사주팔자라고 하면서 운명이기 때문에,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체념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귀신들린 것 같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확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면서 무당을 찾아가서 하라는 대로 다 합니다.

그런데 미신은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이고 비도덕적입니다.

 

여러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하고 먼저 부르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이 '네~"하고 반응하면서 하느님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누구를 통해서든, 자기 스스로든, 어느 날 교회를 생각하고 하느님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혜의 시작이고 하느님과 관계의 시작입니다.

 

1. 끈기와 인내의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이 이방여인이 용기를 내서 남자들의 무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을 그냥 랍비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시여, 자비를 베푸어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 은 메시아, 그런 뜻입니다.

한번 소리지르고 만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을 소리쳐 외쳤습니다.

그런데 다른 데서와 달리, 우리가 익히 아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 듯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마치 일부러 못들은 척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모르실 리가 없으실텐데

왜 그런 모습을 하시는지

루가복음 115-13절 기도에 대한 가르침과 연관됩니다.

어떤 사람이 한 밤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서 이웃에 찾아가서 빵 세개를 얻으려고 문을 두드리는데 그 친구가 자려고 자리에누워서 '귀찮게 하지 말고 가라,' 얼마나 귀찮겠어요?

그런데 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일어나서 빵을 줍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우정만으론 빵을 안줄터이지만 귀찮게 졸라대면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겠느냐?

우정은 예의갖추는 것, 체면 차리는 것,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

적당한 간격이 있는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이 이방여인이 예수님을 향해 부끄러움이나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딸이 마귀들려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들으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면 기도하는대로 금방금방 들어주실 때도 있지만

시간이 걸릴 때가 많습니다.

루가복음11장에서 한밤중에 예의나 체면을 불구하고 빵을 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것이나

이방 여인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딸의 질고를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만큼 소리쳐 외치는 것은 같은 이치가 됩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기도를 포함해서 하느님과 관계는 우정 차원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몇 번 두드리다가 포기하는 것은 우정차원입니다.

제 딸을 고쳐달라고 한두번 소리지르다가 포기한다면 우정차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차원을 초월해서 하느님을 찾는 기도를 원하십니다.

그런 차원을 초월해서 하느님을 간절히 찾는 것, 간절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진정성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정말 내가 빵을 줄 것이라고 믿느냐?

정말 내가 귀신을 쫓아낼 것이라고 믿느냐?

 

2. 자존심이냐?  믿음이냐? 절박하고 절실하게 기도합시다.

우리의 절박함과 절실함이 담긴 기도를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다가와서 끓어엎드려서 도와달라고 하는 이 여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만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먹지 않습니까?’

우리는 질이 떨어지는 모든 것에는 짜를 붙입니다.

이런 취급을 받아보신 적 있으신 분, 안 계시죠?

엄청 난리날 겁니다.

이 여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존심이냐? 믿음이냐?

자존심을 목숨같이 여기며 사는 이들에게는 자존심상해서 딸이고 뭐고 다 그만 둔다고 할 것입니다.

모성애는 위대하고 강합니다. 그리고 절박하고 절실합니다.

가나안 이방인인 이 여자는 지금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딸을 위해서 사람들의 시선이나 유대인들의 차별이 상관이 없습니다. 거기에 신경쓸 겨를도 없고 관심이 없습니다. .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말 다음에 하는 말이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딸이 마귀들린 사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히는 꼴이에요.

사람들이 알까봐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지만 자신의 처지를 다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엄마의 담대한 용기입니다.

계속 소리질르면서 따라가요. 그런데도 예수님이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듣다듣다가 시끄러우니까 예수님께 와서 말합니다.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까 돌려 보내시는 것이 좋겠네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그 여자가 다가와서 끓어 엎드리면서

주님, 저를 도와우십시오엎드려 울면서 울음섞인 소리로 울부짖습니다.

그 간절함이 그 주변에 있는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는데 평소의 말투와는 다른 말을 하시지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님 답지 않게

유대인들과 똑같이 예수님이 이방인을 차별하시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누가 자신한테 강아지취급을 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왜 나를 무시하냐 하면서 싸움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지금 분위기가 농담할 그런 가벼운 상황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딸이 귀신이 들려서 엄청나게 고통을 겪고있는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여지껏 힘들었는데 거기다 강아지라고 아주 비하하는 말을 들었어요. 이럴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하면서 그냥 화를 내고 가버릴 수도 있겠지요.

내가 강아지냐? 나를 개취급한다 어쩐다 해도 예수님이 참 잘못하셨네.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하셔, 너무 심하셨어.

그런데 이 여자의 답입니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만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말이 되지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줄 수 없다.’ 그랬더니

강아지래도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먹으니까 부스러기래도 주시면 주워 먹겠습니다.’

이 말을 지금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딸을 고쳐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절박함과 절실함으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절박함과 절실함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네 믿음이 장하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입니다.

의심을 안하기로 결정하고 신뢰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강아지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 말씀하셨을 때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기분나쁘다. 내가 이런 말을 들으면서까지 이래야 하나,

자존심이 우리의 삶 가운데 믿음 생활도 흔들리게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흔들리게 하고 아주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하면 부부사이에도 자존심 때문에 갈등하고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

믿음이 자존심보다 더 큰 것이고 더 우선이에요. 자존심으로 인해 믿음을 놓치거나 잃는다면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보다 자가 자신이 더 높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믿음 생활을 감정대로 하게되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에는 내 감정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의지적으로 하느님의 것을 선택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순종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일을 행하십니다.

그 순간에 이 가나안 이방인 여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하느님의 택하신 민족이란 우월감에 충만한 유대인들 앞에서 이방인인 한 여자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보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없는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믿음을 취하는 것은 신앙의 연륜과 상관이 없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

우정 차원을 넘어서 사람을 보지않고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맡기는 믿음

이와 같은 믿음의 도전이 있으시기를 예수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