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조절 다섯번째 주일

유테레사 2023. 10. 1. 23:00

101일 연중 26주일, 창조절 다섯 번째 주일

생태의 수호성인 아씨시의 성프란시스코 축일 104

17:1-7, 78:1-4,12-14, 필립비 2:1-13, 마태오 21:23-32

<기후정의 시대에 부르심>

 

추석 한가위 명절 연휴기간 중에 맞는 주일입니다.

풍성한 명절에 가족들과 풍성하고 즐거운 시간 잘 보내셨으리라 믿습니다.

아직도 휴일이 이틀 더 남았습니다.

 

예부터 물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근원입니다.

물이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에덴동산과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후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신다음 네 줄기로 갈라져서 비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로 흐른다고 했습니다.

이 네 강이 인류의 4대 문명발상지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후에 홍수로 인해 지각변모가 생겨났을 것으로 보고 4대문명 발상지는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나일강, 황하 문명이 그 이후 생성되었습니다.

 

물과 함께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역사입니다.

에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백성은 홍해를 건너 광야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문제는 물입니다. 사흘지나 물을 먹지 못하다가 마라에서 물을 찾았는데 써서 못 먹으니 바로 모세에게 투덜거립니다.

하느님께서 나무를 보여주셔서 물에 던지니 단 물이 되어 마십니다.

샘이 열 두 개가 있는 엘림에서 진을 치고 쉬다가 씬 광야에 이르러서 아침에는 만나,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먹습니다.

씬광야를 출발해서 르비딤에 이르러 먹을 물이 없자 모세에게 물 내놓으라고 들이댑니다.

저들이 나를 죽일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부르짖자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들고 와라. 호렙의 바위를 치라.

대들었다 해서 그곳을 므리바, 하느님께서 계신가 안계신가? 시험했다고 마싸아

시편957-8절에서 오늘 너희는 그의 말씀을 듣게 되리니

므리바에서 그 날 마싸광야에서의 너희 선조들처럼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굳히지 말아라

그들은 거기에서 내가 하는 일을 보고서도 나의 속을 떠보고 나를 시험하였다.

시편 95편에 말씀입니다.

홍해바다를 가르고 건너게하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보고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떠보고 시험하였습니다.

생생하게 경험한 이 사람들도 하느님을 떠보고 시험하였다는 것에서

욕망에 가득 찬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 죄성을 봅니다.

필립보서 2장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 것임을 봅니다.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 하느님의 영광스런 자리에서 누리던 것을 다 내려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죄인인 인간과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것에

지극히 겸손하신 예수님, 온전히 순종하시는 예수님을 닮아갈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두 아들 가운데 작은 아들은 멋지게 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습니다.

큰 아들은 거절했다가 뉘우치고 일하러 갑니다.

우리는 참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삽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분위기에 끌려서 지킬 수 없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이목에 끌려 다니게 된다면 그 삶이 곤고할 것입니다.

우리는 말에 대해서 무수히 많은 실수를 하며 삽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남에게 상처를 주었던 말, 지키지 않은 말, 남의 허물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말 등에 대해 회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기후정의 시대에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위해 멋진 말, 구호에 그치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계를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약속이 아니라 실천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다섯 번째 창조주일인 오늘은 104일이 성프란시스코 축일이어서 성인의 삶과 영성을 통해서 오늘날 자연환경과 생태환경을 축복하고 회복하는 것에 많은 의미를 둡니다.

 

예수님께 어느 율법학자가 첫째가는 계명에 대한 질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너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답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에다가 자연,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고 함께 살아감으로 창조세계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 성프란시스 성인의 삶과 영성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성인의 영성을 생태영성이라고 말합니다.

 

생태영성과 자연보호의 차이

오늘날 생태영성이란 말이 새롭게 부각됩니다.

생태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생태영성은 쓰레기는 어떻게 배출하는게 좋은가? 그런 게 아니라 본질적인 이야기에 관한 것입니다.

생태와 에코는 비슷합니다. 에콜로지(생태학)라는 말에서 에코가 접두어처럼 쓰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에코는 메아리입니다.

 

환경의 중심에 누가 있나?

환경을 말할 때 중심은 곧 인간입니다. 환경을 이야기할 때는 인간중심주의입니다. 그래서 환경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잘 살기 위해 자연을 이용합니다. 자연은 배경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모든 생명체의 최고봉에 있으니, 인간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맘대로 쓰고 다스립니다. 이게 환경입니다. 전통적인 개념입니다.

 

생태는 관계성이다

생태는 이와 전혀 다릅니다. 관계성을 말합니다. 환경주의는 인간중심이기에 인간을 둘러싼 환경 하나뿐이지만, 생태는 그런 환경들이 각 개체마다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지렁이에게 생태의 주인공은 지렁이입니다. 지렁이 입장에서 인간의 환경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환경들의 관계성이 바로 생태입니다.

환경이란 말은 은연중 인간중심이므로, 자연은 인간을 위해 쓰여진다는 것이고, 마구마구 자연을 사용해도, 남용하지 않는 수준에서는 당연하게 인식하며 정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 정당성이 성경에서도 창세기에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라고 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태는 형님이 태양, 누님이 달. 이렇게 프란치스코 성인의 감수성이 생태입니다. 온갖 피조물이 형님이며 누이입니다.

 

에페소서 1:23에서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유기체적 교회론입니다. 머리인 그리스도에 연결된 우리는 모두 지체입니다. 어떤 건 큰 역할을 하고 어떤 건 작은 역할을 하더라도 모두 존귀하고 동등합니다. 세상에도 그렇게 적용하는 것이 생태적 관점의 교회론이면서 성 프란시스코는 그리스도교 영성 안에서 깨닫고 살았습니다.

결국 생태의 중요한 지향점은 바로 함께 살자입니다.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창조 시절의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겁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의 존엄은 차별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닮아서 뛰어나다는 게 존엄성의 이유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 자연과 피조물을 마구잡이로 훼손해도 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출애굽에서 갈증이나 배고픔 등 굶주림에 대한 욕구와 욕망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려는 일념으로 발전과 개발이란 목적으로 자연을 마구 훼손해왔습니다. 문명의 발전은 편리를 추구하고 풍족한 먹거리를 위해 자연의 질서를 파괴했고 지구의 환경과 생태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내달리던 욕심과 욕망의 결과는 이제 인간과 자연, 피조물이 고스란히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지구의 멸망이 가까이 왔다는 말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명이 가져다 주는 편리함과 스피드, 풍족함 이란 그동안 달콤함에 젖어 살아온 생활로부터 절제, 인내, 절약, 겸손을 지향해 가야하는 것입니다.

불편함, 기다림, 재활용 등이 생활 가운데 익숙해져야하는 상황입니다.

즉 반환점을 돌아야하는 때에 이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늘 먹는 먹거리가 엉망진창입니다.

한 예로 우리가 한우라고 하는 소고기는 사료를 먹입니다.

소들이 먹는 사료가 외국에서 수입한 GMO유전자변형유기체, 곡물로 만듭니다. GMO에 연관된 음식과 식품은 표기를 해야되는데 현재 우리나라는 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GMO사료를 먹은 한우쇠고기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향은 어디에선가 나타나고 있을겁니다. 결혼한 가정에 25%가 불임이라고 하지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료를 먹이지 않고 풀만 먹여키우는 한우 목장이 우리나라에 세 곳이 있습니다. 그 한 군데가 예수원 목장입니다. 풀만 먹은 소고기는 암환자들도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식사 후, 성경공부 시간에 실천에 대해서 잠깐의 나눔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창조절을 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지키고 자연을 지키며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거절할 수 없는 부르심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이 부르심에 겸손과 순종으로 응답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