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랑,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
10월 29일 연중30주일
마태22:34-46
<이웃사랑,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의 활약이 오늘 본문에서도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우루루 몰려왔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사두개인들이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예수라는 신출귀몰한 인물에 대해서는 서로 골치아파하는 형편인지라 이 상황에서 어떤 점에선 서로 동지와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것은 일곱 형제가 첫째의 부인과 차례로 혼인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부활에 대해서 더 이상 반박불가하게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우스꽝스런 질문은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바리사이인들은 이번엔 우리가 가보자, 하고 의기투합하여 달려와서 어찌 대답하는가 한번 보자는 심사에서 한 율법교사가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서에 어느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질문합니다. 가장 ‘큰 것’은 ‘첫째’이면서 ‘중요한’ 이란 뜻이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신명 6:5)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레위 19:18)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40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신명기 6장 5절은 유대인들이 매일 두 번씩 소리높여 암송하던 구절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내용입니다.
앞 구절에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
유대인 아이들은 이 구절을 외우는 것으로 교육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음(카르디아)은 진정한 의지, 목숨(푸쉬케)은 육체적 생명을 뜻하는 것으로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뜻(디아노이아)은 지적 능력을 의미하는데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해와 통찰력을 동반합니다.
신명기 6장 5절 원문은 뜻 대신 ‘힘’, 마르코와 루가도 ‘힘’으로 표현합니다.
이 구절은 전 인격을 기울여서 존재의 전 기능을 다하여 전 생애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다 원어(아가페세이스)는 자기 이해를 초월한 순수하고 무목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웃에 대해서는 고전13장 수준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친절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구절은 첫째 구절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포함합니다. ‘이에 못지 않게’란 연결어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가리켜 둘째도 첫째 계명과 같이 큰 계명이란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째와 둘째 계명을 같은 것으로 보셨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의 계명으로 보셨는데 바리사이파들의 견해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의무를 다하면 부모를 돌보는 것을 포함해서 이웃에 대한 의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원수는 미워하고 조건적 사랑을 추구했습니다.
죄인들을 미워했습니다.(마5:43-47)
이웃의 개념이 레위기 19장18절에는 이스라엘사람과 그 땅에서 함께 사는 외국인을 이웃으로 보았으나 예수님은 원수(마5:44)를 포함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루가10:29-37)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던 사마리아사람까지 확대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이웃을 사랑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이웃 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웃 사랑 개념은 온 세상의 인류를 향하신 하느님의 구속적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이 말에서 우리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돌봄은 무조건적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쉽게 용납하고, 잊어버리고, 허물에 대해 관대하고, 지나치게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기적이고 자기문제에 쉽게 빠지고 맙니다. 이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냉정하고, 계산적입니다.
이런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계명에 대해서 부담을 갖습니다.
이웃을 내 자신인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근본정신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근원적인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그 사랑을 흘려보낼 것입니다.
사랑은 흘러갑니다. 그 말은 사랑하기로 결정하면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시간이든 물질이든 뭔가를 상대방을 위해 내어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의 골자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온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사랑을 보여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과 죽으신 것을 통해서
인류를 사랑하시는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이웃을 위해 대가를 치르는 것이 이웃사랑입니다.
본문에 또 한 단락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윗의 자손입니다.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심으로 ‘주’로 불리게 되었음을 지적하시면서
메시아의 초월성을 조상인 다윗의 입을 통해 증거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지도층에게 예수님이 책잡힌 것은 신성의 주장(요5:17,18)
자칭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적인 용사(장수), 다윗의 전투적인 용맹을 물려받은 한 자손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느님을 친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버지와 하나라는 주장에 대해서 자신들의 견해와 다르기에 극렬하게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거부하고 반대하던 이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후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삼일 후에 살아나셨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서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완악하고 강팍하던 돌같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이렇듯 변화는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며
끊임없이 도전하며 따라야하는 삶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