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스크랩] 신약과 구약의 중간사 성경이야기

유테레사 2012. 12. 8. 21:13

Ⅸ. 바벨론 포로시대 (70년)

 

  성전이 파괴되고(B.C 586)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신앙을 전적으로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그 지역의 종교와 정치에 흡수 될 것인가를 택일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전적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율법에 유의해야 하였고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종교적으로 모일 수 있는 성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회당에 모여 율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항은 디아스포라와 회당 그리고 서기관이다.

 

 

1. 디아스포라

 

  (1) 명칭

  하나님의 선민으로 영광스러운 특권을 누렸던 이스라엘이 당신의 법도를 무시하고 방종하다가 마침내

이방인의 발아래 짓밟히고 말았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저 위대한 탈출 사건인 출애굽 이후 살아오던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온 사방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렇게 포로로 잡혀가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을 일컬어 디아스포라 9분산이라 한다.

 

  (2) 범위 9분포

  애초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사로잡혀 간 자들이 디아스포라의 주종을 이루었으나 그 외에도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자발적 이주가 늘어남에 따라 시리아, 이집트, 파르티아 등지는 물론

소아시아를 넘어 이탈리아와 서방세계에 까지 그들의 거주 지역이 확장되어 갔다.

더욱이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 후 로마 제국은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들과 더불어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처에 두루 퍼져 독특한 유대인의 생활 양식을 이루고 있다.

 

  (3) 특징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종교적 자유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적인 면에서도 본토인들로부터 신임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은 신앙 공동체로서의 민족적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성전세를 납부하거나 성지 순례를 떠나는 등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분산된 유대인들은 민족 고유의 전통적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우수한 헬라

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방인 개종 사업에도 어느 정도 열의를 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4) 의의

  디아스포라는 땅끝까지의 복음 증거를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예비된 일종의

교두보였다. 특히 기독교 예배당의 전신에 해당하는 회당은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 및

이방 세계를 향한 복음 전파의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했던 셈이다. 그리고 디아스포라에 의해

구약 성경이 헬라어 70인역과 아랍어(탈굼역)로 번역되었는데 70인역은 초대 교회의 성경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2. 회당

 

  (1) 기원

  바리새파의 기원과 동시에 회당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며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

성전을 대체하며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성전 준심의 예배를 대체하여 회당에 모여 토라 9율법을

연구한 것을 회당의 기원으로 본다.

  회당에는 제단이 없기 때문에 희생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대신 기도와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회당은 중심적인 일을 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전 지역 유대인 거주지에도 늦어도 1세기까지

회당 제도가 도입된 것으로 추측 되어진다.

  사도행전 6장 8절 ~ 9절에 의하면 각 회당 중에는 리버디노(해방된 자, 자유인들)의 회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예루살렘 주변에는 약 480개에 달하는 회당이 있었다. 회당의 구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주로 각 회당마다 율법 두루마리를 담는 상자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계단의 입구는예루살렘 쪽으로 내었고 동편에는 Bema라는 강대상이 있어 이곳에서

성경 본몬이 읽혀졌다. 주로 거튼이나 1층 , 2층으로 나누어 남자와 여자가 따로 앉도록 하였다.

회당이 되기 위해서는 성인 남자가 10명 이상 모여야만 가능하였고, 10명 이하일 때는

기도처로 사용하였다.(사도행전16장 13절, 빌립보 기도처)

  회당 공동체의 목적은 예배와 소년들의 교육, 그리고 장로 책임하의 치리에 있었다.

먼저 소년들의 교육은 주로 본당에서 이루어졌다. 본당이 교육관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회당의

본질적 목적이 교육임을 알 수 있다.

  3세기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회당을 ‘책의 집’(낭송의 집)이라 표현하고 있으며 마쉬나

(랍비들의 전승) 연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더라고 되어있다.

 

  (2) 기능과 직원

 

     ① 회당장 : 상임 직원(질서 유지, 소란 제거가 임무(

  토라의 낭독과 예언의 낭독, 설교를 하도록 함. 회당 예배를 위한 성직으로 임기(1년)가 있거나 때로는

선거를 통하여 평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② 핫잔 : 치리자의 보조 역할

  회당장을 보조하고, 봉독자에게 두루마리를 갖다주고 돌려 받는 심부름을 감당하며

회당장의 행정적 보좌역이다.

 

    ③ 전언자 : 기도문을 크게 낭독하는 사람. 전언자의 낭독을 회중은 복창한다.

관례상 회당장이나 핫잔이 지명한다.

 

    ④ 쉐마 선포자 : 쉐마와 축복을 낭독. 쉐마란 성경에 “들으라 이스라엘”이라고 시작되는

문구로 이 쉐마를 이스라엘 민족은 기도문과 암송문으로 만들어 매일 암송하였다.

 

    ⑤ 공인 성경 해석자 : 성경의 번역

  구약의 히브리어를 회당이 있는 지역의 언어로 해석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번에 3절을 읽고 해석 (번역)하면 그것을 받아 문자화 하였다.

 

 

  3. 서기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율법에 대한 깊은 연구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계급 즉 , 서기관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기서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각 회중들은 자신의 사본을 구해서 구약

그 중에서도 율법을 베끼는 전문가들이 생겼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성경 학자과 되었고 이것이

서기관의 유래이다.

  서기관의 대표적 인물은 에스라이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흔히 율법교사 혹은 교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은 물론 갈릴리와 유대 각 지방에도 흩어져 있었다.

한편 서기관이 신약 성경에는 율법학자 및 권위자로 묘사되어 있다.

신약의 서기관은 제사장 9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관련하여 나타나는데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어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의 서기관’(마가복음 2장 16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사도행전 23장 9절)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율법의 이론적 발전, 율법의 교수, 율법의 적용 등에 힘썼다.

또한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랍비 교리에 의한 유대교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후에는 현인, 랍비로

알려졌다. 그러나 제사장파와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율법의 전통적 관례들을 어기고

무시했다해서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했다. 신약 시대 이후에 서기관들은 어린이들의 교사와 법률 문서의 구성자가

되었으며 ‘현인’과 ‘랍비’라는 명칭들은 율법 학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4. 포로 시기의 의미

  포로 시기는 우상숭배라는 ‘겨’를 이스라엘로부터 까부러냈다.

바벨론은 유수 이래 한 번도 유대인은 우상 숭배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시기는 그들 안에 대망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대망하기

시작했다. 선지자들이 가끔 메시야를 언급했으나 백성은 거의 유의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실재적 임재가 없는 성전으로 인해 그들은 계속 그들의 종교에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진지하게 메시야의 오심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X. 포로귀환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는 B.C 559년에서 530년까지

Persia 제국의 기초를 닦은 위대한 정복자였다.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이 70년간 포로 생활을 할 것을 예언하였다.

유대인들은 B.C 605년에 1차로 바벨론에 잡혀갔고 1차 귀환은

B.C 536년에 이루어졌으며 포수 기간은 70년이 된다.

  고레스 왕은 그의 조서를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게만 한정시키지 않고 옛날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 왔던 이스라엘 열 지파의 후손들도 포함시켰다. 북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경험한

지 이미 이 당시 200여 년이 흘렀다. 조서에 대한 반응은 예상치에 미치지 못했다. 열두 지파 중에서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족장들만이 큰 반응을 보였고 나머지 열지파는 거의 귀를 기울이

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를 비롯한 몇몇 지파에 속한 열심있는 사람들은 귀환에 참가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에 남아 있기를 바랬던 표면적인 이유는 페르시아 제국의 관대한 처우였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여호와의 선민으로서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보다는 현세의 안락에

더 안주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정복자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호의로 포로 귀환이 시작되고 B.C 51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됨으로써

이스라엘은 새로이 민족적 존재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구속사의 진전인가!

  그러나 역사의 궁극적 의미보다는 피상적 현실에만 국한되는 인간의 아매한 시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또 다시 영적 헤이함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민족적 골격은

갖고 있었으나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다운 영광스러운 존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페르시아,

마게도냐(헬라), 로마 등 이방 열강들의 손아귀에서 헤어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특히 B.C 400년경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 이 후에는 하나님의 계시적 권위를 가진 예언이

중단되어 심지어 구속사의 맥락 마저 끊어진 듯한 정도로 영적 고갈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신음하는 민중들 사이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참 ‘메시야’에 대한 대망 사상

이 고조되어 갔다. 이러한 암담한 상황 가운데 인류의 죄악을 대속하시기 위해 우리 주 예수께서 태어나셨던 것이다.

 

 

  XI. 페르시아 시대 (메데 ~ 파사 ; B.C 537-332)

 

  B.C 586년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바벨론 제국과 그 뒤를 이은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는

정책상 커다란 상이점이 있다.

  바벨론 제국은 피정복민을 바벨론의 여러 지역으로 이주시켰으며 , 또한 피정복민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반면에 페르시아 제국은 바벨론에 의해 잡혀 온

포로들의 귀환을 장려하였고, 민족의 전통을 용납하는 등 피정복민들의 충성심을 유도해 내는

유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페르시아의 통치 기간 중 유대인들의 생활은 비교적 평안한

편이었다.

  고레스(Cyrus) 왕제가 예루살렘으로서의 귀국과 성전 재건을 허락함에 따라 일부 유대인들이

귀국하였다. 팔레스틴 주민들의 반대에 부?치기도 했으나 그들은 다리오 대제(Dariys the Great)

때에 성전 재건을 끝마쳤다. (스룹바벨 성전)

  학사 에스라와 평신도였던 느헤미야가 유대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에 충성을 다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들은 팔레스틴 유대 공동체를 굳건히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느헤미야 이 후에도

약 1세기 반동안 페르시아 제국이 유대를 통치하였으나, 유대인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자신들의 종교와

제사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받고 있었다.

  이 때 유대를 다스린 자는 페르시아 정부에 정치적 책임을 진 대제사장이었으며 이는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사제 직분과 정치적 공직의 겸임은 가까운 미래에 이것을 둘러싸고 일어날

무서운 암투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대제사장직을 놓고 시기와 음모 심지어 살인까지 자행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요야다의 아들 요하난(느헤미야 12장 22절)이 성전 경내에서 자기 형제를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cf)사마리아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남자들 강제 이주 정책으로 팔레스틴 지역에 이방 민족을 이주시킴으로

이스라엘 여인과 이방인 남자 사이에 태어난 혼혈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았으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엄격한 분리 정책은 이들의 감정을 자극하엿고

그들 나름의 독립 국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들은 그리심산(신명기 11장 29절)에

그들 나름의 성전을 세워 그들끼리 예배를 드리게 된다. 사마리아 공동체에서는 시온산보다

그리심산을 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리심산의 성전은 하스몬 왕가의 통치자인 요한 힐카누스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로인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적개심은 고조되어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와 사마리아는 서로 전혀

교류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갈릴리의 유대인이 예루살렘 지방을 방문할 때에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빠른 길보다는 요단강 동쪽으로 우회하는 우회 도로를 사용하였다.

(누가복음 9장 51절 ~ 53절) 페르시아가 그리스 참략 전쟁에 실패하자 피정복민들은

독립을 쟁취하려고 동요하게 되었다.

  이집트가 끊임없이 페르시아의 멍에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해 온 반면 유대는 지리적으로

 이 두 세력  사이에서 예속을 피할 수 없었다.

  아닥사스다 3세 (Artazeres Ⅲ)때 많은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에 대한 투쟁에 가담했다.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페르시아 정부는 이들을 바벨론과 카스피해 남부로 유형을 보낸다.

 

 

 

XII. 헬라 제국(B.C 332 ~ 323)

 

  헬라 문화의 영웅인 마게도냐 왕국의 알렉산더 대제는

마침내 페르시아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다.

  알렉산더는 단순히 권력에만 광분한 독재자는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그는

헬라 문화야말로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임을 철저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B.C 333년 그는 마게도냐에서 소아시아로 진군하였다. 그 후 시리아와 팔레스틴 남부를

통과하여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유대인과 마게도냐 정복자 사이에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율법을 지키도록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안식년에는 조공을 면제하였다.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될 때에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고 다른 정복인과는 구별되는 특권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이집트에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압제에서 구출해 준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그의 군대는 승승장구 팔레스틴과 시리아를다시 되밟아 올라가 계속 동진하여

인도의 펀잡 지방까지 정복해 나갔다.

  전쟁에서의 승리도 승리거니와 알렉산더가 중동에 끼친 유산은 그 통치 방식보다는

헬라 문화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제국의 각 지방마다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 도시들은 헬라의 문화를 좇아 생활 질서 전체를 갱신시키는 모델이 되었다.

  실제적 의미에서 볼 때 도시 건설이란 곧 생활 방식을 헬라적으로 변화시킨 웅장한 건물과

체육관, 야외 극장 같은 건물을 건축하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사람은 헬라식 이름을 갖게 되었고 헬라어의 의복을 받아

들이게 되었다.간단히 말해서 헬라화 되어갔던 것이다.

  헬레니즘의 물질적 측면이 많은 사람에게 매혹적이었음이 틀림 없었다.

  교역과 상업이 새로운 상인 계층에게 부를 안겨 주었고 학자들은 도서관과 학교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높은 수준의주거 방식과 식생활이 사람들에게 생활 수준의 향상을 가져다 주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인들도 헬라 문화의이 겉모습에 만족하였고 기꺼이

그 문화를 받아들였다. 바벨론 포로 이전에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의 장해였다고 하면,

포로 이후에 이스라엘이 당한 가장 큰 유혹은 헬라화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헬라식 이름을 가졌고 헬라 철학을 받아 들였으며 자기 조상의 신앙과 헬라식 지혜를 혼합하려 하였다.

반면 또 다른 이들은 헬레니즘에 반대하여 율법을 더욱 폭넓고 깊게

연구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더는 바벨론에서 33세로 요절하였다. 향후 수년 동안 근동의 미래가 불확실하였으나

그의 장군들이 제국을 계숭하며 헬레니즘의 물결은 더욱 고조되었다.

  헬라는 4명의 장군들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으며 애굽의 톨레미 왕조와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는 영토와 권력을

얻기 위해 서로 싸웠지만 그들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사명에서는 완전히 일치하였다.

 

 

 

ⅩⅢ. 톨레미 왕조(프롤레마이오스 왕조 B.C 323 ~ 198)

 

  알렉산더가 죽은 뒤 유대는 알렉산더의 장군 중의 한 사람인 안티고누스(Antigonus)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곧이어 해방자란 뜻의 이름이 소테르라 불리는 다른 장군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통치하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B.C320년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는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왕국의 중심을 둔 그는 유

대인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 시기에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 도시는 이 후 수세기 동안 유대 사상의 중심지가 되엇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때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은 70인역(LXX)이라고 알려진 것인데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기 위해 유대에서 왔다는 70인

(정확하게 12지바에서 6명씩 도합 72명)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팔레스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번영을 누렷다.

애굽 중앙 정부에 조공을 바치기는 했지만 지방 행정면에 있어서는 페르시아 통치 이래로 대제사장 책임 하에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에 가장 위대했던 인물은 시몬(Simon The Just)이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 때 파괴 되었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 하였으며 가뭄과 포위 속에서도 급수를 가능케 하는

수로 공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는 대제사장으로서의 명성과 함께 고대 유대 주의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 되어졌다.

그러나 의인 시몬이 정확시 누구인지는 역사적 문제로 남아있다.

  시몬 1세로 알려진 대제사장이 3세기 중엽에 생존하였고, 시몬 2세는 B.C 200년경에 실존하였다.

유대 전승과 설화에 의하면 의인 시몬은 이 두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시대에 유대의 제사장 가문은 오니야가와 도비야가 있었는데, 이 두 가문 사이에는 대제사장이 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도비야가는 친 이집트파로 상류 계층을 대표하였다.

이 도비야가는 느헤미야를 몹시 괴롭혔던 암몬사람 도비야와 관련되기도 한다.

(느헤미야 2장 10절, 4장 3절 ~ 7절, 6장 1절 ~ 19절) 도비야가는 신약 성경에서의 세리와 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수세관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대제사장 오니야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 4세에게 바쳐야 할

조공인 은 20달란트를 거부함으로 그의 충성을 의심받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후 도비야가 충신인 요셉이 전 팔레스틴 지역의 수세 관직을 맡게 되었다. 수세관은 해마다 세금을 거두어

들일 수 있는 자격권을 갱신 받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에 다녀 와야만 하였다.

요셉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와 그후 안티오쿠스 3세 및 셀루커스 왕조시대의 20년 동안 이 영향력 있는 지위를

계속 누렸다.

 

 

 

XⅤ. 셀루커스 왕조 (B.C 198 ~ 165)

 

  시리아의 통치자들은 셀루키드(Seleucids)라고 불려진다. 왜냐하면 알렉산더 제국을 계승한

국가들 중의 하나인 그들의 왕국이 셀루커스 1세 (니카토르NIcator)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초기 지배자들은 대부분 셀루커스나 안티오쿠스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그들은 오론테스강의

안디옥을 그들의 수도로 삼았다. ‘대제’라는 별칭을 가진 안티오쿠스 3세는 B.C199년 까지

이집트의 톨레미 왕조와 수차례의 전쟁을 치뤘는데 요단강의 발원지인 파니아스

(가이사랴 빌립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그 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게 된다.

  이 사건은 유대 역사에 새 장을 열어 놓았다. 그 이전의 프롤레마이오스 왕조가 유대의 관습과 전통을 용납했던 반면

셀루커스(Seleucus)왕조는 유대인에게 헬레니즘 문화를 강압적으로 이식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사장 중에는 헬라화를 지지하는 자들도 있었다. 대제사장은 그의 고유 업무인 성전 제사의 주관보다는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일과 팔레스타인 지방의 지배 대표자로 변질되었고 정복국의 황실에서는 돈이 필요하게 되면

유대의 대제사장을 주목하게 되었다.

 

B.C 145년 안티오쿠스 4세 치하에서 대제사장은 율법 준수에 열심인 오니야 3세(오니아스 3세)였는데 그는 의인 시몬의

후손으로 정통파 유대인이었다.

  그는 당연히 헬라화를 지지하는많은 제사장들에게 반감을 사게 되었고 이들의 대표격이던 야손(여호수아, 오니아스 3세의 형제)은 황실에 거액의 뇌물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사지만 암살 당한다.

  안티오쿠스가 대제사장직을 정치적 적임으로 생각하는데 반하여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것이 그 근원에서부터 신성한 것이며, 돈을 주고 그 직을 매매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범죄라고 생각하였다.

축출당한 오니아스 3세의 아들 야손은 톨레미 왕조에 망명하여 그들의 보호 하에서 B.C 160년경 이집트에 성전을 건축하고

이집트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굳이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편의를 제공하지만 유명 무실한 성전이

되었다.대제사장직을 돈으로 산 야손은 헬라 문화를 장려하였다. 경기장이 예루살렘에 세워지고 헬라식 이름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으며 히브리적 전통주의는 반계몽적이거나 시대에 뒤진 것으로 매도되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할례의 흔적을 지우는 수술이 성행하게 된다(마카베오상 1장 15절, 고린도전서 7장 18절)

  열렬한 헬라주의자인 메넬라우스는 베냐민 지파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안티오쿠스에게 지불하고

대제사장에 오른다. 이 후로는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이 소멸 되었고 대제사장직은 금전으로 사고 받는 위치로 전락해 버렸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에게해 지역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프톨레마이노스의 요청을 받은 로마에 의해 좌절

당하게 되고 이 전쟁에서 안티오쿠스가 죽었다는 루머가 돌게된다. 이 틈을 타서 야손이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회복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메넬라우스는 안티오쿠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이집트와 대치하고 있는 시리아의 입장에서는 팔레스튼에 대해 효과적인 통제를 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느꼈고

이를 위해 안티오쿠스는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왜냐하면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결코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내 시리아 군대는 메넬라우스를 반대하는

세력들을 대량 학살하고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으로 다시 한 번 확중한다.(마카베오상 1장 1절 ~24절)

  안티오쿠스는 정통적 유대 신앙의 자취를 일소해 버릴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제우스의 이미지와 동일시 되었고, 턱수염을 기른 이방 신상이 성전 제단에 건립 되었으며 이 제단에서는 돼지와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를 행하는 것과 안식일이나 유대의 절기를 지키는 일이 금지 되었다.

또 성경을 필사하는 작업 및 모든 율법의 준수는 잔혹하게 탄압 되어졌다. 군대의 힘으로 에넬라우스는 대제사장직을

유지했으며 친헬라파들은 승리를 획득했다. 그러나 친헬라파들이 지나치게 극단에 흘렀으며 옛 질서를 파괴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자신들의 타락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난들을 마지막 때의 징조로 이해한 정통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때가 신속하게 도래하리라는 믿음으로 율법을 포기하기 보다는 순교를 택하게 된다.(마카베오 하7장)

 

XV. 마카비가(B.C 165 ~ 63)

 

  유대인의 헬라화에 반대하는 모대인 사건이 독립 운동에 불을 붙이는 게기가 되었다.

모대인 사건이란 안티오쿠스의 사자들이 예루살렘에서 24㎞ 가량 떨어진 모대인이란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전례대로

제사장 맛티아(Mattathias)가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려 유대 백성에게 좋은 본을 보여 줄 것을 바랐다.

  맛타디아스가 이를 거절하자 겁이 많은 다른 유대인이 대신 제사를 드렸다.

격노한 제사장 맛타디아스가 제단에 다가가 그 배교한 유대인과 안티오쿠스의 사자를 살해한 것을 말한다.

맛타디아스는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이방 제단을 부수어 버린 후 체포되는 것을 우려하여 고원으로 피하였다.

그 후 정통파 유대인들 중 일단의 무리들이 맛타디아스 일가에 합세하며 유대 시골의 이교 제단을 파괴하거나 헬레니즘에

편승한 유대인들을 처형하는 등 게릴라전을 폈다.

  한편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도무지 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량으로 학살을 당하기도 하여 맛타디아스는

안식일의 자기 방어를 위하여 교전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는 새로운 방침을 세우기도 했다.

노령의 맛타디아스는 혁명 초기에 곧 사망하였다.

그는 자기의 셋째 아들 유다 스마타베우스의 지휘하에 혁명을 계속 할 것을 추종자들에게 명하였는데 이 선택은 비교적

훌륭한 것이었던지 더 많은 유대인들이 나날이 규합 되어졌고, 시리아 군에 대항할 만한 자체 군대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유다는 전략에 뛰어난 인물로 시리아인을 상대로 대규모의 전쟁을 감행한다.(B.C 166 ~ 160)

시리아의 루시아스(Lysias)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였고 더럽혀진 성전을 정결케하고 제단이 새롭게

봉헌되었다. 이 사건을 기념하여 수전절을 지킨다.(마카베오상 4장 45절, 마카베오하 1장 18절, 요한복음 10장 22절)

 

  이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아크라 요새는 시리아인의 지배하고 있었다.

유다는 이 성채를 회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되고 이에 대하여 루시아스는 강력한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한다.

그러나 시리아 내부의 정권 다툼은 루시아스의 군대를 철군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고 이것은 유다를 시리아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게 한다. 루시아스는 종교적 자유에 대한 회복은 유다스를 따르던 많은 정통파 유대인에게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대제사장직이 회복된 것으로 만족한다.

  B.C 162년 시리아에 데메트리우스가 등극하자 예루살렘 내의 헬라화를 동조하는 자들은 왕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여

유다스의 압제를 호소한다. 이를 구실로 데메트리우스는 알카무스를 대제사장에 임명하였다. 그

는 아론의 자손이었고 제사 의식이 율법에 정한대로 회보되었다. 이 결과로 유대인의 투쟁 목표들은 달성된 것으로 여겼고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그러나 유다스와 정치적 독립주의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시리아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열망하여

알키무스에게 대항한다. 이 전투 과정 속에서 B.C 160년 유다스가 살해 당하여 유다스의 추종자들은 게릴라로서 광야로

피신한다. 이들은 전열을 정비하고 요나단을 지도자로 세웠다. 요나단은 시리아와의 협상에서 많은 양보를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B.C 160년 알키무스 사망 후 요나단은 시리아와의 협상에서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나. 이러한 상황을 하시딤 9종교적으로 헌신된 자들은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그러나 B.C143년 요나단이 시리아인들에 의해서 살해 당하고 투쟁의 지휘권은 시몬에게 계승되고 시몬이 대제사장과 군사 지휘권을 갖게 된다. 시몬이 왕좌에 올랐을 때에는 꽤 늙어 있었다.

그의 빛나는 승리는 외교 분야에 있었는데 그가 데메트리우스를 시리아의 합법적인 왕으로 승인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 세금의 면제야 말로 결과적으로 유대인의 독립을 승인한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시몬은 예루살렘의 아크라 성채를 점령해 왔던 시리아군을 굶어 죽게 함으로 욥바와 벧술의 전 도시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현명한 통치를 기념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시몬을 가리켜 “영원한 지도자이며 대제사장이시니 이는 신실한

선지자가 나타날 때 까지니이다.”라고 찬양하였다.

  맛타디아스의 막내 아을 시몬은 하스모니아(Hasmonaean)이라 하는 새로운 왕조를 열게 되는데(마카베오상 14장 44절)

아마도 그의 조상 아스모네우스(Asnonaeus)에서 따온 말인 듯하다.

  B.C 134년에 시몬과 그 두 아들은 야망에 차있는 그의 사위에게 살해 당하였다.

시몬의 셋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는 겨우 달아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시몬의 치세는 성공적이었다. 왜냐면 그의 치세하에서 독립이 성취되었고 평화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카베오상 14장 8절) 이러한 시몬의 치세를 종말론적 때로 이해하는 유대인들이 많았지만 제사장들과 실한 유대인들은

하스모니안 왕조에 반발하는데 이는 시몬이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이 아니고 다윗의 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몬의 통치에 반발하는 율법을 독실하게 지키고자 하는 한 무리가 광야로 은거하여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생활하게 되는데 이들을 쿰란 공동체라 부른다.

 

 

 

XVL. 하스모니안 왕조

 

  시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시리아에 종속할 것과 시리아의 순대 출정에 협력할 것을 조건으로 하여 요한 힐카누스의

정부를 승인하였다. 요나단과 시몬이 병합하였던 일단의 연안 도시를 시리아에 양도하게 된다.

그러나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시테투스가 파르티아 전쟁에서 전사하게 되었고 요한 힐카누스는 독자적으로 팔레스타인을

다스릴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이에 그는 용병을 이용하여 이두매 지역과 연안 도시들을 점령 유대 영토로 귀속시킨다.

이 정복은 상인 계층들에게 그들의 옛 상로를 되찾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다. 힐카누스는 이 두매인들에게 종교적 일치를 종용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힐카누스는 사마리아에 출정하여 그리심산의 성전을 파괴하였다. 유대 군대의 승리를 민족주의자들이 환영한 것은

사실이지만 초기 마카비 시대에 가졌던 종교적 열성은 더 이상 명확하게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특히 하시딤 바리새파들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대제사장직 겸직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하스모니안 왕조와 심각하게

대립하게 된다. 하스모니안 왕가는 새로운 정치의 지지 기반을 얻기 위해서 사두개파들과 손을 잡게 된다.

  B.C 104년 요한 힐카누스가 사망하기까지 유대의 영토는 전 국경에서 확대되었다.

마카비의 투쟁은 이미 오래 전 일로 지나가 버리고 새로운 경쟁자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과거의 헬라주의자들은 마카비 투쟁에서 배척 당하였으나 그들의 사상은 사두개인들 가운데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마카비 시대의 정통파들은 기독교 이전과 신약 시대에 바리새인으로 되었다.

사두개인과 바리생인은 서로 기득권 획득을 위하여 다투게 되었다. 힐카누스 자신은 율법을 고수하는데 헌신적이었으나

그의 자녀들은 전통적인 히브리 사상에 거의 공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귀족으로 간주했으며 철저한 정통파 바리새인을 경멸하기까지 했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혁명을 주도했던 맛타디아스의 후손들이 철저하게 헬라화 되었던 것이다.

 

 

요한 힐카누스의 사망은 자녀들간의 분쟁을 재촉하였고 결국 유다가 형제들 가운데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유다라는 히브리식 이름보다는 헬라식 이름인 아리스토불로스(Aristobulus)라는 명칭을 더 좋아하였다.

그는 어머니와 3형제를 감옥에 가두어 어머니와 두 형제를 굶어 죽게 하였고 또 다른 한 명의 형제는 궁전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겨우 일년 남짓했던 그의 통치 기간 중 그는 영토를 레바논 산의 북편까지 확장시켜 스스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의 생에는 술과 질병 그리고 폭동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끝없는 불안을 멸치지 못한 채 곧 끝나 버리고

말았다.B.C 108년에 아리스토불로스가 죽게 되자 권력은 그? 아내 살로메 알렉사드라에게 넘어간다.

살로매는 감옥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요나단을 풀어 주고 그와 결혼하여 대제사장직을 그에게 물려준다.

요나단은 알렉산더 안네우스라고 역사에 알려져 있다. 그도 영토 확장 정책을 계속 펼쳐 나가 팔레스타인 해안 지역을 따라

이집트 국경과 트렌스 요르단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다윗왕과 솔로몬 시대의 영토 크기와 감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스모니안 왕국에 병함된 지역들은 빠르게 유대화되어 갔다.

이두매가 유대인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고 갈릴리 또한 유대주의 주요한 중심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동화되지 않고자 저항하였고 아볼로니아와 스구디아(구약의 ?산)와 같은 도시는 약간의 유대적 요소를 가지기는 했지만

그들의 비유대적 성격을 제속 지켜 나아갔다. 대제사장은 이혼녀나 과부와 결혼할 수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안네우스의 비정상적인 결혼에 불만을 품었고 수리아의 데메트리우스에게 도움을 청하여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에서 안네우스가 승리하게 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바리새인 8백명을 십자가에 처형한다.

러나 바리새인의 종교적 열심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와 존경은 확대되었다.

 

 

안데우스는 자신의 왕권을 살로매에게 넘겨주고 죽게 되는데 살로매는 바리새파와 화해를 위한 정책을 실시하여 공회에

바리새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게 되었고,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살로메는 7년 동안 유대를 다스렸고 후에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왕의 권한을 나눠 주었다.

장자인 힐카누스는 대제사장이 되었고 둘째 아들인 아리스토불로스는 군의 총수가 되었다.

한편 그녀의 오빠인 시몬 밴 세타(Simon ben Sshetah)는 바리새인들의 지도자였는데 이점이 유대주의의 적대 당파들 사이의 화친을 유지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살로메 알렉산드라의 치하에서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생활에 건설적으로 공헌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많은 영역에서 특히 교육에서 바리새인들은 특출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시몬 벤 세타가 산헤드린(유대의 국가 회의, 공회)의 의장일 때 모든 젊은이들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광법위한 초등 교육 제도의 성립과 실시로 인하여 유대의 큰 마을이나 촌락 및 도시에서 교양있고 학식있는 사람을 길러

내게 되었다. 이 교육이 히브리 성경에 그 중심을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당과 분재의 상처가 알렉산드라의 재위 기간에 다 치유되지는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새로이 획득해 낼 여러 측면의 권력에 만족하였으나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상실에 분개하고 있었다.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바리새인들이 안네우스의 대량 학살에 대하여 복수하기 위해 벼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사두개인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고 또 내란이 일어났다.

사두개인들은 안네우스와 아리스토볼로스를 지지하였다. 왜냐하면 아리스토볼로스는 군인이었고 제국의 팽창과 세계적인

권력을 꿈꾸는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장자이며 정식 후계자인 힐카누스를 응호하였다.

알렉산드라가 죽자 두 형제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그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힐카누스 2세가 대제사장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볼로스가 사두개인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해 올 때 힐카누스와 바리새인은

무방비 상태였다. 결국 아리스토볼로스가 대제사장과 왕위를 찬탈하고 힐카누스는 이두매의 안티파터(Antipater)에게

피하게 된다. 나라가 내란의 위협에 흔들리고 있을 때 품페이(Pompey)가 유대를 평화롭게 유지하고 더 나아가 로마가

품은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그의 로마 군단을 이끌고 팔레스틴에 나타났다.(B.C 63년)

 

 

맛티아<마카비가>

유다 마카비(맛티아의 셋째 아들)

요나단(맛티아의 )

시몬 하스모니안 (맛티아의 막내아들)

 

   <하스모니안 왕가>

  --> 요한 힐카누스 1세(시몬의 3남) ---> 유다 아리스토볼로스(요한의 아들) ---> 살로메 알렉산드라(유다의 아내) ---> 

요나단 알렉산더 안네우스 ---> 살로메 ---> 힐카누스 2세 (살로메의 장자, 제사장), 아리스토볼로스(살로메의 차남,

군 총수)

 

 

 

XVIL. 로마 시대 - 이두매왕조

 

  품페이는 B.C 67년 시리아를 점령하였다.

이 때 힐카누스와 아리스토볼로스는 동시에 품페이에게 접근하여 도움을 청한다.

 B.C 63년 품페이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힐카누스는 대제사장에 임명되지만 더 이상 왕일 수는 없었다.

족장(혹은 민족의 지배)으로서 유대와 갈릴리, 베뢰아를 통치하게 되고 하스몬 왕조는 문을 닫게 된다.

유대는 다시 독립을 잃은 것이다.

  품페이는 지성소에까지 군화 발로 들어가 누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확인한 후 성전 의식의 재개를 명한다. 그

는 매년 로마에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고 아리스토볼로스는 자신의 승리를 장식하기 위하여 다른 포로들과 함께 로마로

끌고 갔다. 호송 도중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도주하여 힐카누스에 대항하는 폭동을 일으켰지만 힐카누스는 로마의 도움으로 이들을 진압한다.아리스토볼로스와 힐카누스가 내분을 일삼고 있는 동안 이두매 총독 안티파터는 유대의 정치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안티파터는 아리스토볼로스를 매우 반대했는데, 이는 힐카누스와 화친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리스토볼로스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힐카누스는 안티파터를 매우 신뢰하였으므로 유대를 사실상 지배한 사람은 바로 이 안티파터였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증오하는 만큼이나 안티파터의 세력을 혐오하였다.

 

이두매 지역은 명목상으로 유대에 귀속되어 힐카누스가 다스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결코 유대에 동화되지 않았고 자신들의 오랜 적대감도 잊지 않고 있었다. 쥴리어스 시이저가 암살되고 일단의 위기가 밀어닥치자 안티파터와 그의 아들들은 세금을 열성적으로 거두어 들여 카시우스의 새 정권에 바침으로 충성심을 다짐하였고 대가로 안티파터의 아들은 헤롯은 언젠가는 유대의 왕위에 오르게 해주겠다는 밀약을 받고 유대지방의 수세 관직에 오른다.

그러나 안토니(Anthony)가 부루터스와 카시우스를 빌립보에서 패퇴시키자 헤롯은 재빨리 안토니에게 뇌물을 바치며

새로운 충성을 다짐했다. 한때 페르시아 제국이 지배했던 동부지역은 로마에게 한 번도 정복 당하지

않았던 파르티아(Parthians)족속이 점거하고 있었다. B.C 41년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아리스토볼로스 2세의 아들인 안티고누스(Antigonus)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았다.

이에 헤롯은 힐카누스의 사후에 자신이 계승하려 했던 왕위를 빼앗기자 로마로 피신하였다. 거기에서 헤롯은 안토니의

환심을 얻어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 칭호가 파르티아인이 쫓겨가기까지는 명목상에 지나지 않았으나 파르티아인을 몰아낸 후 헤롯은 로마 군대와 함께

승전고를 울리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며 왕좌에 올랐다. 헤롯은 B.C 43년에서 B.C 4년까지 통치했으며 그동안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했었다. 그는 자신을 능가하는 유대인의 왕이 탄생할 것을 두려워해서 예수가 탄생 할 즈음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영아들을 살해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헤롯이 정말로 영아 살인을 자행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성경 외의 문헌으로 검증되지

못하지만 그의 잔악성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도합 열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아구스도(Augustus) 황제는 그의 사생활을 가리켜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낫다."고 논평했다. 돼지는 불결한 동물인 관계로 도살되지 않는 반면에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되거나 그 충성 여부가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자기 아내와 자식들도 가차없이 살해하였음을 가르키는 말이다.

 

 

헤롯의 번영기라고 할 수 있는 B.C 25 ~ 14년에는 로마와 유대인의 요구 사이에 조심스러운 중도 노선을 취하여 유대

신하들이 자신을 몹시도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호의를 얻고자 노력하였다.  

  전 국토에 걸쳐 도시를 세우거나 재건하는가 하면 요새와 목욕탕, 공원, 시장, 도로 및 헬라의 사치스런 문화 시설들을

건설하였다.헤롯 18년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라는 큰 역사가 시작되었다.

주요 건물은 제사장들이 1년 반 동안에 걸쳐 건축했지만 성전의 복잡한 새 건물과 구조는 알비누스(Albinus, A.D 62 ~ 64년) 시대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었다. 그러나 10년도 채 못되어 A.D 70년에 디도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헤롯은 임종에서 앞서 왕권을 물려주기 위하여 고민하였는데 결국 그의 왕권을 3명의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큰 아들 아켈라오에게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의 통치자로, 헤롯 안티파는 갈릴리와 베뢰아를, 빌립은 왕국의 북쪽과

요단 동편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러한 헤롯의 유언은 로마의 승하에서만 효력이 있는 것이었기에 헤롯의 세 아들은 로마를

방문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였고 팔레스틴에서는 이들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중 갈릴리에서의 반란이 가장 심각하였고 예루살렘의 공회(산헤드린)는 로마에 대사를 파견하여 헤롯가의 통치가

합당치 않음을 주장하였.다(누가복음 19장 12절 ~ 15절)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예루살렘 백성의 청원을 거절하고 헤롯의 유언을 인정하여 왕이 아닌 족장(Tetrarch) 즉 분봉왕에

임명한다. 아켈라오의 폭정과 일관성 없는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의 학정에 불만을 품은

예루살렘 공회는 유대와 사마리아 대표를 로마에 보내 탄원하게 한다.

이들의 탄원이 받아 들여져 아켈라오는 직위 해제되어 갈리아(프랑스 남부) 지방으로 추방 당하여 그곳에서 죽는다.

아켈라오가 직위 해제되자 유대는 로마 총독이 다스리는 로마의 속주가 된다. 로마의 총독들은 주로 헬라화 된 도시인 가

이사랴에 거하다가 특별한 일이 있을때에만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반란, 폭동에 대비하였다. 총독은 군사, 사법의 권한을

소유하였고 산헤드린 공회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종교 등 실제적 문제에 관여하였으나 사형 선고와 집행의 권한은 없었다.

(요한복음18장 31절)

 

 

성전 제사 등 모든 것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고 예루살렘 성전에는 가이사의 초상이 세워지지않았다.

이러한 관례를 깨뜨리고 본디오 빌라도가 가이사의 기를 세우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다가 유대인의 반발에 부딪쳤고 이

로 인한 대규모의 폭동 위협에 군기를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빌라도는 예루살렘 수로 건설 기금 조성을 위하여 성전세를 요구하였고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이에 반발하였지만

빌라도는 이를 강제로 징수하여 군중 시위를 유발시킨다. 이 시위의 무력 진압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누가복음 13장 1절) 한편 사마리아의 그린심산 성전에서 사마리아 순례자들이 무차별 처형되는데 이는 모세가 사용하던

기구를 보여 주겠다는 선지자의 주장을 많은 무리들이 모세 예언의 성취라고 믿고 성전에 모여들자 혹시 반란이 아닌가 하는 정치적 위기감에서 이들에게 무력을 행사하였다. 이에 사마리아인들은 시리아의 총독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며 빌라도를 직위 해제시킨다.(A.D 36년)

  헤롯 안티바는 큰 소요가 없었던 기간에 통치하였고 공식적으로는 분봉왕이었지만 그의 신하들은 그를 왕이라 칭하였다.

(마가복음 6장 14절)그는 건축가로서 디베랴를 건축하였는데 디베랴는 개네사렛 서쪽에 있는 도시로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념하여 건설하였지만 공동묘지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살기를 거절한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랍비 학교가 세워져 종교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다.

  그는 나마테아의아레카스 4세의 딸과 결혼하지만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사랑하게 되어 공주와 이혼하고

헤로디아와 재혼한다. 이에 경건한 유대인은 반발하고 세례 요한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된다.

 

나마테아의 왕 아레타스 4세는 베뢰아를 침공하였고 헤롯 안티바는 참패를 당한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세례 요한을 처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이해한다.

그는 칼라굴라를 설득하여 왕의 칭호를 얻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황제의 의구심을 불러 일으켜 갈리아로 추방당한다.

(B.C 39년)

  빌립은 트렌스 요르단 북쪽 지역을 통치하였고 가이사랴 빌립보를 세웠다.

이곳은 이방 지역으로 유대인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황제의 형상을 새긴 동전을 사용하였다.

그의 통치 기간은 평온하였으며 그의 사후 관할 지역은 사마리아의 총독 관할로 편입하게 된다.

  헤롯 아그립바 1세(아켈라오 아들)는 칼라굴라에 의하여 빌립이 통치하던 지역의 왕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헤롯 안티바가 추방당한 뒤엔 그의 관할 구역도 아그립바 1세의 통치권에 편입된다.

칼라굴라의 사망 이후 황제에 오른 클라디우스에 의해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까지도 그의 통치권에 편입하게 된다. 

  그의 부계는 비록 이두매인이었지만 모계는 하스몬 왕조의 미리암네 공주의 자손으로 제사장

혈통이었고 유대지역 내에서는 경건한 유대인으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유대인의 반응은 좋았다.

그는 또한 바리새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기독교 공동체를 핍박하는데 이 때 야고보가 처형당하고 베르도가 옥에 갇히게 된다.(사도행전 12장)그의 경건성은 유대 지역 내에서만이었고 그 외 헬라 도시들에서는 친할레적이었다.

그는 또한 황제나 자신의 형상을 새긴 화폐를 사용하였고 헬라의 도시들에 공공 극장이나 목욕탕을 지어 하사하였다.

  율법주의적 유대인들이 그의 행위들을 용납하게 된 이유는 35년이 넘는 로마 총독의 통치에 반발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다시 유대인이 통치자로 임명됨으로 만족하여 아그립바 1세의 헬라화된 일들은 묵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그립바의 죽음은 그의 통치 지역을 시리아 관할로 편입하게 하고 헤롯 왕가는 종국을 맞는다.

시리아 관할로 재 편입된 후 최초의 두 총독의 재임 기간은 평안하였으나 그 뒤를 이은 두 총독의 재임 기간은 상황이

악화된다.콤마누스는 사마라이에서 갈릴리인이 살해되자 유대인들이 이를 보복하기 위해 사마리아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 소요의 책임을 물어 해임된다.벨릭스는 해방된 노예 출신 총독으로 직책 수행이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그의 재임 기간은 수많은 소요사건으로 얼룩져 있다. 시골의 도적 떼를 잡아 십자가에 처형하지만 많은 자들이 메시야로

자처하며 소요 사태를 더욱 가중시킨다. 메시야로 자처하던 자들은 토벌 당하지만 산적과 반란군은 끊임없이 속출한다.

  베스도는 사려가 깊고 인품이 고귀한 자이지만 전임자에 의해 발생 되어진 소요 사태를 평정 시키는데 실패한다.

 

 

알베누스는 공공기금을 약탈하는 등 벨릭스 보다도 더 형편없는 통치를 행한다.

  게시우스는 산적과 함께 약탈한 도시의 탈취물을 나무며 성전 기물들을 약탈한다.

이에 민중의 가중되어진 불만이 분출되며 본격적인 반란이 시작된다. 이 반란을 집안하기 위해 베시파시우스가 유대로 진격해 오는데 갈릴리 출정 기간 중 네로 황제의 죽음으로 황제에 등극하게 되고 대신 자신의 아들 티투스(디도)를 예루살렘에

파견하여 예루살렘을 정벌하고 성전을 파괴한다.(A.D 70년)

 

 

출처 :파천대협의 프로태권도와 색소폰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 파천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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