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론(聖靈論)
제1강 삼위일체론
성령님의 사역에 관한 견해는 체험 위주의 성령 운동과 교리 위주의 일종의 지성주의와의 사이에 극단적인 견해차이로 인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외면하도록 하는 손해를 초래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 둘 중 그 어느 쪽도 혼자로서는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성령론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확실히 알아야 되는 부분은 삼위일체론 이다. 삼위일체론은 이해하는데 있어서 뿐 아니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난해한 부분이다. 그러나 성경이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이 숫자적으로 하나라는 개념으로 훨씬 많이 강조되어서 실제적으로 설명하려는 부분을 놓쳐버렸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하는 것은 숫자적으로 한 분이시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유일신(唯一神)이라는 말씀이다. 다른 신은 없고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라는 뜻이지 숫자적으로 한 분이시라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유일신이지 단일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숫자적으로 한 분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므로 매우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하면 예수님과 성령님의 위치가 매우 애매하게 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근접된 표현으로 하나님은 '3 인격체' 즉 '구별된 3위'이시다. 초대교회에서도 이 삼위일체에 대하여 성자 하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여러 이단들이 있었다. 그래서 A.D.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하나님은 숫자적으로 한 분이 아니라 "3인격체(3위, three persons)"라는 공식적인 신조를 채택하였다.
이제 '하나'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하나'라는 말은 영광과 존귀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모든 신의 속성이 똑같다는 의미이다. 즉 본질에 있어 '하나'라는 뜻이다. 그것은 외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한 분이라는 이론은 단일신론(單一神論)이라는 형태로 많이 나타난다. 이는 숫자적으로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단이다. 그중 양자론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성령님을 보내셨으므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같은 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자 하나님은 피조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또 양태론은 한 분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신약 시대에는 성자 예수님, 현 교회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가면을 바꾸어 쓰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경은 성부 하나님과 성장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명령이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말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3위 일체란 3 인격체인데 그 본질에 있어서 우열의 개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질서상 1위, 2위, 3위가 있을 뿐이다.
제2강 성령과 불로써 세례
세례란 원래 동일화, 동질화(identification) 한다는 뜻이다. 이런 용어들은 원래 서양에서 연구되어진 것들이기에 우리말로 적당한 표현을 찾기가 힘들다. 동일시, 동질화, 연합정도로 표현한다. '연합'이라는 표현이 제일 많이 쓰인다.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를 처음으로 세례받는 일로부터 시작하신다. 왜 그런가? 죄는 없으신데 죄인인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죄인과 동등시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그 물 세례 아래 친히 들어가심으로 자신도 죽어 마땅한 인간들과 동등한 위치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묘사할 때 세례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는 자이고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과 대조를 해 보아야 잘 이해가 된다. 물은 우리 모두를 심판아래, 사망과 멸망아래 가두게 하는 역할을 한다. 세례를 줌으로써 우리가 나 자신은 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을 자, 심판을 받을 자들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방주 안에 들어감으로써 물로 말미암아 그 위에 뜰 것을,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것을, 분리 된 자인 것을 고백하듯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히 주시는 '성령과 불' 세례는 불에 타버릴 것들을 불로 태워 없이하고 성령 안에 들어가 하나님과 같이 있는 자로서의 그 일에 신앙 고백적으로 동참하는 자임을 하나님께서 인 치시며 또 우리에게 신앙 고백으로 요구하는 세례인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분이요 의와 거룩으로 사실 분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연합되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분이 가는 데로 우리도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방주 안에 타고 있는 자들이 배가 가는 데로 갈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시므로 우리는 성령님이 가시는 데로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성령 하나님이 지옥에 가실 리도 없고, 사망 아래 있을 수도 없으므로 그와 연합된 그가 우리 안에 오심으로 하나된 우리는 이제 그와 도저히 떼어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즉 성령님이 드디어 우리를 죄와 사망과 저주로부터 꺼내실 보증으로 와 계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그 신앙 고백이 있는 자들이 모두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의미에서의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이다.
제3강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
오순절의 의미를 알려면 일단 먼저 안식일의 개념부터 알아야 한다. 안식일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신 날수를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천지창조를 생활로 간증하는 의식이다. 쉰다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레 되는 날 쉼으로써 앞의 엿새 동안에 하나님께서 일해서 온 천하 만물을 만들었다는 신앙고백을 형식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 5장에서는 안식일의 개념이 한 단계 더 진전한다. 여기서 보면 안식일의 개념 속에 우리를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첨가된다.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어 거룩하게 하는 것, 즉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의 안식일의 개념이 여기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안식일을 지킴으로 일상 생활의 규칙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거룩케 하는 하나님, 종되었던 애굽에서 구해낸 하나님인 것을 즐거워하는 절기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일의 결과를 감사하며, 즐기며 돌아보는 절기로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를 얻는 절기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안식일'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케 하는, 안식케 하도록 간섭하는 일의 상징인 것을 알 수 있다. 안식일을 지키게 함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죄와 악과 더러움과 부패함에서 꺼내어 안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섭, 즉 "거룩케 하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 일이 더욱 강조된 것이 희년이다.
성경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런 절기들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실 것인가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오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어떻게 친히 죄와 사망의 종에서 꺼내셨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제4강 성령강림, 그 자체가 갖는 메시지
신약시대와 구약시대는 결국 약속된 것이 이루어진 것,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이루어진 것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분기점으로 나뉘어 진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안식년, 희년, 맥추절, 칠칠절 등 절기로써도 요구하시고 강조하신 것 같이, 그가 이루시려는 구원 사역은 이제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일로 완성된다.
죄와 사망의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꺼내어 자유케 하신 것은 나의 조건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사, 불쌍히 여기사 은혜로 이루어 주신 그 일, 죄의 세력에서 꺼내어 구별하여 거룩케 하신 그 일을 상징화하고 있는 오순절날 성령님이 임하시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것이다. 오순절이라는 절기를 주어 놓고 거기에 맞추어 성령님이 그날에 임하시므로, 오순절이 갖는 의미와 동일한, 성령님의 임하심, 즉 구원의 사역이 하나님 쪽에서 전적으로 하신 일이요 우리 쪽의 일의 결과가 아님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오순절 날에 성령님이 강림하신 이유이다.
성령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키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니다.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임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신 그 사실로 심판이 효과 있게 되어 버렸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여 버린 사실이 무엇으로 증명이 되는가?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증명이 된다. 예수님이 떠나셨으니 성령님이 오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자체가 갖는 의미이다.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일을 위해서는 아닐지라도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일에 대한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 된다.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가 있다는 표이다. 예수님이 그 존귀와 영광의 보좌에 가셔서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 세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이 오셨으며, 실제로 계신 것, 이런 것들을 볼 때 그분이 그의 약속에 따라 일을 하셨으며, 또 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기뻐해야 된다. 성령 강림은 개인적 신자가 갖는 주관적 체험의 문제로써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성령님이 오신 그 일, 그 자체의 객관적 증거로도 우리에게 이미 커다란 경계가 되며, 힘이 되며, 각성해야 되는 표인 것이다.
제5강 성령이 주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
성령세례라 할 때 우리는 그 개념이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성령세례가 다른 분에 의해 성령에로의 세례를 받아서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지, 혹은 성령님이 베푸는 세례를 성령 세례라 하는지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보통 '성령세례'라 할 때 성령님께로 가는 세례, 성령님 속으로 들어가는 세례로 많이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았다 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 우리가 성령님 안에 파묻히는 것, 성령님의 충만함이 흘러 넘치는 것으로 보통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 성령 세례는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베푸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럴 때 나타나는 어려움 중 하나가 그러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으면 성령이 없는 자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에 성령이 있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이 단계에서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잘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는 '성령 세례'라 할 때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로써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것 외에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가 있다고 말한다. 성령님이 베푸시는 자로서의 '성령 세례'가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령의 충만한 자리로 들어가는 것,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이야기 할 때, 그 세례는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이고, 예수님이 성령으로 베푸시는 세례를 말한다. 지금 언급하는 '성령세례' 즉 성령님이 주시는 세례라는 것은 성령님이 구원 얻은 모든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신비스러운 연합으로 불러모으시는 그 일을 말한다. 성령께서 세례를 베푸셔서, 우리는 이제 한 몸이 되었고 다 한 성령을 마시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접붙여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신비로운 연합체가 된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접붙이는 일, 하나되게 하는 일이 바로 성령님이 베푸시는 '성령세례'인 것이다.
성령님이 주시는 성령세례에 의하여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나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몸으로 부름받은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생명과 삶을 유지케 하시는 분이고, 부여하시는 분이다. 성경이 예수를 믿는 신자들에게 분명히 확신시켜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구원 얻은 일에 대하여 우리의 인식이 없듯이, 성령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내시는 일, 그의 몸에 덧붙이는 일에도 우리의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냄을 받고 있고,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 일은 그 자체로는 우리들에게 인식되지 않고 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일, 구원을 받는 일은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고 다 된 다음에 결과로써 성경을 통하여 알며, 성장하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제6강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성령 세례'라는 것은 성령님께서 베푸신 '성령 세례'와는 구분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주심)는 구원 얻는 것과는 다르고 그 이상의 선물이고 그 이상의 경험이다. 신, 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님이 내주해 계신다. 그래서 신,구약의 차이도 성령의 내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령의 부어주심, 성령의 충만에 관하여서 이다. 중생(성령이 베푸시는 세례+성령님의 내주)과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지 않으면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주심)를 받지 못한 자는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는 외적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간 한국교회에서는 이 문제에서 늘 방언이 그 첫 번째 표적으로 등장하곤 하였다. 어떤 외적인 증거가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틀림없는 일인데 그 외적인 증거를 꼭 방언이라고 못박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될 것은 성경의 약속과 체험과의 관계이다. 성경이 약속하는 것과 체험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서 참으로 위험한 실수를 할 수 있다. 성경이 약속한 것 중 몇 가지 체험한 것 때문에 그것만을 가지고 나머지 성경이 약속한 것들도 쉽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편 기독교가 갖는 초월성과 기적들을 배제해 버리는 잘못된 견해가 있다. 이것은 이성주의적 오류가 되는 것이다. 요즘 신자들의 분위기를 보면 이 쪽으로 점점 쏠리고 있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교육 수준의 향상과 함께 사람들이 다 너무 이성주의적으로 가고, 그 동안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에 의한 체험들이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아름답게 사용되지 못한 것으로 인한 반작용으로 인해서일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이 겪는 가장 큰 아픔은 원함이 있으나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요즈음 같이 성경공부가 붐을 이루고 있는 때는 예전엔 없던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말씀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알고들 있는 때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신자들은 힘이 없다. 신자의 가장 큰 불행은 아는 것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데 있다.
성경에 기록된 신자들의 삶에는 분명히 어떤 힘이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어떤 간섭이 있었다. 우리의 맥빠진, 힘없는 신앙 생활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쁨과, 충만과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왜 그렇지 못한가? 여기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며 성경의 지적 앞에 우리의 위치와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부흥 운동이 일어난 곳은 언제나 성령님의 나타나심이 충만했음을 교회사가 증명하고 있다. 언제나 부흥 운동은 성령님의 운동이었다.
제7강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의 차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성령님의 내주도, 성령세례도 가능해졌다고 보아진다.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를 시인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언하기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오해하는 경우에는 복잡해진다. 성령이 있다는 것이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인가? 이렇게 되면 한국교회가 한동안 문제가 되었듯이 방언이 없으면 구원을 못 받았다는 경지에까지 가는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계셔도 우리가 모르고 성령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성령의 나타나심을 무시한다면 바로 이런 부분이 너무 모호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성령세례(부어주심), 성령의 나타나심에 관한 약속들을 제외시켜 놓고 성경을 논하여 왔다. 이유는 그것으로 인한 부작용 때문일 것이다. 가장 큰 이유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늘 외적으로 은사로 나타나는 법이다"라는 것에 대한 반대가 그만 극단으로 가서 또 하나의 축복된 약속을 빼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성경의 엄청난 기록들을 읽으면서도 몇 가지 부작용을 맛보았기에 성경의 증거에 대하여서도 신중하고 심각하게, 기대에 차서 들여다보는 시선을 빼앗겨 버려 아무런 감동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심각한 오류인 것이다.
자주 고넬료 사건은 믿을 때에 즉 구원을 얻을 때에 성령세례(부어주심)가 동시에 임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본문이 그렇게 보이는 가능성도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것이 동시적이지 않다. 성령님의 내주와 성령세례(부어주심)의 차이점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예로써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실과 그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과의 차이점을 생각할 수 있다. 신자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중의 하나는 신자가 신자답게 살지 못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죄책감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 그분을 향하여 죄책감을 가진다는 것이다.
성령님의 내주가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면 이제 성령의 부으심(성령세례)라는 것은 그 외의 일로 인하여 오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것으로 나에게 확실히 인식되는 것이요, 내각 감각하는 것이요, 내가 분명히 "이것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님의 내주와는 달리 내가 그것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결코 그 사건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는 확신이 있다. 성령 세례를 받은 그 기쁨과 만족감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유일한 것으로 주장하기에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다. 내주 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우리는 인식하지 못할 수가 있지만, 즉 우리 자신이 성령의 전인 줄도 모르고 있고, 우리 안에서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는 것도 모르고 있을 수 있지만 성령 세례는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언제나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본인에게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알도록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성령의 충만'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것이다. 성령세례(부어주심)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사하시는 은사이다. 은사란 베푸는 쪽에서 주권적으로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열심히 추구할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또한 분명히 구별되어야만 한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원래 성경에서 성화의 원리로서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성화의 원리로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방언을 주시고 성령의 나타나심을 허락하신 것과, 그 사람이 성화 되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있음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성화에 대한 큰 자극과 촉진이 되기도 한다. 성화란 성령 충만에 의한 것이다. 성령 충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셔 그의 요구와 그의 권면과 그의 명령 앞에 자기를 끊임없이 굴복시키며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요구와 원리와 명령을 나의 것으로 삼아 나가는, 즉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십자가를 지고가는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보았던 부작용들과 같이 내가 성령의 부어주심을 체험했다고 하여 그것으로 모든 대화의 내용을 삼으면 모든 일에 증거로 삼아서 사실상 우리가 성화에 얼마나 방해를 받았는지 모른다. 이제 모두 성경공부로 와 버렸다. 이제는 어떤 의미에서 내용적으로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달은 바 그 내용을 우리 자신에게 확신시키며 기쁨과 확신과 자랑 속에서 용수철처럼 일어나게 할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요청되고 있는 때임을 우리는 겸손히 시인해야 한다.
제8강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들
'성령 충만'에 대하여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는 문제에 있어서는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고 되어 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체험과 경험을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쪽에서는 '성령세례'를 요구하고 또 그것을 받기 위하여 어떤 조건을 제시할 수도 없다. 우리 쪽에서는 전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도 할 것도 없다.
어떤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던가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그는 사랑을 소유치 않을 수도 있다. 성령의 부어주심으로써의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사역에 대한 증인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어떤 능력이다. '성화'가 개인적인 인품과, 신앙 인격에 대한 문제라면 이 '성령세례'는 제 삼자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의 구원 사역에 대한 증언을 능력 있게 하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특별한 은혜이다. 그러니까 이 일은 즉 '성령세례'는 증인되는 일과 무관하게는 보통 잘 발생하지 않는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내적으로 첫째 자기의 내면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 감지가 생긴다. 즉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생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는 동시에 자신의 비천함에 대한 자각이 생긴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동시에 일어난다. 두 번째로 내적으로 기쁨과 거기에 수반되는 확신이 일어난다. 예외적인 기쁨과 감사인 것이다. 세 번째로 성령세례를 받은 본인에게 두드러진 현상중 하나는 주를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일어났던 가장 큰 부작용은 '성령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전파하지 않고 내가 경험한 것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증명하는 바람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자존심 싸움, 우열의 싸움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네 번째로 빛과 이해가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어떤 영적인 밝음을 소유하게 되고 어떤 명쾌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 어떤 외적인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살펴보자.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외적 현상 중에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 세례를 받은 사람들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보아서 뿐 아니라 들어서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어떤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외적 현상 중에 '얼굴이 달라진다'는 현상도 있다. 이것은 적당한 표현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그의 얼굴에 어떤 경외감이 있다는 거이다. 다음에는 '말'이 달라진다. '말'이라고 할 때는 우리가 하는 언어 그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 말, 즉 그 내용이 능력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의 말과 증거는 자기 것이 아닌 어떤 힘과 어떤 존재의 능력과 지혜와 권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을 때 듣는 사람이 지혜에 관한 것에 대하여 이해가 더 확실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권능이 있는 말씀, 권위자의 말씀이라는 권위적 압도감을 받는 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시'에 대하여 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계시는 내용 면에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계시된 성경의 내용을 밝히시는 하나님의 간섭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제9강 성령의 인침과 은사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치심은 본질상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어느 쪽에 초점이 주어지는가에 따라서 구별이 되어진다. 근본적으로 성령 세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하도록 하는데 즉 증인의 사역을 감당케 하는데 훨씬 많은 초점이 있다. 성령의 인치심이라는 말은 증인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인 자기와 구원문제,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확인'쪽에 초점을 두고 사용한다. 어떤 부분에 더 많은 초점을 두는가에 따라 똑같은 내용을 용어만 다르게 쓰는 것이다. 성령의 인침이 갖는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즉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하는 것은 에베소서 1:14절에 나와 있는 것 같이 '보증'이다. 신자가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인하는데 가장 놀라운 확신이 있다면 여러 가지 중에서 아마도 하나님께서 직접 확인 시켜 주는 이 '성령의 인치심'일 것이다. 이 깨우침은 신자들에게 약속된 것이요, 커다란 축복이요, 경험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인침'이 도장을 찍었다는 의미가 있는 것임을 생각할 때 도장이라는 것은 단둘만의 비밀스러운 일을 위해서는 쓰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쓰이는 것이 도장이다. 즉 성령의 인치심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인가를 그 '인침'을 받은 본인이 체험적으로 깨달을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그 사람이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는 것을 주위의 사람들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세례' '성령이 인침'을 받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내용 면에서 다른 사람보다 나아진 것도 없다. 다만 있었던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뿐이다.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사이에 우열의 개념은 절대 없다.
성령의 부어주심으로써의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침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고린도전서 12장, 즉 은사 쪽에서 볼 때는 이 사역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사역이다. 성령 세례나 성령의 인침을 받는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고 그가 어떻게 나를 사랑하는가를 아는 것이지 능력을 받는다는 차원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능력적인 것이다. 이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키 위한 증언을 위한 능력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한 능력이다. 은사를 주심으로 우리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약속과 소망이 어떻게 확실하며 대단한 것인가를 확인시켜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를 소망케 하시는 것이다.
제10강 성령세례, 어떻게 받을 것인가?
성령세례에 대해서 두 가지 큰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가장 큰 첫 번째 오류로서 성령 세례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론을 이야기할 때 많이 오해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인과율'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서 내가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이것은 또 다른 행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은혜로 결과를 주는 방법이다. 나는 주신 줄로 믿고 기도했으니 마땅히 주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허락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요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 위험은 "안수"라는 방법을 통해서 성령세례(부어주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안수하는 자가 준다는 표현이 아니라 이 일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하늘로부터만 허락된 것이라는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변해버렸는가? 능력 많은 사람이 손을 얹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안수는 의식적이요, 메시지적이지 성령님이 임하시는 통로가 아닌 것이다. 성령은 자기 힘으로, 자기 뜻대로, 자기 의사대로 내려오시지 누구에 의하여 누구의 요구에 의하여 주장되지 않으시는 분이다.
또 하나 우리가 조심할 것은 성령의 부어주심을 원하는 그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늘 자신에게 확인해 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증명하거나,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것이 되지 않도록 자기 중심에서 이것을 구하고 간구할 때마다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 항상 이 약속을 목표와 생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 성령님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죄와 죄들로부터 자기를 거룩케 하기 위하여 애를 써야 된다. 그리고 양립할 수 없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신", "자아"이다. 내가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한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세 번째는 기도하는 일이다. 믿음을 인과론적 차원에서 동원하면 잘못이듯이 기도 역시 방법론적 차원에서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인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큰 상징이다. 마지막으로 전심전력해야 한다. 정열을 다하라는 것 뿐 아니라 인내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오랜 시간, 이것을 얻기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옮긴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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