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관련

부산지역의 복음화 과제와 전망

유테레사 2015. 3. 3. 11:01

부산지역의 복음화 과제와 전망

John T. Lee 2007년 8월 18일

I. 부산지역의 현황

부산이란 이름의 유래

? 富山 : 1402년 (태종 2) 1월 28일『태종실록』

?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 :『경상도지리지(1425)』『세종실록지리지(1454)』『경상도속찬지리지(1469)』등

? 동래지부산포(東萊之富山浦) :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해동제국기』

? 釜山 : 1470년(성종 1년) 12월 15일자『성종실록』

? 가마골과 같은 모형의 읍성- 가모령 - 동구 좌천동의 증산


부산의 상징

용두산공원과 동백꽃(푸른바다, 시민의 정신, 젊음과 의욕), 갈매기(백의민족, 강인함)

 

부산의 위치와 자연환경

? 위치 : 동경 129° 18′, 북위 34° 52′ (동경, 로스엔젤레스, 바그다드, 아테네와 같은 위치)

? 기후 : 온대계절풍 기후대와 대륙 동안기후대,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함

? 관문도시 : 국내 제1의 국제무역항 및 국제공항을 가진 세계와의 연결 관문

? 태평양 시대를 주도할 전진기지


부산의 인구

? 1914년 4월 부제(府制)를 실시했을 당시 20,000명, 1925년에는 116,853명, 1942년에 334,318명, 1945년에는 281,160명(일본인 퇴진), 1951년 844,134명(6.25 피난민, 임시수도), 1955년 1,049,363 , 1963년 1월 정부 직할시(直轄市) 승격과 행정구역 확장 1,360,630명, 1990년 3,798,113명

? 2000년 3,812,392명이었고, 2003년 3,711,268명, 2006년 12월 31일 현재 3,635,389명


산의 하루

? 출생 78명, 결혼 52쌍, 이혼 27쌍, 급수량 1인 334리터, 지하철 66만 2천명, 쓰레기 3,680톤, 수산물어획고1,070톤, 항공여객 1만9천명범죄발생 307건화재발생 5건전력사용량 45,149MWh, 해운화물수송 331천톤, 인명교통사고 37건,. 자동차 등록 300대(신규)


II. 부산지역에서의 선교사 활동

초기 선교사들과 부산지역 선교 역사

? 부산항 :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처음 귀착한 곳이며, 아펜젤러 선교사가 스크랜튼,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에 입항하기 전 1885년 4월 2일 배가 잠시 체류함

?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성경반포사업

? 부산 및 경남 일원 복음화를 위한 시도는 알렌이 입국하기 1년 전인 1883년부터임

? 스코틀랜드 성서공회(NBSS, 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는 1882년 3월 심양(瀋陽)의 문광셔원 간행의「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그해 5월에 간행한「예수셩교 요안나 복음젼셔」각 3천권 중 3분지 1에 해당하는 각 1천권씩을 다른 소책자와 함께 일본 요꼬하마 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인 톰슨(J. Austin Thomson)에게 보내어 조선에 반포하도록 했다. 톰슨은 1884년 4월 13일 조선에 성경보급소를 설치할 목적으로 자기 아내와 두 사람의 일본인 매서전도자, 미우라(三浦)와 스가노(管野)부부와 함께 부산에 왔다. 이들은 붓나 경남지방에서 성경반포사업을 수행했는데, 1883년 7월이래 1886년 말까지 부산과 남부지역에서 약 2천권의 복음서를 반포했다. 이것이 부산과 경남지방에서의 최초의 기독교와의 접촉으로 알려져 있다.


월푸의 조선선교를 위한 방문 및 홍보

? 영국교회선교회(CMS, Church Missionary Society)소속 중국선교사 존 월푸(Archdeacon John R. Wolfe, 1832-1915)가 1884년 부산 방문을 계기로 부산지방 선교를 시도하였다. 호주장로교의 데이비스의 내한을 가능하게 하고, 1890년에는 성공회의 한국선교의 길을 열게 되었다. 호주 CMS로부터 부분적인 지원을 받아 1885년 11월 말경 두 사람의 중국인 전도자(two Chinese catechists)와 함께 다시 부산을 방문하였다.


게일과 하디의 부산에서의 선교활동

? 게일(James Scarta Gale, 奇一, 1863-1937) : 부산에 거주했던 최초의 캐나다 개신교 선교사-토론토 대학교(Toronto University)를 졸업하고, 그 대학 학생 기독교청년회(YMCA)의 파송으로 25세 때, 1888년 12월 12일 내한, 부산에서 28시간 체류 후 인천, 서울, 송천 등지에서 1년간 체류하였다. 1889년 8월 게일은 서울을 떠나 제물포로 가서 일본 증기선 ‘히꼬 마루’(Higo Maru)로 부산에 온 후 부산항과 일본인 거류지 사이에 위치한 초량에 살았고, 1890년 12월 이전에 부산을 떠났다

? 하디(Dr. Robert A. Hardie, 河鯉泳, 1865-1949) :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YMCA의 파송을 받아 1890년 9월 30일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였는데, 약 6개월 서울에서 보내고, 1891년 4월 14일 부산으로 이주하여 해안과 선박 검역 및 항만 의사로 봉사로 1년 6개월 동안 체류하다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베어드를 도와 전도사역에 동참하였고, 그의 노력이 후일 초량교회 설립에 일조하였다


데이비스의 내한, 부산도착, 죽음

? 데이비스(Rev. Joseph Henry Davies, 1856-1890) : 미국 북장로교회의 첫 한국선교사였던 알렌(Dr. H. N. Allen)이 입국한지 5년 후인 1889년 10월 호주 빅토리아장로교가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Miss Mary T. Davies, 1853-1941)와 함께 파송된 최초의 한국 선교사이자 부산, 경남지방 선교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첫 선교사이다.. 중국 푸초(福州)지방에서 선교하던 영국교회 선교회(CMS)소속 선교사 월푸(John R. Wolfe)의 한국선교에 대한 호소를 듣고 데이비스 남매는 한국선교를 자원하였다.

? 19세기 말인 1880년대 한국은 외국과의 모든 활동이 단절된 극동의 고집스런 나라였고, 그리피스(W. E. Griffis)의 표현대로 ‘은둔국’(Hermit Kingdom)‘이었음

? 20여일 간에 걸쳐 약 500km(300마일)에 이르는 답사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는 무리한 도보 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폐렴까지 겹쳐 마지막 5일간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데이비스가 부산에 도착한 날은 1890년 4월 4일 금요일이었다. 그러나 다음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 세상을 떠났다.

? 데이비스를 파송했던 청년연합회는 1890년 7월 23일 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한국에 선교사를 다시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또 1890년 창립된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PWMU, 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과 청년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멕카이목사(Rev. J. Mackay) 부부와 여전도회엽합회가 파송한 3사람의 미혼 여선교사(Misses Menzies, Fawcett, Ferry) 등 5명의 제2진 선교사가 1891년 10월 내한하였다. 호주장로교회는 해방전까지 78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특히 데이비스의 두 조카인 마가렛 데이비스(Miss Margaret S. Davies, 체한기간 1910-1940)와 진 데이비스(Dr. E. Jean Davies, 체한기간 1918-1941)가 내한하여 부산과 경남지방에서 교육선교사로 혹은 의료 선교사로 봉사하였다.


엘라딩 기념선교회의 부산 선교의 시도

? 1891년 9월에 시작된 미국북장로교 선교부나, 같은 해 10월에 내한한 호주선교사 제2진보다 후기이기는 하지만 부산지방에서 선교를 시도했던 또 하나의 선교단체가 독립선교단체인 엘라딩기념선교회였다. 엘라딩 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란 미국 보스톤에 있는 클라렌톤가(街) 침례교회(Clarendon Street Baptist Church)의 집사였던 사무엘 딩(S. B. Thing)이 자신의 외동딸 엘라(Ella)를 기념하여 조직한 침례교의 선교단체인데, 1895년 폴링(E. C. Pauling)목사 부부와 미혼 여성인 아멘다 가르더라인(Amanda Gardeline)을 제1진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하였다.

? 스테드맨(F. W. Steadman)목사 부부와 두 미혼 여성인 새디 에클스(Sadie Ackles)와 아르마 엘머(Arma Ellmer)를 파송하였다. 이미 부산에서는 미국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부가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선교사가 없는 공주지역으로 옮겨갔다. 이들은 공주를 비롯하여 강계, 홍성 등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했으나 재정난으로 더 오래 사역하지 못하고 1900년 한국에서 철수하게 되자 펜윅(M. C. Fenwick)이 이 사업을 인계받아 1906년 ‘대한기독교회’라는 독자적인 교회 조직을 갖추고 선교에 착수하였다. 후에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로 개칭하고 일제 말까지 계속되다가 해방 후 한국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윌리엄 베어드(Rev. William M. Baird, 裵緯良1862-1931)부부의 부산 지역 선교 활동 지원

? 호주의 첫 선교사였던 데이비스가 부산에서 세상을 떠난 후 호주 장로교 선교사 제2진이 부산에 오기 전 1891년 1월 29일 최초의 미국북장로교(PCUSA) 선교사인 윌리엄 베어드(Rev. William M. Baird, 裵緯良1862-1931)부부가 파송됨

? 북장로교 선교부는 그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해 왔으나 평양과 부산에도 선교지부(Mission station)를 개설하기로 하고, 1891년 평양에는 마펫(Samuel Moffett)을, 부산에는 베어드를 파송하게 됨.

? 1891년 9월에는 미국 영사관의 협조로 영선현의 땅을 매입하여, 북장로교의 부산, 경남지역 선교 거점 마련

? 1982년 3월 베어드는 앞서 구입한 부지에 지은 선교사관으로 옮긴 영선현은 북장로교 선교의 중심지이자 후일 초량교회 태동의 모체가 되었음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

? 1891년 12월 베어드에 이어 두 번째로 부산에 부임한 북장로교 선교사 휴 브라운(Dr. Hugh M. Brown) 의사 부부

? 자기 집에 작은 시약소(dispensary)를 마련하였다. 브라운 의사의 예기치 못한 결핵의 감염으로 더 이상 선교지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부산에 온지 2년 후인 1893년 말까지 사역하고 1894년 1월 8일 귀국하였으며, 2년 후 1895년 뉴욕에서 병사함

? 1893년 11월에는 어빈 의사(Dr. Charles. H. Irvin, 漁乙彬)가 내한했는데, 이듬해 3월 부산으로 와 브라운의 뒤를 이어 의료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의료활동 외에도 베어드와 함께 지역 순회활동에 동참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료, 전도활동을 전개했다. 어빈은 이 때로부터 1911년까지 약 17년간 선교사로 일하고, 그해 4월 1일자로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광동 5가 영선고개에 어을빈 의원을 개원하고 계속 부산에 체류하였다. 그는 가정생활이 원만치 못해 부인과 이혼했고, 양한나라는 한국여인과 재혼했다. 42년간 한국에 체류했던 그는 1935년 부산서 사망하고 복병산에 묻혔다.

? 1895년 5월 29일에는 아담스(Rev. James E. Adams, 安義窩)부처가 부산에 파견되었다. 배위량선교사의 처남인 그는 생후 3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내한하여 부산선교부에서 2년간 일했다. 1897년에는 공식적으로 대구로 옮겨가 대구지부를 개척하였고, 1923년까지 한국선교사로 일했다. 그의 아들 아담스(安斗華)는 아버지에 이어 제2대 선교사가 되었고, 계명대학교의 설립자로 되었다.

? 그 후에는 로스목사 부부(Rev. Cyril Ross, 盧世永, 1897-1902), 시더보탐목사(Rev. Richard H. Sidebotham, 史保淡, 1900-1909) 부부, 스미스목사(Rev. Walter E. Smith, 沈翊舜, 1902-1912) 부부, 윈목사(Rev. George H. Winn, 魏喆治, 1909-1914)목사 등이 활동했다. 호주선교부와의 지역 조정으로 심익순목사는 부산 영선현과 부산의 서쪽 지역과 김해, 웅천, 마산, 창원, 칠원 지역을 담당했고, 위철치목사는 김해 서남편, 초계, 합천 등지를 맡았다.

? 북장로교는 선교지역 조정에 따라 1914년 부산, 경남지역에서 철수하였는 데, 이 때까지 23년간(1891-1914) 21명의 선교사가 부산에서 일했다. 이들 중 1897년 10월 11일 내한하여 부산지부에 배속되었던 시릴 로스(Rev. Cyril Ross, 盧世永)와 1899년 11월 내한한 시더보탐(Rev. Richard H. Sidebotham, 史保淡)은 부산지방 3번째 교회인 제일영도교회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비록 부산지부에 속해 있지는 않았으나 밀즈(Dr. Ralph G. Mills, 체한기간: 1908-1918)와 비거(Dr. John Bigger, 체한기간: 1911-1951)는 부산지방에 와서 어민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했던 의사들이었다. 이들의 봉사와 희생, 헌신의 결과가 오늘의 부산, 경남지역 복음화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호주장로교의 부산, 경남지방 선교

? 데이비스가 호주 장로교 첫 선교사로서 부산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려고 하였으나 1890년 4월 5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은 이미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회의 ‘장로교 여전도교회 연합회’(PWMU. 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의 창립을 가능케 했고, 이미 결성된 ‘청년연합회’(YMFU. Young Men's Fellowship Union)과 더불어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선교사 파송기관(missionary sending organization)이 되었다. 결국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었다.

? 제2진 선교사들의 내한 : 데이비스를 이어 두 번째로 한국 땅을 밟은 호주 선교사들은 청년 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제임스 멕카이 목사(Rev. James H. Mackay) 부부와 장로교여전도회 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3사람의 미혼 여선교사, 곧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페리(Miss Jean Perry) 그리고 퍼셋(Miss Mary Fawcett) 등 다섯 사람이 있다. 이들 5명의 호주 선교사들이 일본을 거쳐 부산에 도착한 날은 1891년 10월 12일이었다. 부산에 도착한 호주 선교사들은 일본인 거주지 내의 주택에 기거하면서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부산에 도착한지 3개월 후인 1892년 1월 27일, 멕카이 목사 부인 사라(Sara)는 폐렴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의 두 번째 희생이었다. 호주 선교사들은 그녀의 시신을 부산 앞 바다가 굽어보이는 복병산 데이비스 목사 옆에 안장하였다.

? 멕카이 목사와 미혼 여선교사들의 건강 또한 악화되자 하디선교사는 이들을 자기 집으로 오게 하여 함께 그해 겨울을 지내도록 배려하였다. 당시 하디의 집에는 4칸의 작은 방이 있었는데, 하디 부부와 두 아이, 베어드 부부, 멕카이목사 그리고 세 사람의 미혼 여선교사 등 열 사람이 함께 생활했다. 멕카이의 건강이 호전되지 않아 의사였던 하디는 그의 귀국을 종용하였다. 그래서 멕카이는 아직 한국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3미혼 여선교사들을 남겨두고 1892년 7월 4일 부산을 떠나 호주 멜버른으로 돌아갔고, 약 한 달이 지난 후인 1892년 8월 3일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때 그는 장로교 여전도회 연합회의 4번째 선교사인 무어(Miss Bessie S. Moore)와 함께 부산으로 돌아왔다.

? 부산으로 돌아온 멕카이 목사는 그해 10월 11일, 일본 나가사끼에 있는 성공회 교회당에서 동료선교사인 퍼셋(Miss Fawcett)과 결혼하였고 퍼셋은 여선교회 연합회의 선교사 사임 의사를 전달하였다. 당시 여전도회 연합회 선교사는 파송기간 동안은 결혼할 수 없으며, 결혼할 경우 선교사직을 사임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선교거점의 확보와 후속 선교사들 : 당시 부산은 크게 3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첫째는 해안지역(port)인데 당시 이곳에는 3,500여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둘째는 초량지역인데, 이곳에도 약 3,500여 주민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셋째는 부산진이었는데 이곳의 거주인의 정확한 수를 알 수 없으나 적어도 3,500-4,000명 정도가 거주한 것으로 판단된다.

? 선교부지의 확보 : 호주 선교사들이 부산에 도착한 이후 처음에는 일본인 거주 지역에서 살았으나 1893년 4월에는 초량지역에 약 600평의 땅을 매입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여선교사들은 1892년 말경에 부산진의 한옥과 땅을 매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멕카이 목사 부부는 초량으로, 여선교사들은 부산진으로 이주하였던 바, 이 지역 곧 초량과 부산진이 호주 선교부의 거점(Mission station)이 되었다. 후일(1909) 선교지 조정안에 의해 호주선교부는 초량지역을 북장로교 선교부에 넘겨줌으로써 부산진 지역, 곧 지금의 동구 좌천동 686번지 일대는 호주선교부의 부산, 경남지역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 호주선교부는 부산의 두 지역, 곧 초량과 부산진에서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초량에는 청년연합회가 파송한 남자선교사, 멕카이와 아담슨 가족이, 부산진에는 여전도회 연합회가 파송한 미혼 여선교사들이 거주함으로써 두 개 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그 후에 초량지역은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고, 부산의 경우 부산진과 고관, 동래 지역 등 부산의 동남지역이 호주관할이 된다. 그러다가 미국 북장로교선교부가 1913년 말로 부산에서의 사역을 마감하고 이 지역에서 철수함으로써 부산과 경남지역은 전적으로 호주선교부 관할구역이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100여년 지난 지금까지도 부산진의 좌천동 지역, 곧 지금의 일신병원, 부산진교회, 그리고 구 선교관 등이 있는 이곳은 호주 선교부 관계기관의 중심지가 되었다.

? 부산의 두 개 지역(초량)에 선교부지를 확보했으나 그가 부산에 온지 꼭 2년이 지난 때, 멕카이 목사의 건강이 호전되지 못하고 1893년에 들어와서 다시 악화되자 그는 한국을 떠나기로 하고 1893년 8월 28일 본국에 선교사 사임 의사를 통보하였고, 1893년 9월 멕카이 가족은 한국을 떠났다.

? 내한하는 선교사들 : 멕카이 목사가 한국을 떠난지 2년 후인 1894년에는 페리도 장로교 여선교회 연합회 선교사직을 사임하였고, 고아와 맹인들을 위해 독립적으로 사역하기로 하고 서울로 갔다.

? 빅토리아주 장로교 여전도회 연합회는 페리의 후임으로 롤란드 관(Rolland House) 혹은 여교역자 훈련원(Deaconess Traning College)라고 불렸던 여성 교회지도자 혹은 선교사 훈련원을 수료한 브라운(Miss A. Brown)을 임명하였고, 그녀는 1895년 12월 부산에 도착하였다. 브라운은 앞서 파송된 멘지스, 무어와 함께 부산에서 사역하였고 1907년 왕길지(Rev. G. Engel)선교사와 결혼하였다. 후일 남편을 따라 평양으로 이거하였고, 1937년 한국에서 은퇴하였다.

? 멕카이 목사 부부와 페리의 사임으로 1891년 두 번째로 한국에 왔던 다섯 명의 선교사 가운데 오직 멘지스만이 부산에 남았다. 멘지스는 1892년 파송된 무어, 멕카이 목사에 이어 청년연합회의 파송으로 1894년 5월 20일 부산에 온 아담슨목사(Rev. Andrew Adamson, 孫安路), 그리고 1895년에 파송된 브라운과 더불어 1890년대의 호주 선교부를 이끌어 갔다.

? 아담슨은 ‘영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England) 출신으로 ‘대영성서공회’(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소속 선교사로 중국에서 5년간 일한 바 있는 유능한 선교사였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선교지를 떠나 런던에 돌아와 휴양하던 중 호주 장로교회 선교부와 접촉하게 되었고, 호주장로교 선교사로 입허되어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부산 초량에 거하게 된 아담슨 목사는 이때로부터 1914년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20년 동안 부산(1894-1909)과 마산(1910-1914)에서 봉사하였다. 내한 초기부터 그는 기 내한한 여선교사들간의 갈등으로 엄청난 정신적 고뇌를 경험했으나, 그는 초량과 경남지역에서의 교회설립과 기독교 운동에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III. 부산지역의 선교활동 현황

부산지역의 기독교 현황

? 부산은 인구가 약 400만 명이고 영남지역 인구 전체는 약 1,200만 명 정도이다. 한국의 인구 5,000만 명 중 절반이 수도권에 살고 나머지 절반은 영남에 살고 그 1/3은 부산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인구가 많은 곳을 우선적으로 전도하는 것이 효율성을 극대화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부산에서부터 근접 대도시 동해안 쪽으로 울산, 포항, 남해안 쪽으로 김해, 마산, 창원, 진주, 내륙 쪽으로 밀양, 청도, 대구까지 부채꼴로 파도처럼 복음의 급진적인 파급효과를 볼 수 있다.

? 세계적으로 이슬람권을 제외하고 가장 복음화율이 낮은 곳이 부산을 비롯한 영남권입니다. 아프리카도 복음화율이 20~30%입니다. 중국도 지하교회를 포함하면 약 10%입니다. 한국에서 선교사가 가장 많이 나가 있는 필리핀도 비록 구교이긴 하지만 복음화율이 약 90%이다. 부산지역에는 1,379개 개신교가 있는 데 그중 85%가 장로교회이고 침례교회는 160여개, 성결교회는 90여개, 감리 교회는 김해, 양산을 포함해도 63개이다. 그나마 40%가 미자립 교회이다.


대형집회 기획 및 실행

? 전국의 교회, 전세계의 교회가 부산을 주목하고 있는 작비(JAC-B)는 부산지역의 대형교회인 수영로 교회, 호산나 교회 등이 앞장서 부산대부흥의 비전을 제시한 ‘JUMP 2007’, 부산대부흥 ‘Awakening 2007’, 세계150개국 청년·대학생 신앙올림픽, ‘Campus Mission 2007’, ‘부산전지역의 복음화’를 비전으로 한 부산 프랭클린 전도집회의 이니셜 BFGF. 일명 ‘하나님의 작전 비밀’이라 불린다. .

 

IV. 부산지역의 복음화 과제와 전망


영남지역은 전국에서 복음화율 최하위이다. 공식 10% 미만, 실제 8% 미만 부산 및 영남을 주도하는 장로교회는 극단적인 보수주의 장로교로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건 신앙의 색채를 띠고 있다. 따라서 전도와 선교는 상대적으로 약한 실정이다. 영남사람들의 기질 또한 보수성향을 띠고 있어서 기독교를 외래종교로 인식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폐쇄적입니다. 토착종교라고 인식하는 불교는 그 세력과 영향력이 막강하고 기독교는 상대적인 불이익과 핍박을 받고 있다. 부산은 우리나라 제 2의 도시라고 하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열악해서 교회마다 치열한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다. 예를 들어 해운대 일대 교회들마다 문제가 없던 교회가 없을 정도이다. 교인들이 다툼과 분열의 아픔을 겪는다든지, 교역자가 비윤리적인 문제로 교회가 지탄받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났었다. 이것은 이방종교와 사신우상을 섬기는 해안가 지역의 특성으로 음란의 영과 분열의 영이 기승을 부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전국의 모든 교회가 영남지역을 위해 강력한 중보기도를 하여 영적전쟁에서 승리케 하고 불신의 영의 사슬에 매인 사람들을 구원해 내야 할 것이다.

초교파 교회 연합을 통한 일련의 대형 행사들을 통하여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란 공동의 목표에 도전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불신자 전도를 목표로 하는 BFGF의 경우, 이미 대형교회 중소형교회를 무론하고 6백여 교회가 협력하고 있음은 다행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에서 1907년 평양 대각성 운동은 한국 부흥의 기초 초석이 되었고, 1970년대 빌리 그래함 집회는 한국교회의 중흥기를 가져왔었다. 즉, 당시 빌리 그래함 집회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현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 국의 빌리 그래함 집회를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지도자가 세워졌던 것이다.

이처럼, 부산에서 일고 있는 산뜻한 연합의 바람은 하나님의 뜻과 대부흥을 갈망하는 지역교회의 노력에 더해 중소형교회를 살지우기에 족할 것이며, 특별히, 2007년 10월 18일-21일 프랭클린 그래함 집회는 부산의 대각성 및 한국교회 부흥의 큰 도약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번 BFGF 부산 그래함 축제가 부산뿐 아니라 한국의 부흥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한다.


? 20만의 기도부흥에서 50만의 전도부흥으로 나아가자.

? 선단을 이루어 물고기를 대량으로 잡아 들이자.

? 영혼을 구원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고 나아가 도시를 회복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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