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

-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여왕 빅토리아 정치적 업적 -

유테레사 2015. 8. 11. 08:30

- 영국의 유명한 여왕 빅토리아,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정치적 업적 -


※ 엘리자베스 1세 [一世 Elizabeth 1533.9.3 ~ 1603.3.23]

영국 튜더왕조 제5대 여왕(1558∼1603). 그리니치 출생. 부친은 헨리 8세이다.

인문주의 학문을 공부하였고, 프랑스어·이탈리아어에도 능통했다. 1543년의 의회 제정법에 의해 왕위계승권을 회복했다. 아우 에드워드 6세 때에는 T.시모의 음모와 관련이 있다는 혐의를, 언니 메리 1세 때에는 와이어트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아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 58년 11월 메리 1세가 죽자 11월에 린던으로 귀환, 59년 1월에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체제수립기(즉위시∼1572년)〕 1559년의 <국왕지상법(國王至上法)>과 <예배통일법>으로 부왕이 수립한 잉글랜드교회를 재건하고 중도주의를 취했다. 63년에는 <39개조>를 제정·공포하여 국교회의 교의적(敎義的) 입장을 밝혔다.
외교면에서는 메리 여왕 이래의 프랑스와의 전쟁을 종결지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뱅주의자의 선동으로 일어난 반란에 무력개입하여 에든버러조악을 성립시킴으로써 프랑스세력을 일소하고 브리튼섬 통일의 기초를 쌓았다. 내정면에서도 1560년에 은화 개주(改鑄)를 단행하고, 63년에는 <인클로저 단속법> <직인법(職人法)> <구빈법>을 제정, 과격한 변혁을 억제하고 경제·사회의 안정을 꾀하였다. 69년에는 <북방 여러 백작의 반란>이 일어나 엘리자베스체제에 대한 공공연한 적의를 드러내었다. 70년 2월에는 결국 여왕에 대한 파문장이 공표되었고, 이를 틈타 리돌피의 음모가 발생했으나 모두 타개하여 그 치세가 견고함을 실증하였다.

〔체제안정기(1572∼85년)〕 1560년대 말 이후의 위기는 체제의 안정과 그에 따르는 평화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였는데, 72년 4월에 에스파냐를 가상(假想)의 적으로 여겨 프랑스와 맺은 블루아조약은 하나의 지표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여왕은 국민에게 경모(敬慕)의 대상이 되었으며, 매년 11월 17일에는 그 즉위를 기념하여 성대한 식전이 거행되었다. 내란이 일어날 염려가 없어졌고 내외전쟁의 어려운 사태도 없어져 73∼78년의 5년간은 특히 안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교회에 대한 신구 양파의 공격은 차츰 격화되었는데, 메리 스튜어트의 존재도 화근이 되었다. 외부에서는 에스파냐의 위협이 커지고 있었으며 여왕의 후계자는 정해지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체제고난기(1585년 이후)〕 여왕 암살 음모와 관련된 배빙턴사건이 드러나게 되어 1587년 2월 메리 스튜어트는 처형되었다. 영국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을 네덜란드로 파병하였는데, 그것이 그때까지의 해상에서의 각축을 가중시켰고 드디어 영국과 에스파냐는 전쟁상태로 돌입하였다. 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격퇴시켜 여왕의 명예는 크게 높아졌으나 전쟁은 장기화되었으며, 재정도 부족해졌다. 또한 94년부터 5년간이나 흉년이 들어 곡물가격이 크게 인상되었고 극도로 곤궁해진 서민에게 부과된 과중한 조세 및 징병 등으로 여러 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여왕을 핵으로 하는 정부쪽은 진부한 이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으므로 유효 적절한 법령을 만들 수가 없었다. 95년 아일랜드 북부에서 에스파냐의 사주로 반란이 발발, 98년 무렵에는 나라 전체적으로 확대되었다. 게다가 1601년 2월 그 진압에 실패한 총신인 에섹스백작이 반역함으로써 여왕을 실망시켰다. 그해 10월에 개회된 의회는 <독점특허>를 논의하면서 격화되었다. 여왕의 실질적인 양보와 훌륭한 연기 등으로 사태는 수습할 수 있었다. 그 때의 국민에 대한 헌신적 애정을 강조한 유명한 연설은 치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되었다. 1603년 여왕의 죽음과 함께 튜더왕조도 끝났으며,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 즉위함으로써 스튜어트왕조가 시작되었다.

〔통치의 특색〕 엘리자베스 1세는 군주권의 존엄을 중요시하여 여왕의 권위를 높이는 데 힘썼다. 통치를 할 때는 항상 의회의 협력을 구했으나, 대권사항(大權事項)에 의회가 관여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민심을 장악하기 위해 힘썼으며, 자주 시도된 순행(巡幸)도 그에 대한 일환이었다. 감정표현은 확실하게 하는 편이었으나, 신하는 잘 다스렸다. 많은 구혼자들을 물리치고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대권 유지에만 전념하였다. 해상발전에 관심이 많았으며, 드레이크 등의 해적행위를 도와준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또한 학문을 좋아하는 여왕의 치세 아래 문운(文運)이 융성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는 W.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영국르네상스의 전성기였다.

국가와 결혼한 엘리자베스1세

그리니치 출생. 튜더 왕조의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딸.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참수된 뒤 궁정의 복잡한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또한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귀 정책이 불만을 사게 되어 와이어트 반란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때, 그녀도 반란 가담의 혐의를 받아 런던탑에 유폐(1554)되는 등 다난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석방된 뒤 인문주의자 R.어스컴에게 그리스 ·라틴의 고전을 배우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외국어를 공부하여 역사 ·음악 ·신학에 능통하였다. 메리 1세가 죽자 뒤를 이어 25세에 즉위하였으며, 에스파냐 왕 펠리페의 구혼을 받았으나 즉위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그녀의 오랜 치세는 영국의 절대주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므로 국민으로부터 ‘훌륭한 여왕 베스’라고 불리며 경애의 대상이 되었다.

종교정책에서 전 여왕 메리 1세의 가톨릭적 반동에 의해서 신구 양파의 항쟁이 격화되었을 때, 여왕은 수장령(首長令)과 통일령(1558)을 부활하여 국왕을 종교상의 최고 권위로서 인정받도록 하였다. 동시에 전국민에게 국교회(國敎會)의 의식과 기도서를 강제로 지키게 함으로써 국교의 확립을 꾀하고 가톨릭과 퓨리턴을 억압하여 종교적 통일을 추진하였다. 의회에 대한 행정은 강제와 양보의 양면작전으로 조종하여 권한을 축소시켰고, 45년간의 치세 중에 의회를 열지 않은 횟수는 불과 10회였다. 추밀원(樞密院) 중심의 정치를 폈고, 정치범을 위한 성실청(星室廳) 외에도 종교범을 위하여 특설 고등법원을 설치하였다. W.세실, 월싱엄 등을 중용하고 베이컨, T.그레셤 등의 진언을 받아들였으며, 지방에서 명망 있는 사람을 치안판사로 임명하여 지방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그레셤의 제안을 받아들여 화폐의 개주(改鑄)를 단행하고, 금과 은의 가치를 일정하게 하여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물가의 앙등을 억제하였다. 또 도제조례(徒弟條例, 1563)에 의하여 노동시간 ·임금 등을 정하였으며, 빈민구제법(1601)에 의하여 인클로저 운동과 수도원 해산으로 인하여 토지를 잃은 농민의 무산화(無産化)를 방지하였다. 유리 ·제당 ·제분 ·금속 ·광산 등 각종 공업 분야에 독점권을 부여, 이의 보호육성을 도모하는 등 중상주의(重商主義)정책을 채용하였다. 특히 역점을 둔 공업, 이를테면 모직물공업의 발전은 상인의 해외 진출을 촉진하게 하였으며, ‘모험 상인조합(merchant adventurers)’에게 독점적인 면허장을 교부하여 보호하였다. 또한 회사조직에 의한 많은 무역 단체에게 특허장을 교부하여 조직함으로써 무역의 확대와 해외 진출을 도모하였다.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설립(1600)과, 월터 러리에 의한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 식민지의 기초가 확립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에스파냐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펠리페 2세의 구혼을 거절하는 한편 네덜란드의 독립을 도왔으며, 에스파냐의 미국과의 무역선을 F.드레이크와 J.호킨스에게 명령하여 습격함으로써 에스파냐 선박의 해상 지배를 위협하였다. 펠리페는 그녀를 폐위시키고 가톨릭파의 메리 스튜어트를 옹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메리 스튜어트가 처형당해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에스파냐의 해상지배는 무적함대의 패배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영국인은 국민적 자각이 높아져서 해상 발전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여왕의 치세 중 영국은 한 섬나라에서 대해상국으로 성장할 기초가 이루어졌고 ‘명랑한 잉글랜드’가 이루어졌으며, 문화면에서도 영국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국민 문학의 황금시대가 도래하여 셰익스피어 ·스펜서 ·베이컨 등의 학자 ·문인이 속출하였다. 이리하여 여왕은 ‘선녀여왕’으로서 온갖 영광의 상징이 되었고, 영국의 절대주의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590년 이후부터는 퇴색되어 ‘반독점 논쟁’에서는 하원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녀는 처녀여왕으로서 노쇠하여 죽었고, 처형된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제임스 1세가 후계자로 즉위하였다.


내용출처 : http://www.tgedu.net/student/tfowor/HTML/IMAGE/GU208.html


※ 빅토리아여왕 (Victoria, Queen ; 1819.5.24~1901.1.22)

영국의 왕(재위 1837~1901)으로서 아버지는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공(公)이다. 하노버왕가의 마지막 군주로서,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독일 출신의 어머니와 독일계 보모(保姆)의 손에서 엄하게 자랐다. 즉, 조지 3세는 자녀를 15명이나 낳았지만, 맏아들인 섭정왕자(나중에 조지 4세)의 딸 샬럿 공주가 1817년에 죽자 조지 3세의 직계손 가운데 생존자는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왕위 계승자를 얻기 위해 섭정왕자의 아우인 클래런스·켄트·케임브리지 공작 등 세 사람이 1818년에 결혼했다. 다음 번 영국 군주의 아버지가 되기 위한 이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조지 3세의 넷째 아들인 켄트 공작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가 낳은 외동딸은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에드워드가 죽고 1820년에 조지 4세가 왕위에 오른 뒤, 빅토리아의 왕위계승 서열은 요크 공작(1827 죽음)과 클래런스 공작(나중에 윌리엄 4세)에 이어 3번째가 되었다.

빅토리아는 독일 태생의 어머니와 독일 코부르크 출신의 가정교사인 루이즈 레첸과 함께 켄싱턴 궁에서 단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공주에게 아버지 노릇을 해준 사람은 외삼촌이자 사촌 형부(샬럿 공주의 남편)인 레오폴트였는데 그는 1831년에 벨기에 왕으로 선출되어 떠날 때까지 영국 서리 주 에셔 근처에 살고 있었다.

빅토리아의 어린시절은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의 조언자인 존 콘로이 경의 농간 때문에 날이 갈수록 불행해졌다. 콘로이는 '못된 삼촌들'이 어린 공주를 위협하고 있다고 부추겨 공작부인과 합세해서 빅토리아를 친가쪽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고립시키고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온갖 술수를 부렸다. 그러나 의지가 강한 빅토리아는 가정교사 레첸의 도움을 얻어 이 시련을 이겨냈다. 빅토리아는 어머니한테서 멀어졌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어린시절의 기억 때문에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했다. 백부(伯父)인 윌리엄 4세가 죽자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하노버왕가에서는 여자의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노버왕가가 성립한 이후로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일군주 관계는 끝나고, 그녀는 영국 왕위만을 계승하였다.

즉위 당시의 총리 W.L.멜번이 어진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그녀를 지도해주고, 또 아버지가 생전에 휘그당과 가까웠던 관계도 있어서, 초기에는 자유당에 호의적이고 보수당 내각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1840년 사촌인 색스코버그 고터가(家)의 앨버트공(公)과 결혼하였다. 그에게서 왕실 통치의 요체와 궁중 생활의 미덕을 배웠다. 곧이어 자녀들이 잇따라 태어났다. 빅토리아는 1840년에 제1왕녀(비키)를 낳았는데, 비키는 1858년에 프로이센 왕세자와 결혼하여 훗날의 독일제국 황제인 빌헬름 2세의 모후가 되었다. 영국 왕세자(나중에 에드워드 7세)는 1841년에 태어났다. 1843년에는 헤센 대공비가 된 앨리스 공주가 태어났고, 1844년에는 뒤에 에든버러 공이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된 앨프레드 왕자가 태어났으며, 1846년에는 헬레나 공주(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제후인 크리스티안의 아내), 1848년에는 루이즈 공주(아가일 공작부인), 1850년에는 아서 왕자(코노트 공작), 1853년에는 레오폴드 왕자(올버니 공작), 그리고 1857년에는 비트리스 공주(바텐베르크의 제후인 하인리히의 아내)가 태어났다. 여왕의 첫 손자는 1859년에 태어났고, 첫 증손자는 1879년에 태어났다. 여왕이 죽었을 때, 살아 있는 증손자는 37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결혼 초 독일 출신인 공은 영국에서 백안시(白眼視)되고 그녀도 애정을 가지지 않았으나, 고결한 인격과 풍부한 교양으로써 여왕에게 좋은 조언자와 이해자가 되어, 공사(公事)와 가정생활에서 그녀를 두루 뒷받침하였다. 이기적인 데가 있던 그녀가 국민이 자랑하고 존경하는 여왕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공에게 힘입은 바가 컸으며, 그녀도 차차 공의 인품에 감화되어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1861년 12월 4일 공이 42세의 나이로 죽자 그녀는 비탄에 잠기어, 버킹엄 궁전에 틀어박힌 채 모든 국무(國務)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B.디즈레일리의 설득으로 차차 마음을 바로잡고 동시에 그가 거느리는 보수당에 동조하였으며, 1877년 그가 바치는 인도 여제(女帝)의 제관(帝冠)을 받았다. 9명의 자녀를 두었고 독일 ·러시아 등과 친척 관계를 맺었으며, 행복한 말년을 보낸 뒤 보어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 64년간의 치세(治世)를 마쳤다. 여왕의 치세는 빅토리아시대로서 영국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자본주의의 선두 선진국이 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디즈레일리와 W.글래드스턴으로 대표되는 2대정당제(二大政黨制) 의회정치가 전형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외교면에서도 영광스런 고립을 지키면서 그 동향(動向)이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빛나는 시대에 살면서도 그녀는 ‘군림(君臨)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랐다. 즉, 여왕 부부가 스코틀랜드나 아일오브와이트에서 자주 시간을 보낸 것은 영국 군주제가 새로운 유형으로 바뀌었다는 증거였다. 앨버트와 빅토리아는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오붓한 사생활을 추구하여, 중산층 국민과 비슷한 생활 방식을 채택했다. 앨버트는 지적 문제와 과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빅토리아의 취미는 대다수 영국 국민의 취미에 더 가까웠다. 빅토리아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즐겼고, 서커스와 밀랍 전시회를 후원했다. 많은 사람들은 빅토리아가 고상한 체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빅토리아는 또한 안식일 엄수주의자도 아니었다. 여왕은 발모럴 성에서 가난한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지만, 그래도 사회를 보는 안목은 별로 높아지지 않았다. 1846년에 빅토리아와 앨버트는 기근에 시달리는 아일랜드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곡물법(영국 곡물 가격을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하는 보호 무역법) 폐지를 지지했지만, 그들 부부는 여전히 아일랜드의 비극보다 오즈번 왕궁 건설과 대외정책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게다가 빅토리아는 정부의 차티스트(광범위한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 탄압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영국 노동자들이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며 여왕에게 충성한다고 믿었다. 1848년에 런던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대규모 차티스트 시위가 실패로 끝나자, 여왕은 대다수 국민의 충성심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강한 개성으로 강경하게 적극 외교를 밀고 나가는 H.J.파머스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보수주의로 기운 후반기에는 글래드스턴의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본분을 지킬 뿐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영국 군주의 패턴을 확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