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성공회의 파격…이란출신 여성 주교에 이어 최초 흑인여성 주교 탄생 |
2017년에는 영국 성공회 최초 이란 출신 여성 주교 탄생…英러프버러 지역 주교로 |
기사입력: 2019/06/30 [08:45] 최종편집: | ⓒ 매일종교신문 |
문윤홍 대기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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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성공회는 최근 파격적으로 주교를 임명하고 있어 주목된다. 2017년 이란 출신의 여성 주교가 탄생한데 이어 이번에는 최초의 흑인 여성 주교가 탄생했다.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로즈 허드슨 윌킨 주교는 오는 11월 영국 잉글랜드 켄트주(州)의 도버시의 새 주교로 공식 임명된다.
윌킨 주교는 1982년 자메이카를 떠나 웨스트미들랜즈주(州)에서 성공회 신앙을 훈련 받았으며 1994년 여성 사제로 서품됐다.
그는 더 많은 흑인과 소수민족 성직자가 임명돼야 한다고 평소 주장해왔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반대하는 성명에도 나섰다. 저스틴 웰비 켄터베리 대주교는 6월27일(현지시간) 윌킨 주교의 임명을 “역사적이고 획기적”이라며 “영국 내 소수 민족을 위해 앞장 선 최근 가장 영향력 있는 주교였다"고 소개했다.
2017년에는 영국성공회 최초 이란출신 여성 주교 탄생
영국성공회 레스터교구는 굴리 프란시스 데콰니 부주교의 주교 임명식이 2017년 11월30일 캔터베리대성당에서 열렸다. 데콰니 주교는 영국 러프버러 지역 주교가 됐다.
데콰니 주교는 스스로 ‘중간 지대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인구의 대부분이 시아파 무슬림인 이란 이스파한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에서 유일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는 이란성공회 주교였고 어머니도 주교의 딸이었다. 이질적인 환경 속에 자라난 데콰니 주교는 학교에서는 이란어를 사용했고 집에서는 영어를 사용했다.
몇몇 이란인은 성공회 신자인 그의 가족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가 14세였던 1979년 이슬람원리주의를 내세운 이란혁명이 일어나자 무장 괴한이 그의 어머니에게 총격을 가해 부상을 입혔다. 1980년에는 오빠마저 이란 정부 요원에 의해 살해돼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데콰니 부주교는 음악과 신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영국 노팅엄대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브리스톨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해 ‘중세시대 종교 페미니즘’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사제 서품을 받기 전까지 BBC방송에서 종교부문 PD로 일했다. 세 아이의 어머니인 그는 런던 왕립음악원에서 사역하다 2004년 육아 휴직을 했다. 2011년 복직해 피터버러 교구에서 사제 교육을, 2012년에는 교구 여성사역 고문을 맡았다.
영국성공회가 영국 내 소수민족 출신 주교를 임명한 데는 영국교회가 직면한 소수민족 공동체 선교의 시급성이 고려됐다. 2011년 설문조사 결과, 영국 인구의 15%는 소수민족 출신이지만 영국성공회 안에서 소수민족 출신은 성도와 성직자가 각각 7%, 3%에 불과했다.
데콰니 부주교의 주교 임명에 이어 이번에 월킨 주교의 임명으로 영국성공회 내 소수민족 출신 주교 수는 4명으로 늘었다. 소수민족 출신 첫 주교는 우간다 태생의 존 센타무 주교로 1996년 임명됐다. 데콰니 주교는 “흑인과 아시아인 등 소수민족 출신이 교회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며 “이민자 출신인 경험을 살려 배경과 문화가 다른 이들을 교회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성공회(The Anglican Church, 聖公會)는 어떤 종교단체인가
1534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해나간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따르는 교회를 총칭하는 말이다. 성공회라는 명칭은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교회에 관한 신앙고백 가운데 성(聖)과 공(公) 두 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밖에 영국 국교회, 영국교회, 영국성공회, 잉글랜드교회, 앵글리컨처치라고 하며, 미국의 성공회는 주교감독제교회라는 의미의 에피스코팔교회(Episcopal Church)라는 명 칭을 사용한다.
영국에 처음으로 가톨릭이 전파된 것은 1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596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 1세(540∼604)가 어거스틴(?∼604)과 수도사 40명을 영국에 파견한 이후 로마가톨릭은 영국교회는 물론 정치적으로 영국을 지배하였으며, 교회법정에서는 국가의 사법권을 대행했다. 성공회의 개혁은 헨리 8세(1491∼ 1547)와 캐서린 왕비의 결혼무효소송으로 시작됐다.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이 소송을 거절하자, 헨리 8세는 의회를 소집하여 1534년 국왕지상법(國王至上法) 을 발표한 데 이어, 1536년 로마의 감독권을 폐지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개혁은 대주교 크랜머에 의해 프로테스탄트적 방향으로 진행됐으며, 크랜머는 1549년 성서적 요소를 회복시킨 공동기도서를 만들었다. 1553년 여왕 메리 1세(15 53~ 1558)가 로마가톨릭으로 복귀했으나,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즉위 후 종교개혁의 정착기를 맞이했다.
1559년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포용하는 기도서를 제정하고 1563년 중용 노선을 추구하는 39개 신조를 발표해 가톨릭적이며 개혁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형성하게 됐다. 1570년 교황 비오5세가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자 성공회는 로마교회와 완전히 갈라섰다.
성공회는 온건한 칼뱅주의로, 세례·성찬례는 성사로 혼인·견진·고해·서품·조병을 예식으로 행하며, 구약과 신약 66권 외에 외경(外經) 14권을 준정경(準正經)으로 삼고 있다. 신앙의 판단은 성서와 이성, 전통에 의하며, 다음의 람베드-시카고 4개 조항을 신앙적 기준으로 삼는다.
① 구약과 신약 66권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②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은 그리스도신앙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선언이다. ③ 세례와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두 가지 성사다. ④ 역사적 주교직은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적절한 처리방법이며,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성직에는 주교, 사제, 부제의 세 계급이 있다. 네 개 이상의 교구가 있으면 관구를 형성할 수 있고, 교구는 많은 전도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도구에는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교회가 속해 있다.
근세 영국의 해외 진출에 따라 성공회는 북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로 확대되었으며, 대표 주교인 캔터베리 대주교관구와 통공(通共)관계에 있는 모든 교회를 일컫게 되었다.
세계성공회는 중앙헌법이나 연방적 통치의 체제를 갖지 않으며, 독립관구가 되지 못하여 캔터베리 대주교 관할 하에 있는 소수 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성공회는, 나라마다 독립된 관구나 관구군을 갖고 독립적인 헌장과 교회법 체계를 갖추어 독자적으로 운영된다.
●신앙과 예전(禮典)
성공회의 신앙적 특징은 ①복음을 전하려는 왕성한 전도의욕, 학문에 대한 존중, 교회의 토착화 정신이며 ② 동·서 교회로 분리되기 이전에 공의회(公議會)가 결정한 모든 교리를 그대로 지키고, 성경과 일곱 가지 성사(聖事)를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으며, ③극단적인 그리스도교와 가톨릭교 사이에 중도(Via Media)를 걷는 것이다.
첫째, 성공회는 중용(中庸, Via Media)의 신앙
구교와 신교 사이의 극단적인 것을 지양하고 서로의 장점을 포용하려는 전통을 세웠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세계교회 일치운동(에큐메니칼 운동)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둘째, 성서와 함께 하는 신앙
모든 교파가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성공회는 일찍부터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이미 14세기에 라틴어 성서를 영어로 번역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16, 17세기에는 영어 성서를 번역하는 빛나는 기록을 낳았다. King James Version(흠정역 성서)은 이러한 성공회 전통의 산물이다.
셋째, 초대교회의 신앙
성공회는 최초의 교회분열인 동서교회(로마교회와 정교회)의 분열 이전의 초대교회의 신앙을 지킨다. 그래서 성공회는 공적인 신앙고백으로 교회분열 이전의 모든 교회가 같이 고백한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을 보유하고 있으며, 초대교회의 예배 형태인 말씀과 성만찬이 하나로 어울린 성찬례를 통하여 하느님을 예배한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성공회는 성서에 근거하고, 전통을 존중하며 학문과 이성에 의해 재해석되는 공번되고(가톨릭적이고), 사도적인 신앙을 지켜왔으며 지금도 이를 선포하고 있다.
성공회의 교리 성격을 온건한 칼뱅주의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성경의 권위와 신앙의인(信仰義認)의 교리를 중시하고 원죄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한때 영국교회는 교리의 표준을 39개조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서』, 에드워드 6세 때 발행된 2권의 설교집으로 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공회의 신앙적 전통은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공회기도문(聖公會祈禱文)』에 수록되어 있으며, '42개조 신앙고백'을 기본 신조로 하고 있다.
성공회는 예전적(禮典的) 교회로서, 작성된 기도문에 의거해 모든 예전(禮典)을 집행한다. 성세성사(세례식)와 성체성사(성찬식) 외에 고해성사·혼인성사·견진(堅振)성사·종부(終傅)성사·신품성사(성직 안수식) 등 일곱 가지 성사를 행한다.
●성직
성직에는 주교(主敎:Bishop), 사제(司祭:Priest), 부제(副祭:Deacon) 세 계급이 있다. 신품성사, 견진성사는 주교만의 권한이며 또한 관할하의 모든 교회(주교구)의 장(長)으로, 성체성사를 비롯한 모든 성사의 집행을 감독한다.
주교는 교구의회에서 선출되어 다른 세 주교의 동의를 얻어 임명되는데 총대주교·수도주교·대주교·주교·명의주교 등으로 구분한다. 사제는 가톨릭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신품성사(神品聖事)와 미사성제(聖祭)를 봉헌하며, 복음전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을 뜻한다.
교회법상 사제는 신부를 말하는 것으로 탁덕(鐸德)이라도 하며 전도구(傳道區:Parish)를 돌보며 미사를 집전한다. 부제는 사제를 보좌하며, 성사집행권은 없으나 설교할 수 있고, 교회의 제반 업무를 담당한다.
●행정구역과 교리
성공회는 가톨릭 신앙을 지키며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신조(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성아타나시오신경)를 믿는다. 구약성경 39권과 신약성경 27권을 정경(正經)으로 정하여 믿음과 도덕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밖에 외경(外經) 14권을 준정경(準正經)으로 삼아 도덕의 교훈서로 읽고 있다.
성공회 교리의 특징은 사도적 계승, 전례와 공기도(公祈禱), 말씀과 성사의 균형, 전통·성서·이성 존중, 경건 및 학문적 전통, 교회 행정의 대표적인 형태로서의 교구의회 의장인 주교의 존재, 이해와 관용의 전통, 음악·미술·연극에의 인간적인 창의성 존중 등에 있다.
전세계의 모든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성공회는 164개 국가에 약 1억 명의 신자가 있다. 세계성공회는 31개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관구와 450개가 넘는 교구를 가지고 있다. 교구(Diocese)란 주교의 행정적·사목적 지도하에 있는 본교회와 선교교회의 집합체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교회가 속해 있다.
관구(Province)는 민족교회 혹은 지리적인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세계성공회 공동체 내에는 많은 관구들이 있고, 그 안에는 많은 교구들이 소속되어 있다. 4개 이상의 교구(敎區)가 있으면 관구(管區)를 형성할 수 있고, 관구는 보통 한 사람의 대주교(Archbishop) 혹은 한 사람의 수좌주교(Presiding Bishop) 관할에 있다. 언어, 문화, 정치적 상황 등 다양한 지역적인 성격을 지닌 각국의 성공회는 영국성공회의 선교정책에서 탈피하여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지역·민족·국가에 맞는 자치교회를 형성하고 있다.
●각국의 성공회
현재 캔터베리 대주교 관할에 있는 각국의 대다수 성공회는 독립된 관구나 관구군(群)을 갖고 독자적으로 운영한다. 이들은 전세계 164개국에 1억여 명의 성공회 신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제적인 문제나 교회 문제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세계성공회(Anglican Communion)는 중앙헌법이나 통치체제가 없는 모임으로 2, 3년마다 평신도와 성직자들이 다함께 참여하는 회의기구다. 교구와 관구의 상호협력, 선교에 대한 공도의 협력,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다. 전세계 각 지역에 있으며 교구와 관구, 지역교회들로 구성됐다.
이들 각국 교회간의 관계는 영국성공회에서 출발하여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니면서 자유로이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공동의 역사와 전통, 선교사업에 상호책임을 지는 동시에 각자의 독립성을 띤다.
현재 전세계 성공회 주교들은 1867년부터 10년마다 한번씩 세계주교회의인 람베드회의(Lambeth Conference)를 개최하고 있다. 이 모임은 세계 각지에 흩어진 성공회에 대하여 공동체의식을 강화하고 교회의 당면한 과제를 협의하자는 목적에서 설립됐다. 이전에는 영어문화권 지역에서 강한 결속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비영어권 지역에서도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또한 2, 3년마다 개최하는 관구장회의(Primates Meeting)는 지역교회를 대표하는 관구장들로 구성되어 지역교회와 관구들 사이의 문제를 논의하거나 세계성공회협의회가 결의한 사항이나 문제들을 협의한다.
●대한성공회
성립: 1880년 후반에 영국의 외방선교 단체의 사제가 잠시 부산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한 일이 있지만,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11월 코프신부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됨으로써 시작됐다. 한 사람의 한국인 교인도 생기기 전에 주교가 선임되고, 그로써 시작한 대한성공회의 예는 흥미로운 일이다. 실상 한국인에게 세례가 베풀어진 것은 주교 축성으로부터 7년 후인 1896년 6월13일 강화에서였다.
업적 : 코프주교 취임 초 수년 동안 선교활동은 다소 부진했다. 그러나 그때 코프 주교의 감독 하에 이루어진 두 가지 사업이 있었다. 하나는 인천, 서울 등지에 기도소를 겸한 병원이 세워져서 일반환자들과 고아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던 것이다. 이 사업에는 주교와 그를 보좌하는 소수의 사제들과 소수의 수녀들이 합세했다.
또 하나는 후에 정동에 성마리아와 성니콜라 대성당을 지은 트롤로프 신부가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 개신교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성서 번역사업에 참여한 일이다. 성공회의 의료, 복지, 교육사업은 일제(日帝)통치, 세계대전, 6.25한국전쟁 등으로 발전을 보지 못했지만, 그 전통은 오늘날에도 살아있고, 성서번역과 보급에 대한 전통적 관심은 성공회가 성서공회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해온 것으로서 반증된다.
이 시기에 이룩한 기념할 만한 사업은 강화읍에 세운 성베드로와 바오로 성당의 축성(1900년 11월15일)이었다. 서구의 바실리카 양식과 불교사찰 양식을 조합해서 세운 이 성당은 한편으로는 초기의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의 기틀을 보여주는 증거물이고, 또 한편으로는 한국의 그리스도교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기념물이자 강화도의 명소이기도 하다.
정착과 발전: 1900년부터 1945년까지의 약 반세기 동안 성공회는 정착과 발전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서 1940년 이전에 영국이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제의 수와 맞먹는 20여명의 한국인 사제가 나왔다. 그리고 1910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에 서울, 강화, 수원, 천안, 진천 등지에 성당이 들어서고, 황해도 백천, 연백에까지 교세가 확장했으며, 교우가 5000명을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 인천에는 성미카엘 신학원이 설립되었고, 1926년에는 숙원이었던 정동 대성당의 준공을 보았다.
1930년 일제하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선교활동을 추진한 트롤로프 주교가 객사하여 대성당 지하성당에 묻힌 후, 그 뒤를 이은 쿠퍼주교 때에는 북한 지역에서의 사업이 큰 활기를 띠었으며,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영국 선교사들이 강제로 한국을 떠났을 때 남한의 성공회 교세보다 북한지역에서의 교세가 더 컸을 정도였다. 선교사들이 비우고 간 성공회는 종전 때까지 일본인 주교의 관할 하에서 최소한의 성사생활을 계속했을 뿐, 선교. 교육. 사회봉사는 붕괴와 침체를 면치 못했다. 종전(終戰) 후 쿠퍼주교가 다시 돌아와서 교회 재건에 몰두하였으나 그가 사랑하던 북한지역의 교회는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다.
현황 : 한국 성공회는 1965년에 두 개의 교구(서울과 대전)로 분할되어 최초로 한국인 사제(이천환)를 주교로 축성하여, 서울 교구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그후 1973년에는 대전교구를 대전과 부산 두 교구로 나누어 그 두 교구장에 다시 한국인 주교가 착좌해서 그로부터 한국 성공회는 한국의 교회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 사람은 최후의 선교사 서울주교 데일리 교구장이다. 그가 교구장으로 부임해서 그 자리를 이천환 주교에게 넘기기까지 10년 동안 (1955-1965년) 한국 성공회는 몇 가지 뜻 깊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기독교 연합사업(N.C.C.)에의 참여, 지역사회 개발과 기아해방운동 전개, 평신도 교육과 자급 사제직의 시도, 산업선교의 도입, 성미카엘 신학원 재개, 확충 등이 그것이다. 1965년 이후의 성공회 역사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선교정책을 변천하는 한국과 세계의 상황에 맞추어서 전개한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행정조직: 교회행정조직이 정비되어 각 교구장 산하에 교무국이 설치되고, 1983년 1월부터 세 교구를 망라한 전국의회의 산하에 교무원이 설치되어, 세 교구의 균형있고 효율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기구를 갖추었다.
성공회의 최소단위는 전도구이며, 전도구에는 영성체자들이 선출하는 교회의원으로 구성되는 교회위원회가 있고, 각 전도구의 사제와 교회위원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교구의회, 그리고 세 교구의 교구장과 교구의회가 선출하는 사제와 평신도들이 구성하는 전국의회가 있다. 교구의회와 전국의회는 대한성공회의 헌장이 구정하는 바에 따른 교회의 최고 입법기관이다. 이와같은 의회제도는 세계의 모든 성공회의 공통적 관습이며, 의회에서의 의결에는 주교, 사제, 평신도가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고 어느 누구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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