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일 연중22주 (다해) 루가14:1,7-14
<온전히 주님을 향한 마음 >
우리나라 나이드신 어르신들에게 질문을 했어요.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은 좋은 대학 나와서 잘 풀려서 출세했어요.
고위직에 올라서 텔레비전에도 가끔 나오고 아주 잘나갑니다.
그런데 부모님한테 용돈을 챙겨 드린다던지 자주 내려와서 찾아뵙던지 그런 것은 잘 못해요. 관심이 덜 해요.
그런 반면에 작은 아들은 아버지 가업을 물려받아서 농사지으면서 나름대로 지역에서 자리를 잡았어요.
그래서 부모님 용돈도 잘 드리고 자주 찾아와 뵙고 해요.
두 아들 중에서 누가 효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어르신들이 첫째 아들이라고 대답한답니다.
입신양명, 출세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이름을 널리 알린다는 고사성어가 있어요.
이 말에는 부모의 이름을 알려서 효도한다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아들이 출세하면 부모가 아들을 잘 가리켰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여러분,
동물의 왕국을 보면 동물들이 초원에서 평화로울 때도 있지만 다투기도 합니다.
모든 동물들이 잘 지내다가도 서로 다툴 때가 있어요.
왜 다툽니까? 서열 때문에 그러는거에요.
끊임없이 서열싸움하느라 으르렁거리고 치고받고 합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도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아요.
서로 높아지려고 서로 더 많은 힘을 갖으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나라가 대학 진학률이 상당히 높은데 학벌이 좋아야 좋은 대우받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니까
대학 들어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향은 학문을 중요시하고 농, 공, 상에 대해 천하게 여기는 유교의 영향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에 안동에 있을 때 안동이 어떤 곳인가 알아보려고, 안동역사 조사를 해서 엣세이를 쓴 적이 있어요.
안동이 농경시대에 경작지가 적은 지역이다 보니 할 일이 별로 없었어요.
논밭의 소출이 적으니까 굉장히 가난했던 것 같아요. 먹을 것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고려말부터 유학에 입문하고 과거 준비하는 출세지향적인 풍토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안동 김씨들의 세도가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거에요.
이런 유교의 문화 가운데 개신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학교를 많이 세웠습니다.
학교 세우고 가르치는 것이 교회가 하는 일이라고 보였지요.
그래서 기독교를 서학이라고 했어요.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으로 알았어요.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 ‘교’자가 ‘가르칠 敎’로 한 것도 6세기에 중국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유학자들이 그렇게 붙인 거라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가르치고 배우고, 그래서 지위가 높아진다
이런 인식이 초기부터 있어왔던 것입니다.
배웠다. 많이 배웠다 하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거에요.
그래서 지금도 배워야한다. 대학가야 한다.
이런 풍토는 유교와 함께 기독교의 영향도 조금은 있다고 보여집니다.
여러분,
주님은 높아지려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정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필립비 2장 5절-7절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정작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거나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우월하다, 내거 너보다 좀 낫다’ 는 것을 나타내보이거나 증명하려고 애씁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마음 속에서 항상 그런 경쟁을 하고 있어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에요.
높은 자리,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권위의 상징이고 내가 인정받았다고 하는 복잡한 정치적 구조를 나타냅니다.
예전에 대가족으로 살면 밥상을 서 너 개씩 차려서 제일 높은 권위자, 할아버지, 아버지,
그 다음 할머니하고 남자들, 그 다음 여자들, 아이들 이렇게 먹었잖아요.
아니면 여자들은 밥그릇을 상위에 얹어놓지도 못하고 밥상 아래 바닥에 놓고 먹었습니다.
그게 생활과 습관, 문화 모든 면에서 그런 의식이 있었지요.
오늘이 여성선교주일입니다.
교회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루가복음 14장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처럼
늘 어떤 결정하는 자리나 위치에서 제외되어 있었어요.
하느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사명은 부드러움과 섬세함 등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 남성과 함께 상호보완함으로 세상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성들 스스로 노력하면서 서로 배려해야할 부분도 많이 있어요.
또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여성과 상호보완해야 할 때 이해하고 배려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루가복음 14장에서 바리사이파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온 손님들이
자기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스스로 자기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어요.
권위는 스스로 주장할 때, 이미 그 힘을 잃어버립니다.
권위는 다른 사람들이, 남들이 인정하고 세워져야 권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권위와 권위주의는 구분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먼저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초대를 받았을 때 차라리 가장 끝에 있는 자리에 가서 앉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이 와서 당신 자리는 여기요. 하면 더 높은 자리로 안내해준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잔치집은 각 자리마다 앉을 사람을 결정하는 권한이 주인에게 있습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앉고 싶다고 해서 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결정하기에 따라서 앉는 자리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잔치 집에서 앉을 자리를 주인이 결정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관심이 하느님께서 관심하시는 것에 따르시기를 원하십니다.
저 자리에 내가 앉아야겠다. 또는 내가 앉아야지,
우리의 관심과 마음이 온통 이런 정치적인 것에 가 있는 것에 대해서
예레미야서에서 말씀합니다.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생수가 솟는 샘인 나를 버리고
갈라져 새기만하여 물이 괴지 않는 웅덩이를 팠다.”
우리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지 않으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리거나,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리 다툼이나, 자리 차지 하려고 열심히 힘써서 시간을 보내고
시간을 보내지만 삶 속에 아무런 결실이 없어요.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라고 하지요.
여러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나와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나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만남, 시간을 갖으면서 나만이 아는 하느님,
나만이 경험한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죠.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는 성경구절이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골방은 혼자 들어가는, 누가 들어간지도 잘 모를 수 있는
골방에 들어간 것은 하느님을 만나러 독자적으로 혼자서 만나러 들어간다는 뜻이죠.
그 하느님은 나를 훤히 아십니다.
시편 139편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서도 아시고
멀리 있어도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 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하시고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 할지 다 아시기 때문에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고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그 오른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가장 관심갖으시는 사람은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
잔치에 초대하면 와서 먹고만 갈 수 밖에 없는 형편과 처지의 사람들,
이런 분들은 잔치에 초대해도 잘 안올려고 할 수 있지요.
늘 무시당하고 소외되어 왔기 때문에 거절받아왔기 때문에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에 익숙해있어요.
실제로 식사한끼 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무료급식하는 곳이 곳곳에 있어요.
우리의 관심과 마음은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한 부부는 부인은 미국교포이고 남편은 중국교포4세인데
부인이 20대때인지 필립비서2장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낮은 곳으로 낮은 곳, 그래서 매년 우간다에 와서 봉사를 해요.
결혼할 때 축의금받은 걸로 우간다 시골에 학교를 지었어요.
이 분이 예일대 신학, 예배학, 합창, 네 과목을 공부한 석학이에요.
그 말씀에 감동을 받고 깨달아서 매년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서 거기를 와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행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께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합니다.
너희 주변에, 너희가 사는 지역에서, 잔치에 초대받을 수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으라고 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따뜻하게 사랑을 베풀어
한끼라도 따뜻하게 배부르게 먹이는 너는 행복하다.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에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식사만 있겠어요? 식사만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와 같은 사랑과 정성으로 주변에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나의 손을 내밀어주고 귀를 기울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인드, 사고방식이 교회생활의 기본이고 시작이며 출발입니다.
2독서 히브리서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십시오. 2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3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학대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같은 학대를 받고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은혜가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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