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우간다에 18년 5월 약 20일간 방문하였다.
성공회 네비교구에서 33년간 사역하시는 한 한국 여 선교사님을 만났던 적이 있다.(그때는 16년째되셨을 때다)
아프리카에 가서 그 분을 꼭 만나리라 염원이 있었던 참이다.
네비교구에서 캄팔라로 돌아오는 길에 사파리(스와힐리어로 여행이란 뜻) 중 만난 사슴가족, 국립공원에서
우간다 성공회(Church of Uganda)
우리에게 아프리카는 가뭄과 기아, 빈곤, 그리고 내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간 성공회와 관련해서 들려오는 아프리카는 부흥하는 교회로써 기분 좋은 소식들이 들려왔다. 우리와 다른 문화와 역사, 삶의 관습이 다른 분위기에서 다른 성공회, 우간다에서 보고 들은 성공회를 담아보기로 한다.
성공회의 전래와 순교자
우간다에 성공회가 들어온 시기는 1877년 부간다왕국 무테사 1세로부터 영국성공회의 선교사들(CMS소속)이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며 시작되었다. 그후 1894년 영국의 보호령에 들어가있다가 1962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885년 11월 15일, 무테사 1세의 아들인 므왕가 2세 재임 때 우간다의 첫 순교자가 탄생했다. 동부적도교구의 주교인 영국선교사가 왕에 의해 처형되었다. 또한 므왕가왕은 충성하던 젊은 시종들이 그리스도교에 적극적인 신심을 갖는 것을 보고 박해하였다. 당시에 천주교도 성공회와 함께 유럽 열강들의 각축에 따라 들어왔는데 처형된 시종들은 10대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성공회 신자 23명, 천주교 신자 22명이다. 이들이 산채로 화형당하는 끔직한 처형장면은 이후에 수많은 우간다인들이 신앙에 귀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끌려가 처형받았던 곳이 수도 캄팔라 근교 “나무공고”(namugongo-‘끌고가다’란 뜻)이다. 이곳은 우간다 순교성지로 우간다를 포함하여 매년 르완다, 케냐, 수단 등 인접한 나라에서도 순례자들이 찾는다. 처형일인 6월3일은 우간다의 국경일로서 전 한 주간은 순교자를 기념하는 주간인데 필자가 갔던 날, 저마다 등에는 배낭을 짊어지고 50리터정도 되는 물통을 들고서 아프리카 특유의 붉은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채, 오랜시간 순교성지를 향하여 걸어 오는 순례자들의 행렬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천주교 순교자들은 1964년 교황 바울로6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우간다 네비교구 초대주교였고 대주교를 역임한 오롬비은퇴주교, 우간다기독교 지도자이며 아프리카 성공회 지도자이다.
동아프리카 부흥
1929년 9월 22일 흑인 그리스도인 지도자 시므온 은시밤비(Simeon Nsibambi)가 백인 의사 조 처치(Joe Church)를 만나 함께 성령충만을 기도하며 동아프리카의 부흥은 시작되었다. 개인의 회심과 금주, 정직함, 엄격한 윤리와 용서를 강조하는 실천을 방탕으로 한 복음주의 영성이 20세기 초 성령운동의 움직임으로 등장하는 이 운동은 주로 성공회 교회들을 중심으로 번져가며 다른 교파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간다, 르완다, 부룬디, 케냐, 탄자니아 등 다섯 나라 전역에서 지리적 사회적으로 확산된 동아프리카 부흥은 이 지역 기독교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1885년 베를린회의 이후 서구 국가들의 식민지 확보와 이를 바탕으로 제국 경영을 위한 생산적인 공급처로 활용하고자 독일(탕가니카와 잔지바르), 영국(우간다, 케냐), 벨기에(르완다, 부른디)의 식민지 관료들이 들어와 영토 착취, 정부를 조직하고 관리하며 아프리카인들을 교육하는 외부 개입에 대한 반응이었다. 둘째, 유럽의 아프리카 쟁탈전은 이미 노예제와 부족 간 갈등으로 시련을 겪고 있던 가족적, 부족적 제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작위적으로 경계를 재설정하고 식민지가 되면서 전통적인 아프리카인들의 삶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광범위한 중앙 통제와 단일화된 국가적 목표를 지닌 국민국가라는 유럽의 관념을 아프리카의 광대한 지역에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이다. 즉 전통적인 부족 생활 방식을 뿌리부터 흔드는 식민지 정책에 대해 엄청난 분노, 이주, 사회적 재앙, 가열된 부족 갈등같은 불안정한 상황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부흥은 우간다 북부와 케냐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부흥이 확산되며 우간다 젊은 지도자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이 정신을 갖고 활약한 이들을 ‘발로콜레(구원받은 자)’라고 부른다. 그 부흥 가운데 이런 말이 떠돌았다. ‘부서지는 것이 부흥의 시작이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명의 길이다.”
1950년대에 아프리카 성공회 교회들이 아프리카인 주교를 임명하게 되었고, 부흥에 참여하며 경험을 쌓은 목회자들이 주교직과 지도적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런 경향의 지도력이 아프리카 현지인들에게 이양되는 계기도 되었다.
부흥의 물결은 1970년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디아민의 독재정권(1971-1979)아래에서 주춤거렸으나 성공회 지도자가 된 발로콜레들은 정권에 정면으로 비판하는 지도력을 보였다. 권력에 맞서 진실을 말하려고 애쓴 성공회 대주교 “자니니 루움”은 암살당했고 다른 주교는 해외로 도피 했다. 케냐에서도 성공회 대주교인 데이비드 기타리가 부패정권에 대항하는 유력인사가 되었다.
동아프리카에서 부흥은 특별한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 속에서 아프리카인이 서구 세계에서 발전한 기독교 신앙적 요소를 자기 주도적으로 수용함에 따라 기독교가 아프리카적 형태를 띠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지금까지도 학교, 선교단체, 거의 모든 교회가 분명한 복음주의적 특징을 띠고 있는 것은 동아프리카 부흥의 항구적 유산이다.
세계성공회 미래회의
아프리카 교회의 복음주의적인 상황은 성공회의 동성애자 수용과 서품 등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며 2008년 람베스회의에 우간다, 케냐, 나이지리아, 르완다의 성공회 주교 230명이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이 해에 세계성공회 주교 800여명 가운데 650명만이 참석했다. 당시 회의를 주도한 우간다 오롬비 대주교 등 아프리카 291명의 주교를 포함한 1148명의 전 세계 성공회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세계 성공회 미래회의(Global Anglican Future Conference)에 모여 범(汎) 성공회 포럼(pan-Anglican forum)을 구성하고 5년마다 회의를 하고 있으며 올해 모임을 개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아프리카 주교들이 동아프리카 부흥의 발로콜레 출신들이다.
우간다에 동성애를 거부하는 정서는 성공회 전래 초기에 있었던 순교와도 연관이 있다. 우간다 므왕가 왕이 동성애자였는데 그에 의해 10대와 20대 왕궁 시종출신 순교자들이 왕의 동성애 요구를 거절함을 이유로 산채로 화형되었다. 이들이 처형된 나무공고 순교성지는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에게 거룩한 순교성지로 영적 부흥의 발원지처럼 기념일에는 매년 순례자가 수천에 이른다.
전세계 성공회교인을 8500~1억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성공회 신자는 우간다 1400만, 나이지리아 2500만이상 등 아프리카신자가 절반을 훨씬 넘는다.
우간다 성공회와 천주교 순교자 성지 나무공고에 순례객
화형당한 순교자들을 처형장면 기념 조형물
하느님께서 아프리카인들에게 주신 역동적인 춤과 음악에 대한 열정은 예배와 기도에서 유감없이 드러나며 공동체적인 시너지 효과도 담아낸다. 다음 세대 어떤 변화들이 있을지 관심을 갖고 기대해보면 좋겠다.
우간다 네비교구 전도자들 세미나 시작 전 찬양하는 모습 18.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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