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실과 성공회, 그리고 가톨릭
스위트 케이트의 작은 도전
대영제국을 50년 이상 통치하고 있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2세의 사촌으로 켄트(Kent) 공작이란 인물이 있다. 현직 여왕의 사촌이므로 엘리자베스여왕의 자녀 손자들과 함께 엄연히 후속 왕위의 서열에 들어가 있는 인물이다. 물론 직계가 아니만큼 상당히 먼 서열에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왕위 서열 리스트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대접을 받는 입장이다. 왕위 서열에 들어 있으므로 자연히 세간의 관심을 받지 않을수 없다. 영국 왕실로서는 왕실 친족이, 그것도 후속 왕위 서열에 들어 있는 사람이 일반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면 대단히 거북한 입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켄트공작에 대하여는 누구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철수라면 모를까? 켄트공작은 참으로 점잖은 양반이다. 때문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만한 일이 한번도 없었다.
켄크공작부인 스위트 케이트와 가톨릭 흄 추기경 (개종후 기념사진)
켄트공작의 부인(The Duchess of Kent) 역시 아주 기품 있고 온화하며 교양있는 여성이다. 공작부인의 이름은 캐서린 워슬리 (Katherine Worsley). 약 30년 전 켄트 공작과 결혼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명문 켄트가를 단정하게 이끌어 온 사람이다. 한마디로 착실표 부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캐서린공작부인을 ‘사랑스런 케이트’ (Sweet Kate)라고 부른다. 그런 켄트공작부인이므로 다른 왕실 사람들처럼 신문이나 잡지 나부랭이의 구설수에 오를 만한 일이 있을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 그렇지! 켄트 공작부인이란 사람이 있지. 그 분이야 그저 조용하고 품위 있는 분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정도였다. 바꾸어 말하여 특별한 관심은 두고 있지 않다고 할수 있다.
에드워드왕과 미국인 이혼녀 심프슨부인
왕실의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가? 멀리도 갈 것 없이 엘리자베스여왕의 큰아버지 에드워드(윈저 공)의 경우는 대단하지 않았던가? 세기적 로맨스라고 하는 심프슨부인과의 결혼 사건이다. 왕관을 택할 것이냐, 사랑을 택할 것이냐의 기로에서 결국 사랑을 택하여 왕관을 던져 버린 사건이다. 직계 가족을 살펴보면, 왜들 그러는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다. 지탄과 핀잔을 받기에 합당한 찰스(한국명 철수)황태자의 염문, 다이아나 황태자비의 스캔들과 뜻하지 아니한 죽음, 옛애인이라고 하는 말처럼 긴 얼굴의 웬 여자와 찰스의 결혼, 앤공주의 이혼과 불행한 가정생활, 둘째 며느리 사라 퍼거슨(Sarah Ferguson)의 분별없는 행동과 이혼, 더 앞서서 엘리자베스여왕의 단 하나뿐인 동생 마가렛 공주가 뿌린 피터 타운센드 대령과의 비련의 세기적 로맨스, 그리고 이혼... 정말 모두 왜 들 그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과거에는 왕실 사람들에 대한 세간의 가십이란 감히 있을 수도 없었다. 왕실에 대한 유비통신은 불경죄에 걸릴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 오늘날에는 사정도 달라졌다. 웬만큼 변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변했다. 왕실 사람들의 스캔들은 동네 술집(Pub)에서 팝콘이나 프릿첼을 대신하는 안주가 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영국의 왕실 사람들은 하루하루 힘든 나날을 보내는 서민들의 스트레스 해소 역할을 자청해서 해주고 있다. 왜냐면 TV에 나오는 왕실 사람들의 추태만발에 대하여 서민들로서는 그러지 않아도 살기 힘든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왕실 사람들을 향해 서슴없는 욕설을 퍼 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동네 약국의 소화제 및 신경안정제가 잘 팔릴 정도라는 것이다. 바야흐로 왕실 수난시대가 아닐 수 없다.
요즘 왜 이러나? 영국 왕실 사람들
스위트 케이트공작부인의 경우에는 지난 30 여년 동안 왕실가족의 일원으로서 왕실에 누를 끼칠만한 단 한 번의 구설수에도 오르내린 일이 없다. 항상 만면에 웃음을 띠고 사리가 분명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사소한 의무라도 소홀히 함이 없었던 그런 부인이었다. 그런 공작부인이었는데 사정이 달라졌다. 단연 온 영국을 휩쓰는 화제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무슨 사연 때문일까?
영국 왕실의 가족이라면 당연히 영국성공회 신자이다. 왕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켄트공작부인 역시 당연직 성공회 신자였다. 그러던 켄트공작부인이 어느 날 아침 런던 웨스트민스터 홀에서의 비공개 예식을 통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성공회 신자였던 일반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사실 하나로도 얘기꺼리가 되는 마당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사모 (성공회를 사랑하는 모임) 특별 회원격인 켄트 공작부인이 가톨릭으로 방향전환을 했다는 뉴스는 찰스나 훠기 (Fergerson의 애칭)등 그 어떤 왕실 가족들이 제작해 내는 너절한 가십에 비할 수 없는 중량급 토픽이었다. 온 동네 신문기자들이 켄트 공작부인에게 물었다. ‘왕실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그런 깜짝 쑈를 할수 있었나요?’ - 공작부인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건 개인적인 문제올시다. 왕실과 결부시키지 말아 주시옵소서!’
스위트 케이트의 가톨릭 개종은 왕실 사람들이 음식을 쩝쩝대며 먹는다든지, 음란한 전화 통화를 한일이 있다든지, 수영장에서 비키니로 수영하는 모습이 몰래 카메라에 찍혔다든지, 진드기 같은 신문기자들과 실랑이 하다가 한 대 치는 바람에 폭행죄로 고발을 당했다든지, 과속으로 경찰의 추적을 받았다든지 하는 그런 종류의 가십과는 차원이 다른 뉴스였다. 실상 사람들은 왕실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제공해 주는 너절한 가십에 어느 정도 면역되어 있었다. 그런 가십이 신문이나 잡지 표지에 실리면 그저 ‘츳츳.. 왜들 그래? 배부르고 등 따스하니까 그런가?’라고 말하면서 속으로 언짢아했을 뿐이었다.
인연의 시작
하지만 스위트 케이트의 금번 종교 호적변경은 달랐다. 화려하면서도 격정적이었던 지난날의 영화를 잊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영국의 백성들...그 백성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일종의 향수심을 일깨워 준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통과 역사에 대한 일종의 조용한 도전이라고 할수 있다. 어쩌면 켄트공작부인은 왕궁이나 교회의 케케묵은 장식장 안에 깊숙이 모셔져있던 파란과 영광이 점철되어있는 왕족들의 유골을 슬며시 꺼내 보이기 위해 그 장식장 문을 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 왕실과 로마 가톨릭간의 골수에 맺힌 관계(어쩌면 아무런 관계가 아닌지도 모르지만)를 실로 오랜만에 회상시켜주는 것이었다.
영국 왕가는 지난 3세기동안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탈 가톨릭’의 전통을 유지해 왔다. 그런 상황이므로 왕실 멤버중의 어떤 한 사람, 특히 왕위 서열에 들어 있는 사람의 친가족이, 느닷없이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모든 국왕은 당연히 영국의 교회, 즉 성공회 신자여야 했다. 국왕은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수호자이며 수장이기도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왕실 사람이 성공회를 뿌리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역사적으로 보아 왕실 성공회 신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일은 단 한 번뿐이었다. 저 멀리 17세기, 찰스 2세라는 인물이 임종할 때에 침상에서 공개적으로 성공회를 버리고 ‘난 로마 가톨릭이 좋아!’라면서 가톨릭을 받아 들였던 것이 유일한 사건이었다. 헨리8세 사후, 왕위에 오른 메리여왕의 경우에는 다르다. ‘블라디 메리’(Bloody Mary)라는 칵테일 명칭의 근원지 역할을 한 메리 여왕은 스페인 출신의 어머니를 따라 원래부터 가톨릭이었으므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죽음의 침상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찰스2세의 얘기로 돌아가서, 그가 그렇게 한 배경에는 어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지난 1백 50 여년에 걸쳐 영국 왕실에 있어서 종교 문제는 켄트공작부인이 주장할 수 있었던 것처럼 개인적 문제가 아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왕실 사람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종교는 사느냐 죽느냐와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유럽의 다른 여러 국가에서는 국가와 국가사이의 대립, 왕실과 왕실간의 증오, 또는 당파간의 폭력이 빈번하여 그 결과 살육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했었지만 종교 문제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잘못된 신앙’(Wrong Faith)으로 인하여 한때 서슬이 퍼랬던 주교들이나 귀족들이 추방당하고 재산과 가축을 몰수당하여 하루아침에 쪽박을 차는 일일 심심치 않게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도끼에 목이 달아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영국이야말로 이스라엘보다 더한 종교적 핍박의 용광로였다. 헨리8세의 첫 부인으로 저 유명한 메리여왕의 어머니인 캐서린은 스페인공주였다. 헨리8세는 앤 볼레인이라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첫 부인인 캐서린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러므로 메리의 뇌리에는 언제나 ‘아이구, 불상한 우리 오마니!’라는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굳건한 가톨릭 국가였던 영국은 다 아는 대로 헨리8세가 앤과 결혼하기 위해 ‘탈 가톨릭’의 성공회를 주창하게 됨으로서 바야흐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소용돌이를 예견해 주었다. 헨리8세는 첫 부인 캐서린을 추종하는 가톨릭을 몰아냈다. 캐서린의 딸 메리가 왕위를 차지하게 되자 자기 어머니를 핍박한 웬수의 성공회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메리 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앤 볼레인의 딸 엘리자베스여왕 (지금의 엘리자베스여왕의 증고조 할머니뻘 되는 분)이 왕위에 오르자 이번에는 가톨릭을 잡아 도륙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날 영국에서는 예전처럼 종교 문제에 대하여 삶과 죽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정도의 파란을 일으키는 일은 거의 없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개신교와 가톨릭 간에 죽어라고 싸우고 있는 북아이랜드는 예외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들었다. 주일날을 보라. 성공회건 가톨릭이건 도대체 교회에 출석하는 신도가 몇 명이나 되는가? 현저하게 줄었다. 어떤 성당은 파리를 날릴 정도가 아니라 날릴 파리조차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영국은 성공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종교국가이며 세계 성공회의 종주국이다. 그러면서도 영국에서는 주일날 자기 집 소파에 기대 누워 유치하기 짝이 없는 TV 코미디 프로그램을 볼망정 교회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다른 나라 성공회를 보라.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대전의 성공회 신도들을 보면 주일 낮 예배, 저녁 예배, 수요일 예배, 구역 예배, 성가대 연습, 신부님의 가정 방문....정신이 없을 지경이 아닌데 말이다.
성공회를 국교로 삼고 있는 영국이라고 해도 종교의 자유는 엄연히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종교법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다. 하지만 사도신경과 같은 신앙 고백의 근거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든지, 또는 피부 색깔이나 성별에 따라 종교적 차별을 둔다든지 할 경우에는 기소의 대상이 된다는 법일뿐 종교를 강요하는 내용 따위는 없다. 그만큼 종교적 상황이 달라졌다. 오늘날 영국의 사회는 다른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다민족, 복합 문화의 짬뽕이 되어가고 있다. 런던의 거리를 거닐어 보면 당장 알 수있다. 인도 사람, 아랍인, 동양인(상당수는 한국 유학생), 아프리카인...형형색색의 인종이 거리를 들끓고 있다.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 도교...이런 사람들에게는 성공회가 자기들 생활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사항이다. 사회의 분위기가 이렇게 변하다 보니 영국 사람들마저 영국의 개신교, 즉 성공회에 대한 관심을 점차 흘려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옐로우 카드와 레드 카드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어도 왕실의 경우에는 다르다. 왕실의 사람들은 당연직 성공회 신도이다. 가톨릭이면 안 된다. 왕위 계승자가 로마 가톨릭이면 법적으로 그를 배척하고 반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왕실 사람이 로마 가톨릭 사람과 연애하는 것은 옐로우 카드를 받는 일이며 만일 결혼하게 된다면 왕실에서 레드 카드를 받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현재 왕위계승 서열 18위에 있는 켄트공작의 부인 문제는 만만치 않다. 사실 켄트가문이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금번 켄트공작부인의 가톨릭 개종이 첫 번 경우는 아니다. 전과자로서 켄트공작의 두 아들이 있다. 큰 아들은 이름도 거룩하게 성앤드류스 경(Earl of St. Andrews)이며 둘째 아들은 마이클 공자(Prince Michael)이다. 글쎄 이 두 아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가톨릭교도와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보란 듯이 왕위계승 서열에서 자퇴하였다. 그런 전력이 있는 켄트 집안에서 이번에는 왕위계승 서열 19위에 있는 사람의 부인이며 역시 왕위 계승 서열 20위와 21위에 들어있었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아버지인 켄트공작도 왕위 계승서열에서 사퇴해야 하는 것일까? 기로에 서 있다.
실제로 켄트공작 가문과 왕위계승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에 켄트가문이 의연하게 이런 종교적 이탈 행위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왕위 계승서열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직계 자손들이 10위까지를 차지하고 있다. 찰스황태자, 해리왕자, 마이클왕자, 앤드류왕자, 에드워드왕자... 줄줄이 있다. 그런 입장에서 켄트가가 왕위 계승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켄트공작이 왕위 서열 19위라고 한다면 엘리자베스여왕의 사후 또는 자발적인 왕위 사퇴 이후, 서열 18위까지의 후보자가 모두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아무튼 왕위 계승서열에 등록되어 있다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가문의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등록된 후보자들이 왕실의 기본적인 전통을 벗어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문제이다. 더구나 종교 문제에 있어서 가톨릭으로의 개종은 왕실 전통을 거부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물의를 빚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영국 왕실의 밑바탕은 바로 종교에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아라곤의 캐서린이 도화선
어떻게 해서 영국이 가톨릭을 배척하게 되었는지는 모두가 아는 대로이다. 16세기 초반, 헨리8세의 초창기 시대까지만 해도 영국의 왕실은 유럽의 다른 모든 왕실과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이었다. 먼 역사를 보면 영국도 로마의 변방 영토이지 않았던가? 로마 가톨릭과의 분열은 1529년, 헨리8세가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스페인 ‘아라곤의 캐서린’에 대한 이혼 요구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헨리 자신도 영국 종교를 새롭게 구조 변경해야겠다는 생각을 은연중 품고 있기는 했다. 헨리는 국가를 통치하는데 있어서 국왕이 있으면 되었지 왜 로마 가톨릭 교황의 간섭을 받아야 하느냐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헨리 8세
당시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교황이 국왕보다 더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교황은 왕을 파문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파문 당한다는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아비뇽의 일화를 생각해 보면 잘 알수 있는 일이다. 프랑스의 왕이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 맨발로 교황의 집 현관 앞에 꿇어 엎드려 잘못했으니 제발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한 사건이다. 뭘 잘못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런데 다행이라고나 할까? 헨리 치하의 영국에는 교황의 권세가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유럽 대륙에서 떨어져 있다는 이점도 작용했다. 헨리로서는 교황의 직접 간섭이 없는 가톨릭 교회제도라면 상당히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1517년에 마틴 루터(Ma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개신교(Protestant)라는 새로운 조류에 휩싸이고 있던 때였다. 영국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도 로마 가톨릭의 횡포에 반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개신교에 은근히 동조하고 있었다. 헨리8세의 가톨릭 배척은 결혼을 위한 방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개신교 신앙의 길을 열어 준 것이었다.
헨리가 가톨릭을 배척한 것이 영국 근대 역사에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이던가? 헨리가 탈가톨릭의 선구자처럼 생각될수 있지만 꼭 그런것 만은 아니었다. 그 보다 오래전에도 영국의 왕이 가톨릭을 거부한 전례가 있었다. 영국 국민들의 정서 또한 무심히 보아 넘길 사항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국인들은 외국인들이 영국의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 영국 출신이 교황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 외국인이었다. 독일 출신 교황, 이탈리아 출신 교황. 지난번에는 폴란드 출신... 영국인의 외국인에 대한 거부반응은 교황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로마 교황이여! 좀 지나치지 않은가?
영국 국왕들은 1066년 정복왕 윌렴(William the Conqueror)이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에서 승리하여 영국 왕관을 차지한 이래 교황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교황이 제왕들의 권위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9세기 훨씬 이전부터 교황들은 유럽의 대부분 땅을 차지함으로서 유럽을 마치 거대한 교황 영지처럼 만들었다. 교황들은 이 영지로부터는 물론이고 심지어 왕들과 대공들로부터도 세금을 거두고 병역을 부과하며 만고강산의 생활을 했다.
교황의 권세는 실로 막대했다. 별도의 종교재판소를 만들아 맘에 들지 않으면 이단이니 뭐니 해서 잡아넣었다. 그리고 국가의 법에 복종하던 수많은 성직자들을 교황이 만든 별도의 법 테두리 안으로 밀어 넣었다. 국광의 말은 듣지 말고 하나님이 택한 교황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었다. 만일 이의가 있으면 ‘아니, 하나님 알기를, 다시 말해서 나를 우습게 알아? 엉!’이라면서 사정없이 핍박하였다. 사정이 그러하니 유럽의 국왕들도 교황의 권세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정복왕 윌렴의 증손자인 헨리2세가 한때 자기의 친구였으며 자문관이었던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커의 피살과 관련하여 자기 입장을 고해성사 하게 되었는데 그 때에 왕으로서 대주교에게는 고해 성사 한다 하더라도 바로 그 대주교가 죽은 이상 누구에게 고해성사 해야 하며 또 과연 국왕으로서 교황이 임명한 성직자에게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할 필요가 있는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캔터베리 대주교 사건
그로부터 34년 후,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그 헨리2세의 아들인 악명 높은 존(John)왕이 교황이 임명한 캔터베리 대주교를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 바람에 존왕은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한술 더 떠서 교황은 존왕의 왕위를 박탈한다는 교서까지 발표하였다. 이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존왕은 ‘해볼 테면 해봐라’라는 심정으로 영국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의 활동을 모두 정지시켰다. ‘감히 왕에게 까불어...?’였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주관으로 치루던 결혼식은 물론 장례식도 치루기 어렵게 되었다. 당시로서 이것은 성직자에 대한 대단한 처벌이 아닐 수 없었지만 민간인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장례가 그러했다. 교회의 참여가 있어야만 영혼이 부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신부의 참여 없이 장례를 치루는 것은 마치 죽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존왕은 교황에게 가장 굴욕적인 조건으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존왕은 영국을 교황의 속지로 인정하였고 그 속지를 다스리는 특권으로서 매년 약 700 파운드의 세금을 내기로 했다. 부왕인 헨리2세와 존왕은 교황으로부터 비참할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 마치 교황이 어부(사람 낚는 어부?)라고 하면 그 어부의 낚시 바늘 끝에 매달린 지렁이처럼 보잘것 없이 꿈틀거리는 신세와 같았다. 그로부터 3세기 후, 헨리8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 교황의 입장은 상당히 위축된 형편이었다. 왜냐하면 열국의 왕들과 군주들이 유럽을 물들이고 있는 종교개혁의 기치에 편승하여 교황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517년 독일의 성직자인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Pardons for Sin) 판매를 비롯해서 몇 가지 불합리한 교회의 관습을 반대하는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것은 결국 가톨릭에서 개신교(Protestant)가 갈라지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유럽의 여러 군주들은 이 기회를 교황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기로 삼았다. 종교적 관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생각보다는 군주의 주권을 찾는다는 의도가 더욱 강했을 것이다. 군주들은 엄청남 부를 축적한 교회의 토지와 재산에 눈길을 돌렸고 결국 이런 것들은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서 모두 군주의 손아귀에 돌아가게 되었다.
앤 볼레인의 등장
영국에서 헨리8세가 탈가톨릭을 주창한 이면에는 이 같은 시류에 동승한다는 의미 이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시 헨리8세는 왕자를 생산하는데 실패한 아라곤의 캐서린왕비와 이혼하고 정부로 엔조이하던 앤 볼레인(Anne Boleyn)과 정식으로 결혼하여 후사를 이을 왕자를 가져야 하겠다고 간절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캐서린왕비는 이같은 강압적인 이혼을 당치도 않게 생각하였다. 캐서린에게는 막강한 배경이 있었다. 캐서린왕비의 조카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의 스페인 카를로스(Carlos)황제였다. 카를로스는 합스부르크 왕가 계통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왕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상 교황을 장악하고 있었다. 가톨릭의 교리에 따르면 이혼은 절대금물이었다. 어쩔수 없는 사정으로 이혼하게 된다면 교황만이 이혼을 인정하는 권한이 있었다. 카를로스황제의 압력을 받은 교황은 헨리8세가 요구한 이혼신청서를 책상 설합에 넣어 둘수 밖에 없었다. 압력도 압력이지만 교황 자신도 은근히 영국 왕실에 대하여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영국 교회의 실력자 중 하나인 토마스 크란머 (Thomas Cranmer)가 헨리8세에게 캐서린과의 이혼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크란머는 나중에 켄터베리 대주교가 된 사람이다. 크란머가 제시한 해결책은 만일 영국이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국왕이 교회의 수장을 겸직한다면 가톨릭에 의한 이혼 거부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헨리는 귀가 솔깃하여 크란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독실한 가톨릭인 캐서린왕비는 교황이 인정하지 않는 결혼 무효는 받아 들일수 없다고 거부하며 왕비의 자리를 내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 땅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결국 캐서린왕비는 헨리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다. 헨리는 교황의 눈치를 보지 않고 두 번째 왕비 앤 볼레인과 결혼하였다. 이로부터 헨리는 도합 6명의 왕비를 두었던 세기적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무튼 헨리는 캐서린과의 이혼에 때를 맞추어 영국 땅에서 교황의 영향을 말살하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헨리는 실제로 아주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다.
유토피아를 주창한 토마스 모어의 수난
그는 가톨릭 수도원과 수녀원을 폐쇄하고 수도승과 수녀들을 강제로 추방했다. 추방당한 이들은 시골을 방황하면서 음식을 구걸하고 하룻밤 잠자리를 찾으며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헨리는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 및 기타 소득을 국왕의 개인용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궁정의 귀족들과 장관들에게 논공행상 차원에서 나누어주었다. 이렇게 되자 새로운 귀족과 영주들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그 새로운 귀족 영주들은 새로운 영국, 즉 성공회 국가를 보호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물론 헨리의 개혁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기도 했다. 전직 수상(Chancellor) 토마스 모어(Thomas More)경과 로체스터 주교인 존 피셔(John Fisher)를 포함하여 상당수 고위급 인사들이 국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여 ‘폐하! 통촉 하옵소서’를 연발한 일이 있었다. 이들은 앤 볼레인과의 결혼이 중혼(重婚)이라고 주장했으며 1533년 헨리와 앤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를 사생아로 간주하는 도전을 하였다. 하지만 칼자루를 쥔 사람은 헨리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헨리8세의 반대파들은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 저항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저항은 왕실 내부로부터 있었다. 캐서린왕비를 추종하는 궁정인들이 헨리의 가톨릭 핍박을 노골적으로 반대하였다. 역시 모두 처형 당했다. 사형집행인의 도끼가 잠시도 쉬는 날이 없었다. 어떤 사형집행인은 얼마나 도끼질을 해댔던지 팔에 근육통이 생겼다는 후문이 있다. 캐서린에게서 태어난 헨리의 소생 중, 유일하게 생존한 딸 메리는 부모의 이혼과 그로 인한 여러 가지 사태들 때문에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가장 대표적 인물이었다. 메리는 ‘두고 보자! 우리 오마니의 원수들아!’라면서 그저 이를 악물고 굴욕을 참으면서 지냈다.
헨리의 이혼선언은 캐서린과의 결혼이 불법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캐서린의 딸인 메리는 사생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메리의 왕실 타이틀(Princess Mary)은 하루아침에 모두 박탈되었다. 왕위서열 1위였던 메리의 위치는 앤 볼레인의 소생의 딸인 엘리자베스로 바뀌어졌다. 메리는 버림받았고 위협받았으며 학대와 천대를 받았다. 그 뿐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생모와 만나지 못하도록 멀리 떨어져 살도록 했다. 메리에게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불명예는 자기가 사생아라는 것과 헨리가 영국 교회의 수장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던 일이었다.
레이디 메리에서 블라디 메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헨리가 불쌍한 어머니 캐서린의 웬수라는 독심을 품은 메리는 가톨릭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신앙 때문이라기보다는 말 할 수없이 응축된 비분과 원망 때문에 가톨릭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헨리는 메리가 미운 오리새끼였지만 자식은 자식이니만치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기를 원했다. 매일처럼 ‘충성!’을 외치면 자식으로 인정하여서 용서해줄 심산이었다. 결국 거의 강압적인 방법에 의해서 메리가 헨리에게 복종을 다짐하자 헨리는 인심이나 쓰듯 메리를 궁정에서 다시 지낼 수 있도록 윤허하였다. 하지만 명칭은 ‘프린세스(공주) 메리’가 아닌 ‘레이디 메리’(Lady Mary)라고 부르도록 했다. 공주의 신세에서 그냥 귀족부인 계층으로 격하 된 것이다. 메리는 앞날을 생각하여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했다. 헨리에 대한 복종은 겉으로의 복종일뿐, 그 마음에 새겨진 깊은 상처는 치유될 수 없었다. 자기 어머니를 쫒아내고 안방 차지를 한 앤 볼레인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앤 볼레인이 낳은 엘리자베스에 대하여 까지 증오심을 키워 갔다.
그러는 와중에 헨리는 두 번째 왕비 앤 볼레인을 처형하고 나서 곧 바로 세 번째 왕비 제인 세이무어(Jane Seymour)와 결혼했다. 결혼 1년이 지나자 헨리는 제인 세이무어와의 사이에서 영국 왕실이 그토록 갈망하던 왕자아기씨를 얻었다. 1537년 헨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6세이다. 그러나 에드워드6세는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병으로 요단강을 건너갔다. 어린 왕의 죽음은 결국 서열상 악밖에 남지 않은 메리가 여왕이 되는 길을 열어 주었다.
헨리는 유일한 왕자인 에드워드의 탄생을 보고 자기가 주도한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을 상당히 잘한 처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헨리는 영국도 유럽의 일부 국가와 마찬가지로 개신교 왕국으로 노선을 잡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헨리는 왕자인 에드워드를 영국 개신교의 새로운 신앙 형식에 적응하도록 양육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헨리의 구상은 헨리를 뒤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가 제대로 활동도 못한 채 겨우 1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남으로서 완전히 원위치 되었다.
스페인의 캐서린 왕비의 딸로서 영국 최초의 여왕이 된 메리 (블라디 메리)
노덤벌랜드경의 도박
에드워드가 죽은 후, 한 많은 메리가 가장 적법한 왕위 계승자로서 왕위에 등극하자 그동안 메리의 생모 캐서린 추방에 앞장섰던 인물들은 죽기 아니면 죽기라는 심정으로 메리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에드워드의 삼촌 노덤벌랜드경(Earl of Northumberland)이 주도한 것이었다. 노덤벌랜드경은 영국이 가톨릭 왕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기 위해 그의 개신교 며느리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 즉 일찍 죽은 에드워드왕의 부인을 영국의 여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실제로 에드워드가 죽은 날, 왕의 삼촌인 노덤벌랜드 경은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영국의 국왕으로 삼는다는 칙령을 급하게 발표했다. 하지만 노덤벌랜드경의 횡포에 반감을 갖고 있던 영국 귀족들과 왕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외국 출신이 영국을 통치하는 것을 증오하는 만큼 왕위찬탈이라는 중차대한 사건에 대하여도 대단한 배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에드워드의 삼촌에 의한 왕위찬탈 음모는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당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메리에 대하여 상당한 동정심을 갖고 있었던 것도 큰 함수로 작용했다. 실제로 불쌍한 메리에 대하여 국민들의 지지는 생각 밖으로 폭넓었었다. 결국 나중에 여왕이 될 뻔하였던 레이디 제인 그레이와 그의 아들, 그의 남편인 얼간이 귈포드 더들리, 그리고 노덤벌랜드경은 도끼날의 이슬이 되었다.
한 풀기식 통치? 어디서 많이 들은 소리인데...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메리는 마침 당시 헨리와 그 이후에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의 눈총을 피하여 잠시 어머니의 나라 스페인에 가서 지내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다가 영국 국왕으로 선발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메리는 백성들에게 영국 국왕의 위엄을 보이고 자기야 말로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스페인에서 런던으로 화려한 입성을 하였다. 길거리를 메운 백성들의 환호는 흐린 하늘을 진동할 정도였다. 메리의 ‘한 풀기식’ 통치는 즉각 시행되었다. 어머니 추방에 앞장섰던 인간들은 속속 면직되거나 추방되었다. 가톨릭의 전통이 부활되었다. 하지만 메리의 연산군 스타일 통치는 1년이 지나자 문제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메리는 영국 교회가 다시 교황청의 권한에 속하도록 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메리는 만일 자기가 왕이 된다면 영국에서 가톨릭 왕조의 기반을 다지겠노라는 꿈을 안고 영국으로 돌아왔었다. 어머니의 나라 스페인... 불쌍한 어머니.... 핍박 받은 가톨릭.... 메리의 머리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결혼도 가톨릭인 스페인의 필립공자와 하는 것으로 주선했다. 메리가 필립(펠리페)과 결혼하고자 했던 이면에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영국을 스페인의 영향 아래 두는 한편 가톨릭의 기반을 다시 다지자는 의도에서였다.
메리는 필립과 결혼하기 전에 신랑될 필립에게 자기가 통치하는 영국이 가톨릭으로 복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토마스 크란머가 도입한 개신교 기도서를 폐기하는가 하면 교회의 주교들에게는 가톨릭 예배의식을 다시 복구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1547년 이후 무효로 된 ‘이단법’(Laws against Heresy)을 다시 부활 시켰다. 이에 따라 외국인이든 영국인이든 종교개혁을 따르는 개신교 개혁자들은 결정적으로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국의 상당수 종교개혁주의자들은 유럽으로 보따리를 싸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 남아 있던 크란머 대주교를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자격을 박탈당한 뒤 구속되었다. 메리는 여왕으로 취임한 후 7년이 지나서인 1554년에야 그렇게도 갈망하던 스페인의 필립공자와 결혼할수 있었다. 하지만 메리는 죽을 때까지 내내 독수공방으로 지냈다. 필립공자가 결혼식을 치룬 후 며칠 안되어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영영 다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필립공자는 나중에 스페인의 철권왕 필립페2세로서 무려 30년 연하의 프랑스 공주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였다.
죽음아니면 자유를!
메리의 성공회 핍박에 대하여 성공회측도 만만치 않았다. 메리의 가톨릭 재건에 저항하는 세력이 서서히 고개를 들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가톨릭에 항복하느니 차라리 순교의 길을 걷겠다고 하는 개신교도들이 수없이 많았다. 영국의 개신교들도 가톨릭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골고다를 향해 걷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신앙을 지키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가톨릭은 부패부정의 온상이었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굳게 믿었다. 실제로 순교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개신교 신자들이 많았다. 가톨릭을 싫어하였으며 가톨릭을 등에 업은 외세의 영향을 증오하였던 영국인의 개신교도들이 순교도 마다하지 않고 나서는 바람에 가톨릭은 움칠하는 입장이 되었다.
개신교도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게 되자 가톨릭을 수호하기로 다짐한 메리여왕은 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신교도에 대하여 본격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1555년 1월부터 시작된 박해운동으로 인하여 수백명의 개신교 신도들이 화형을 당하거나 도끼날 아래 목숨을 잃었다. 처형당한 개신교도들의 피가 강물처럼 거리에 흘렀다. ‘블라디 메리’(Bloody Mary)라는 말은 이때를 생각하여서 나온 것이다. 메리여왕에 의한 개신교 순교자들의 수는 수백명에 이른다. ‘겨우 수백명?’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사실 이것은 당시 다른 유럽 국가에서 자행되었던 보복성 마녀 사냥식 화형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그 엄청남 숫자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여왕의 사망일을 국경일로
자라보고 놀란 가슴 뭐 보고 놀란다고 영국은 메리가 죽자 이후 어떠한 군주라고 해도 가톨릭 절대 사절을 내세우도록 했다. 가톨릭에 대하여 그저 약간의 동정심을 가지고 있기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메리 여왕이후 오랫동안 영국 국왕은 성공회 신자만이 자리를 차지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찰스2세가 오랜 개신교 왕권에서 돌연변이처럼 예외였던 마지막 가톨릭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찰스2세는 평소 가톨릭 신앙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생전에는 감히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나서지 못하였다가 임종하는 순간에 비로소 개종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영국의 가톨릭 증오는 상상외로 깊었다. 가톨릭에 의한 득세를 주도하였던 메리여왕에 대한 증오도 당연히 깊었다. 영국 국민들이 메리여왕의 사망일인 11월 17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그후 몇 년동안을 축제를 벌였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메리여왕이 세상 떠난 후 개신교가 영국 사회에 단단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중요한 것은 의회의 구성에 있어서 극단 개신교인 청교도가 다수를 점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의회 의원들은 이제로부터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헨리8세 치하에서의 의회는 국왕이 로마 교황청과의 결별을 합법화하기 위한 하수인에 불과하였다. 어쨋든 메리 여왕 이후 의회의 권한이 점차 강화된 것은 격세지감이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돌이켜 보건대 헨리8세가 왕권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권세인 교황청을 몰아내기 위하여 의회를 세우고 이를 십분 활용하였으나 그 의회가 나중에는 왕권에 도전의 주역을 맡아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메리 여왕의 사후, 의회가 새로운 위치를 차지하기까지는 그다지 긴 세월이 필요치 않았다. 메리의 승계자인 똑똑하면서도 교활하기까지 한 엘리자베스여왕은 45년간에 걸친 장기 통치 기간 중 의회를 자기 목적에 맞게 아주 잘 조정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종교 문제에 있어서도 참을성 있게 양보하고 타협할 줄 아는 수완을 보여주었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천일의 앤인 앤 볼레인의 딸)
무적함대의 참패
1559년, 엘리자베스가 여왕의 자리에 오른 다음해에 ‘수장령’(Acts of Supremacy and Uniformity: 로마 교황의 주권을 부인하고 영국 왕을 영국의 정치․종교 양면의 주권자로 삼는다는 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법안의 골자는 간단하다. 영국 국왕이 교회의 수장을 겸한다는 것이었고 개신교 기도서를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며 예배 의식도 개신교 형식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기도서와 예배의식은 당시 궁지에 몰려 있다고 할 수 있는 가톨릭도 쉽게 따를 수 있도록 개정하였다. 한편, 엘리자베스1세 치하에서 영국과 스페인간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다. 스페인을 뒤에 업은 메리여왕의 치하에서 쥐죽은 듯 지냈던 엘리자베스가 집권하여 난리를 펴고 있으니 메리여왕의 친정인 스페인으로서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스페인은 영국에 도전하였으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를 격파하여 대서양에서의 패권을 잡고 세계 제패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해적 드레이크의 활약은 다음 기회에 설명토록 함. 인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캘커타) 아시아식민지를 확대한 것도 엘리자베스 1세였다. 종교에서는 파란이 있었지만 통치에서는 엘리자베스여왕이 대단한 솜씨를 보였다. 찬란한 문화가 꽃 피워졌다. 셰익스피어가 함렛(Hamlet)을 썼던 때도 엘리자베스1세 치하에서였다.
영국인들은 타협의 명수이다. 의회 의원은 특히 그러하다. 그런 천부적 재능은 엘리자베스여왕 때에 분명하게 들어 났다. 의회는 여왕이 결혼에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한편 자손의 있고 없음에 따라 왕위계승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미연에 방지코자 교묘한 제안을 하였다. 여왕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제안이었다. 결과 엘리자베스여왕은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당연히 자손이 없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타협은 종종 엉뚱한 방향으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엘리자베스 사후 영국의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1세의 경우가 그러하다. 제임스1세는 나중에 영국왕 제임스1세로 호칭을 바꾼 사람이다. 스코트랜드의 스튜어트(Stewart) 가문 출신이다. 제임스1세의 등장은 또 다른 새로운 재난의 전조(harbinger)였다. 제임스1세는 누구인가?
그 당시는 종교와 정치가 사실상 서로 역할을 바꿔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의회가 종교에도 간섭하는 일이 많았다. 의회는 제임스1세의 폭군과 같은 통치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불만은 제임스1세가 가톨릭에 대하여 너무 관대한데 대한 불만으로 연결되었다. 제임스1세가 가톨릭을 제재하는 법을 완화하자 그 이후로부터 로마 가톨릭 사람들이 상당수 영국에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의회의 불만은 더 커져갔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안심하고 있던 가톨릭들이 겁을 먹게 되었다. 가톨릭들은 의회에 대하여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1605년 일단의 가톨릭이 의회를 폭파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그 결과는 참담하였다.
방탄조끼를 입고 다니는 왕
통치는 폭군적으로 했지만 제임스1세는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사건이후 제임스1세는 혹시 비가톨릭 분자들이 자기를 암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항상 방탄조끼를 입고 다녔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1세는 가톨릭 완화 정책을 버리지 않았다. 제임스1세는 아르메니아인 또는 앵글로-가톨릭에게 까지 호의적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앵글로-가톨릭은 개신교 스타일이면서도 교회에서 가톨릭 예배의식을 보존하기 위해 은근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제임스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둘째 아들 찰스1세는 더 문제가 많았으며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찰스1세도 기본적으로는 성공회 신자였다. 하지만 아르메니안(Armenian)들에게 기울고 있었다. 당시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영국 왕실에서 경제권을 쥐고서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어쨌든 찰스1세는 군주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임명해야 왕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며 하나님만이 군주의 요구에 답을 주신다고 믿고 있었다. 왕권신수설을 주창한 사람이 바로 찰스1세였다. 찰스1세의 통치는 가히 폭군적이었다. 영국의 관행과 전통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영국의 젠트리(Gentry: 지주와 상인 등을 말함. 젠틀맨으로 발전)들이 저 멀리 야만적인 스코틀랜드 혈통인 찰스1세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게 된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부왕 제임스1세와는 달리 찰스1세는 간이 큰 사람이었다. 찰스1세는 종교문제에 있어서나 정치문제에 있어서 의회의 비위를 맞추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우리나라의 모씨 처럼 함부로 말하는 인간이었다.
영국에도 공화제가
찰스1세는 의회가 뭐라고 그러던지 말던지 주교급 인사들을 영국인이 아닌 아르메니안인으로 임명했고 세금을 불법적으로 올리기도 했다. 찰스1세는 이렇듯 의회를 무시하고 11년 동안이나 통치하였다. 결국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찰스1세의 왕당파군이 의회군에게 패배하였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보아 비록 찰스1세가 절대적 왕권을 추구했고 또 가톨릭에 대하여 호의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지만 의회의 막강한 권세, 또는 개신교 확대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의회가 가톨릭에 대한 반대의 기치를 거세게 올리기 시작하자 찰스1세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왕당파군이 우세하였으나 크롬웰이 편성한 ‘철기군’의 활약으로 왕당파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청교도의 열렬한 신앙으로 무장한 의회군은 찬송가를 부르면서 용감히 돌진하는 전투를 했다. 그야말로 ‘싸우는 교회’ 자체였다. 국왕 찰스1세는 평민 찰스 스튜어드가 되었고 끝내 1649년 처형되었다. 이로서 영국의 왕조는 일순간 파멸되고 말았다. 의회와 청교도들이 승리함으로서 영국은 왕이 통치하지 않는 국가가 되었다. 영국 역사에 있어서 유일한 공화국 시대였다.
이 시기에 사실상 권세를 잡은 것은 청교도 군사정권이었다. 크롬웰은 병사들에게 줄 급료를 마련하기 위해 아일랜드를 침략하여 점령했고 해상에서 네덜란드의 세력을 약화시킴으로서 대서양의 판도를 영국으로 끌어들였다. 아무튼 청교도가 세상을 휘어잡자 그 결과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이 모두 박해를 받게 되었다. 예배의 자유도 없었고 재미있는 일이나 즐거움은 모두 금지되었다. 크롬웰의 청교도 정권은 금욕적이고도 검소한 생활을 국민들에게 강요하였다. 청교도가 달리 청교도인가? 예를 들어 화려한 옷을 입는다든지 극장에 가서 연극을 구경한다든지 하는 일까지도 금지되었다. 하지만 영국 국민들도 보통 국민이 아니었다. 은근히 놀기를 좋아하고 사치를 좋아하는 백성들이 아니던가? 그러니 점점 청교도 정치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공화국 체제하의 영국은 지도자이며 수호자인 올리버 크롬웰 경(Lord Oliver Cromwell)이 세상을 떠나자 얼마 가지 않아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올리버 크롬웰 경은 최근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켄트공작부인의 직계 조상이다. 크롬웰이 세상을 떠나자 영국은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2년도 되지 않아서 왕권이 회복되었고 찰스1세의 후계자인 찰스2세가 귀양지에서 풀려나 왕위에 올랐다.
토사구팽
왕위에 오른 찰스2세의 좌우명은 ‘다시는 똑같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는다. 귀양까지도...’였다. 결과적으로 이 세계적으로 문제가 많은 군주는 자기의 입맛에 맞는다고 하면 의회와 달콤한 대화를 서슴치 않았으며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의원들을 토사구팽하듯 내몰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왕실 재정에 대한 의회의 세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찰스2세는 친척인 프랑스왕으로부터 비밀자금을 지원받았다. 돈이 있었으므로 의회의 간섭에 대결할수 있었다. 찰스2세는 부유한 사람들을 역적으로 몰아 그 재산을 몰수함으로서 자기의 이득을 챙기는 재주가 비상했다. 물론 자기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이런 행동은 머지않아 권력에서 쫒겨 날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찰스2세 자신도 자기의 그런 행위가 장차 재앙을 불러 올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찰스에게는 적출 소생이 없었다. 그러므로 후계자는 자기 동생 제임스였다. 요크 공작(Duke of York)인 제임스는 세상이 다 아는 가톨릭이었다. 찰스2세는 가톨릭인 자기 동생 제임스가 왕위를 계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여러 방법을 통해 방해를 했다. 찰스는 영국에서 성공회 대신 가톨릭이 재건된다면 상당한 재난이 온다고 믿었다. 의회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이 군주가 되는 것을 환영할리 없었다. 의회는 다음 국왕으로 제임스의 딸 메리를 내세웠다. 메리는 개신교였다. 하지만 펄펄 살아있는 제임스가 서열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고 말았다.
제임스2세는 3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 3년 동안에 과거 우려하였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다. 제임스2세는 개신교의 줄기찬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을 요직에 임명함으로서 권력을 강화했다. 아일랜드 총독(Lord Lieutenant of Ireland), 해군 장관, 그리고 상당수의 장관급과 시장, 고위 판사들을 가톨릭으로 임명하였다. 제임스2세는 대학과 시청의 주요직까지도 가톨릭을 임명토록 압력을 가했다. 제임스2세는 의회의 고유 권한인 법률 제정 및 폐기권에 대하여도 간섭을 했다.
1649년을 기억하는가? 의회 알기를 개떡으로 알던 찰스1세가 의회군에 의하여 처형당한 해이다. 그런 사실을 상기한 의회는 현재 제 멋대로 하고 있는 제임스1세에게 할 말은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주, 귀족 및 기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의회의 은밀한 반항에 동조하며 기회만 오기를 은인자중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참으로 생각치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가톨릭 + 가톨릭 = 가톨릭
제임스1세의 두 번째 왕비인 모데나 출신 메리(Mary of Modena)가 아들을 낳았다. 자식 없이 15년을 지내던 끝에 생긴 일이었다. 더구나 메리는 가톨릭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음 왕위 계승자는 제임스의 딸 메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일이 묘하게 변한 것이다. 의회를 비롯해서 전 개신교들이 메리가 여왕이 되는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덜컥 왕위 계승 1순위인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가톨릭왕과 가톨릭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가톨릭이 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영국의 앞날은 가톨릭이 지배하게 될 처지였다. 이런 사태에 대한 개신교의 반응은 재빨랐다.
영국의 대지주 7명이 연합하여 메리의 남편인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 윌렴’(Prince William of Orange)에게 비밀 서한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영국을 가톨릭의 위기로부터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임스2세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고 자기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프랑스로 도피하였다. 아버지인 찰스1세는 앞에서 설명한대로 의회군에게 패배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처참한 운명을 마지하였고 아들인 제임 2세는 왕관을 버리고 도망간후 발각되어 1899년 크리스마스 날에 영국땅에서 영구 추방되었다.
영국의 성공회는 청교도, 그리고 국교인 성공회에 속하지 아니한 기타 개신교(이들을 Nonconformist라고 불렀음)와 얼굴을 맞대고 협의하여 다시는 국왕 문제로 종교가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왕위 계승을 정하는 문제는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얽매여 있고 권력장악과도 직결된 사항이라서 좀처럼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법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오렌지 공이 왕관을 공동으로 받게 되었다. 메리는 메리2세 여왕이 되었고 남편 오렌지 공은 윌렴3세 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689년의 일이다. 하지만 참으로 중요한 단서가 붙어 있었다.
같은해인 1689년, 의회는 권리장전 (Bill of Rights)을 선포하였다. 국왕의 권력을 약화시킨 법안이었다. 선전포고권, 국회해산권이 국왕으로부터 의회로 주소지를 변경했다. 이것이 바로 세계에 알려진 입헌군주정치의 시초였다. ‘권리장전’의 골자는 간단히 말하여 ‘군주(여왕)는 군림 (reign)하되 통치(rule)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권리장전’은 영국 왕좌로부터 영원히 가톨릭을 배척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같은 가톨릭 출입금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약 10년 후인 1701년, 의회는 이른바 화해법(Act of Settlement)이라는 것을 채택하였다. 어떤 사항이 구체적이란 말인가? 가톨릭인 스튜어트왕조를 영국 왕위에서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오렌지공과 결혼한 제임스2세의 딸 메리 여왕
열부만세
메리2세 여왕은 여왕에 등극한지 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자녀가 없었다. 이제 남편인 오렌지 공 윌렴, 즉 윌렴3세가 영국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 오렌지공 윌렴3세는 재혼을 거부했다. 열부만세였다. 다음 서열은 메리여왕의 여동생인 앤이었다. 만일 앤에게 아들이 있다면 영순위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앤의 다섯 자녀는 1700년 이전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다음 순번은 누구인가? 찾아보니 추방당한 제임스2세의 열네살난 아들뿐이었다. 나중에 조지1세가 된 인물이다. 제임스2세는 유배지에서 1701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들이 가톨릭이란 점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법적으로는 왕위 계승 서열 1위에 있으니 이를 어찌하란 말인가. 만일 그 어린 왕자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달리 무슨 방안이 없는 형편이었다.
영국의 의회가 달리 영국의 의회인가? 죽은 제임스2세의 아들 문제를 해결하고 성공회 왕위 계승자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결과, 제임스1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딸로서 ‘하노버 선제후’ (Electress of Hanover)인 소피아(Sophia)를 찾아내었다. 제임스1세는 누구인가?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1세는 가톨릭 후원자였고 그의 아들 찰스1세는 한발 앞장서는 가톨릭 옹호자가 아니었던가. 성난 개신교의 저항을 받아 1649년 처형된 인물이 바로 찰스 1세였다. 그 찰스1세의 누이가 엘리자베스였고 엘리자베스의 딸이 소피아였다. 그러므로 소피아는 제임스1세와 항렬이 같았으며 현재 왕위승계를 주장할지도 모르는 제임스의 어린 아들에게는 고모가 되는 셈이었다. 아무튼 영국을 가톨릭의 위기로부터 구하려고 부랴부랴 1701년 ‘화해법’을 만들었던 것이며 그 ‘화해법’에 따르면 몇 년 전 사망한 메리2세 여왕의 동생인 앤이 자손 없이 사망할 경우, 소피아와 그의 자손에게 영국의 왕관이 이어지도록 되어있었다.
하노버 왕조의 시작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 것인지 또는 제대로 돌아가는 것인지, 하여튼 어머니 앤과 딸 소피아는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1714년이었다. 소피아의 아들 조지1세가 왕위에 올랐으니 이것이 하노버왕조(Hanoverian Dynasty)의 시작이었다. 그 조지1세 부부가 독일에서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상륙하자 왕은 대항도 하지 않고 다른 나라로 도망가 버렸다. 영국에서는 이 정치 혁명을 ‘명예혁명’이라고 부른다. 조지1세 때문에 불편한 점도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독일에서 살다가 50세가 넘어 영국으로 들어온 조지1세는 영어를 한마디도 몰랐다. 그래서 각의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돌이켜 보건대 헨리8세에 의하여 주도된 성공회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이름이 두 번이나 바뀌는 역사를 거쳤지만 그래도 영국의 개신교 왕조는 왕위를 면면히 이어왔으니 오늘날 엘리자베스2세는 하노버 왕조의 창시자 조지1세 이후로부터 계산하여 11대 군주이다.
이처럼 한때는 피에 얼룩지고 또 한때는 격론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까지 성공회를 지키기 위해 걸어온 영국의 역사이지만 이제는 사정이 변한 것 같다. 일각에서는 성공회 고집 일변도는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근대적 처사라고 하면서 항의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왕실에서는 성공회 전통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켄트 공작부인의 가톨릭 개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왕위 계승 서열에 있지만 거의 실현성이 없는 입장에서 종교의 자유를 가지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옛날에는 종교 때문에 왕실 사람으로서의 특권과 명예와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다. 오늘날에는 잃을 것이 무엇인가? 단지 왕위 서열의 순번에서 제외되는 것뿐이다. 아면.
(2004년 6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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