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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회 가톨릭

유테레사 2014. 10. 22. 22:09

[한국교회, 위기를 넘어 희망으로-2부] (3)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

100년 늦은 개신교 1907년 교세 첫 추월 가톨릭, 1939년 조상 제사를 문화로 수용

특별취재팀
입력 2014-07-15 03:15
[한국교회, 위기를 넘어 희망으로-2부] (3)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 기사의 사진
개신교와 천주교 관계자들이 지난 1월 서울 목민교회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인 일치기도회’에서 기도문을 낭독하고 있다. 국민일보DB
[한국교회, 위기를 넘어 희망으로-2부] (3)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 기사의 사진
1885년 천주교 제7대 조선 대목구장인 블랑 주교는 불편한 심정으로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낼 편지를 써내려갔다. 당시 조선 천주교인의 수는 1만4039명이었다.

“우리가 위협받고 있는 또 다른 곤경은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의 내한입니다. 이미 10여명 이상의 목사와 2∼3명의 여전도사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는 100년 늦게 전래된 개신교가 순교를 경험한 천주교보다 활발하게 포교하는 데 대한 무거운 심정을 가감 없이 편지에 담았다.

“오류를 설교하는 이 신교(新敎) 목사들은 활보하고 다니는데, 반면 진리와 참된 자유의 설교자인 우리들은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처럼 숨어서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손과 발이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개신교를 ‘열교’로 비하하며 견제=블랑 주교의 불편한 심기는 천주교의 순교사와 직결돼 있다. 한국 천주교는 이승훈이 1784년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으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조상제사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 종교(無君無父)’라며 공격을 받았다.

“천주교는 다만 천(天)이 있는 줄만 알고 임금과 어버이가 있음을 모르며 천당과 지옥이 있다는 설로서 백성을 속이고 세상을 의혹케 함이 큰물이나 무서운 짐승의 해보다 더하다.”(1785년 유하원의 상소문)

이런 분위기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억울하게 체포돼 투옥되거나 처형됐다.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도 1846년 참수형을 당했다. 학계에선 조선후기 천주교인 1만여명이 순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주교는 이처럼 한국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반면 개화기에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천주교에 비해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 선교를 시작했다. 개신교가 의료, 교육, 신분의 자유를 앞세워 단기간 급성장하자 조선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던 천주교는 조바심을 드러내며 개신교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갈등관계는 신도 충돌 사건으로 표출됐다. 천주교인과 개신교 청년들이 맞붙은 명동성당 구타사건(1894년), 기사에 불만을 품은 천주교인들의 황성신문사 난입사건(1899년) 등이 대표적이다. 중요 선교지였던 황해도와 전라도에서도 재령군 향내동사건(1898년), 장연사건(1901년), 고부 덕촌 충돌사건(1905년) 등 충돌이 잇따랐다.

갈등의 골은 교세가 역전되면서 더욱 깊어졌다. 1905년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 수는 각각 6만4070명과 3만7407명이었으나 1907년엔 개신교가 7만2968명으로 천주교(6만3340명)를 앞질렀다. 자신을 ‘성교(聖敎)’로, 개신교를 ‘열교(裂敎·분열하고 나간 종교)’라고 불렀던 천주교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개신교 비판서인 ‘신교지기원(新敎之起原, 1923년)’ 등을 제작해 내부단속에 나섰다.

◇사회복지, 민주화·인권운동으로 이미지 쇄신=천주교는 1939년을 기점으로 조상 제사를 전통문화로 수용했다. 이후 일제의 종교탄압에도 끊임없는 성장을 했는데 개신교처럼 박해나 순교 없이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전쟁 후에도 개신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꾸준한 성장을 기록했다. 인성회(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를 출범시켜 사회복지 사업에 뛰어들었고, 70년대 민주화·인권운동, 80년대 쇄신운동, 90년대 성서번역운동을 통해 대내외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인천가톨릭대 오경환 명예교수는 ‘가톨릭 신자의 괄목할 만한 증가와 그 요인’이라는 논문에서 천주교가 호감을 얻게 된 요인을 천주교회의 결속력, 청렴성, 정의·인권활동, 제사수용,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유연한 태도로 분류했다.

한국 천주교가 개신교에 대해 대립관계에서 벗어나 일부나마 화해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한 것은 1964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부터다. 당시 공의회에서는 “적지 않은 단체들이 가톨릭교회와 완전한 일치에서 갈라진 데에는 가톨릭 측의 탓도 있었음을 자인한다”고 선언하고 분열된 형제들을 포용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한국 천주교도 개신교와 대화에 나서 68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77년 ‘공동번역성서’를 출간했다. 86년부터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한국정교회 등과 그리스도인 일치기도주간(1월 18∼25일)에 합동기도회를 열고 있다.

NCCK는 지난 5월에는 천주교, 정교회 등과 연대해 '한국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를 창립했다.

◇'보수와 진보' 역할분담한 천주교=종교사회학자들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종교조사에서 볼 수 있듯 천주교의 높은 신뢰도의 근저에는 '진보'와 '청렴'이라는 외적 이미지가 직결돼 있다고 분석한다.

강인철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는 "1990∼200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개신교의 사회적 이미지는 진보에서 보수로 대체됐다"면서 "대중의 집합적 기억에서 NCCK의 진보적 이미지가 지워지면서 이제는 그 공백에 '개신교=극우·보수'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채워졌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천주교 역시 종교권력 구조가 보수로 역전됐지만 보수적인 정진석 염수정 추기경보다 진보적인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나 정의평화위원회가 여전히 사회적 이목을 끌며 사회적으로 진보적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천주교가 소외계층 등 사회적 약자를 대변한다는 이미지는 이렇게 형성되고 유지돼 온 것이다.

조성돈 실천신학대학원대 교수도 "개신교는 대형교회 목회자의 말 한마디로 심각한 타격을 입지만 천주교는 진보와 보수의 다양한 목소리를 보장하며 역할분담을 하고 있다"면서 "특히 교단을 움직이는 전략그룹이 대내외적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를 벗는 데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다음 달 교황의 방한은 한국 종교시장에서 천주교의 긍정적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별취재팀=송세영 유영대 전병선 박재찬 신상목 백상현 박지훈 이사야 진삼열 양민경 신은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