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교회 2013 여름 수련회 / 박영선 목사 특강 / 2013.08.10
마태복음 18장 21절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용서의 비유는 베드로가 물은 (몇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와 마지막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렇게 두 괄호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쉽게 읽으면 뭐 너무나 당연한 무한히 용서하고 중심으로 용서하라가 되는데, 살아보시면 그렇게 안 됩니다.
이거는 신약성경, 특히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역설 중에 하나인데요,
예수님의 역설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부터 존재가, 출생이, 사역이 역설이었습니다. 그렇죠?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이것부터 시작이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체도 없은 즉 아무도 그를 메시야일 거라고 상상을 하지 않았으며 그가 매 맞고 그가 죽은 것은, 자기가
잘못해서 그랬다고 생각을 했지, 우리 죄 때문에 죽는다고는 생각을 못했다고요!
다 역설이죠.
신약성경은 특히 복음서는 역설을 맨 먼저 생각에 두고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저 베드로가 잘 난척을 한 거죠. 잘 난척이라는 건 좀 미안하지만, 한껏 늘려서 이만큼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횟수,
`일곱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가 나왔는데,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라` 는 거죠.
전부 그렇게 그러니까 매 번 해야되, 가 아니라,
"이만큼 하면 할 만큼 한 거죠?"
"넌 죽었다 깨나도 못한다" 라는 뜻이죠.
그러면 무엇 땜에 그 얘기를 하는가? 그런 문제 아녜요?
그러니까, 23절에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라고 천국이 소개됩니다.
천국이 왜 찾아왔는가?
우리가 할 수 없어서 해결을 하러 들어온 겁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던 어떤 임금과 같습니다.
이 회개한다는 거는 잘 알다시피 그 달란트 비유에서 나온 것같이, 맡긴 돈에 이익을 남겨야 됩니다.
하다못해 뭘 하라 그랬죠? 못하겠으면 이자라도 얻도록 은행에 갖다 넣어라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계산해야될, 다른 말로 심판 받아야할, 다른 표현으로 행한대로 받는다, 라는 것은 이 계산으로, 회계로 얘기함으로써,
다만 그런 어떤 업적이나 유효성이나 유익함이나, 이런 것하고 좀 다른 어떤 가치를, 여기서는 화폐로 환산한 가치를,,사실은 따지고 들어가면, 인간된 내적 성숙의 완성된 인격의 가치를 묻는,, 그런 얘기로 천국을 소개하는데,,
천국은 마치 그 종들과 회계하려던 어떤 임금과 같습니다.
심판을 하시는 임금, 뭐 했느냐고 묻는 임금입니다.
이 임금이 뭔가 맡겼던 거죠.
그 인생의 어떤 기회를 줬던 것이고, 가치있는 것을 약속하셨는데, 제대로 했느냐고 묻습니다.
못했답니다. 얼마를 내야 되는데 못했다고요?
일만 달란트! 금화입니다. 굉장히 큰 돈이라 그랬습니다.
정확히 지금 환율이 하도 변해서 모르겠는데, 백 조쯤 된다고 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달란트는 굉장히 큰 당위입니다.
데니리온은 아주 싼 돈은 아니지만, 하루 임금에 해당한다고 그랬습니다.
그 만 달란트를 용서를 받고 가서 자기에게 빚진 자, 백 데나리온을 용서치 않아서 다시 주인에게 붙잡혀와 옥에 갖혔다!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니 용서라는 것이, 우리 설교 때 제가 인용한 것같이,
용서를 할 줄 모르면, 용서를 받은 게 아니다!
용서를 받아봐야만 용서를 할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고, 용서를 하는 것은 용서를 받는데 묻어들어온 용서하는 은혜다!
용서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가 용서를 못 받아들인 거다. 받은 게 있어야 내 놓죠.
막연하게 용서를 받은 감동이 내가 용서를 하는 게 아니라, 나는 가만있고, 용서가 나에게 들어와 지나가는 게 용서입니다!
우리가 늘 오해하는 것은, 은혜를 받으면 (은혜를 받아서 그 다음엔 내 마음대로인데) 은혜가 나를 지나서 은혜의 목적을 이룹니다!
그 은혜가 들어오면 의무가 따라 들어옵니다!!
은혜가 하려는 목적이 따라 들어오는 법입니다!!!
우린 뭘 깨달으면 깨달은 내가 그 다음에 하는 반응으로 생각하는 바람에, 이 인과율이 늘 이런 순서로 이해되는데,
성경이 하고싶은 얘기는 그것이 나에게 들어와 흘러 차고 넘쳐 흐르는 거라고 얘기합니다!!!!
전도를 한다 그러면,
빛이 나에게 들어와 내가 빛이 되어 (내가 빛을 만든 것이 아니라) 빛이 된 내가 저절로 어둠 앞에 빛으로 서는 것! 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받았으니까 그러니까 용서해 줘야된다,, 라는식의 우리의 회계의 계산법과 다르다 하는 얘기는 대표적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아주 특징적으로 드러납니다.
어떻게 읽어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각 속에서는 이 기도를 풀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주었사오니, 이제 우리도 사하여 주옵소서,, 그렇게는 일단 말이 안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전체 흐름 속에서 그 말은 맞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을 갚아주십시요,,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형태의 해석이 나왔습니다.
내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그 마음으로 배운 그 용서를 하나님이 주셔야만 되겠습니다, 이렇게 이제 순서를 바꿔놓기 시작했죠.
용서를 해보니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를 할 수 없던대요? 의 수사적 표현이다,,
상당히 억지스럽지만, 성경전체의 맥락과 뜻을 같이 하려면 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더 나가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이해하게 하죠. 이런 뜻이라고 이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해 보니까 안 되던데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용서를 해 보니까 안되어서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도록 해 주지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좀 더 이해가 됐을까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는 용서를 했으므로 읽히지만, 해 보시면,
"주님, 용서를 해보니까 안 되던데요? 그러니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십시요! 그리하여 용서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그건 꽝 입니다.
그래서 이 용서라는 문제를 이 조금 더 현실적으로 또 성경의 가르침과 함께 해 봐야겠는데,
예수님의 용서는 그의 생애에서 안 나타납니다!!!
비유에서 나타났어도 <용서한다>는 없고 <죄를 사한다>는 있습니다.
예수님이 용서라는 표현을 안 쓰는 이유는, 다만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한 행보가 아니라는 가장 중요한 초점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칠 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 이게 제일 쉬운 표현인데, `네 죄가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런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둘러 앉았던 비평가들이, `아니 저가 뉘기에 죄를 사하는가?` 이렇게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가 쉬우냐? `네 죄사함을 받았다` 가 쉬우냐? 그러니까 뭐가 쉬운지는 뻔히 알지만,
`내가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음을 보이기 위하여 이렇게 말했느니라` 하고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다만 병을 고치는 자가 아니라, 죄를 사하는 구원자 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사역에서 용서라는 말이 아니라, 구원, 사면이 등장할지언정 용서는 잘 등장을 하지 않는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하는 용서들은, 어떤 불편함을 해소하는데 주로 쓰는 것입니다.
어떤 오해, 어떤 사소한 그 불이익, 상처들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꼭 필요한 응급처지 같은 것이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같이 살 수 없기 때문에 넘어가는 것들,, 어렵던 시대를 생각하면, 선생님이 때린 것,,
왜 그 때는 그렇게 때렸는지 모르겠어요, 이유는 있었어요, 하나 틀린데마다 세 대, 한 문제 틀리는데 세 대였으니까, 교육적인 이유가 있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았어요.
표정은 `너는 죽어라, 너는 살아서 내 속을 썩히지 마라` 강하게,, 그것도 다 교육열 때문에 생긴 거지만, 그 때는 어떻게 참았을까요?
모두가 같이 맞아서 엉덩이 비비면서 들어올 때 웃으면서 들어왔어요.
그 때는 신앙이 제일 좋았었던 것 같고, 예수를 믿고 나니까 이 용서라는 게 잘 안되던데요? 용서라는 게 만만치 않더라구요.
왜냐하면, 사랑은 상처를 간단한 것만 입히지 않습니다.
매우 어려운 상처를 입히는데 이 문제에 대한 글을 쓴 `스티브 체리`라는 영어 제목으로는 <Healing Agony>,, 원한의 치유쯤 될 겁니다.
그 성공회 신부인데, 아주 논문을 쓰셨어요.
중요한 건 정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용서란 정답이 없다! 그렇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아냐? 어려운 이유를 아냐? 였고, <용서라는 고통>이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나와있습니다.
읽으면 더 골치가 아파요, 더 정신이 없고,, 그냥 쉽게 생각하는 용서 정도로 충분한 것 같애요.
예수님은 신의 용서를 하셨어야 했다, 이거죠.
신의 용서, 무조건적인 용서, 우리가 엎어논 창조의 이 타락, 하나님에 대한 모독, 하나님 뜻의 왜곡,, 이 모든 걸 창조주는 다시 하실 수 있더라는 거죠! 하나님이 하는 용서가 있습니다!!
그 용서는 하나님만 괜찮으면 되는 게 아니라, 또 상대방을 피해자가 납득하게해서 가해자를 처벌하는 게 아니라,
가해자를 바꿔놓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그래서 유일한 용서자 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죠.
우리의 용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용서의 어려운 점은 내가 용서를 한다고해서 상대방이 시원하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혼자 그 정도의 불이익은 감수하고 물러나는 것을 용서라 그럽니다.
나 혼자 그 정도 그냥 감수하고 그냥 길 가다가 차가 물탕튀긴 것 그냥 집에와서 빨고 말지,, 까지 우리한테 용서가 해당합니다.
그 이상을 할려면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정당한,, 말하자면, 그 합의, 확인, 공감,, 그리고 보상이 이루어져야 되는데, 인생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보상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죽었을 경우, 그 상처가 회복되지 않는 피해일 때입니다.
평생 그 피해를 안고 가야되는,, 죽은자에게는 살인자가 죽은자에게 보상을 할 방법이 없고, 가해자가 죽는다고 피해자가 살아나지 않고,
그 피해자의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가족이나 친구들은 그 빈자리에 대한 상처를 메꿀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그러니까 이렇게 저렇게,, 보복을 하고, 또 어떻게 술먹고 잊고,, 어떻게 어떻게 넘어가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기독교 정신에서는 그럼 뭐냐?
이게 이 책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됐고, 우리도 살아보니까 이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요? 우린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될 지 모르니까, 이제 친하지 않는 겁니다.
현대사회로 올수록 교회에서 마저도 친하지 않는 겁니다. 상처받을까봐,,
개 얘기에 이제 답을 해야될 순서가 되었는데, 저는 개를 잡아먹는 이유가,, (잡아먹지는 않습니다, 개를 즐기지 않습니다)
개를 기르다 여러번 죽는 걸 봤어요. 개가 오래살지 않습니다. 수명이 짧고 나중에 꼭 병이 들어 죽습니다.
그렇게 이쁘하다가 나중에 너무 처참해요. 그래서 이제 안기르지 시작했어요. 안 보니까 먹겠더라고요.
잘라져서 고기로 왔는데요. 고기로,, 보고야 못 먹죠.
우리가 이쁜 강아지 하나가 어떻게 되는 걸 봐도 평생에 다시 개를 기르지 않겠다가 되는데,
뭐 특정한 가해자가 아닌, 말하자면 여러분 누구 가까운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 심장마비,, 뭐 그다음에,, 이런 일들이 생겨서 죽으면,
누구한테 가서 물을 수도 없고, 따질 수도 없고, 호소를 할 수도 없고,, 그 여간한 남은 인생 내내 그 빈자리를 보면서 가야합니다.
그 빈자리를 본다는 것 아십니까?
주일날 와서 설교를 하면 여러분 대부분이 보통 같은 자리에 앉습니다. 그게 비면, 벼라별 생각이 다 납니다.
봉은사에 갔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않아도 늘 이렇게 쓱 일별하면 다 보입니다.
`누가 안 왔구나,,` 그렇게,, 인사성은 없지만, 기억력은 좋은 마음이 따뜻하고 깊은 표정이 덤덤하고 큰,, 그래서 얼른 보이지 않는,, 그런 연기력을 지닌,,?
그래서 이 용서에서 쩔쩔 매니까 어떤 문제가 생기냐하면, 옆 사람도 고통을 받습니다.
아내를 잃은 남편, 남편을 잃은 아내,, 이 사람만 고통스러운게 아니라 그 친구들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이 문제를 극복시킬려고 용서 부추기기를 합니다.
용서 부추기기,, 이게 사람 잡는 겁니다.
아, 천국가면 다 만날건데 왜 밤낮 그래,,? 이게 이제 시작이죠.
그렇게 하는 거 아닌 것이죠.
용서란, 용서란, 방향입니다. 어떤 방향?
하나님이 호리라도 남김없이 보상해 주신다,
그것을 누구의 잘못을 추궁하고 보복해서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무궁한 어떤 영광과 승리로 보상한다를 믿는 것인데,
그 믿는다는 건 방향이라 말입니다.
어떤 문제도 일차적으로 생각해야할 방향은 용서입니다.
용서부터 방향을 잡아놓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를 해서 문제를 종결하고자 해결하고자 하거나, 잊어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시작인 것입니다. 어떤 시작?
이 길로 가는 시작,, 결국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다 선다,,!
그 때 두고 보자,, 그건 빼고.
그 때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아픔까지 다 하나님 안에서 만들어낸 승리와 영광으로 만난다.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적대적 관계, 증오, 보복이라는 것으로 나 여기 멈추어서 있지 않겠다! 라고 발을 내딛는 방향,
실제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용서라고 합니다!
이 일에 가장 오해가 되는 건, 용서가 문제를 종결하고 해결하고 없던 것,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신만이 할 수 있는, 죄인을 예수의 피로 다시 원래 창조의 영광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용서,,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린 할 수 없는데, 그걸 부추깁니다.
네가 져! 그런 놈인데 뭐! 이렇게 자꾸 쉽게 얘기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아파해야 됩니다. 그 걸음 걸음 하나가 아픈 걸음을 걸어가고 있는 줄 알아야 됩니다.
"아휴, 제는 아직도 그러고 있어,,?" 그러면, 용서라는 거를 적용해야되는 인생의 나타나는 특히 신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 속에서의 실제적인 고통과 만나는 그 경악스러운 감수할 수 없는 인생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걸 용서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이 용서부치기기 입니다.
다 이 강박증이 있습니다.
일단 계속 해결이 되지 않는게 힘들고 또 쉽게 어떻게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아휴 이제 그만,," 이렇게 주변에서도 계속 부추키고,, 그래서 용서하고 잊자고 그럽니다. 잊자,,!
그런데 보세요! 책에 인용되는 사건 중에 하나가, 북아일랜드 폭탄테러 사건인데, 그 테러폭탄로 그냥 뭐 이렇게 여기에 서 있다가,
버스정류장에 서 있다가, 길 가다가 이렇게 사고를 당해서 누군가가 같이 가족이 다섯이 서 있다가 셋이 죽고, 하나는 팔이 잘리고, 가족 셋이 없어지고, 하나는 팔이 잘린 체,, 잊었는데도 팔은 안돌아온다니까요?
이걸 지고 살아야되는 이게 용서의 길이예요.
그래도 보복을 하거나 내가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긴다, 그 길로 가야되는데, 가야 되는 거예요,,
없어진 팔로 남은 생애를 살아야 되는 거예요. 해결하고 해결이 나야 발을 떼겠다, 살겠다가 아니라,
사는 일은 이렇게 해결이 되지 않을 때에도 내일이 오잖아요, 계속 내일이 오잖아요.
그러니까 내일을 살고 있어야된다는 거죠.
걸어가는 거예요.
뭐가 뭔지 모르는 날도 아침이 오고, 내일은 죽겠다 그런 날이 다시 오늘이 되고,, 내가 먼저 죽는 건 억울하지만 다시 그 날이 오고,,
그걸 용서를 생각하면서 걷는 거예요.
용서를 하겠다가 아니라, 내가 가진데로 내가 할 수 있는대로 해결을 할 것인가, 라는 자폭과 하나님의 결론 사이의 긴장과 갈등과 그 못참을 혼돈 속에서 자폭을 보류하는 거예요!
`이렇게 살라` 고 그러는 게 아니라, `이거예요 이거예요,,` 이렇게 사는 걸 용서라고 그래요.
그러니 제가 설교하다가 인상쓰게 됐죠? 그죠?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이렇게 나 좋게 상대방을 이렇게 덮곤 해요? 그렇죠? 나 좋게 상대방을 덮죠.
"이 설교하는데 왜 자?" 오죽하면 자겠어요? 오죽하면,,
"넌 성경 왜 안 펴?" "다 외웠잖아요!"
"근데 왜 넌 찬송 안 불러?" "내가 부르면 너무 튀잖아! 다른 사람들이 주눅이 들잖아!"
유머 센서가 없으면 깊은 신앙의 경지엔 갈 수가 없다,,!
유머센스는 어디서 나왔냐? 삶에 답이 없다는 걸 알아야 나온다,,!
왜 그랬어? 에 정답이 없습니다.
묻는 게 신앙이 없는 겁니다.
왜? 라니,,? 나는 생각이 없었을 것 같애?
나는 내가 한 일에 자랑스러워할 것 같애?
나는 후회가 안 되는 줄 알아?
왜 와서 다시 물어 봐?,,,
그기에 유머가 나오는 겁니다. ^^
"왜 그랬어?:
"넌 몰라도 돼" ^^
나도 아파 죽겠는데 와서 꼭 집어본다니까,,? 우리 가위를 가지고 다닙시다. 손가락으로 찌르거덩,,, ^^
올해의 표어, 사정없이 자른다, 손가락을 조심하라,,
이런 문제들이 신앙적으로 걸러지지 않고 즉 가장 원색적인 `난 예수 믿고 천국간다` 라는 이름 아래,
나머지는 모두를 본인이 아닌, 가장 피상적이고 가장 어리석고 가장 원초적인 답으로 그냥 난무하고 있는 거예요.!
그 다음의 문제는, 하나는, 용서 부추기기라고 그랬죠.
두번 째, 용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난 용서했어! 난 용서했어!,, 라고 해서 그것이 영웅이 되고 신화가 되고, 그것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는 건, 용서의 자리까지 아픔을 안고 걸어가는 과정이 중요하지, 용서를 했다는 것으로 훈장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혼자 극복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가해자를 해결해야 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해결해야 됩니다.
내가 너무 쉽게, `좋아, 용서해!` 그러면 상대방이 무색해진다는 거죠.
내가 천만원을 훔쳐갔는데, `좋아, 용서해!` 그러면, 저게 돈이 더 있나,,?
피해를 본다는 건 다만 피해자가 아니라는 거죠. 가해자에 대한 책임이 있답니다.
우린 신자들이기 때문에 이 쪽 편에 서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우리는 늘 피해자니까!
가해자에 서서 책임을 져야하는 건 다 법정에서 다루면 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로 하면 됩니다. 그것 말고,
기독교 신앙 속에서 용서하기, 피해자가 어떤 책임을 지는가의 문제에서,
`나는 용서했어!` 라는 영웅론, 기만, 그것 하나 붙잡고 더 이상 인생을 못사는,, 이건 안된다는 거죠.
용서를 하려면, 답이 없는 싸움을 해야 되는데, 가장 중요한 싸움이 이 피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입니다.
사람이 어떤 피해를 받든지 정도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지만, 큰 피해가 되면 가장 중요하게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것은 이런 피해를 받고도 아무 아무 해결책이 없는 존재라니,, 내가 요것 밖에 안되니,, 이러고 살 까닭이 있어,,? 라는 문제로 온다니까요!
그러니까 모든 피해는 이게 따라 들어옵니다.
나를 뭘로 보고? 아니 나는 밟아도 좋단 말인가? 이 분노!
내가 무슨 의미를 가지며, 내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리고 누가 보호해 줄 자도, 편을 들어주는 자도 기억하는 자도 없단 말인가?
여기가 그 중요한 싸움이라고요! 여기가!!
그런데 누가 우쭐대고 자기는 이겼다는 거예요!
누가 공감을 하고 누가 속깊은 도움을 받고, 한발 한발 의지해 나간 흔적은 하나도 없이, 어느 날, 나는 다,,
,,밀양 얘기인데, 교도소에 찾아갔더니, 하나님이 용서해 줬다는 거 아녜요? 그래서 주인공이 뿔다구가 나는거죠.
`그래? 나는 아직 안했다` 그게 밀양입니다.
무서운 영화죠!
너하고 하나님하고 해결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너 나하고도 해결해야 된다,, 해결이 문제가 아니라, 씨름을 해야죠!
그래야 상대방의 가치가 있죠!
가해자는 그냥 악마거나 기계거나 재난이 아니라, 인격이잖아요.
피해자도 그렇고 서로 그 후싸움을 해야되는 거예요. 서로 후싸움을!
가해자는 잘못을 했지만 한 인격으로써 취급이 되어야하고, 피해자도 피해를 받았다고 해서 약자이거나 무슨 잘못의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그런 인격적인 위로를 받아야되고, 그 길을 걸어야죠! 어떤 길?
여기 앉아서 분노와 자폭 속에 있으면, 그 인생은 그기가서 고정이 됩니다.
정지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대하심! 어떤 경우에도 시간은 흐릅니다.
그래서 내일이 옵니다. 다음날도 오고 그 다음 날도 오고,, 24시간 마다 하루가 새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일어나게 돼요. 일어나게 돼요,, 일러나게 되요,,,
여기가 중요하죠!
아무런 답도 주시지 않고, 나타나시지도 않고, 주변에 답도 없는 것 같은데,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실히 일하시는 그 눈으로 보지만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의 영혼을 떠밀어 붙잡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야 돼죠. 오래 걸려서 어떤 힘이 생기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그것으로 어떻게 극복케 하시고,,
극복케 한다는 건 해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그것으로 인하여 그 원한에, 그 자리에 붙잡혀 있지 않고, 걷게 만드는 겁니다.
이 상처를 부둥켜 안고 자폭해서 주저 앉아있지 않고, 그 상처를 몸에 이고 걷는 겁니다.
`봐, 아무것도 안 남았지?` 가 아닙니다!
잘라진 팔, 화상입은 얼굴,, 그걸로 사는 겁니다.
그 시선과 `당신 그게 뭐야?` 라는 그 본인들이 설명해 주지 않으면 모르는,, 그래서 얼른 얼굴을 외면하는,, 그걸 감당하고 사는거죠.
인간은 그것보다 크다는 것을,, 인생은 어쨌든 끝까지 살아봐야 안다는 것을,, 가지게 돼죠.
그 먼 길을 통하여 용서의 길을 갑니다. 용서의 끝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게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해결될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신다,, 다시는 상하는 것이나 해하는 것이 없다,,
이걸 뒤집으면 살아 생전은 이런 일들로 얼룩져 있다는 것이죠!
거기서 웃어야 되는 것입니다!
웃는다는 것은 사람이 이렇게 웃는다는 건 무슨 뜻이죠?
`헤헤,,` 그게 무슨 뜻이죠?
헤헤,, 오줌 쌌는데 부모가 들어왔거든요,, 손녀딸이 `헤헤,,` 웃으시라니까요! 좋은 말로 할 때,,!
그렇게 웃고 살아야 돼요.
자기가 한 실수를 감당 못해서 지랄 떨고 유리깨고 나가 떨어져 뒤지지 말고,, 살아가라구요.
그러면 좋은 날이 오는 게 아니라, 그게 그 상처가 나에게 뭘 만들어요!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르는,, 그런 자리로 만들어요!!
얘기 한번 턱 해 보세요. 무슨 회의 한번 해 보세요. 인사 한번 해 보세요!
공력의 차이가 있어요. 눈빛이 깊어야 돼요. 속이 깊은 얘기가 나와야 되고 어루만지는 손길로 나와야 돼요!
우린 뭐든지 내질러고 그렇게 그럴 자격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어요. 그건 무례한 거예요.
무례한 겁니다!
자기가 얘기에 참여했으면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얘기를 들으셔야 되고, 그 한 인격이 실존으로 뱉어내는 육성을 존중해야 됩니다.
단 하나의 예의가 더 있다면 상대방이 지루해하면 적당히 끊을 줄 아셔야 됩니다. 일방적일 수는 없습니다.
얘기를 나누면 집에가서 내가 모르던 나무 하나 더 본 것같고, 보다 깊은 산을 본 것 같아야지, 서로 제 얘기하고 헤어져서,
`에, 오늘도 괜히 쓸데없는 소리하고 왔다, 쯧 밥먹고 가서 커피나 마시고 와서 뒤집어 잘 걸,, 괜히 만나서 버려버렸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답답한 말 하나 할 실력이 없고, 좋은 인삿말 하나 할 실력이 없는,, 어떻게 해야 된다구요?
그걸 지고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걸어 나가 그 짐이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일, 그 인생을 걷겠다! 라고 출발을 하셔야 합니다.
자기 설명을 하는데 급급하지 마시고, 변명하는데 급급하지 마시고, 쉬운 답 내놓고 큰소리 치지 마시고,
그 상처를 안고 걷는 인생이 무언지 그 사람은 어떤 경험과 어떤 특성 속에서 다른 소리를 내는지,, 귀담아 든는 자세를 가지셔야 됩니다.
그게 예수 믿는 신자들의 특별한 인생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이유로 모이는 단체보다도 교회는 사실 더 깊은 관계의 단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 하나, 말하고 듣는 것 하나 제대로 못해서 사실은 교제가 막히고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친할 수는 없습니다.
속을 다 쏟아내면 안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얘기를 다 창자까지 다 꺼내시면 그러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내놓을 수 있을만큼, 들어 줄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상대방의 상대방 인생 아닙니까?
그 사람 얘기를 들어주는, 정답은 얘기하지 마시는, 싸움을 하지 마시고, 편이 되시는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여러분이 은혜를 받은들, 성경말씀에 익숙한들,, 뭐에다 써 먹겠습니까?
뭐에다 써 먹겠습니까?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절갑을 두른 듯 바람소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그건 애국가고,,
아궁이에 넣을 장작불 부스러기,, 가 되십시요. 고구마 구워 먹게,, ^^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신자로 사는 것은, 용서하고 용서받는 길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승리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니 우리 먼저 서로 따뜻하고 기다려주고 덜어주고 편들어 각자의 짐을 지고가는 길에
우리가 모두 기쁜 동지고 함께 길걷는 친구가 되도록 반갑고 기쁜 식구가 되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그 일로 오늘 이박 삼일 실컷 했습니다. 돌아가거든 이렇게 부요한 마음을 가지고 주일에 나와서 웃으며 교우들을 맞이하고
교회 지키는 책임있는 신자의 인생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록 이택자 http://blog.daum.net/tjstory -
'지혜의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점이 장점으로-7층에 있는 샌드위치가게 (0) | 2015.05.17 |
---|---|
여객기 1등석 승객과 1등 승객 (0) | 2015.02.18 |
인생을 살면서 (0) | 2014.07.12 |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0) | 2014.04.25 |
[스크랩] 무학자임에도 대통령이 된 "앤드류 존슨"(미국) (0) | 2014.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