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노동의 영성'이 살아있는 예수원과 대천덕 신부
대천덕(R.A.Torrey Ⅲ·1918∼2002) 신부는 1918년 중국에서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과 조선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조부 R.A. 토레이는 19세기 말 미국에서 유명한 복음전도자 D.L. 무디의 동역자이며, 그 뜻을 계승해 성령운동과 근본주의운동을 일으킨 탁월한 신학자이자 장로교 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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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덕 신부는 이러한 기독교 전통을 가진 가문에서 자라나 미국 장로교 신학교인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장로교회선교부와 선교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등을 겪다가 성공회로 교파를 옮기고 1949년 성공회 사제서품을 받는다. 1957년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성 미가엘신학원 재건립을 위해 한국에 입국하여 한국전쟁 이후 재만 남은 학교를 다시 일으켰고, 1964년까지 학장으로 있었다. 이후 1965년 강원도 태백에 성공회수도원인 <예수원> 공동체를 만들었다.
<예수원>은 설립 당시 다른 수도원이나 선교단체와는 달리 확실한 뜻이 있었다. 대천덕 신부는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늘‘책만으로는 안된다. 실천하고 봉사하는 사명자를 길러야 한다.’라는 주장을 했는데, <예수원>은 그의 이러한 평소 주장을 반영하여 자유로운 실험과 개척자적 정신으로 운영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37년간 기도와 코이노니아(공동체의 교제)를 추구하며 “노동이 기도이고, 기도가 노동이다”는 성 베네딕투스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하는 일과 노동하는 일을 병행하였다. 고희를 넘겨서도 하루 14시간씩 일하며 기도의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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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원>은 '한국교회의 쇄신과 세계선교를 위한 수도공동체'를 표방하며 예배와 중보기도를 공동체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아침(조도) 점심(대도) 저녁(만도)의 예배와 노동이 <예수원>을 움직이는 두 축이다. 한편, 공식적인 주일예배는 성공회 미사 형식을 따르나, 매일 저녁예배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초교파적 성격을 띠고 있다. 재정(財政)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고 받는 믿음의 원칙’을 따른다.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것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세워 지키는 것은 청지기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한편, 대천덕 신부는 성서와 성령에 의한 회심을 중시하는 복음주의 전통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사회정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영향과, 토지는 여호와의 것이므로 아주 사고팔지 못한다는 레위기 25장 말씀에 따라 경제정의를 실천하고자 했다. 이는 시민단체인 ‘성경적 토지경제 정의를 위한 모임(성토모)’의 설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대천덕 신부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는데, 한 번은 누군가가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는 "지붕 위에 올라가 외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을 만큼 ‘실천’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특히 인생 후반부에, 정의와 정의의 기초인 성서적 토지법을 '외치는' 데 전력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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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예수원>을 설립하여 신성한 노동과 기도의 삶을 실천하고 성경적 토지정의를 외치며 이땅에서 평생 개척자로 살았던 대천덕 신부는 2002년 8월 6일 84세의 일기로 소천 했다. 그는 일평생 성령과 공동체, 경제정의를 주제로 수도자적 청빈과 순종의 삶으로 한국교회를 한 단계 성숙하도록 헌신했다.“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분리될 수 없다. 물질적인 문제는 기도와 영적 전쟁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영적인 문제는 현실적 삶의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다.”고 하며 성령과 말씀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에 있으면서 사회정의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사후 <예수원>을 맡았던 그의 아내이자 복음의 동역자 제인 토레이(Jane G. Torrey, 한국명:현재인) 역시 2012년 4월 6일 하나님께로 돌아갔고, 지금은 대천덕 신부의 아들인 벤 토레이(대영복, 1950~현)가 대표로 있다. 대영복 신부는 2003년부터 삼수령센터장으로서 북한선교를 시작했는데, 한국의 청소년들과 탈북 청소년들을 말씀 안에서 양육하며 통일을 대비하고자 계획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교회마저도 기초가 흔들리는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 이러한 때, 강원도 외딴산골에서 오늘의 민족 현실을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고 땀 흘려 노동하며 영적 기초를 놓는 일에 힘쓴 대천덕 신부와 <예수원>의 역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한국교회가 이 ‘성결한 영성’을 근간으로 재무장될 때, 사회와 교회의 기초가 굳건해지고 이 민족의 영성이 회복되리라 믿는다.
주소: 강원도 태백시 하사미동 산7번지
- 글: 진흥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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