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스크랩] 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유테레사 2015. 3. 3. 11:35
 

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1. 항일운동

1) 국체보상운동
2) 3.1 운동
3) 서울여학생 운동

2. 단체활동

1) 1920, 30년대 여성들의 상황
2) 일반여성단체 활동
3) 기독교 여성들의 단체활동
4) 근우회-일반여성들과의 연합활동

여성들은 교육을 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세계가 가정만이 아니라 이웃,사회,국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화기 조선의 상황은 여성들이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상당히 제한되었고,이것은 전통적 가부장제적 결혼양식에 의한 것이며,이에 대한 개별적인 반발이 종종 야기되었지만,이러한 그녀들의 문제는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사회에 살고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가 겪ㅇ야 하는 아픔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다른 여성들보다 먼저 교육을 받은 그녀들은 선각자들로서 이제 받은바 지식을 이웃과 사회와 민족을 위해서 사용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일제의 억압하에 신음하는 민족을 위해서,가난에 시달리는 민족을 위해서,경제적,사회적,정치적,문화적 차별과 소외 속에서 시달리는 동포를 위해서 모두가 힘을 합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즉 누구의 억압도 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독립국가 건설에 일익을 담당해야 할 과제가 주어진 존재들로서 부각되어졌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얼크러져 있는 싸움터인 제3세계의 한 국가로서, 조선에서도 소위 근대화가 이러한 싸움의 한 표현으로서 등장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자체 속에 배태된 가능성의 성장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강요당한 근대화 물결 속에서 먼저 교육을 받은 여성으로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없었을 수 없고, 이런 자각을 가진 여성들이 사회참여의 의지를 굳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종교적 배경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재정적으로 독리발 수 없어 외국의 선교본부의 지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미션계통의 선교 교육기관들의 교육자들이, 즉 선교사나 조선인을 막론하고, 얼마나 조선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삼아서 학생들을 교육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더구나 이 세상적인 것보다는 하늘의 것을 더 강조하면서도 한국의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서구문화를 기독교와 동일시하여 우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던 선교사들이 얼마나 조선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깊이 있게 다루었겠는가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학교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이 얼마나 한국의 문제를 그들의 스승들보다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었겠는지 또한 문제로 남는다.

정세현 씨는 "여자교육의 역사가 불과 4,50년에 불고한 한국인인지라 부인운동의 역사가 짧은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마는 소위 부인운동이 시작되기는 진실로 짧은 10여년 전 을미운동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도 기천 명의 신교육을 받은 여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거의 전부가 종교학교 출신으로서 찬송가나 성경을 잘 아는 여자가 가장 새로운 사상의 소유자였다. 사실상 2,30년전만 하여도 교회출입을 하고 학교에 발을 들여 놓는 여자와 그 부모는 큰 혁명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성에게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여성관을 가졌을 뿐이었다. 즉 '교회의 머리는 예수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니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할지니라'하는 봉건사상적 여성관이 그들을 지배하였으므로 오직 인종하는 것만을 최고의 미독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여자의 지위를 개선하려는 운동같은 것은 몽상에도 생각지 못하였고..."1)라고 주장한다.

각종 성경학교 출신들, 신학교 근대식 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은 여성들 중에서 선교사들이 요구하는 종교적인 사업 외에 다른 활동에 얼마나 헌신할 수 있었는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여성들이 긴 잠에서부터 깨어나와 집 밖으로 나온 것은 여성의 사회참여를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지만 나와서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내에서는 실상 가정에서 하는 일의 연장선상의 일, 즉 남자의 보조자 역할만 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면 사회에서는 어라나 더 나아갈 수 있었는가 살펴보기로 한다.

1. 항일운동

기독교가 복음을 전파하러 들어왔다는 것은 서구의 세력이 이 땅에 밀려 들어오는 것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서구세력 특히 미국이 한국을 식민지화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출신의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들이 세운 병원에서 혜택을 받은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합병할때,아니 그 이전에도 이미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게는 어느 정도 진정한 의미에서 한민족의 자주 독립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어느 한 세속적인 국가의 산물이 아니라 국가를 넘어서는 하나님을 믿고,모든 민족이 평등하게 취급받는 하늘나라를 믿는다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말살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다. 국수주의적인 의미에서의 맹목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대등한 관게에서 서로를 보완하여 보다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그래서 인류의 미래에 기여할 수 있는 건전한 민족주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미국 선교사들이나 그들에게서 교육을 받은 기독교여성들이 얼마나 이러한 의미에서의 민족주의 수립에 기여를 했는가를 평가해 보는 일은 중요하다.

조선민족의 자생적인 성숙이 짓밟혀가고,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서 조선을 억압하고 착취할 때 선교사들의 태도는 대체로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그렇게 가르쳤다. 1907년부터 일본은 노골적으로 반일 저항의 거점이 한국교회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한국교히의 맹렬한 항일운동에 대한 반발은 선교사들에게서 먼저 터져나왔다. 즉 게일은 "위로 애국의 미친 듯한 광란이 휩쓸어 자결,신체절단,허황한 맹세,게릴라 의거,냉혹 무정의 저항"이 차있다고 비난하고 있다.2)

감리교의 일부 선교사들도 이러한 비난을 하였다. "선교사의 행동"이라는 일본측의 문서에는 1907년 5월 2일 미국선교사 존스, 스크랜톤 두 박사가 이등통감을 저택으로 방문해서 자신들은 한국인의 도덕적 및 정신적 개발을 위함에 노력하고 정치상의 것에 대해서는 초연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밝혔다고 한다.3)

따라서 선교사들은 1907년의 교회 대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히에서 자라나고 있던 민족주의적인 자각과 애국적인 열의 및 행동을 꺾어 버리고 비정치화의 길을 가도록 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4)

선교사들은 한국이 국가적으로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예를 들어 3.1운동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도 처음에는 잘해야 온정적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선교사들의 관여는 일차적인 것이 아니고 이차적인것에 불과하였으나 충분한 효과는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들 선교사들의 관여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기독교도적인 자비를 반영한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은 경찰서와 형무소에 접근할 기회를 요구하며 고문을 정지시키는데 조력을 하였다. 그후 일본의 불의와 만행이 폭로되자 선교사들의 감정은 단순한 동정에서 의분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한국에서일어나고 있는 비참한 사태의 진상을 전세게에 호소하기로 결정하는데서 선교사의 감정은 마침내 행동으로 표출되었다.5)

그러나 한국기독교인들은 선교사들의 이러한 의식과 태도를 넘어서는 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는 1910년 그리슨 목사가 블라디보스톡 한인교회인 신한촌 교회 사경회에 참석할 때의 일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에 개신교가 전파되었을 때에 교인들의 입교동기는 사회적,현실적인 요인이 강하였다. 즉 일반민중의 경우, 관리들의 가렴주구와 탐익을 피하기 위해서 입교했다. 또 지배층의 경우는 관료들이 개화를 통한 구국의 방편으로 기독교와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 그들의 입교의 강한 동기였다. 이들 입교한 교인들에 의하여 반봉건 개화의식을 성장되었고 이는 자주독립의식으로 연결,성장하였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1896년부터 국왕탄신일에 충군적이고도 시위적인 대중집회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애국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고 협성회와 독립협회 등에도 많은 기독교인 인사들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6)

독립협회 사건 이후 선교사들에 의한 교회의 비정치화가 강력히 추진되었지만 3.1운동 때의 기독교인들의 참여, 105인사건,물산장려운동, 신사참배 거부운동 등은 항일의식의 면면한 이어감이라고 할 수 있다.7)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일화는 기독교인들의 항일의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정한 대로 사경회 날이 다가왔다.사경회 날이 다가왔다. 그리슨목사는 남자반을 맡아 인도하고 그의 아내 레나여사는 여자반을 맡아 인도했다. 사흘째 되는 저녁집회 때였다. 레나여서는 십계명을 가르치게 되었다. 여섯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에 가서는 더욱 힘을 주어 가르쳤다. 왜냐하면 그때 신문에 끔찍한 살인기사가 많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그중에도 한인들이 일본인 암살을 마치 의로운 행위처럼 쓴 것을 보고 놀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나여서는 살인이란 무조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가르쳤던 것이다.

교인들은 잠자코 레나여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날밤 부인들은 말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 얘기를 남편들에게 전했다. 그러자 큰 분노가 터져 나왔다. '한인이 왜놈 죽인 것이 왜 죄냐?그렇다면 왜 성경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돌로 쳐죽인 소년 다윗을 영웅시하느냐'이렇게 말하면서 노발대발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리슨 목사는 왜놈들의 앞잡이다'라는 소리가 높아졌다. 사태가 이쯤 험악해지나 사경회는 중단되었다. 최관흘 목사는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나! 최 목사는 교인들을 하나 하나 붙들고 사정했다. 타일렀다. 겨우 노기가 가라앉아 위험한 고비만을 넘길 수가 있었다."8)

여성들도 또한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일본의 침략과 지배에 대하여 저항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여성들이 이러한 문제를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기에는 힘의 축적이 부족했다. 황신덕 씨는 그 당시 여성들이 활동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내가 동경에서 돌아와 얼마쯤 시간을 보낸 후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여성운동을 한번 시작해 보겠다고 작정했을 때 현실적으로 부딪친 문제가 바로 그런 문제였습니다. 여성단체를 하나 조직하려 해도 자유롭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여성들을 모으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요.대부분의 여서들은 가정살림에 꼼짝없이 얽매여 한발짝도 울타리 밖을 나올 수가 없고 거기다가 그 동안의 여자천시 사상으로 교육을 시키지 않아 어떤 운동에 필요한 기본지식이나 능력을 갖춘 여성이 그리 흔하지 않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단체에 들어가 한 3년 활동해 보았습니다만 여성의 기본적인 문제에 관한 생각은 항상 머리에 남아 있었습니다...(중략)지식수준이나 의식의 면에서 기초가 잡혀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단체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떤 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전개하려고 하면 처음에는 한 50명쯤 모여요. 그러다가 다음에는 30명,그 다음에는 10명 이런 현상이라고는 볼 수 없었어요. 엄한 시부모를 모시고 복잡하고 전근대적인 가정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환경, 의식의 부족,지식의 결여 등이 그 주요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볼때 가정생활을 과학화하고 근대화하며 여성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여성운동 또는 독립운동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9)

따라서 이때 여성들이 애국운동에 가담한 것을 여성들의 조직화된 역량의 표출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여성들이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마침내 그녀들의 전통적인 가정적 삶까지도 위협당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서는 것을 여성의식의 신장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를테면 행주산성 전투 때 여성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나른 것을 여성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적어도 우리가 기독교 여성운동이라고 했을 때는 기독교적 신념하에서,여성문제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조직적인 운동을 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칙하에서 기독교 여성들의 민족과의 관계, 사회참여를 살펴보기로 한다.

1) 국채보상운동

근대에 들어와서 여성들이 국난에 대처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한 예는 국채 보상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1876년 2월 27일,강화 연무당에서 12개조의 수호조약이 조인된 뒤 일본은 여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한국을 거액의 채무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리의 발목을 점점 쇠사슬에 얽매어 영영 국권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 된다 하여 1907년 2월 21일에 맨 먼저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그의 향우인 동지 서상돈이 우선 단연동맹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취지서를 공함으로 발표하였다.

신문을 통하여 이 소식을 규방에서 알게된 서울의 부인들은 마음에 크게 자극을 받고 전 평리원 판사 김규홍 부인과 이준 부인 이일정이 남북촌유지 부인들과 회합하여 "국제보상부인회"를 조직하고 대안동 414통 4호 김규홍 집에 임시 사무소를 정하였다.

이에 뒤를 이어 대구부인들의 발기로 손에 꼈던 은가락지를 뽑아놓고 경고문을 발표하였고, 부산의 좌천리 부인회의 부인들 역시 살림을 알뜰히 하고 반찬거리를 절약함으로써 그 남는 돈을 국채보상금에 제공하기로 결의하였다. 1907년 4월 평안남도 삼화항에서는 "패물 폐지 부인회"를 조직하고 취지서와 규칙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통감부가 항일의 급선봉인 대한매일신보를 타도하려는 책략을 꾸며냈고 이 바람에 서리를 맞아 좌절의 비운에 빠져버렸다.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의 후임 사장 영국인 만함(한국명)이 신문운영권을 통감부 앞잡이에게 매도하고 일본으로 떠나버린 뒤 친일의 간부들과 사회유지로 국채봉삼처리회를 구성하고 처리방법을 결정한 다음 새로 입사한 간부진에게 대한매일신보사에 예치하였던 의연금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들이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는 동안 소위 한일합방이 이루어져서 총독부에서 그 돈을 압수하였다.10) 이 국채보상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결과적으로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방법으로는 너무나 사태를 단순하게 본 순진무구한 방법이었음이 드러났다. 이 운동에는 물론 전국적으로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였고 특히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기독교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예는 다음과 같은 조직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국미적성회 1907.3.29.인천(기독교)박우리바,여누이사.정혜쓰더.장마리아 김쓸비여,송천심이. 기독교부인.식구 수대로 일시식, 황성 1907.3.14 남양군 부인의성회 1907.4 경기도 김희경,김혜중,안마리아. 기독교신도성.현금,기타 제국 1907.4.17. 영도국채 보상부인회 1907.6 부산 유지 기독교부인 현금등 황성1907.6.22 비석동예수교 부인국제보상회 삼화항 기독교부인 현금등 대매 1907.4.24 11) (대매=대한매일신보의 약어)

이렇게 기독교부인들로 조직된 4개 단체는 국채보상 여성단체의 31%를 차지하고 있다.12) 이 중에 인천에서 기독교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활동한 국미 적성회는 1907년 3월 29일에 발기하였는데 발기인은 박우리바,여누이사,정혜스터,장마리아,김쓸비여,송천심이이고,개최 당시의 회원수는 80여명이었다. 이중 20명을 권고위원으로 결정하였고 위원 두사람이 한 동리씩 맡아 여성참여를 권고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들 권고위원에 의하여 매주일마다 의연곡물이 수합되었으며 회원수는 활동 수일 만에 500여명으로 증가되었고, 음력 2월 한달 동안에 수합한 의연미와 의연금품이 무려 18섬 8되 8홉에 달하였고 동화가 254원 36전에 1냥중짜리 은비녀 2개가 수합되었다. 이들의 의연미는 매조석마다 매식구당 일시씩 떠서 모은 것이었다.13)

적성회 취지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 일개인으로 말하여도 남에게 빚을 지고 그 전주를 보면 압기가 되어 스스로 자유권리를 잃어버리고 필경 그 집은 점점 쇠퇴하여 보전치 못하나니 나라일도 또한 일반이라.외채가 있고야 어찌 보전하기를 바라리오. 나라를 사랑하는 자매양 눈물을 흘리고 한탄하기를 마지 아니하더니 하나님이 도우사 근자에 사방에서 유지하신 선배들이 의조금을 모집하여 단연회를 실시하고 일심으로 국채갚기를 결심하는 자가 상약한 바 없이 각처에 불일 듯하니 어찌 우연타 하리오. 그러나 우리나라 여자로 말하면 규중에 있어 바깥일은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도리로 알았더니 지금 세계각국을 볼진대 남녀의 분별은 있으나 권리는 남자와 조금도 등분 없는 것을 본즉 이것이 떳떳한 이치라 여자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적자는 일반이온대 어찌 녹녹히 옛법을 지키고 만연히 두동하오리까.비록 일푼일지라도 보조할 터이온데 우리 여자가 다른 권리는 없으되 집마다 양식 다루는 주권은 우리 여자에게 있는 고로 몇 사람이 작정하고 매일 먹을 양식중 식구 수효대로 때때에 한술씩 모아 국채갚기로 이회를 실시하고 이름을 적성회하라 하니.. 우리는 밥한술씩 덜 먹고 십시일반으로 모으는 쌀로 국채갚아 노예를 면하고 자유를 찾아 영원히 세계상 상등국이 되기 바라나이다..."14)

이 취지서는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는 남자만이 바깥 일에 관여하는 옛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국채봉상운동의 취지문서들의 내용은 거의 이와 유사한 경향을 띠고 있다. 1907년 3월 9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나타난 대구부인들의 경고문은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라고 역설한다.15)

더 나아가서 "이렇듯이 국채를 갚고 보고 국권만 회복할 뿐 아니라, 우리 여자의 이름이 세상에 전파하여 남녀 동권을 찾을 것이니..."16)라는 차원까지 발전한다.

즉 나라를 위하는 일은 곧 여자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취지서들에는 "우리가 함께 여자의 몸으로 규문에 처하와 삼종지도의에 간섭할 사무가 없아오나..."(대구부인들의 경고문17) "정승이 어질지 못하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아내가 어질지 못하면 집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니 제가는 치국지본이라 우리가 치산을 잘 하여야 군자들에게 의무를 보상하려니와"<부산부인들의 감선의연취지서>.18)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의 근본 영역은 가정인데 나라가 위태로와진 지금 가정도 위태롭고 따라서 이 운동에 여성이 참여하여야 한다고 역설하는 내용도 있다.

이 운동은 남성들의 발기로 시작되었고 거기에 여성들이 적극 참여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따라서 참여한 여성들의 의식수준도 남자들이 하는 일에 협조하는 정도이다. 민족의 고난이 끝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심화되어 갔는데 국채보상운동 이후의 발전적인 여성 조직활동이 계속 맥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이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의식이 주체적인 활동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라는 점을 밝혀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은 여성들의 의식에 변화를 가져왔고,눈앞에 벌어지고 있는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만큼의 초보적인 싹이 트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국채보상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한 이일정은 이미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얽매인 여성이 아니었다.

이일정의 활동을 보면, 그녀는 남편 이준이 정치개혁운동을 하다가 옥고도 겪고 유배되는 동안 어린 딸을 데리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여성은 반드시 독자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경험철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가 1907년 신년벽두 서울 안현동(지금의 안국동 일대)11통 16호 길가집에 안현부인상점을 개업한 것이 그의 소신으로 이루어진 한국 최초의 일이다.

이 상점은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돌아오지 않자 자세한 소식을 알려고 러시아 등지를 헤매는 동안 상점은 페지되고 말았지만 그녀의 딸을 그 자립정신으로 진명여학교와 동경 유학을 시킬 수 있었다고19) 한다.

그녀는 아직도 상인을 천시하던 시대여서,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생활 기반을 구체적으로 닦을 줄 아는 한 독립된 인격이었고 그것이 그녀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2) 3.1운동

(1) 배경및 운동과정
식민통치 10년 동안에 자본가,농민,노동자 등 사회구성원 각계 각층이 식민통치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입음으로써 그들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이 급격히 높아져 갔고 이 기회를 포착한 일부 종교인, 지식인들이 불을 지르게 되자. 항일 민족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적 전민족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어간 것이다.

식민통치 10년을 우선 민족자본가 계급에게 큰 타격을 준 것이었다. 문호개방 이후 일부 선진적 민족 자본가층이 형성되어 갔으나 "합방"이전에 이미 보호국 체제가 단행한 "화폐정리사업"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은 데다가 "합방"후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실시된 회사령(1910)에 의해 다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1910년대에 있어서의 민족자본의 성장도는 지극히 낮아서 3.1운동이 발발한 당시 기업에 투자된 민족별 자본액 비율을 보면 조선인 기업이 11.7%에 불과한 데 반해 일본인 기업은 78.4%나 되었고 나머지 8.9%가 두민족의 합동기업이었다. 아직 예속되지 않은 민족 자본가들이 식민지적 경제구조의 정착화에 따라 그 진로를 봉쇄당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농민들의 경우는 사정이 더욱 절박했다. 조선왕조 후기 이래 점진적으로 발달해 오던 농민의 토지소유가 1918년에 끝난 "토지조사사업"의 강행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상층 농민은 자생적 자본주의화 담당층으로서의 성장이 철저히 봉쇄되고 오히려 소작농으로 전락하기 시작했고 소작농민층의 소작 조건 역시 악화일로에 있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조선총독부 자체가 거대한 지주로 변하고 일본인 지주가 증가하는 반면 조선농민의 소작인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1914년에 전체 농가 호수의 1.8%이던 지주가 3.1운동 전해인 1918년에는 일본인 지주가 늘어남으로 3.4%로 증가한 반면 주로 조선농민인 자작농은 22%에서 19.6%로, 자소작농이 41.1%에서 39.4%로 각각 줄어들었고 소작농은 35.1%에서 37.7%로 증가했다. 극히 일부의 지주층을 제외하고는 조선농민 전체가 식민통치 10년의 피해를 깊이 입고 있었떤 것이다.

1910년대에는 일본의 재벌자본이 아직 본격적으로 진출하지 않았고 그 대신 소규모의 공장과 가내수공업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그 때문에 노동자의 수는 점점 증가하면서도 그 노동조건은 극도로 나쁜 상태에 있었다. 특히 임금수준에 있어서는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1913년의 통계를 예로 들면 서울에서의 토목전이었고 부두노종자의 경우 일본인은 120전인데 비해 조선인은 43전이었으며, 서울 철도공장 노동자의 경우 일본인의 월급은 31원 59전이었고 조선인은 12원 44전이어서 조선인의 임금은 일본인의 2분의 1 내지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낮은 인금과 긴 노동시간,비인간적인 대우, 민족적 차별 때문에 1910년대에도 이미 노동파업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1916년에 파업건수 8건,참가인원 458명 중 조선인 참가자가 362명 가운데 조선인이 8,283명으로 그 비율이 84건,참가인원수 9,011명 가운데 조선인 8,283명으로 그 비율이 92%로 증가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 중의 하나에는 세계사적으로 고조된 혁명적 분위기가 있었다. 즉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의 독립문제, 러시아혁명의 성공은 조선의 지식인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3.1운동의 기폭제는 1919년 2월 8일의 2.8 학생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보다 한 발 앞서 근대화한 일본에서 신학문을 배운 유학생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에 예리한 정세판단을 하고 그 추세를 유리하게 이용하고자 한다.그들은 '조선유학생학우회'(1919.10.27),"동경조선 기독교청년회"(1906.6.8)."조선학회"(1915.11),"조선여자 유학생 친목회"(1915.4)."동경조선 고학생 동우회"(1917.1) 등을 중심으로 한 유학생 활동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었다.21)

이 동경 유학생들이 2.8선언문을 가지고 국내운동을 선동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고,이 독립선언문은 국내의 천도교주 손병희,긷고교 이승훈,불교승려 한용운 등 33인의 지식인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 지배하에서 겨우 합법적 활동을 보장받은 종교, 교육자의 집단이었고,봉건체제 내에서 발흥한 중소자본가,인텔리,관료에서 민족모순의 격화와 더불어 직업적 종교가로 전신한 자가 많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강화회의 열국위원회에 보내는 청원서, 총독부,일본국회에 대한 의견서 등 다섯 종류 청원서였다고 한다. 그들의 운동 방침은 문서를 배부하고,독립선언을 공포하여 일본정부의 양심에 호소,선처를 희망했고,만약 순조롭게 끝나지 않을 때는 여러 열강 그 중에서도 미국 대통령의 개입 혹은 원조를 기대하는 대외의존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22)

그들은 구 봉건귀족이었던 박영효,윤용구,한규설,김윤식 등에게 제휴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청년, 학생 그룹에게 제휴를 요청했다. 학생그룹의 지지를 얻은 민족대표는 당초 3월 3일로 예정된 고종국장일에 독립선언을 발표하려고 했으나 돌연 2월 28일 밤에, 3월 1일 명월관에서 자기들끼리 독립선언 발표를 하기로 변경하여 4명이 결석한 가운데 이를 실행한 후 그 자리에서 총독부 경무국에 자수하여 체포되어 갔다.

민족대표의 대부분은 그 재판기록에서 그들의 "독립선언"이 저와 같은 대중운동으로 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하고 또 대중을 선동할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변명을 "사려천박한 학생,노동자"등 민중경시의 발언과 결합하여 볼때, 그들의 민중에 대한 태도는 명백해진다. 요컨대 그들 민족대표가 주최하는 운동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학생,노동자가 참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때 참된 민족독립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전진한 것은 청년,학생이었으며,대중이었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민족대표와의 공동전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각 학교의 대표들이 사전에 수차례의 회합을 가지고 민족대표와는 별도로 2월 28일 내지 3월 1일에 서울,평양의 각 학교의 운동장 혹은 교실에서 독립집회를 열고 "시위운동'을 준비하여 파고다공원으로 집합하였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서북부 각 도시에서 발발한 대중 운동은 청년 학생을 선두로 방대한 시민층을 끌어들여 전국적 대중 투쟁의 기동력이 되었다. 이 대중투쟁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즉 파상적,지속적 전개가 그 특징이었다. 시위 행동참가자는 학원, 직장으로 돌아가 민족대표의 이탈과 최초의 시위의 좌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새로운 강인한 투쟁을 기도했다.

수많은 격문과 경고문이 뿌려졌고 이에 노동자들이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용산인쇄,동아연초,경성철도국,경성시내 전차, 인천부두 등이 파업에 들어갔다. 1919년 노동자의 파업은 102건,참가인원은 11,000명에 달하였는데 파업을 총계화한 최초의 해,즉 1912년 이후의 수년간은 겨우 4.5건,참가인원도 3,4백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노동자 5인 중 한사람이 참가한 셈인 이 해의 파업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3월 4일 평양에서 시작된 상인의 시위는 충격적으로 서울,함흥,대구 등 중요도시에서 지방의 중소도시로 파급되어 갔다.

이렇게 각 게층을 종횡으로 연결, 대중운동을 뒷받침하고 끌어간 층은 청년,학생이었다. 시위,봉기에서 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예는 거의 드물었다. 특별히 그 때문에 동맹휴교,퇴교를 결의하지 않더라도 자발적 결석자만으로도 사실상 출석한 학생이 없는 맹휴로 되어버린 학교가 다수였다.

한편 농촌에서의 시위,봉기는 고종 국장일에 수십 만의 군중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을 계기로 하여 서울에서의 시위의 구체적 경과를 목격하고 신문,격문,경고문을 소지하거나 혹은 우송하여 지방에서의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장날을 이용하요 궐기한 농민은 광범한 연합체로 되어 면사무소,헌병파출소,순사주재소,우편국,금융조합사무소등 일제 권력의 말단기구를 습격했다. 전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의 궐기는 나아가서 조선인 관공리에 대한 퇴직, 반란의 호소에까지 이르게 했다.

이에 따라 일제의 고립화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4월 초순 이래 전병력을 도우언하여 가능한 한 위압을 가하는 동시에 경무기관으로 하여금 수색,검거의 자유를 가지게 하고 화근을 일소하라는 강압방침은 그 고립화에 대한 반동이었다. 본국으로부터의 증원군의 도착과 동시에 병력을 수백개소의 거점에 분산,배치하고 종래의 경비, 진압의 태세에서 운동을 선제 공격하는 탄압태세의 확립은 일제의 초조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경기도 남부를 중심으로 심야에 예정된 부락으로 방화, 부락민 전원의 살육을 감행하는 사건이 속출했다. 제암리 사건은 일제의 이러한 미연 방지책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 중의 하나였다.23)

(2) 기독교 여성들의 참여
이러한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교회라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기독교는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교회인사 16명이 서명 날인함으로써 3.1운동에 공식으로 참여하였고, 국내외에 독립선언서와 각종 문서를 전달하는데 교회는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3월1일 만세시위가 지방에 파급되었고 이 만세시위 운동에 많은 기독교인들과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도 참여하였다.24)

3.1운동에 참여했던 교회의 각오는 이렇게 나타나 있다.
"이 독립운동이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복잡을 극하는 문제이다. 교회지도자들은 만일 이 운동이 실패하는 경우,교회에 대한 피해나 핍박이 올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 운동에 가담했던 것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이 문제로 해서 기도드려 왔으며 세계의 여러 약소 민족들이 민족적이요,종교적인 자유를 획득하는 역사의 기로에서 자기들도 그러한 축복을 위해 분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노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25)

따라서 독립운동에 대한 가장 가혹한 보복이 교세가 우수한 지방의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가해지고 있었다. 일본은 경찰과 헌병의 병력으로 교회를 때려 부수고 종탑과 성경책들을 산산조각 냈으며 검거선풍 역시 기독교인들을 특별히 목표로 하고 있었다.26)

1919년 10월의 장로교 총회에서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장로교인만의 피해상황만도 아래와 같이 보고되었다. 곧 체포된 자의 수가 3,804명,체포된 목사와 장로의 수 134명,기타 기독교 관계 지도자로서 수감된 자 202명, 사살된 자 41명,그날 현재 수감중인 자 1,642명,매맞고 죽은 자 6명,그리고 훼손된 교회수가 12개소였다. 그런데 함북노회만 해도 26명의 참살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27)

가. 준비단계 - 송죽 비밀결사대
1907년 국채보상운동 이후 조직적인 항일여성 운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회활동에 익숙한 남자들은 만주,노령,중국 등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설치하고 무력을 통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행하고 국내에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국외 독립기지와 긴밀한 연락과 지원을 했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이와같은 독립운동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여성들은 거국적인 독립항징의 기회가 오기까지 개개인이 또는 학교나 교육을 통한 소규모적인 정신적 저항운동을 하는데 그쳤다.28)

특히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경우에는 맘이 맞는 친구끼리 독립쟁취의 비상시를 위하여 각각 다른 명칭을 가진 몇 개의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졸어바 후에도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는데 이것이 1913년경 숭의여학교 교사 황에스터,김경희,박정석 3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송죽 결사대이다.

황에스터와 김경희는 학생들의 지역적 분포가 전국적인 데 착안하여 독립사상을 전국 여성에게 확산시킬 목적으로 정예학생 2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사상 함양을 위한 집회를 비밀리에 가졌었다. 이들 회원들은 주거지역이나 취지지역 등지에서 각기 믿을 만한 동지를 규합하여 송죽결사대의 지휘적 활동을 하였다. 예를 들면 이혜경은 함경도에서,서배몰은 부산에서, 박현숙은 전주 기전여학교에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나이든 회원들은 송(松)형제,젊은 회원들은 죽형제로 나누어서 조직관리를 하였다고 한다.

이 회원관리는 매우 철저하였다. 최은희씨에 의하면, "오랜 시일이 흘러 송형제가 결사적인 동지를 얻게 되어도 결코 총본부를 알리거나 합석하는 일이 절대로 없으며 1대 1로 그치고 만다. 어떤 한 사람을 시작으로 2단계,3단게를 구성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죽형제는 송형제가 있다는 것 조차 모른다. 또 자신들이 죽형제라는 사실마저 알지 못한다. 다만 구국동지의 결의 형제로서 비밀을 지킬 뿐이다."30)

이들은 교회마다 부인계몽단체를 결성하고 부인회에서는 국산 장려와 흰 옷에 물을 들여 입자는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황애덕은, "우리는 독립을 위하야 외국물건을 쓰지 말고 우리 국산으로 생활하자는 실천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는 왜비누 대신에 녹두가루를 만들어 쓰고 의복도 무명과 명주로 만드러 입었습니다..."31)

고 송죽 비밀결사대의 활동을 회고하고 있다. 그녀들은 회의를 할 때면 의례히 통곡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또한 망명한 애국지사들의 가족을 돕기 위해서 해외에서 밀사가 들어오면 그들의 여비와 체류비를 위해서 회비를 각출했다.32)

이때 회원은 월 30전을 내게 했고 그 회비 이외에도 자수 등을 판매함으로써 특수회비를 마련하여 국외의 독립운동기지에 송금하였다. 예를 들어 김경희는 상해임시정부로 가서 활약하다가 폐결핵으로 1919년 10월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상해에서의 추도사 중에 송죽회라는 명칭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그가 7-8년간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회비를 모아 독립 군자금으로 송달하는 애국적 활동을 하였음을 치하하고 있다. 그 "비밀단체"가 곧 송죽결사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33)

이러한 조직은 후일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준비조직이 되어 주었다. 이를테면 1919년 2월에 3.1운동을 준비하기 위하여 황에스터와 김마리아가 일본에서 국내로 잠임하였는데,김마리아는 부산,대구,전주,서울,황해도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만세시위를 독려하였고 황에스터는 서울을 거쳐 평양의 송죽회원 장성석에게 들러 거사 준비를 부탁하고는 서울로 돌아왔다. 이들이 이처럼 여러 곳을 다닌 것은 일본을 떠나기 전에 항일 만세 시위를 거족적으로 전개하는 데 여성을 참여케 하기로 하고 송죽결사대의 조직을 이용하기로 서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34)

이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가면서도 경찰망에 잡히지 않았는데 이는 기독교 여성들이 개인으로사가 아니라 여럿이 모여서 조직을 만들고 관리할 수 있는 성숙함과 축적으로 보여진다. 물론 활동내용이 아직도 독자적인 활동이 아니라 남성들의 독립투쟁을 도와주는 보조적인 역할과 독ㄹ비에의 의지를 깨우치는 계몽적 역할을 담당하였찌만 그러한 역할을 여성들 스스로 결정하고 조직된 힘에 의해서 진행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나.3.1운동에의 본격적 참여
2.8선언 당일에는 김마리아,황에스터,현덕신,정자영,유영준,나혜석,노영조,성목진 등의 여자 유학생들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2.8운동이 동경에서만 그쳐서는 안되며 이 기회에 국내에서 거족적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여자유학생들이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을 하였다. 송복신 등이 먼저 민족자결운동에 관한 비밀문서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왔으며 뒤이어 김마리아,황에스터도 곧 이어 귀국 활약을 하였다.35)

일본에서 귀국한 여자유학생 또는 상해에서 파견된 여성지도자들에 의하여 3.1운동을 위한 여성조직이 학교와 교히를 중심으로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각 여학교에서는 비밀써클이 활발히 조직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한 여학생의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2개월간 우리들은 여러가지 준비를 하였다. 학우의 주소를 조사하여 재정을 구취하며 일인의 눈을 피하여 비밀리에 동지를 단속하였다. 혹 때로는 아궁지 앞에 널짝을 놓고 그 밑에 들어가 가만히 한마디 두마디씩 연락하여 주기도 하였다가 3월 1일 오전을 당하여 어린아이 큰 사람 할 것 없이 하나씩 둘씩 알고 가서 오늘 할 일을 알려주었다."36)

또 3.1운동을 목격한 영국인 맥켄지의 저서인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록된 다음 내용을 통하여서도 3.1운동을 위한 여학생의 철저한 준비 상황을 알 수 있다.

"어떤 미션스쿨의 여교장은 며칠 동안 여학생들이 이상하게 들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입했어'하고 서로 묻는 것을 보고 어떤 여학생단체가 새로 조직되는가보다 생각했다. 이것은 그 위대한 날이 오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어느날 아침 교장이 교실에 들어가 보니 자리가 모두 비어 있었다. 선생 책상 위에는 여학생 전원이 서명한 자퇴서가 놓여 있었다..."27)

이러한 활동에 연대한 교인인 듯한 한 여학생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호소문은 이 여학생이 민족의 문제와 신앙의 문제를 얼마나 잘 연결시키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여학생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호소문:"파리 평화회의의 여러분이여,한창 인류의 정의와 권리를 개정하기에 주의하는데 우리들 한국아동은 삼가 上帝의 앞에 정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부휴하여 주시며 안무하여 주시기를 앙청하나이다. 우리들은 불행히 여신을 타고나서 말할 수 없는 수치적 대우를 받았으며 입으로 옮길 수 없는 모욕을 당하였사오니 아! 吾人은 장차 누구를 향하여 호소하여서 원억을 伸하오리까? 오인은 장차 어디를 향하여 원조를 걸(乞)하오리까?오인은 설사 허공을 우러러 규호한들 불쌍히 여길이 누구오리이까?요사이 듣건대 각국 사람들이 모두 자유를 요구한다 하옵기 우리 한국의 원한을 품은 남녀아동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우리의 받던 압제를 벗어버리려고 한국의 독립을 선포하였삽더니 우리들은 마침내 구타를 받고 감금을 당하고 타마를 입고 칼에 찍히고 철구에 끌리고 자도에 찔리고 머리채를 끌려 다녔사오며 우리 방실은 소휘되었사오니 이것을 정의라 하리까? 이것이 인도라 하리까?오인은 예배일을 당하여도 교히당에 갈 자유가 없습니다. 오인은 국내에 거주하면서도 항상 기독교인이 아니냐는 힐문을 받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곧 구타와 장초를 받고 피상당한 자 벌써 다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치 아니합니다. 다만 양수를 들고 상제께 향하여 국가를 위하여 호소하면서 자유와 민권을 간구할 뿐 이외다. 여러분! 여러분은 장차 오인을 연민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려나이까?여러분은 장차 일본의 참혹한 학정과 불평한 대우를 저지하려 하나이까? 우리는 이 글월이 반드시 평화회의 석상에까지 도달되지 못할 것을 잘 압니다마는 행여나 이 글월을 득견하는 이가 있어 우리의 처참한 통고에 감동되어 이것을 말씀하는 이가 있을까 함이외다. 우리들의 이 글월이 착오된 것 있사와 소아의 장난거리 같음을 면치 못하리다마는 바라건대 여러분은 양찰하소서 우리들은 권력도 없고 호소할 곳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오직 상제께서 여러분을 감동시켜 우리들의 말씀을 부청하여 주시도록 하실 것을 믿을 뿐이외다. 듣건대 아국인민중에는 일본의 현재와 장래의 포학을 인수치 못할 것을 우려하여서 지상에 서명하여 일한 합병을 청구한 일이 있다합니다마는 그것이 참뜻이 아니요, 일본사람들의 유괴입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여, 우리들은 당신을 아버지와 같이 바라오니 한번 우리들의 독립선언을 청납하시고 세계각국에 포고하시면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이 간절히 기원하는 바외다."38)

3.1운동이 주동적 매체 역할을 한 청년, 학생들 가운데 여학생들의 활동은 눈부신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한 미션학교의 여학생들은 온 읍내를 돌아다니면서 데모를 하였는데 여교장이 와서 학생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자신이 대신 경찰에 체포된다고 하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이제 모든 게 다 잘됐어오. 우리는 우리가 하려던 것을 다 했으니까.우리는 남자들이 분발하도록 했어요. 그들은 마음이 약해서 우리 여자들이 먼저 나서기를 바랐던 거에요. 이제는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겠죠"39)라고.

또한 유관순이란 여학생은 어느 남학생 못지않게 용감했던 투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3.1운동 당시 16세의 소녀로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본래 충남 천안군 목천면 지령리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3.1운동이 터지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 서울에서 활약하다가 고향인 충청도에 내려가 천안,연기,청주,진청 등지에서 공작, 봉화신호로 음력 3월1일 수만의 군중을 천안군 동면 아내 장터로 모이게 하였다. 수많은 군중을 일본헌벙에게 체포되어 천안 헌병대를 거쳐 공주재판소로 넘어갔다. 유관순은 검사국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후 재판정에서 "하는 한국 사람이다,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며 일인에 의해 재판받는 것을 거부하였다. 끝내 3년형의 언도를 받았다. 다시 경성 복심 법원에서도 판결을 거부하고 독립을 주장하였으며 일인 검사가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고 모욕적인 발언을 하자 법정에서 유관순은 걸상으로 검사를 쳐서 7년형으로 가형되었다.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자 조석으로 만세를 연창하여 그때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일인들은 나중에는 고문을 하다못해 유관순의 밥에 모래와 쇳가루를 섞어 주었다. 유관순은 오랫동안 계속된 악형과 불굴의 투쟁과 영양실조로 1920년 10월 12일 17세를 일기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40)

여성들은 이제 집에만 갇혀 잇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여성을 묶어 두었던 가정으로부터,제도로부터 벗어나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외쳤던 것이다. 시집살이도,아이기르는 일도 다 잊어버리고 하루종일 뛰어다녔던 것이다.

서용란씨의 말에 의하면 "3월 1일이 되자 독립만세가 일어났다. 만세소리가 나면 길이 모두 하얗게 되어서 뛰어다녔다. 나도 큰애를 시어머니에게 맡겨두고 거리로 뛰어나와 만세를 부르고 다녔는데 결국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41)고 한다.

이렇게 독립운동이나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일은 여성의 지위 향상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즉 김종희 씨에 의하면 3.1운동 이후 여자는 쓰개치마,장옷을 다 벗어던지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즉 이후부터는 아주 완고한 집안 여자만을 빼놓고는 여자들이 쓰개치마, 장옷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42) 이렇게 여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사회적인,민족적인 문제들에 여성들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을 때, 여성들은 종래의 자신을 억누르던 억압으로부터 스스로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남자들이 하는 일에 동참하거나,보조자의 역할을 한 데 지나지 않고, 주체적인 결단이나 독립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이런 경험은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종래의 억압적인 구습에서 해방시켜 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여성들은 여성들이라고해서 무자비한 고문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석방된 소녀 죄수의 이야기는 일제가 행한 만행을 여실히 드러낸다.

"오늘(1919년 3월 28일) 21세 가량되는 한 여자가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돌아갔다. 나는 평양에서 3월 2일에 체포되어 경찰서에 구금되었었다... 거기에는 오직 12명의 감리교 여자들과 2명의 장로교 여자 및 1명의 천도교여자만 남았었다. 감리교여자 중 세사람은 전도부인이었다. 그런데 경관들은 채찍으로 우리 여자들을 내리치면서 옷을 다 벗기고 벌거숭이로 여러 남자들 앞에 세워 놓았다. 경간들은 나에게 대해서는 길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죄목밖에 찾지 못했다. 그들은 내 몸을 돌려가면서 마구 구타해서 전신에 땀이 흠뻑젖었다. 그것을 보고 이들은 '너 몸이 더워졌구나'하면서 내 벌거벗은 몸에 찬물을 끼얹었다. 내 양손을 뒤로 잡혀져서 꽁꽁 묶였다. 그리고는 내 알몸을 사정없이 때리고 땀이 흐르면 전처럼 또 찬물을 끼얹곤 했다. 춥다고 말하면 그때는 담배불로 내 살결을 지진다(어떤 이는 단 인두로 몸을 지지기도 했다)...우리들은 성경책을 다 빼앗기고 기도는 고아간에 서로 말도 못하게 했다. 사람으로 견딜 수 없는 무서운 욕과 조롱을 우리는 다 받았다..."43)

그러나 여성들은 용감하였다. 기전여학교 결사대원들의 재판과정에는 일본검사가 '누가 너희를 시켜 이런 일을 하였느냐?'하자 여학생들 대답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전국이 의를 지팡이 삼아 일어나 만세를 일제히 호창한 것이어늘,시켰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너희는 진실로 세계적 정세에 어두운 섬 사람이다"44)고 했다.

다.3.1운동 이후의 활동
3.1만세 시위가 잠잠해갈 무렵 여성들은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을 서울과 서북지방에서 비밀리에 조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녀단체들은 처음에는 투옥지사의 옥바라지와 그 가족에 대한 구조 후원을 목적으로 하는 소규모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의 소규모 단체들이 점차 통합되어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는 큰 단체로 발전하여 갔으며 이렇게 확대된 조직체는 상해의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러한 부녀단체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단체로는 서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와 평양의 대한 애국부인회를 들 수 있는데 이 단체들의 중심 멤버는 거의가 다 기독교 여성들이었다.45)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혈성단 애국부인회와 대조선 독립 애국부인회를 병합한 단체이다. 위의 두 단체는 조국의 독립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진 운동체이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병합한 것이다. 그런데 회장이었던 오현주가 남편에 뜻에 따라 독립운동에서 손을 떼려고 하자 활동은 자연히 저주해졌다.

이때 마침 1919년 8월 4일 예심면소로 출감된 김마리아, 황에스터가 이를 전국적 규모로 확장시켜 독립운동에 전력하고자 조직의 확대강화를 제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9월 9일 회의에서 종래의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확충해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본부로 개칭하기로 결의했다.46)

김마리아 등은 이 애국부인회,그들이 계획하고 있는 대일독립전쟁에 맞는 체제로 개편하기 위해서 종래의 부서와는 달리 적십자상,결사장이란 부서를 두었다. 이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군관학교는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부상자 치료구출을 위한 대한민국 적집자회를 조직한 것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국내외에서 동시에 독립전쟁 준비를 위하여 기존체제를 정비,강화,보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한 자는 주로 기독교계 여학교 교사들이었는데,그후 독립전쟁 준비를 갖춘 체제로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간호원들을 대거 규합하여 점차 그들의 참여활동의 범위를 확대시켜 나갔다.47)

또한 서북지방의 기독교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항일부녀단체인 대한애국부은회는 처음에는 평양의 장로교계와 감리교계의 부인신도들이 각기 조직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상해 임시정부의 요원들의 권유에 의하여 연합된 조직이다.48) 이 조직 역시 기독교계 교사와 전도부인들이 주를 이루었다.49)

이들 조직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려는 목적하에 돈을 모아 보내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이 조직들은 얼마가지 않아서 일경에 의해서 검거되어 활동이 중지되었다. 즉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1919년 11월 27일에,대한애국 부인회는 1920년 10월 15일에 일제히 검거되었다.

단기간이었기 때문에 체제를 정비하고 돈을 보내는 일 이외에 더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지만, 그 당시 일경보고서에 의하면 이들에 계속 활동했을 경우 일제에 끼치는 심각한 영향력을 우려하고 있다.

즉 "저들의 계획은 자못 대규모이며 조직은 심히 정돈되어 있어서 만약 13도에 걸쳐 본부와 지부가 서로 책응하여 대활동을 벌인다면 그 해화는 실로 측량할 수 없을 것이다."50) 라고 하였다. 이렇게 이들 여성들은 남성들 못지 않은 조직력과 활동력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근대식 교육을 받아 사회적인,민족적인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고려할 수 있는 여성들의 역량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직들에 있어서 조직의 결성 및 관리과정이 완전히 자주적이었다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혈성단 부인회와 대조선독립 애국부인회가 연합되어 대한 애국부인회로 된 것은 상해의 임시정부를 지지하기 위하여 조직된 대한 청년 외교단의 총무 이병철의 권유에 의해서였다.51)

민족의 고난은 남녀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든 여자든 민족의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가부장제의 억압이라는 남성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억압 또한 존재하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구의 반이나 되는 여성들이 자주의식이 없이 남성이 시키는대로 보조적인 역할만 한다면 참된 의미의 민족적 독립을 쟁취하기 어렵고 평등한 사회를 이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문제에 대한 의식 없는 활동은 결국 남성들의 보조자적 역할에 불과한 것으로 운동을 이끌어간다. 사실상 여성들이 3.1운동에 참여하고 다치고 고난받고 한다 하더라도 운동 전체의 방향,그 이후의 방향 정립에 여성들은 아무런 참여도 못하고 그저 돈이나 걷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3.1운동이 독립을 선언한 운동이었던 만큼 그 결과로 정부 수립이 추진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정부수립 운동은 노령의 블라디보스톡과 상해(1919.4.10)서울에서 각기 조직되었는데, 결국 세 정부 사이의 이해를 넘어서서 이승만의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통합정부가 이루어졌고, 그 위치는 당분간 상해에 두기로 하였다. 이는 민족운동을 계속 이끌어나갈 임시정부의 성립을 열망하는 민족적 여망이 뒷받침된 때문이었다.

3.1운동의 정신을 구현하여 비록 임시정부이긴 하지만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후의 민족 독립운동을 주도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임시정부의 위치문제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데 임시정부가 그 위치를 상해에 정했다는 사실부터가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정부라기보다 실력 양성론,외교독립론 중심의 정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만주나 연해주 지방에 있는 많은 독립군 단체들을 직접 통어하지 못했고 따라서 이 지방 독립군의 전력이 통일되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애초에 독립전쟁을 "최후의 수단"으로 정했었기 때문에 독립전쟁을 포기하다시피 한 임시정부는 심한 논쟁과 파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특히 외교 독립론에 바탕을 둔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통치론은 논쟁의 가장 큰 불씨가 되었고 임시정부 안의 평안도파와 기호파의 대립은 파쟁의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북경을 중심으로 신숙,신채호 등 독립전쟁론자들이 이승만을 불신임하면서 임시정부 활동과 독립운동 전체의 방향전환을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장했고,각 지방 해외동포사회의 70여 단체라는 개조파와 해체파,새 정부를 수립하라는 창조파로 나뉘어져 쟁쟁히 맞섰다. 결국 국민대표회는 결렬되고 국민대표회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크게 타격을 받은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집단체제로 변화, 헌법의 적용범위도 "인민"에서 "광복운동자"로 좁히는 등 큰 변화를 겪으면서 독립운동 단체로 변하는 침체기에 들어가게 되었다.52)

이러한 상해임시정부의 변화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소리는 얼마나 반영되었는가?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문제의 해결은 순진한 정열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체를 총괄적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것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의지와 힘은 오직 여성들 스스로의 자각과 굳게 단결된 조직적인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독립운동 참여에 있어서 여성들이 그 방향이나 중요한 결정에 참여치  하고 남성들에게 맡기고 남성들의 권유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보조적인 역할만 했다 하더라도 여성들의 자주의식을 싹트게 하는 데 큰 계기가 된 사실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

3) 서울 여학생운동

전국적인 항일운동에 여성이 참여한 예로 광주학생운동의 뒤를 이어 일어난 서울 여학생운동을 들 수 있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나주간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에는 충돌이 일게 되었다.

이를 발단으로 하여 1929년 11월 3일에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은 곧 목포,나주 등 광주와 지역적으로 인접한 전남지방에 파급되었고 이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이 운동은 이듬해(1930) 3월까지 만 5개월 동안 지속되었는데 참가학교가 149교,참여 학생수는 연54,000여명,이로 인해서 퇴학을 당한 학생이 582명,무기정학이 2,330명에 달했다. 그리고 검거된 학생이 1,642명으로 최고 4년의 체형을 받은 학생도 있었다. 그중에 광주 고보생으로 기소된 자만 49명이나 되었다.

즉 1931년 5월 현재 조선인 전국 학생(소,중,전)는 587,951명이었는데 비해 10분의 1의 학생이 이 운동에 가담한 셈이 된다.53)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운동에 여학교의 여학생들로 적극 참여하였다.

예를 들어 평안남도 지방에서는 1월 21일에 숭실중학생과 숭실전문 학생이 평양전문 앞까지 가두 시위를 하였으며 숭의여학교,광성고보,숭인학교 등이 교내에서 시위에 참가하였다.54)

숭의여학교에서의 운동과정을 보면, "숭의" 졸업반에 재학중이던 우신실의 오빠가 숭실대학에 재학중이었다. 그가 하루는 누이동생에게 편지를 전하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 편지가 바로 광주학생 사건의 전말과 숭실전문학교에서의 시위 계획을 알리는 비밀문서였다고 한다. 이 편지는 곧 당시 면려회 회장이던 이신덕 양에게 옮겨졌다. "... 회장 이신덕 양은 믿음직한 급우 7명(박경화,김진채,김수은,외 4명)을 선정하였다. 결정된 이들 마음의 동지들은 곧 지하실을 작업실로 삼고 태극기를 만들기에 바빴다..."55)

그러나 서울 여학생들의 항일 시위운동은 세칭 이화여고보 사건이라고 할 만큼 이화가 주동이 되었었다. 여학생운동의 가장 주동적 인물은 이화여고보 4학년의 최복순이었는데 그는 광주학생운동이 터지자 서울에서도 같은 운동을 벌여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여러 모로 생각하던 끝에 근우회 간부 허경숙(26)을 찾아가 그 뜻을 전하고 그의 활동을 얻었다. 허정숙은 최복순에게 각 여학교 간부들에게 연락,이를 알리게 하고 서로 연락하는 일을 도왔다.

이 당시 최복순은 이화의 기독교청년 회장을 맡고 있었던 정력적이고 창의적인 20세의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여학생들에게 언니와 같은 자세로 임했고 누구나 자신보다도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한다. 학생 중 항일운동을 하면 부모님을 걱정시켜드린다고 꺼려하는 학생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운동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孝에 앞서는 것이라고 역설하여 모든 여학생을 운동에 참여케 했다.

그리고 최는 자신이 진명,숙명,근화,미술,상업,정신,동덕여고보,배화 등 서울의 모든 여학생들에게 만세운동에 가담할 것을 종용하였고 그중 특히 상업의 송계월을 포섭하고 각 학교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 이보다 앞서 최는 같은 학교 김진현,최윤숙과 의논하고 다음과 같은 표어를 지어 각 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학교는 경찰의 침입을 반대한다.
2.식민지교육정책을 철폐하라.
3.광주학생사건에 대해서 분개하라.
4.학생 구속자를 모두 석방하라.
5.조선의 청년 학생들이여,일본의 야만정책을 반대하라.
6.각 학교의 퇴학생을 복교시켜라.

그리고 이화여선생 이순옥은 약소민족 해방 만세! 제국주의 타도 만세! 피압박민족 해방 만세! 무산계급 혁명 만세! 등의 구호장을 만들었다. 이순옥은 그 부모가 모두 공산주의자로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한테 사상적 영향을 받은 학생이었다고 한다.56)

각 학교 대표자들은 15일 아침 9시를 기해 만세를 고창하고 교내를 출발해서 시위운동을 하면서 종로로 나갈 것, 경찰에 체포돼도 관계 학생의 이름을 대지 않을 것, 구속 중에는 단식을 할 것, 부르는 구호는 "광주학생 석방 만세""피압박민족 만세""약소민족 만세"로 결정했다.

15일 아침 이화 3백명 학생들은 약속대로 시위를 하고 만세를 외쳤는데 교사들과 경찰의 저지로 교외진출이 불가능해지자 임종애 학생은 격분한 나머지 학교 유리창을 깨뜨렸고 최복순은 교실 출입구에서 학생들을 저지하는 선생을 넘어뜨리고 교정으로 끌어내는 등 가장 격렬한 소동이 일어났다. 아뭏든 경성여자미술학교,실천,정신,배화,근화 등 모든 여학교 학생들이 같은 시간에,그리고 여상은 그 다음날 만세를 불렀다.57)

검사국에서는 보안법으로 모두 기소하고 주모자 7명(허정숙:8명)에게 체형을 구형했다. 1930년 3월 19일 보안법 제7조(허정숙:8명)를 적용해서 최복순(20),징역 10개월,김진현,최윤숙(20) 6개월,이소옥(18) 7개월.임종애(19)박계월(20),송계월(19),각 6개월 허정숙 1년의 구형이 있었다. 그리고 언도 공판에서 허정숙 1년,최복순 8개월의 실형이 언도되고 나머지 여학생들의 항일시위운동은 여학생들이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운동을 조직,전개시켜 나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주동학교가 이화하교였다고 해서 그 운동이 곧 기독교여성들의 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운동은 1920년,30년대에 밀려들어온 사회주의 물결과 혼합된 것이었다.

그 당시의 사회주의가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여성이나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지 않은 일반 여학생들이 쉽게 호응하고 함께 일할 수 있었다. 즉 최복순이 기독교청년회장직을 맡고 있었는데도 사회주의자 허정숙을 찾아가 협의하고 함께 거사를 한것은 민족주의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특히 1930년대 초반부터는 기독교여성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갈라졌고,그들의 운동은 사실상 체제내에서의 계몽운동,실력향상 운동이 그 당시 교회지도자들이 교회 보존을 위해 강조한 기독교의 타계주의와 폐쇄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2. 단체활동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국을 위한 참여는 열성적이었고 그에 따른 희생을 치루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보조적인 역하을 담당하였다. 왜냐하면 이런 사회적인, 민족적인 문제를 여성의 입장에서 다룰 수 있는 조직적인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일상적으로 다룰 수 있는 조직의 필요성이 생겨났고 3.1운동 이후의 조직활동은 기본적으로 여성문제를 기본으로 대응하는 것이었다.

여성들의 조직활동은 기본적으로 여성문제로 기본으로 해야 한다. 사회문제를 여성문제적 시야에서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

따라서 여성들이 그 당시 어떠한 상황하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즉 그 당시 여학생들은 어떠 어떠한 상황하에서 있었는데 기독교 여성들의 조직활동은 그 상황을 얼마나 철저하게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는가 하는 것을 규명해야 한다.

물론 기독교 여성들의 조직 활동은 그 대상을 결코 교회여성에게만 국한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피조물들은 모두 다 그들이 고백하든 안하든지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에 따른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여성들은 이 땅에서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어떠한 일을 했는가가 중요하다.

1) 1920,30년대 여성들의 상황

우선 교회여성들의 단체활동이 시작된 1920-30년대 여성들의 상황은 기독교가 전래된 초기보다는 나아졌음을 알 수 있다. 소수이긴 하지만 여성들은 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고 그 교육을 바탕으로 제한되어 있긴 하지만 사회활동을 할 수도 있었다.

1910년 이전까지는 여성으로서 전문직에 종사한 사람의 수가 극히 소수였을 뿐 아니라 그 직업의 종류도 극히 제한되었는데, 1920년대에 와서는 문인,기자,무용가,여배우,은행원 회사사무원, 속기사,타자수,비행사,운전사,차장,미용사 등의 다양하고 광범위한 전문직 및 기술직 업종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주류를 이루는 직업은 주로 교사와 간호원에 국한되어 있었다. 1912년과 1946년 사이 35년간 국민학교 교사의 총수가 증가하는데 여고사의 수는 굴곡이 있지만 꾸준히 증가되고 있으며 전교사의 수에 대한 여교사의 비율도 1928년에 11.5%이던 것이 1938년 14.0%,그리고 1946년에는 12.9%로 약간 감소하긴 했지만 대체로 해를 거듭할수록 여교사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표>     국민학교 교사 년도별 통계
 년 도     총 수    남교사   여교사  총수에 대한 여교사의 비율
 1912      888명       -명      -명             %
 1928    9,214     7,807    1,057          11.5
 1938   14,953    12,863    2,090          14.0
 1946   28,975    25,238    3,737          12.9
                 한국경제연감,조선은행 조사부,1949,p.IV-227.

또한 여성이 의료직에 종사한 초창기부터 여자가 많이 차지한 부분은 간호부와 산파로서 1911-1943년까지의 32년 동안 그 수가 산파는 1,795명 간호부는 1,853명이 증가되었다.

간호부 양성은 구한국시대에 이화학당 부속의료원인 보구여관과 세브란스 의전에서 양성하고 있었고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에서는 1928년에 비로소 산파,간호부 양성과를 설치하였다. 1940년에는 도립병원등에 간호부, 산파양성소가 전국에 17개소 설치되고 이미 간호원 양성소를 설치했던 세브란스 동대문 병원을 비롯해서 선교계통 병원의 간호원 양송소는 8개소로 늘었다.

이들 간호원들은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즉 1927년 2월 18일자 [매일신보] 1928년 2월 7일자 [동아일보]에 "구호의 여신,간호부"라는 제호하에 간호원들의 종합적인 호소로 의사의 인격적 압박,종과 같은 대우,다른 사람의 죽음을 많이 겪는 일, 월급이 박하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1921년 11 월에 일어난 평양 기독병원 간호부들의 파업은 그러한 실태를 반영해 준다.59)

그러나 이들 직업여성들은 1920년말부터 일본제국주의의 격화로 경제불안이 만성적으로 지속되고, 따라서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적 수탈이 더욱 가혹해져 가고 있던 당시의 비극을 한 몸에 안고 살던 농촌여성,근로여성들에 비해서는 혜택받은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그 당시 농촌의 경제사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조선을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묶어두는데 있었고 그에 따라 농업정책을 맞추어 간 것이다. 식민지화 이후 첫 경제정책으로 단행된 "토지조사 사업"은 농토를 일시에 일본인 및 일본기관 소유로 만들고 자본주의 발달에 희생된 일본농촌을 대신하여 조선을 그 식량공급지로 정착시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기반 위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함으로써 일본으로 보내는 쌀공급량을 늘릴 수 있었고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이른바 "농촌진흥 운동"을 일으켜 농민을 독려하여 식량공급에 차질이 없게 했으며 태평양전쟁을 도발할 무렵에는 곡물의 공출제도를 실시하여 일본인을 위한 식량공급을 강요했던 것이다.

다음 식민지 농업정책은 지주제를 강화하여 보호한 대신 자작농 및 자소자농을 몰라시켜 소작인으로,더 나아가서 이농민으로 만들었다. 자작농 및 자소작농의 몰락은 농촌인구를 지주와 소작인의 두 계층으로 고정시켜, 농촌 부르조아지의 성장을 저지했고 농민운동을 탄압하고 지주제를 강화하여 이 농민을 증가시킴으로써 값싼 노동력을 대량으로 만들어 침략전쟁에 이용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통해 농민분화도 급격히 일어났고 상업적 농업도 어느 정도 발달했지만 그것이 농촌 부르조아지의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지주 소작제를 강화시켜 나간 과정이었다는 점에 식민지 시대 경제사,나아가서 전체 역사의 성격이 담겨 있다.60) "토지조사사업","산미증산계획","농촌진흥운동","공출제도"등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농업정책으로 조선농민을 몰락 일로에 있었다. 농민 몰락의 구체적 과정은 자작농 및 자소작농의 완전한 소작농화, 소작농의 세궁민화,세궁민의 유랑민 및 걸인화로 이어져 갔다.

1925년의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총농가호수의 46.6% 연간 평균 야4 12원의 적자영농을 하고 있었다. 1926년의 통계에는 세궁민이 총인구의 약 11%,약 215만명이고 걸인이 1만명이었으나 1931년 통계에는 세궁민이 약 520만으로 총인구의 25%로 증가했고 걸인의 수도 16만명으로 급증했다. 소작농민의 75%가 부채가 있고 그 호당 평균 부채액은 65원이나 되었다.

식민지 농업정책의 결과로 절대적인 빈곤에 빠진 농민들은 결국 농촌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1925년의 경우를 예로 들면 1년간에 농촌을 떠난 인구는 15만명 이상이었으며 이후에도 이농인구는 계속 증가했다. 이농인구는 최악의 경우 걸인이 되거나 아니면 산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으며 혹은 일본,만주,시베리아의 노동시장으로 흘러가거나 국내외 각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모여드는 이른바 토막민이 되었다.61)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농촌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이중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신여성]1926년 1월호에 실린 "조선의 농촌여성"에는 농촌여성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그들은 농촌에서 얼마마한 노동을 하고 잇는가 함일 것입니다. 대개 도회에서 생장한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여자따위가 농촌에서 일을 하면 얼마나 하랴 하지만 실제는 농촌여성이 농촌의 남성보다 적어도 2배는 한다고 해도 과연이 안임니다. 일의 종류로도 그러코 시간으로도 그럿습니다. 남자의 하는 일은 농사라는 단순한 일을 마터하지만 여자고 보면 대개 이상에 말한 것은 매일의 과정임니다. 종류가 그러함에 따라 시간도 그렇습니다. 남자는 조반후 석반전까지 대개 일을 하지만 여자는 조반전은 조반준비 석반후는 옷짓기 이러케 男이 만치 일을 하며 살어가는 것이 농촌여성입니다.

농촌여성은 이상에 말한 바와가치 일을 만히합니다. 따라서 그마만치 노예적 지위가 명백함니다. 그것은 단순히 일을 만히 함으로 노예란 말이 안이오. 일은 만히 하지만 자유로 못하고 굴종적으로 하며 또한 그 작물에 대하야도 사용의 자유가 엄슴으로 씨임니다.

농촌의 여성! 며느리 노릇이 노예노릇이며 안해노릇이 노예노릇입니다. 도회지 여자는 대개 남편의 버러주는 것을 먹고 지내니까 비록 멸시를 당해도 괴치 안치만 농촌여성은 자기가 스사소 땀흘니고 버러 먹을뿐 아니라 다른 가족 까지라도 버러멕이면서도 자기의 의사는 끗끗내 세워 보지 못하고 우마가티 굴종하니 이것이 노예가 안이고 무엇입니까.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농촌여성은 뼈가 부러지도록 부리울 뿐이오 자기의 가사에 대하야도 이것은 이리케하고 저것은 저리케 하자는 의사를 용납해주지 안는다는 말이웨다. 별명을 부치자면 '부조노동기'라는 것이 글으지 안을 듯 함니다. 참부려먹기 좃슴니다. 옷을 못 지음이니까 밥을 못지음니까 아해를 못 기름니까 농사를 못함니까.그 외에 가즌 심바람을 다 식혀도 한번도 반대업시 순종하니 이에서 더 조흔 노예가 어되 또 잇겠슴니까."62)

즉 농촌여성들은 남성들이 당하는 고통 외에 여성만이 당하는 성적 억압이 또 있다는 것이다.

또한 농촌여성들 외에 일제의 자본주의 세력이 침투하기 시작한 구한말부터 우리나라에는 여성노동자들이 생겨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여직공 모집은 1900년 초에 있었다고 한다. 1900년 정부의 전환국에서 최초로 지폐를 만들게 될 때 15명의 여공을 모집한 일이 있는데 응모자가 25배나 몰렸다는 기록이 있다. 두번째로는 1901년 동령동 한성제직 회사의 여공 모집이었다. 일본에서 직조기를 도입한 이 회사는 기숙사 시설까지 갖춘 규모로서 당시 황성신문에 정식으로 남녀직공 모집광고를 내어 임금과 일의 성질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여직공의 취업은 점점 증가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경제의 침략과 더불어 공장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정미소는 비교적 초기에 인천, 평양 등 도시에 설립되었으며 1906년엔 경성 동아연초회사와 목포 조면회사가 창립되었다. 이들 회사들은 비교적 여직공을 많이 고용한 회사였는데,1909년,1910년에 걸쳐 동아연초 회사에서 여공을 모집한 기록이 있다. 1910년 기록엔 "국문 약해자에 한함"이라는 자격규정까지 실려 있음을 발견한다.

1910년의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에서 여직공을 모집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예도 많이 있었다.

합방 당시인 1910년에는 공장수 151개소,8,203인에 지나지 않던 전체 종업자 수가 1922년에는 2,900개가 되어 54,667명을 넘고 그 중 10인이상 노동자를 사용하는 회사 및 공장수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664개소에 노동자수는 총 48,043인이며 이 중 여직공이 9,870인으로 20.5%나 차지하고 있다. 그후 1930년부터 공장수가 증가함에 따라 전체 직공의 수도 증가하는 한편 여직공이 차지하는 비율도 3할을 넘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는 1936년까지 계속하여 이해는 5,927개소 공장에 거의 15만명의 직공이 취업하였으며 여자는 이들의 33,3%나 되는 5만명이 넘는다.이러한 근로여성들의 산업별 분포율은 1931년부터 1938년까지 방직업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1931년에는 화학과 식품계 제조업이 각각 30%의 비율을 점하고 있다. 그리고 남자에 비해 적은 비율이긴 하지만 각종 산업분야에 약간씩이나마 참여하였다. 1938년엔 식품 제조업의 참여가 없지만 요업과 화학제조업에 각각 24%씩, 그리고 다른 산업분야에는 적은 비율이 취업하였다.63)

이 여성 노동자들은 어떠한 조건하에 처해 있었는가, 우선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그야말로 최저의 기아임금이었다.

1924년 3월 12일자 동아일보는 저임금 때문에 여성 노동자의 파업이 잦았던 인천의 정미소 중의 하나인 사이또 정미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종래 그 정미소에 다니는 여자는 칠팔세된 어린아이로부터 삼사십에 가까운 여자까지 합하여 삼백명이나 되는 터인데 그들은 정미소의 쌀고르는 방을 자기의 생명으로 알고 해가 뜨면서부터 해가 서쪽바다로 숨을 때까지 잘 고르는 여자는 이삼십말로부터 어린 여자와 늙은이는 에닐곱말 가량을 고르는데 그 삭전은 한말에 삼전씩으로 한사람 평균 하루 사십여전을 받는 터이라 한다..."64)

일제하 전반을 통하여 노동쟁의의 가장 빈번한 이슈로 등장했던 이 임금문제는 도급제도 및 벌금제도를 통한 유인 위협전술을 통하여 노동자를 더욱 철저하게 괴롭혔다. 1927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파업중이던 황해도 암리농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보도를 하고 있다.

"...매일 아침 7시반부터 저녁 6시까지 열시간 노동을 하여 오게되는데 아침에 출근이 좀 늦으면 벌금이 5전씩이다. 점심시간에 좀 늦으면 십전, 작업중 한 사람의 과실됨을 직공들이 누구라고 말하지 않으면 오전 내지 십전,너무 곤하여 잠간 조는데는 의례이 심오전씩,이 모양으로 벌금을 받아 어떤 때는 임금보다 벌금이 많게 되어 그 다음날 임금중에서 제하게 되는 때도 비일비재라고 하며 좀더 심하면 구타까지도 능사로 하여 왔다고 한다..."65)

또한 당시의 여공들의 작업환경은 마산의 조면 공장의 파업시의 요구조건에서 알 수 있다.

1.식사시간은 매일 30분씩 2회 허락하여 줄 事
2.남녀 직공에게 마스크를 줄 사
3.공장내에 직공사용의 목욕탕을 설비할 사 66)

말하자면 식사를 위해 30분의 시간마저 허락되어 있지 않았고 먼지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조면공장에서 직공들에게 마스크도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67) 또한 여공들을 많이 고용하고 있던 공장들은 부속기숙사를 두었는데 기숙사 생활은 노동력 착취를 위한 더욱 조직화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동아일보]1927년 6월 25일자 신문에 의하면,
"평양 부하 대동군에 있는 일본사람 소유의 어떤 방직회사에는 삼백여명의 이십새 이내의 소녀 직공들이 있는데 그들은 기숙사에 감금되어 출입을 자유로 못하고 혹 눈에 거슬리는 일이 잇으면 감독에 구타당하는 일이 종종 있어 여직공들은 시시로 탈주하려고 노력이 심하여 대개는 발각되어 그것이 원인이 되어 더욱 매ㅁ자게 된답니다. 이와같은 소녀 직공의 학대는 그 공장에 한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공장을 물론하고 대개 그렇습니다. 방직회사는 대개 소녀 직공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첫째로 삭전이 싼 것. 둘째로는 약하여 반항하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공장주인은 소녀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왕왕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모든 잔악한 짓을 합니다. 몇해간만 그 생활을 하면 그들의 육체나 정신은 모두 파괴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과한 노동,불결한 거처, 약한 음식 등은 다시 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들은 출입의 자유,심지어 통신의 자유까지 빼앗깁니다."68)

또한 남녀간의 임금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데, 1929년의 남성 임금은 여성의 1,7배였는데 1937년에는 거의 2배 가까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국제수준에서 저수준이라고 불리던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하여 그 절반도 못되는 한국 성인 남자 노동자의 임금과 다시 그 절반도 못 되는 성인 여자노동자의 임금,이것이야말로 일제 한국 여성노동자의 노예적 생활을 무엇보다도 잘 증명해 준다. 69)

다음은 [동아일보]1929년 11월 3일자에 "어느 여공의 하소연"이라는 제목하에 실린 기사인데 그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잘 드러내 준다.

"저는 3세때 아버님을 여의고 일곱살 먹은 옵바와 함께 어머님이 방아간에 다녀 15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옵바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양곱 직공으로 일하다가 20세에 병으로 죽자 그 길로 저는 연초회사 여직공이 됐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17세되는 봄이었찌요. 임금은 매일 10전씩이나 3주의견습동안엔 하루에 6전씩 한달에 30여전으로 감독이나 순사에게 아양을 부리면 하루가 곱게 넘어가고 비위를 거스르면 종일 욕먹고 온갖 고초를 받아 겨우 20전에 불과하답니다.

사자굴 같은 그곳에 들어갈 때는 도수장에 들어가는 소와 같이 싫습니다. 또 남공들의 무서운 색에 주린 무서운 유혹은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나 그 뿐인가요. 퇴사할 시는 경찰서에서 죄인 다루듯이 일일이 검사하지요.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십 칠세 처녀의, 그 무지한 감독손에 유방에서 하부에 이르기까지 조사를 당합니다. 얼마나 원통합니까.17세 처녀의 몸에 그 무지한 행동을 달게 밧고 저주의 피눈물을 먹음고 한낫 돈 30여전에 억매인 생활을 삼년이란 긴 세월을 하게 되었습니다.

19세 되던 겨울철에 어떤 사람의 말이,부산 모 방직회사로 가면 견습 기간이 3개월인데 식비 제하고 15원을 주고 3개월 후에는 한달에 평균 50원을 준다는 말에 어찌나 기뻣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시여 놀라지 마셔요. 부산을 당도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웁니다. 먹는다는 밥은 양쌀밤에 된장국 하나와 작업시간을 12시간이지요. 작업은 주야 2회로 합니다. 또 작업 장소는 90여도나 되는 삼복에도 문을 꼭 닫습니다. 그 이유는 공기가 들어오면 실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감독의 무리한 경향이 일반이지요. 얼굴이 반반하지 못하면 연초회사와 같이 고통이 막심합니다. 준다고 하는 것은 견습기간에 식비 제하고 30전이요,3개월이 지나도 불과 일원이 최상일 것 같습니다. 그 뜨거운 물에 열손가락이 짓물러서 보기에도 숭없거니와 손을 붙잡고 울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이시여 30전이나 1원을 받아 일가족에 도움이 되느냐 하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돈과 사회 조직이 이와 같은 이 사회 여러분이시여 한개 여공의 하소연이나 말끔이 양해하시와 이같은 사람의 깃븐 노래를 들으시도록 힘써 주시기를 믿고 붓을 던지옵니다."70)

이러한 상황은 결국 여성노동자들의 빈번하고 격렬한 파업을 일으키는데, 경성고무여공 파업(1923.7.3),인천 선미여공 파업(1923.5.1),마산조면공장여공 파업(1924.12.6)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공들의 조직적 파업에서 투쟁전술을 적극적이고 격렬하였다. 1929년 부산 5개 고무공장 동맹파업 때는 여직공들의 떼지어 공장을 습격하거나 주모자 검속에 파업단원이 일제히 경찰서에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였으며 1931년 평양 평원고무 여공 파업 때는 을밀대 지봉 위에 올라가서 체공시간의 기록을 돌파하는 전술도 있었다. 이 전술의 주인공인 강주룡은 20세 때 과부가 된 이래 파업 때가지 10년간 독신생활을 하면서 직공생활로 근근히 생활을 해온 노동투사로서 평원고무공장쟁의가 지구전에 들어가고 경찰의 간섭이 심해져 공장에서 쫒겨나게 되자 그 길로 40여척이나 되는 을밀대 다락으로 올라가서 누구든지 쫓아 올라오면 떨어져 죽는다고 위협하면거 무산자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참상을 호소하며 고주의 무리를 타매하는 연설을 하였다. 7시간 40분간이나 버티다가 경찰에 끌리어 내려와 평양서에 구속된 그는 밥 한술, 물 한모금 안 먹는 단식투쟁을 벌였다. 단식 76시간을 계속하던 강주룡은 검속기간이 완료됨에 따라 일단 석방되었다가 고주측이 내놓은 신구직원 안분비례채용안에 반대하여 신직공을 습격하는 일에 가담하였다. 이에 고주측이 강경파 20여명을 해고할 때 강주룡도 해고되었으며 가장 위험인물인 여직공 최용덕과 함께 구속되어 유치장 안에서 다시 단식투쟁을 하였다. 이들은 54시간을 버티면서 항쟁하였고 계속 취조를 받으면서 1주일 구류처분을 받았다. 이 두 여공은 구류기간이 만료됨과 동시에 석방되어 취후담판을 벌일 파업단측 회견대표로 뽑혀 계속 투쟁하며 희생되니 고무여직공 중심의 생산조합을 조직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당시 일제의 노동탄압정책 때문에 비합법 투쟁으로 전환하여 전국을 휩쓴 적색노조활동에 연루되어 1931년 5월 28일 평양서에 검거, 예심에 회부되었다. 강주룡은 평원고무공장 외의 또 다른 투사인 조영옥,최용덕 등과 함께 체포되어 만 4년의 세월을 옥중에서 미결로 신음하다가 드디어 옥사하고 말았다.71)

2) 일반 여성단체 활동

(1) 사회주의와 기독교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원인규명,해결방안 등에서 이른바 사상적 분화가 생겨난다. 즉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두개의 흐름으로 나뉘게 되었다. 물론 민주주의 내에서도 이른바 3.1운동 이후의 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대하여 타협하는 파와 타협하지 않는 파가 나뉘어 대립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역시 단일한 한 운동체를 이루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체로 크게 나누어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72)

그런데 이 분열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주로 민족주의 계열에 속해 있었다. 자신의 구원과 더 나아가서 이 사회, 민족의 구원의 길로서 기독교를 택한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게 되고 그 교회는 여전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적 세력의 일부였고, 따라서 그들은 쉽게 미국에 드나들수 있었고 이러한 그들의 배경은 자본주의에 익숙케 하고 사회주의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소원하게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3.1운동 이후 선교사들을 비롯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관심을 사회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에 쏟도록 지도했고,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순종하여야 한다는 식민지 신학을 강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근본문제는 유물론과 유신론,역사관 등의 차이가 있지만 민족 문제에 관한 한 잘 협조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분열되어야 하는 요인들 중에는 이런 잘못된 신학이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 사회,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사회주의와 기독교가 어느 선까지 함께 할 수 있고 없느냐 하는 문제를 기독교인들이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이 없지는 않다. YMCA의 기관지인 [청년]지에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논ㅁ눈들이 실려 있다. "사회주의와 기독교사상","사회주의와 기독교의 귀착점이 엇더한가", "사회 개조와 기독교"등의 논문들 속에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처해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대위같은 이는 "무삼 신세계를 조성코저 함에는 기독교사상과 사회주의가 상동하다"고 주장하였다. 1924년 1월2일부터 3월 13일까지 7회에 걸쳐 실린 "기독교가 현대자본 제도에 대하야 맛당히 취흘 태도"라는 [기독신보]의 사설에서는 자본주의의 죄악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고 이상의 사회를 조직함에도 복음이 필수라고 역설하면서 교회의 자본가나 농지주에 대한 사랑의 실현을 호소하기도 하였다.73)

그러다가 1925년 10월 21일-28일 제2화 조선주일학교대회가 서울에서 모였을 때 한양청년동맹이란 공산주의 단체에서 노골적인 반 기독교운동을 벌였다. 1925년 11월호 [개벽]지에는 이러한 반종교운동에 대한 주장을 듣고 기독교인의 그에 대한 반응을 싣고 있다. 이 기사에서 나타난 반대자들의 주장을 듣고 기독교인의 그에 대한 반응을 싣고 있다. 이 기사에서 나타난 반대자들의 주장은 "기독교는 모든 강자의 모든 전제와 횡폭이 이 종교의 마력에 의하야만 가능하얏스니 종교야말로 강자의 약자를 정복하는 평화의 무기이오 강자의 약자를 마취케 하는 유일한 수단물이엿다"74) 는 것을 중세의 로마교회 등을 예로 들어 주장하고 있다. 조선 기독교 역시 "과학지식이 부족하고 아직 봉건적인 인습을 벗지 못한 조선인은 각종 잡다한 미신적 생활을 영위한다. 이 중에서 기독교와 다른 양식 종교는 현대 미국식 자본가적 대규모로써 이러한 미신의식의 잠재하엿슴을 이용하야 그리스도의 미신과 허위를 선전한다. 그리하야 배후에 금력과 군벌의 권력을 의거로 조선민중에게 소위 도덕 양심이라 하야 인종과 유순을 장려하며 선전한다."75) 고 비판하였다. 또한

"조선에 기독교가 들어온지 임의 삼십년이나 되였는지라 그동안 서양문명 수입에 적지안한 공로가 잇슨 것이 사실이엿지만은 그 반면에 조선의 대중으로 하여금 현실을 등한시하게 하여 간접직접으로 신흥운동에 만흔 지장을 준 죄악은 더욱 크다... 보라... 예슈교인치고 보수적이 아닌자가 그 누구인가? 거개는 극단의 개인주의자로 유혈이라면 성지에 위반이라고 구실조케 회피하는 자들 뿐이니 이엇지 역사적 사명을 다하랴는 오인으로서 등한시한 바이랴!"76)

라는 비판도 하였다. 그런데 이런 반종교운동에 대해서 주일학교 연합회의 한석원 목사는 "그들은 그들이오 우리는 우리외다... 따라서 대책이나 무엇이니 하는 말도 할 것이 업는 것이 아님니까..."라는 식으로 문제를 문제로 삼지 않는 태도를 보였고 진남포교회 목사인 안경록 목사는 반기독교운동을 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며 만일 교회 내에 유산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목사가 아니라 그 지방에 판박혀 있는 장로측들이 자기의 금전을 옹하고서 교회를 탁란하는 일이 없지 아느나 이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도 배제하려던 일"77)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와는 달리 신흥우 씨는 반기독교운동과 반기독운동을 구별해야 함을 역설하고 반기독교 운동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오늘날의 교회는 그저 민중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산계급의 압 운명을 개척키 위하야 있어야 하며 따라서 현대의 기독교회는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또한 반종교운동이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면 기독교와 인류애라는 그 점에서 스스로 일치할 날이 있을 것이고 우리 교회 안에는 사실 교회의 민중화를 위하야 고심하는 사람들이 있다"78) 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반종교운동을 기독교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선교사는 반종교운동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우려하기도 한다.

"볼쉐비즘이 점차 침투해 들어왔다... 공산주의의 영향력은 특히 교회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 우리 젊은 이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젊은이들 조차도 기독교의 타당성과 진리의 교사로서의 교회의 권위에 공격을 가하게 되었다. 성서는 비판되었다. 그리고 설교 가운데 바울과 칼 막스,레닌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민의 지도자들로서 같이 언급하고 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유물론과 무신론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모든 사람에 의해서 논의되고 있다. 공산주의적 문헌은 모든 사람들의 주머니 속에서, 모든 사람들의 집 안에서 발견되었다..."79)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기독교는 오늘날의 사회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문헌들을 많이 출판해야 한다. 즉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기독교가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학과 과학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80)

기독교가 이렇게 될때, 즉 "참된 사람 정의로운 그리스도의 정신을 내심에 품고 신자를 대하면 왜 종교를 배척하는 청년이 많게 되겠냐"82) 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한국기독교의 움직임은 언제나 여러 이유로 서리를 맞았고 그리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기독교에서 농촌에 관심을 가진 움직임들,예를 들어 독신전도단,YMCA YWCA의 농촌 프로그램, 또한 적극 신앙단운동등 세상의 아픔을 함께 하려는 움직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회주의 계열에 대해서 우리는 당신들보다 더 많이 깊이 세상의 소외된 자들과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연대감을 가지고 일하였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그들의 반종교운동에 대하여 감정적인 반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 사회주의 여성단체들

그러면 구체적으로 고난받는 여성들의 상황에 직면해서 기독교 여성들은 어떤 일을 했는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그전에 우선 사회주의 여성들의 단체활동은 어떠했는가 살펴보기로 한다. "부인의 해방이란 것을 규약과 강령에 직접 내걸고 부인운동을 전개시킨 것은 1924년대 정종형,허정숙,정칠성,박원희 등의 손으로 조직되었던 조선 여성동우회가 그 효시이다."83)

1924년 5월 발족된 이 조선여성동우회는 "우리 조선의 무산 녀성은 현재의 이중노예의 상태에서 버서나자"는 의미의 선언을 발표하고 30여명 전도가 모여 창립하였다."84) 또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언을 하였다.

"녀자는 다못 가뎡과 임금과 성의 노예가 될 뿐이오 각 방면으로 생활에 필요한 일을 힘긋다하야 사회에 공헌을 하여 왓스나 용감한 남성들이 녀성에게 주는 보수는 교육을 거절하고 모성을 파괴할 뿐이라 하엿다... 더욱 조선여성은 그 우에 동양풍 도덕의 질곡에서 울고 있게 하니 이러한 비인간덕 생활에서 분거하야 굿세게 굿세게 결속하자 하였다."85)

이러한 선언의 취지하에 조선여성동우회는 그 강령을
(1) 본회는 사회진화법칙에 의한 신사회의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立할 일군의 훈련과 교양을 期함.
(2) 본회는 조선여성해방운동에 참가할 여성의 단결을 기함 86)으로 채택하였다.

이 회는 사회주의 여성의 정예분자들로 조직되어 신흥 기분이 충만하였고 그 활동에 있어서도 기민성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87) 그녀들의 사업은 주로각 지방에 40여개의 지부를 조직하고 교양에 주력하여 순회 강연과 토론, 강좌 등으로 부인운동의 정신을 선전하여 신문,잡지 등 언론기관을 빌어 사회의 여론을 환기시키기에 노력하였다고 한다.88)

그들이 벌인 사업은 이념에 따라서 원대하고 방대하게 펼칠 계획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1926년에 개최된 여성동우회 정기총회는 회원이 50여명이었고 방청자는 수백 명이었는데 당일 결의사항은 노동부인, 농촌부인,직업부인,가정부인,무산여성 등 전여성을 포함하고 있고 여성운동도 여자청년운동,여학생운동,여자사상운동 등 전운동을 포함하고 있다.89)

그러나 조선여성동우회는 창립부터 경찰의 심한 감시대상이었고 또한 존립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이념을 구체화하는 운동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즉 그녀들은 노동부인 이안음악회와 같은 소극적 사업을 개최하기도 하였고 90) 또한 무산부인을 위한 기념 강연은 금지를 당하기도 하는 등91) 활발한 활동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25년 1월 21일 주세죽,허정숙,김필순 등에 의해서 창립된 경성여자청년동맹은 여성동우회보다는 한층 더 노동문제에 깊이 관여하였다. 창립시부터 인천철공조합,인천정미공장조합, 인천무산청년동맹,인천선미여공조합 등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국제부인의 날의 기념식을 갖기도 하고 노동부인들을 위한 야학과 교양강좌를 개최하기도 하였으며 노동부인 위안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또한 여성해방동맹,경성여자청년회,푸로여성동맹,중앙여자청년회 등도 사회주의 여성단체로 여성노동운동에 깊이 관여했으며 결의사항이나 활동도 부인 노동자 임금이나 시간에 관한 것,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활동을 主로 하였다.

이와같이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단체들은 여성해방의 기치를 들고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여성들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그들의 시도는 주로 노동여성들에게 행해졌다. 비록 그 전략이 낭만적이고 성숙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시달리는 노동여성들에 대한 관심은 여성문제를 여성의 고유한 문제 즉 성적 억압의 문제로만 다루지 않고 사회문제와 함께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였다 하더라도 1922년 조선의 여성 노동자의 인구수는 전체 여성인구의 4%에 불과했다.93) 즉 여성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농촌여성의 문제에는 실천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은 산업 사회에 이루지 못한 한국의 사회구조를 무시한 체 무조건 사회주의를 수입하여 실천하려면 사회주의 여성 단체들의 맹점이었다고 하겠다. 즉 노동문제를 중시하는 사회주의 사상이 한국사회에 수입될 때의 과도기적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뭏든 1920년대에 들어와 일기 시작한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미숙하나마 사회구조적 해결 방법에 접근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시작된 기독교계 여성단체들은 계급성보다는 주로 교육,계몽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3) 기독교 여성들의 단체활동

(1) 조선여자교육회
조선여자교육회는 1920년 4월에 배화학교 기숙사의 사감으로 있던 차미리사가 그 사감직을 사임하고서 조직한 것으로 94) 차미리사는 "이른바 조선의 여자교육이라는 것은 아직 그 정도가 유치함이 그 무엇이라 말할 수 없으며, 또한 학교를 다니지 못할 가정에 있는 여자들은 편지 한장을 자기 손으로 쓰지 못하고 신문 한장을 마음대로 보지 못하므로 답답한 형편이 참으로 많읍니다."95) 라고 하면서" 이에 대하여 동지 몇 사람이 모여서 비록 아무 지식이 없으나마 가정에 있어서 답답해 하는 우리의 자매를 위하여 이 회를 조직하고 매월 한번씩 통속부인강연회를 열어 집 안에 있는 여자들에게 새 지식을 주며 새 깨달음을 주려는 것이다"96)라고 취지를 밝히고 있다.

조선여자교육회는 주로 부인 강습회를 열었는데 1920년 4월 12일 종교예배당에서 첫 강습회를 열었다. 이 강습회에는 많은 여성들이 모여 들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회는 종교예배당 안에 여자 야학회를 개설하고 학용품을 무료로 제공하였으며 교사진은 회의 간부로 있던 각 여학교의 교사 10여명이 무보수로 일하였다.97)

1920년 9월에는 엄정동 새문안 교회로 강습소를 옮겼는데 차미리사는 이 강습소를 본격적인 궤도에 끌어올려 장차 여학교를 설립한 포부를 가지고 기금을 만들어 볼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제1차로 1921년 여름 전국 순회강연을 떠나기로 하였다.

이순희 강연은 차미리사를 단장으로 하여 김선,이은,백옥복,김은수,허정자 등 6명을 단원으로 하여 출발하였다. 이 순회강연의 프로그램은 강연부와 음악부로 나뉘어 진행하였는데,강연은 "여자의 혼","현대 청년","여자의 요구"들이었다. 음악부는 독주 독창,피아노 합주, 독주,바이올린 독주 찬송가 합창 등으로 마련되었다.98)

1921년 7월부터 9월까지의 동아일보에 실린 전국 순회 강연의 내용은 "사회발전 원동력은 여자","육아와 위생","현재 젊은 남녀가 고민하는 이혼문제의 해결책","가정은 인생의 낙원"등과 같다.99)

이와같이 조선여자교육회의 강연은 가난한 여성들의 문제보다는 보다 부유한 여성들의 문제를 여권론적 시각에서 다루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서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직업활동과 사회활동의 기본인 교육은 중요하다.그러나 식민지,사회의 직업활동과 사회활동의 기본인 교육은 중요하다. 그러나 식민지 사회의 모순이 심화되어가고 그 속에서 사는 여성들도 그 심화된 모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여성들에게도 취업의 기회나 사회활동의 기회는 제한되어 있었고 이 교육사업도 결국 전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제한적인 수를 대상으로 제한적인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조선여자교육회는 순회강연시 모은 기금을 가지고 건물을 살 수 있었고 야학에만 그치지 않고, 주학을 병설하여 "근화학원"이라는 학원을 설립했다. 이것이 덕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2) 기독여자청년회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 잇따라 청년회가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여자청년회,기독여자청년회,부인회 등이 조직되었다. 1920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에는 기독여자청년회에 관해서 의주야소교 서교 청년여자계에서 전도,교육,자선의 목적으로 기독여쟈청년회를 창립했고 회원 한 여성이 "부인의 힘"이란 연제로 강연을 하였으며 평양순회 전도단원 두 여사의 열렬한 권유에 일반 청중이 500여원에 달한 원조를 하였다.101) 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이렇게 해서 결성된 여자기독청년회는 근우회가 결성된 1927년에는 그 수가 5,000개에 달했다고 한다.102) 여자기독청년회의 사업은 주로 강연이 많았다. 그 강연내용은 주로 "개조사회와 신여자"(은율여자기독청년회,1920.7.22),"여자의 정신적 화장품"(의주 기독청년회,1921.5.6),"인격 양성의 피겁호,자겁호"(기독청년회 토론회 1921.8.8),"현대사회의 우리 여자의 요구는 무엇이냐"(1921.9.6)등이었다.103)

대부분의 기독여자청년회의 목표는 전도,교육,자선의 주 목적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종교활동 참여를 촉구하는 내용이 많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남녀 평등이 논의되었다.104)

이들 기독여자청년회와는 달리 여자청년회의 강연주제눈 마산 여자청년회 제1회 강연회 "여자 내외법의 폐풍에 취하여","부인해방에 대한 나의 각오 (我의 각오[동아일보]1921.7.16),성진여자 청년회 강연회 "부녀해방","부인의 힘"(婦人의 力[동아일보]1921.9.6)등으로 직접적으로 여성해방을 호소한 것이 많다.105) 여자청년회와 기독여자청년회 사이의 조직적 성격의 차이가 명확ㄷ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기독여자청년회는 평안남도에 많았고 비종교적인 여자청년회 부인회는 경상남도와 함경남도에 많았다.

이는 아마도 관서지방이 개신교적인 전통이 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개신교는 관서지방에서 보수층 관료층이 아닌 근대화의 경향을 강하게 지녔던 자립적 중산층에 의해 수용되었고, 이 자립적 중산층은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나라의 모든 모순을 제거하고 개화를 이룩하게 될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관서지방의 기독교적 전통은 상당히 강하였다.107)

기독여자청년회와 여자청년회간의 갈등 관계도 약간 찾아볼 수 있다.
[동아일보]1926년 2월 25일자에는
"남성과 동등의 책임을 질머진 여성이 순천사회에는 잇때끗 현대적 모임이 잇슴을 ...볼 수 업섯다... '기독학생 청년'으로 모임이 잇서서 그나마 신여성계에 한가지 이채를 도하얏섯스나 그는 다만 '예수 크리스도'를 상좌에모시고 줄곳 천당마을 꿈꾸는 단순한 종교적 '모임'에 지내지 안엇섯다.이것이 엇지 현대여성들의 이상적 욕구를 그대로 만족시킬 수 있으리오"108)

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이는 기독여자청년회가 지나치게 종교적인 데만 집착하는 태도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1926년 8월 21일 [동아일보]에 실린 강화 여자청년회에 관한 기사를 보면

"이 사회는 북감리교에 잇는 여자 엠윗청년회의 후원으로 단순히 종교방면에서만 활동하든 것을 적극적으로 대개혁을 하야 여성운동에 진력하며 일방으로는 활동범위를 확장하야 성공회와 밋 일반사회와 협동하야 가지고 강화 유아원을 금년 춘기에 설립하야 장래 투사 교양에 열중하고 있다."109)(

라고 나와 있다.
이는 기독여자청년회가 여타의 자극으로 인하여 점차 그 성격을 확장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여자청년회,기독여자청년회의 활동은 지식의 획득과 여성의 자각에 기초한 봉건적 인습타파이며 여성해방이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황신덕씨에 의하면 기독여자청년회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특수한 환경에 처한 여성들은 조선 부인으로서 특수한 사명을 잊었다고는 할 수 없다. 조선부인을 위한 사업에는 어떠한 일이라고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봉건적 부인관에 사상의 기초를 둔 그들 여성은 자선사업 이상의 대담한 일을 할 수 없었다"즉"부인해방이라든가 남녀평등...은 부르조아적 자유평등 사상에 기초를 둔 여권론이라고 평한다."110) 물론 사회주의 계열에서 기독교를 비난하는 것이 전부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저 세상의 구원만을 강조할 때, 또한 구원의 의미를 형식적인 율법 준수에서나 찾으려고 할 때, 세상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을 때 어느 시대에서나 가해질 수 있는 비판이라 하겠다.

기독교 여성인 김신도는,
"이즘에는 예배당명부에 성명만 기록되여 잇으면 기독교 신도요 또 매일 일요일 빠지지 아니하면 독실한 신도고 교회를 위한다고 약간의 금전이나 내고 연보나 잘하면 이제 죽어도 텬당에 가는 줄로 아는 것 같읍니다..."

고 현 기독교인들의자세를 비판하면서 "이 세상을 위하야 생겨난 기독교가 가튼 민족을 이방사람들이니 무엇이니 하며 사회와 등지고야 엇지 큰 책임을 실행할 수가가 잇겠슴닛가.저는 기독교라는 것은 예수가 모든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죄악을 미워하고 이를 처업시하라고 한 것처럼 우리 사회에 못된 풍습과 사람을 괴롭게하고 부자연한 상태에 빠지게 하는 모든 악제도를 처부시며 한편으로는 임의 불행이 비참한 지경에 빠진 불상한 사람을 붓들어 주는 개혁운동인 줄 압니다."81)

(3) 조선여자기독교 청년회 연합회

여자기독청년회가 YWCA를 의식한 모임인지 단순히 기독여성들의 지방적 조직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기독여성들의 모임이 국제적 유대를 가진 YWCA의 태동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기반을 무르익게 하였다.111)

YWCA는 1922년 6월 기독교계의 여성지도자 김활란,김필례,유각경 씨가 주동이 되어 김성실,김함라,신의경 등이 동조하고 신흥우,맥루렌 여사(McLur- en 호주선교사)등이 협조하여 전국 규모로 조직되었다.112) 즉 1922년 6월 13일부터 12일 동안 제1회여자 하령회(회장 김활란)을 개최하였는데,여기에는 전국의 공,사립 여학교 대표와 그 당시 급속히 늘어난 각종 여성단체 대표 약 70여명이 초청되었다. 이들 중 65명이 참여하여 새로운 정신을 가지조선사회를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여자들에게 한층 원기를 주고 자각을 주기 위한 각종 교육적인 프로그램을 함께 즐기며 여성운동을 위한 의식을 불러일으켰다.113)

여기서 YWCA창설을 구체적으로 검토,만장일치로 가결을 보아 "조선여자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 기성회"로 정하는 한편 김필례를 지방순회 책임자로 뽑아 지방조직을 서둘도록 결의하였으며,기독청년회 규칙을 제정하고 임원을 선출하였다.114)

이와같이 지방조직을 갖추어 연합회로 출발할 수 있게 되자 이듬해인 1923년 8월 18일부터 열린 제2회 하령회 및 총회에서 5개 도시 11개학교 대표 70여명은 "연합회 기성회"의 명칭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로 고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여자 기독교청년연합회는 곧 1924년 세계 YWCA에 개척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115)

지방조직을 끝내고 연합회를 구성한 YWCA는 다음 세가지를 주요과제로 삼아 중점적으로 활동하였다.

첫째는 기도와 성경연구,교양강좌,사업보고 및 영적 계시를 포함하는 연합회보를 발간하는 일.

둘째는 각 지방 단체마다 금주회를 조직하여 강연에 의해 금주계몽을 하는 일.

세째는 공창제도를 폐지시키는 일이다.116)

이렇게 해서 YWCA는 금주 운동과 공창폐지운동을 첫 사업으로 출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YWCA는 민족경제를 육성하려는 물산장려운동에 주력하여서 일본경제의 침식으로 쓰러져 가는 한국경제의 생산성을 돕기 위해 소위 국산품 애용 운동에 적극 호응하였다. 이 운동은 구체적으로 외래품의 고급주단을 배격하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무명이나 베옷을 입자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낭비적인 구습과 폐풍을 타파하여 생활을 개량하는 것과 활동에 편리하고 간편한 의상과 우의 연구 등을 하였다. 이외에도 여성생활의 요구에 따라 요리강습,육아법,그리고 여어회화반의 교육 과정도 실시하였다.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반은 각 지방 YWCA의 교육사업으로 일찌기 시작하였고 선천 YWCA에서는 유치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117)

YWCA는 1924년부터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부녀자들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 근로부녀자들은 영적,도덕적 및 사회적 어느 면에서나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본 YWCA에서는 유치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117)

YWCA는 1924년부터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부녀자들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 근로부녀자들은 영적,도덕적 및 사회적 어느 면에서나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본 YWCA에서는 회원 몇 명이 공장의 실태를 현지에 가서 조사하여 가능한 사업을 모색하며 근로여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영적 지도를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것이다.118) 그러나 YWCA는 근로여성의 문제보다는 농촌여성의 문제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그 당시에는 "사회주의자의 농민획득운동과 전후하여 일부 민족주의자 기독교도,천도교도,학생 등은 장래의 운동은 조선 민족의 8할을 점하는 농촌을 기초로 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우선 농촌의 개발과 농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통감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기독교에서는 장로교,감리교 두 파 모두 농촌부를 설치하고 선교사들은 농촌의 포교에 전념하고 각지에 농사개량 강습회를 개최하거나 사립학교를 세웠다. 또 생산조합,소비조합,협동조합 등을 조직하고,부업장려,경작법 개량,시장 거래지도 등 자세한 점까지 지도하는 노력을 기울였다."119)

특히 1929년은 교회가 사회 농촌문제에 관해서 가장 활발한 의식화와 그 운동을 진행했던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928년 3월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 sionary Council)와 1929년 개최되었다. 예수교 연합공의회 대회가 계기를 이루었다 한다. 이 대회에서는 네 분과로 나뉘어서 토의되었고 그중에서 "경제적 파멸을 당하고 있는 조선"이 "비판점"으로 지적되면서 농촌사업에 대한 심각한 논의가 진행되었던 것이다.120) 이러한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농촌사업에 뜻을 둔 여성들이 나타났는데 주로 감리교 계통의 여성들이었다.

예를 들어 황에스터는 1929년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감리교신학교 교장의 양해를 얻어 그 학교에 농촌 사업지도 교육과를 특설하고 지도 교수가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황에스터는 채용신과 김노득 두 학생을 장래의 일꾼으로 점찍어 놓고,특히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양성하게 되었다.121) 이중 채용신의 농촌사업을 YWCA가 후원하였다. 채용신은 농촌에서 주로 다음과같은 일을 하였다고 한다.

"1931년 10월 11일에 양은 샘골의 예배당을 빌어 계몽의 첫 일을 시작하였다. 한글,산술,초보의 재봉,수예,가사,노래공부,성서공부 등을 가르쳤다. 얼마되지 않아서 지망 인원이 많아 예배당 안에 한번에 수용할 수가 없어서 오전반,오후반,야간반의 세 부로 조직하여 이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격렬한 활동을 조직하였다."122)

"오전반이 끝나면 오후반이 시작되고 오후반이 끝나면 가정순회지도를 하고 돌아다니며 밤에는 다시 야학을 인도하였다. 야학을 끝내고서는 10리가 단단히 되는 야목리로 지도하러 산길과 논들길을 더듬어 걸어가는 것이다. 야목리의 지도를 끝내고 푸른 측백이 둘러선 삼간 숙소로 돌아오면 닭이 첫 홰를 알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중에도 샘골에는 일년 무방학이었다. 그런고로 일년 열두달.이 과로의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단 하루라도 단 한 글자라도 더 가르쳐주자는 채선생의 열성 때문이었다."123)

즉 그녀의 활동의 기본전제는 문맹퇴치가 이루어지면 그들을 위한 강습과 강연을 통해 교육할 수 있고 출판물을 통해서도 교양을 높일 수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농촌여성의 지위향상이 가능해진다고 본 데 있다.

물론 농촌여성들이 못사는 것은 그녀들이 배우지 못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요인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 요인은 아니다. 그 당시 농촌사회의 피폐는 일본의 식민지적 농업정책이 근본적인 요인이었는데, 이를 알고도 다루지 못했는지, 아니면 모르고 다만 피상적인 현상만 가지고 씨름했는지,아니면 그 상황에서는 그 길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YWCA 농촌여성에게 경제생활의 기초를 마련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여성도 직업을 갖도록 장려해야 하는데 그당시에는 기회가 많지 않으므로 가내부업을 장려하기로 한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YWCA는 양계,가축사유,양잠,양봉,작은 작물 재배,버섯재배,화초 채소 재배,새끼줄 꼬기,신발짜기,바구니 짜기,자루 만들기,목공,농기구 만들기 등을 장려하였다 124)고 한다.

물론 농촌여성들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이런 식으로 하여 조금이나마 타파할 수 있게 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경제구조의 모순에 대한 해결 없는 미봉책은 궁극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오도되거나,이용당할 수밖에 없다. YWCA의 이러한 부업장려는 결국 일제의 "농촌진흥정책"에 이용당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125)

결국 YWCA의 농촌사업은,민중의 삶 즉 농촌여성들의 아픔이 무지와 게으름의 탓이라고 돌려버리는,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왜곡시켜 버리는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농촌사업의 필요성을 주장한 황에스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농민이 잘 살게 되어야만 우리도 함께 잘 살 수 있고 나라꼴도 바로 잡힌다.""부지런하자! 우리가 왜 남에게 뒤져 있는가? 게으른 탓이다. 우리도 부지런히 일하면 다른 나라에 뒤떨어지지 않는다."126)기독교 여성단체 중 대표적인 YWCA가 농촌사업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그 당시 농촌여성의 수와 경제 측면에서 볼 때 농촌이 차지한 비중이 대단히 크므로 의미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업이 고난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어떤 의미에서는 더 시달리게 하는 시각에서 추진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농촌 여성들이 가난한 것은 무지와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몸담고 있는 사회구조의 희생물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아픔의 소리를 겸허하게 듣고,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모순을 해겨해 나가려는 자세가 필요했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그들과 우리가 함께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각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쨌든 YWCA는 전 대중 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직 활동,자원 지원자의 계발 등 그 조직운영에 있어서 기독교 여성들의 수준이 진일보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황신덕 역시 YWCA를 "부인 해방이라는 간판없이 부인 계몽운동에 공이 많으며... 전후에 상당히 많은 지회를 가진 학생청년회와 市청년회의 사업은 결국 여성해방운동의 기초공사를 하여 왔다. 기독교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근본 목적일 것은 물론이나 그 순서에 있어서 여자에게 문자를 가르치며 지식을 보급시키지 않을 수 없는 조선의 특수사정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127) 라고 평가하고 있다.

(4) 조선여자 기독교 절제회

1874년 미국의 미세스 프랜시 윌라드가 클리벌랜 시에서 금주운동을 일으킨 이래 영국에서는 1876년에 미세스 헨리 써머레스트의 주도하에 영국여자 기독교 절제회가 조직되었고 이것이 전세계적으로 불이 붙게 되어 세계 70여개국의 절제회가 가맹한 세계 절제회 본부가 창설되어 영국 런던에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절제회가 조직된 것은 1923년 9월이다. 즉 1923년 봄 세계 본부로부터 미스 팅링이 내한하여 6개월간이나 체류하면서 각 학교를 위시하여 두루 다니며 계몽강연을 하여 각성을 촉진시킨 후 그 해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교장 채부인의 협력을 얻어 '조선여자 기독교 절제회'를 발족하고 회장 박인덕,총무 정마리아를 선임하였다.128)

한국에 전파된 기독교는 신자의 개인윤리로서 애초부터 금주 금연을 상당히 강조하였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태도는 술장사를 그만두는 것,술을 끊는 것,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에 들어온개신교 선교사들의 일관된 태도였고 그 절대적 영향하에 있던 한국 긷고교인들의 신앙유형이 되어 버렸다. 이렇나 금주 금연의 기독교적 신앙유형은 그 당시,즉 1920년대 실력양성 운동의 일환으로서 실시된 소위 물산장려운동과 궤를 같이 하였다.

즉 "교육열의 발흥과 함께 산업의 발달을 기하고 자작자급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물산장려운동은 1920년 당시 인도에서 제1차 반영동맹 때 간디가 제창한 인도 토산의 장려, 영국상품의 사용페지 등에 자극되어 일시적으로 자못 왕성해졌다. 그래서 금주,금연,민력함양이라는 이름하에 왕성하게 선전을 했다."129) 고 한다. 따라서 세계절제회 본부에 의해 조직된 조선 절제회는 우리 사회 안에서 내적인 문제를 가지고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1929년부터 1938년까지 절제회 총무를 했던 기화덕 씨는 그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절제회 운동은 첫째 금주,금연 운동이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부터 금주,금연이 한국 교회의 교과적 사항으로 정해져 신자들은 물론 금주 금연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햇으나 이 절제회 운동은 신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술,담배를 금하는 운동이었다... 절제회 사업의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물산장려 운동이었다.. 즉 우리 손으로 많은 물건을 만들어내고 그 물건을 우리가 아껴쓰고 애용하자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야말로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길이다. 나라의 독립을 가져 오는 바탕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130)

절제회는 초기에는 순회 총무를 두고 선전조직에 힘을 썼다. 제2대 총무 손메례는 290고을에 절제자회를 세우고 전국에서 74회의 대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31)고 한다.

제3대 기효덕 총무는 그 운동방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각 교회마다 절제회를 조직하고 금주서약,금연서약을 빌기도 하고 연합회에서는 각 지방의 요청을 받아 강연을 하고 도회지에서는 선전 행진을 계획하여 약대를 동원하엿으며 어떤 때는 천여명이 행진을 하기도 했다... 또 계몽 비라 포스터 등을 만들어 각 곳에 살포하거나 부치고 금주가를  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보급하며 부르게 하였다."132)

이 절제회 활동은 호응을 받았다. 예를 들면 [기독신보]1924년 12월 24일자에는 손메례 총무의 활동보고서가 실려 있는데, 평북 선천읍 교회당 앞 술집은 강연회에 참석코 감동을 ㅂ다아 술장사를 그만 두었고 25명의 신자가 금연하기로 하였으며 황해도 재령읍에서는 강연시 경관 5인이 입석하였다가 그중 한 경관이 금주하기로 결심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었으며 전북 전주에서는 아편이 유행하여 부인들이 일할 때 어린아이에게 아편주사를 하여 잠을 들게 하고 일을 했는데 강연을 듣고 이 일은 금지하기로 하였다고 한다.133)

이렇게 하여 1926년도에 이르면 각처의 지회수가 26처이고 여자회원이 3,000여명이 이르게 되었다.134)

그러나 그 당시 조선의 가장 절실한 문제가 술,담배를 끊거나, 물건을 아껴쓰는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여유있는 사람들보다는 술,담배를 더 많이 한다. 오늘날 빈민지대의 여성들 역시 가난하기도 하지만 그나마 있는 돈을 술 먹느라 다 써버리고 매질까지 하는 남성들의 횡포에 대해서 호소를 한다.135)

그러나 가난한 상황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술을 많이 마셔서 가난해진 것이 아니라 가난해서,아무리 일해도 살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시는 것이다. 즉 한 일본인이 쓴 조선농촌의 문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가난에 찌들리고 있는 농촌을 볼 때 약 80%가 소작농에 속해 있다. 그들은 지난날 오랜동안의 잘못된 정치 때문에 지금 마음은 거칠어지고 가위 취생몽사,아무런 분발심도 없고 감격성도 없고 희생도,이상도 의욕도 없고 그날 벌어 그날 산다는 나쁜 버릇에 젖고 있으며, 해마다 식량부족을 호소하고 고리부채는 해마다 늘어날 뿐이며, 추수때가 되면 빚장이들이 몰려와 다 뜯어가는 판으로 춘궁기가 되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실로 비참한 상태이다. 이러한 층의 수효는 농가의 농사가 흉년,풍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나 총 농가의 약 48%에 달하는 실정이다."136))

따라서 사태의 원인,결과를 전도한 절제회의 문제해결방식은 일시적인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몰라도 가난한 여성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도움은 되지 못하였다.

4) 근우회 - 일반 여성들과의 연합활동

1920년대에 들어와서의 사회주의,기독교계 여성단체 활동은 각기 나름대로의 운동 경험을 쌓게 하였다. 이념이 현실에 적용될 때의 시행착오,그로 인한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론의 재정립 등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다.

사회주의 측에서는 기본적으로는 여성노동자 이외의 넓은 층에서 운동의 주체와 대상을 찾아야 하는 일,기독교측에서는 예리한 이론의 재정립이 등이 요구되었다.

첨예화된 이념 때문에 대중여성들에게 확산되는데 장애가 있었던 사회주의와 계몽주의의 활동으로 조직 확산이 보다 용이했던 기독교는 서로에게 모자라는 점을 보충하고 서로에게 발전의 계기를 주기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식민지 조선에 필요하고 적합한 여성해방 이론과 운동의 정립을 위해서 이 두 파의 통합이 필요 불가결했던 것이다. 근우회와 창립에 즈음하여 [조선일보]가 실은 사설(1927.5.26 [조선사상 통신사]에 재수록)은 근우회 창립의 동기를 설명해 준다.즉

"점진적 개량주의적인 과도기형태를 거쳐 나아가야만 하고 또 그와같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도 승인해야만 한다. 오늘날 조선인 여성들이 거듭 부딛쳐 온 모든 정치적, 사회적 조건은 가장 급진적인 투쟁을 요구하면서도 점진적인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분야의 책임있는 선구자라면 그 실생활의 귀중한 체험에 의해 누구라도 수긍할 것이다."137)

라고 쓰고 있다. 즉 여성 동우회를 비롯한 사회주의계 여성단체는 어려운 여건에서 사회주의 사상에만 급급하여 조선사회의 실상에 입각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성대중과도 유리된 방향에서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계몽활동으로 시종해 온 기독여자청년히에 비해 이론적으로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조직적 기반은 훨씬 열세였다. 합법단체로서의 근우회의 전선확대를 위해서는 사회주의계 세력이 전술적으로 기독교 여자청년회와 제휴하는 것은 불가피하였고 또한 기독교계 여성의 측에서 사회주의 이론은 일본 제국주의를 거부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었다.138) 이렇게 하여 근우회는 1927년 5월 27일에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창립대회를 가졌다.

근우회 강령으로는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도모함""조선 여자의 지위향상을 도모함"이 채택되었다. 또한 근우회 집행위원회에서는 행동 강령을

1.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일체의 차별 철폐
2.일체의 봉건적 인습과 미신타파
3.조혼 폐지 및 결혼의 자유
4.인신매매 및 공장 폐지
5.농촌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6.부인 노동의 임금차별 및 산전산후의 임금지불
7.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노동 및 야업 폐지를 행동강령으로 내세웠다.139)

이러한 행동강령을 통ㄹ하여 얻는 것은 여성 자신의 해방만이 아님을 근우회 선언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은 동시에 조선사회 전체를 위하여 나아가서는 세계 인류전체를 위하여 분투하게 되는 행동이 되지 아니하면 안된다."140)

중앙에서 근우회가 창설되자 지방에서도 점차 이에 호응하여 여자 청년회를 근간으로 하는 여성조직이 중심이 되어 근우회의 지회조직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928년 4월까지 지회 40개소 회원 2,000여명,즉 제1회 대회(1928.7)까지 40개 지회를 가지게 되었다.141)

근우회는 1928년 5월 서울에서 제1차 전국대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 대회는 일경 당국이 사전에 동대회의 토의사항을 제출시키고 내용이 불온한다는 이유로 금지를 시켰다. 이 토의사항에는 반전결의,민족운동에 관한 결의,노동여성대중과 학생문제를 중심으로 한 조직문제에 관한 결의,전여성을 대상으로 한 선전사업에 관한 결의 등이 들어 있었다.142)

근우회 본부는 그해 7월 14일에 의한 토의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회를 열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따라서 대회의 의안은 교양문제, 지방연결 문제 등 사무적인 문제에 제한되었다. 그러자 근우회 동경 지회가 근우회 간부의 타협적 자세를 비난하고 나섰다.

제1회 대회가 열리자마자 본부와 동경지회는 심하게 대립되었고 이때 기독교계에 여성들이 이 대회를 계기로 이탈되었다. 그러나 이 대립은 근우회의 운동전술이 분명하게 이론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동경지회는 일제의 간섭을 무시하고 투쟁하는 근우회를 구상했고 본부는 합법단체로서 보다 많은 여성을 근우회 주변으로 결집시키는 것을 당면 과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143) 제1회 대회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회확장운동은 전개되었다. 물론 지회 설치에 대한 거부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근우회는 함경도, 경상도,전라도를 시초로 하여 각지에 지회 설치를 계속하여 갔다. 그리고 창립 2년 후 근우회는 그 이론적인 성과로서 [근우]지를 내놓을 수가 있었다.144)

기관지[근우]에서 취급되고 있는 문제는 다방면에 걸쳐 있고 기고자 또한 다채롭지만 이 단계에서는 김활란과 함께 강령,규약,취지서의 작성에 참가했던 황신덕,이현경의 이름을 보이지 않고 배성룡,이성환,허정숙,박호진 등이 보인다. 이들이 한 이론적 작업은 근우회 내부의 개량주의적 경향을 경계하며 여성문제는 계몽운동이 아니라 사회변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으며 구체적으로 노동여성으로 눈을 돌리면서도 봉건적 가족제도에서 신음하는 가정부인 문제에서 조선 여성의 특수성의 실체를 발견했다.145)

이리하여 근우회는 통합된 이론적 성과와 지회 확장에 기초하여 제2회 대회를 1929년 7월에 개최하였고 그 대회에서 강령을 다음과 같이 수정하였다.

一.조선 여성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공고한 단결과 의식적 훈련을 기한다. 一.조선 여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전체적 이익의 옹호를 기한다.

그와 더불어 행동 강령도 수정했는데 수정된 행동강령은 다음과 같다.

一.교육의 성별 차별철폐 및 여자의 보통교육 확장
二.여성에 대한 봉건적 사회적 법률적 일체차별의 철폐
三.일체봉건의 인습과 미신타파
四.조혼폐지 및 결혼 이혼의 자유
五.인신매매 및 공창폐지
六.농민부인의 경제적 이익의 홍호
七.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철폐 및 산전산후 그 주간의 휴양과 임금지불
八.부인 및 소년노동자의 위험노동 및 야간작업폐지
九.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서는 중앙집횡위원장에 정칠성을,중앙집행 위원으로는 우봉운,정종명,박호진,허정숙 등을 선출하여, 이들을 핵심으로 하는 강력한 좌파 진영의 회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146)

이를 기반으로 하여서 도시부, 특히 지식인 여성에게만 머물렀던 종래의 근우회 활동에 대하여 그 대상을 확대하고 또한 구체적인 문제에 접근하려는 반성이 내부로부터 일어나면서 부산과 광주의 여공의 노동쟁의의 조사(동아일보 1929.8.28),여학생의 동맹휴교의 지원(경성일고보 맹휴의 조사:동아 1927.11.3 중앙고보교 맹휴사건의 조사 ;동아 1927.11.3 ,1928.4 경성여자상업학교 맹휴에 근우회의 관여 등)이 이루어졌고 한편으로는 농촌부에 침투하기 위한 전국적인 야학의 개설 결의(동아일보.1929.9.2)도연합회 또는 사회지회하의 분회반 조직의 준비(동아.1929.9.25),노동부의 설치(동아,1929.8.6) 등이 이루어졌다.147)

1929년 제2차 대회 이후,해체될 때가지 근우회는 그 당시의 서울에서 있었던 여학생 시위 사건을 지도하였고 이 사건에 의해 정종명,박호진,정칠성,한신광,허정숙,백덕수,박차정,류덕회 등이 검거되고 허정숙과 박차정이 기소되었다. 이에 근우회는 일제로부터 보다 심한 탄압을 받게되었고 당초 4월로 예정되었던 대회를 개최하지 못한 채 12월에 확대집행위원회를 열게 되었다.

이 확대집행위원회에서는 근우회의 과거의 운동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는 "종래의 근우운동은 계급투쟁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여졌기 때문에 준열한 탄압을 받았고 보는바와 같은 사건의 자취를 남겼는데, 이제부터는 민족단일의 여성운동으로서 운동의 방향을 규정하고 또한 운동의 수준을 낮춰 계몽활동에 매진해야 한다" 고 논하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었다.148)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실제로 결의한 것은 문맹퇴치와 미신,인습의 타파를 목적으로 하는 농촌부인 강좌와 야학을 적극적으로 진척시키고 노동부를 삭제하는 것,과거의 근우회 운동은 식자계급의 독점운동과 같은 면이 있었으므로 이제는 일반 농촌부인과 가정부인을 중심으로 한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 등이다.149)

1930년의 확대집행위원회에서는 기독여자 청년회계가 주도권을 잡게 되어 신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평양지회의 조신성이,중앙집행위원회에는 황애덕 등이 선출되었다. 조신성이란 인물은 그 당시 여성으로서 독립운동에 있어서나 단체운동에 있어서 열렬히 활동을 한 자이다.

그녀는 서기 1867년 10월 3일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여 독훈장을 모시고 한문을 공부하다가 출가하였으나 19세에 과부가 됨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어 미국 선교사들과 전도사업에 힘쓰다가 그들의 주선으로 일본 시모노세끼에 있는 매광 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이화학당 교사로 취임하여 교편을 잡았고 기숙사 임시 사감을 겸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조신성은 평양 진명여학교를 맡아 경영하게 되었다. 그녀는 학교 경영을 위해서 솜을 두면 겨울 옷이 되고 솜을 빼면 춘추복이 되는 회색 산동주 단벌치마 저고기를 부지런히 빨아 입으며 날마다 저녁식사를 끝나면 뾰족구두를 신은 채 바구니를 들고 나가서 돌을 주워담아 머리로 여다가 모아가지고 학교담을 둘러 쌓았다고 한다. 진명여학교는 경영난으로 결국 문을 닫게 되었고 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1921년 그녀는 신민회의 여성지도자로 활약하다가 치안유지법 등 다섯 가지 죄목에 걸려 평양감옥에서 6개월 복역을 하는 동안 다른 사건이 탄로되어 만기 출옥이 되던 날 감옥문 밖에 한번 나서 보지도 못하고 다시 1년 2개월의 형기를 치르게 되었다.

그녀는 그후 단체활동도 열심히 하여서 근우회 평양지부 결성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솔선하여 발기인 모집에 나섰고 총회 당일에는 개회사를 통하여 "'노세 노세 젋어 노세 늙어지면 못노느니라'가 글쎄 무업니까? 우리나라를 요꼬라지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하세 일하세 젊어서 일하세 늙기 전에 빨리 일하세'라는 정신과 노력으로 우리 민족이 합심해서 나가야 소원이 성취됩니다. "150) 라고 열변을 토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민족주의적 계몽가의 성향을 갖고 일한 운동가였다. 그녀가 중앙집행 위원장으로 선출된 때부터 근우회의 종래의 운동방향,즉 여성해방운동을 계급해방 및 민족해방과 병행해서 하려던 시도는 일제의 탄압을 견딜 수 없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체제 하려던 시도는 일제의 탄압을 견딜 수 없게 되었고,이렇게 되자 체제 내에서 여권 운동을 하자고 주장하는 파가 근우회의 주류를 점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주의계 여성들은 "현 근우회는 그 조직체와 기본방침으로는 특수한 투쟁을 전개할 수 없고" "노동부인 문제의 전적인 해결을 가져올 수 없다"하여 차차 지회단위에서 해체를 결의하게 되었다.151)

1920년대 말의 시대적 상황에 의하여 모든 운동이 "분산에서 통합으로""자연생장적에서 목적의식적으로!"라는 표어하에서 152) 일어나던 때 창립된 근우회는 193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그에 따라 달라진 운동론에 의하여 해체되었다. 그러나 근우회의 해체가 정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근우회의 해체를 신간회의 해체에 따른 비주체적 해체라고, 더 나아가서 근우회의 존재 자체를 비자립적이라고 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1차 대회의 토의사항에서 볼 수 있듯이 근우회는 신간회와의 관계를 상당히 주체적으로 규정짓고 있다. 즉 "신간회는 조선민족운동의 현 단계에 대응하는 각급 계층의 협동전선당이기 때문에 근우회는 신간회와 직접 관계를 급속히 맺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근우회는 조선여성의 최고기관으로서 신간회에 다네적으로 가입하지 않으면 안된다.그런데 근우회가 단체적으로 가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1) 근우회의 독립성을 상실하지 않을 것.(2) 비판의 자유를 가질 것이다.153)

이와 같은 것을 볼 때, 신간회, 근우회에 해체는 더 이상 합법단체로서의 운동이 도저히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상황에서의 결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근우회와 마찬가지로 신간회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체되었다.

즉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간회는 온건화되어 갔다. 예를 들면 그 대표자인 김병로는 "종래 신간회의 운동이 쓸데없이 관헌과 항쟁 대립하여 그 억압을 받게되어 하등 조선 민족을 위하여 공헌하는 것이 없음을 거울삼아 스스로 반성하는 것 같고 그 후에 발생한 [전북일보]의 조선인 모욕사건, 함남 단천에서의 경찰관 발포 사건등 상당히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 중요 사건에 대해서는 스스로 그 지방으로 출장을 가서 비교적 냉정한 태도로 사실을 조사 발표하고 사건의 해결에 지장을 초래할 만한 언동을 피하고 본부 및 각지 지회에 대해서도 경거망동을 경계하는 듯한 방침으로 이에 임한다"154) 고 하였다는 것이다.

20년대 후반에 이르러 비타협주의가 동요됨을 인지한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를 단념하고 적극적으로 해체하기로 결정한다. 신간회의 경우 이들이 지방지회의 대부분의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5월 15-16일 전국 대회에서는 해체파가 선수를 써서 해체의 결정을 내리게 되고 그 결정에 따라 해채 분산되어버렸다.155)

그러나 근우회는 해체 당시 해체파가 선수를 쓰지 못했기 때문에 지회 단위에서부터 해체가 시작된 것이다. 연합전선이 해체된 이후 사회주의 계열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넘겨줌으로 대중적 폭력투쟁,적색노동조합운동 앙양의 시기로 옮겨갔고, 기독교계 민족주의 계열은 농촌에 눈을 돌려 농촌 여성의 계몽을 통하여 여성의 주체적 역량을 축적하고 여성운동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근우회를 함께 하면서 사회주의 여성진영과 기독교 여성진영간의 뿌리깊은 적대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기독교 여성들이 주종을 이룬 민족주의 진영은 좌익 여성들로 "괜히 트집잡아 싸움만 해대는"사람들로 인식하였고 반대로 좌익파 여성은 기독교 여성들을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뿐만 아니라 체제유지를 돕는사람들로 생각하게 되었다.156)

출처 : 반석의 신앙 따라잡기
글쓴이 : peterb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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