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교회의 사회봉사
콘스탄틴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신구약 성경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 위에서 복음전파와 섬김의 사역을 병행하였다. 복음을 전하다 수감된 동료 유족, 갇힌 자들, 주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고,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일도 권장되고 있었다.
&역사적 상황
AD 100년부터 325년까지 내적으로는 이단이 난립, 외적으로는 로마의 박해, 사회적으로는 도시화가 되면서 빈부격차가 증가되었다. 복음전파와 함께 병행되었던 구제활동을 통해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이단의 난립
1) 영지주의(Gnosticismus)
영지주의는 철학과 종교를 혼합하여 이원론적인 구원론을 전개시켰다. 선과 악, 영과 물질의 세계, 영과 육을 서로 존재론적입 대립으로 보았다. 신은 영적 세계만 관할하고 인간의 육, 물질적인 것은 악한 것으로 치부하였다. 일부 사람들에게만 존재하는 ‘신적인 섬광’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을 영지라고 하며, 이 영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2) 몬타니즘
AD 156년 소아시아에 나타난 한 프리기아의 예언자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지나치게 초자연주의였으며 엄격하였다. 기독교의 이상과 요구를 지나치게 과장했으며, 성령의 직접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성령의 고상한 교훈을 받은 그리스도인만이 영적 교회를 이룬다고 주장했다.(에클레시아와 바실레이아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금욕주의와 교회의 규율을 광신적으로 지켰고, 여자의 사치스러운 의복금지, 금식과 극단의 고행, 재혼금지, 박해시 도주를 정죄, 순교자의 피세례를 궈장하였다.
3)마르시온
극단적인 이원론에 근거를 두어 주장을 펼친다.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을 대조하며, 예수의 가상적 육신설 즉 가현설을 주장한다.(예수의 피흘림을 부정하는 주장이 된다) 또한 이원론적인 의미에서 영혼만이 구원받는다고 주장했으며, 결혼까지도 금하였다.
이단들의 사상적 특징은 이원론이다. 조화와 화해를 지향하기보다 대립과 갈등을 앞세운다. 이단들의 구원론과 인간 이해에서는 물질적 결핍이나 각종 제도들을 개선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원론에 입각하여 영적인 것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육체적 고난과 환경과 제도적 문제들은 영성을 더욱 고양하는 촉매제로 치부되었다. 이단들 앞에서의 기독교는 교리적으로 밀리지 말아야 했고, 물질생활에서도 본을 보여야만 했다.
&기독교에 대한 핍박
로마정부의 기독교 핍박은 AD 64년 네로 황제 때에 시작되어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통치 후 곧 AD 320년쯤까지 계속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은 원인은 이러하다. 1) 아무런 형상도 없이 예배를 드렸으므로 무신론자들이라는 누명을 썼다. 2) 그리스도인들이 성만찬에서 피와 살을 나눈다는 소문이 퍼지자 내막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식인종으로 오해하였다. 3) 그리스도인들은 근친상간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오해를 받았다.(형제, 자매라고 하면서 그룹 내에서 결혼했기 때문) 4) 이교적인 예배와 미신, 부도덕한 행동을 금했고 관련직업과 오락에서 손을 떼었으므로, 비사회적이며 배타적이라고 생각되었다. 4) 무정부주의자로 몰렸다. 5)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황제숭배를 거부한 것이다.
&계층사회와 빈부의 격차
로마사회는 빈부의 격차가 매우 심했다. 상류계층은 극소수이고, 가난한 하류계층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기사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부유했고, 속주와 지방 귀족들은 조금 부유했다. 중간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지주들, 기술자들, 소매상인들, 백부장, 평범한 군단의 병사들이 있었다.
황제를 통해 부유하거나 유능한 기사계층이 승진되거나 의회의 승인을 받아 로마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신분상승은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이었고, 해방된 노예는 로마의 시민이 되었다.
이렇듯 기독교 기존의 로마정부 제도 아래에서 봉사했다. 그러나 공공의 복리를 위해 돈을 사용할 때, 다섯 가지 중요한 혁신을 가져왔다. 1) 빈부를 막론하고 자기의 능력대로 바쳤다. 2)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드렸다. 3) 자선의 대상이 바뀌었다.(믿음의 공동체에서의 과부, 고아, 병자 및 장애인, 감옥에 갇힌 자, 노예) 여행자들을 접대했고, 다른 교회를 원조하기도 했다. 4) 비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었다. 5) 기독교적 구제가 개인적으로 이행되었다.
콘스탄틴 이전의 기독교 사회봉사는 로마정부의 제도적인 모순을 개혁하려는 정치적인 사회봉사가 아니었다. 자기 공동체 내에서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돌보는 것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다.
*교회의 사회봉사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사회봉사
1) 여행 중인 형제들 접대
2) 교회 사역자들 접대
3) 고아와 과부 구호(AD 251년경에는 일반적인 수입만으로 1500명 이상의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할 수 있었다.)
4) 수감자 방문(그리스도를 믿다가 고난 받는 자 즉 옥에 갇힌 자를 방문)
5) 남녀동등 주장
6) 장례 집례 및 공동묘지 관리(교회는 공동묘지를 가지고 있었고 관리인도 두고 있었다)
콘스탄틴 이전의 그리스도인의 사회봉사는 성경의 원리에 입각하여 결핍된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체적이며 실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분별력 있게 사용해야할 부와 재산
예수님의 말씀이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 18:22-25),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24)
1) 헤르마스의 목자(저자가 불분명한 문서)
죄와 회개에 대하여 장황하게 기술하면서, 부와 재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서도 수차례 언급하였다. 신앙과 부를 통해 공동체의 불균형을 막으려 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더 모으기 위해 달음질 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에 힘쓰기를 재촉했다.
가난한 사람은 항상 받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같은 교회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는 각자 자기만의 것으로 상대방을 섬긴다.
헤르마스의 목자에서 부와 재산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띤다. 그 이유는 헤르마스의 목자가 매우 임박한 종말론에 입각하여 이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부와 재산에 대한 클레멘트의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적절한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적절한 재물은 신앙생활에 더욱 전념할 수 있다. 2) 재물은 어려운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수단이다.(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하라!) 3) 재물의 공동사용을 말한다. 클레멘트는 공동체에 대한 엄격한 의무와 부의 올바른 사용을 강조했다.
3) 카르타고의 키프리안
키프리안은 저명한 집안 출신으로 귀족의 한 사람이었다. 이미 초신자일 때 재산을 팔아 궁핍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제공했다. 키프리안은 엄격하며, 금욕적이었다. 클레멘트와는 대조적으로 공로사상을 강조했다. 키프리안은 물려받은 재산은 자신을 위해 사용될 때 없어지고 말지만 이웃을 위해 사용하면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보관하지만 결국 사기를 당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겨진 재물은 강제로 빼앗길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재물을 사랑하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재물을 맡기는 습관을 기르도록 훈련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실천신학] 초기 교회의 사회봉사|작성자 동쪽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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