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전투는 2차대전의 한축이었던 태평양 전쟁사에 있어 그 의미가 깊다. 이글은 오키나와 전투를 큰틀에서 설명하는 글이다. 즉 세세한 전투 양상에 대해 전부 서술하진 않을 것임을 양해 부탁한다. 주로 대략적인 전투의 배경, 양상, 당시에 대한 증언, 일본군이 왜 막장인지에 대한 내 생각들을 담았다.
내 글에 항상 과분한 호응을 해주는 모든 훌리들에게 감사하며, 이글을 바친다. 덧. 늘 말하듯 내 글과 시중의 출판물, 전문서적의 내용이 다르다면 무조건 후자의 내용을 우선시 하길 바란다. ---------------------------------------------------------------------------------------- 1.전투의 배경 1)2차 대전의 전황. 유럽전선에서 1945년 3월말과 4월경의 전황을 보면, 서부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부연합군의 동진, 동부에서는 소련군이 물량을 앞세워 미친듯이 서진한다. 나치독일은 사실상 산소호흡기만 붙은 신세가 된다. 태평양 전선 역시 미군의 주요전투에서의 승리+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으로 미군의 압도적 우위가 진행되고 있었다. 연합군의 승리는 눈앞에 온 것이다. 2)플랜의 변경- 걍 일본을 직빵으로 턴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 태평양 해역군의 총사령관 이었으며, 2차대전 내내 혁혁한 전과를 보여줬다. 현재 미 해군의 니미츠급 항공모함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네임쉽이다.) (레이몬드 스푸루언스 제독, 미드웨이 해전을 비롯 수많은 주요 해전에서 미 해군의 승리를 이끌어낸 명 지휘관이다. 현재 스푸루언스급 구축함의 네임쉽 역시 그를 기리기 위해서 붙인 것.) 사실 당시 원래 미국의 높으신 분들은 국민당 장개석 정부와의 관계 및 중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마리아나 제도를 쌈싸먹은 김에 대만을 먹고->미군을 중심으로한 연합군 병력이 중국 본토에 상륙하여->일본을 역관광 하고->후일 동아시아 질서에 있어서 친미화된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정책을 짜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개석과 국민당군대는 늘 그랬듯(...) 부패, 분열, 군벌들의 이합집산, 저열한 전투력으로 미국의 기대를 저버렸고, 결정적으로 대륙타통작전에서 보여준 한심한 작전능력으로 미국의 높으신 분들을 빡치게 만들었다. 대륙타통작전에서 1944년 당시 3,4만도 안되는 일본군에 중국 국민당군 30만이 털렸다. 일본은 대전말기 보급이 어려워지자 중국내륙과 동남아의 철도선을 장악하여 보급선 구축계획을 세웠고 이것의 실행이 대륙타통작전이다. 결말 자체는 막판에 중국군의 물량공세+미군의 지원으로 보급이 열악했던 일본군이 털리고 끝나지만 10배차이의 병력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중국군을 보고 미국은 중국 쪽 상륙루트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이러던 차에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은 “걍 일본을 직빵으로 텁시다.”라고 제안했고 이를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승인하고 육군을 설득하는데 성공함으로서 오키나와 전투가 개전됐다. (물론 여기엔 맥아더와의 관계 당시 미군내 파워게임 등등 다른 어른의 사정들도 있지만 스킵.) 2)전략적인 필요성 (오키나와섬은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손꼽히는 관광지다.그러나 2차 대전은 이 아름다운 섬에 조차 전쟁의 화마를 안겼다.) 오키나와는 미군에게 전략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첫째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로부터 불과 약 550km 거리에 있는 지근거리의 섬이기고 비행장 시설이 있기에 일본 본토 폭격작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이라는 것. 둘째 일본의 일명 ‘옥쇄전’ 드립을 힘으로 깨부셔서 심리적 공포를 줘야한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일본 본토를 점령했다는 상징적인 효과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엄밀히 따지면 오키나와는 원래 일본본토는 아니지만..) 2.미,일의 전투준비 1)미국의 준비 미국은 이 중요한 전투를 어설프게 치를 생각이 없었다. “진주만을 기억하라!” 이제 일본 본토에 대한 역관광의 시간이 온 것이다. 미국은 미 육군,해군, 해병대 및 기타 연합군(영국이 중심. ANZAC도 있음)등 총합 18만3천명의 대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주력은 미군. 하지만 결국 예상보다 오키나와 전투가 장기화 되고 약 3개월 가까이 시간이 지체되면서 결국 후발대+군정담당인원 까지 합쳐 54 만명을 투입하게 된다.) 미군의 당시 주요 전투부대 구성은 다음과 같다.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 하는 미 제5함대 휘하의 제57기동부대,(영국 항공모함 소속) -제58기동부대, 통합원정군,제51기동부대, 제54기동부대(전함 중심), 제52기동부대(상륙지원목적의 부대), -158척의 수송선과 184척의 LST(상륙함) 및 89척의 LSM(중견급 상륙함) 요 비행장 45개에 대한 공습을 위해 출항한다. -미 제10군, 육군24군단, 해병 제3상륙군단, 제 77보병사단 총 지휘관에는 육상전이 주가 되는 작전의 특성을 고려, 사이먼 B 버크너 장군이 임명되었다. 더불어 무지막지한 물량의 포탄과 전쟁물자가 준비되었다. - “사실 저 밑에 곤도 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스즈키 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 “무고한 민간인 따윈 없다.” -커티스 르메이-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오키나와 전투 등 본격적인 일본 상륙작전을 함에 있어서 일본의 항공세력과 전략거점, 육상 군수기지들을 밟아놔야 안심이라고 생각했기에 역대급 전쟁광이자, 석기시대 매니아로 지금도 존경(...) 혹은 재앙으로 기억되는 커티스 르메이 장군을 앉혀놓고 신나게 일본을 두들기고 있었다. 당시의 도쿄 핫이 궁금한 사람들은 엔하위키에서 도쿄대공습을(...) 3월초에 걸친 미국의 일본본토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은 오키나와 전투에 있어서 적군인 일본군이 본토에서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튼 당시 천조국의 생각은.. -LET'S TIME TO BEGIN FUCKING JAPS 2)일본의 준비, 민간인의 동원 일본군도 미군의 상륙을 대비하고 있었다. 사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전투의 개전이전부터 미군 잠수함들이 오키나와 인근에서 활동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 미 해군 소속 함재기들이 간헐적으로 오키나와를 정찰하는 것을 보았다. 결국 장기적으로 미군의 상륙 피할 수 없을 것 이라 판단했다.
1945년 2월의 미군의 이오지마 상륙은 이러한 판단을 더욱 굳히게 만들었고 결국 오키나와 현에서는 17세-49세 사이의 남성 2만 명 을 징집하는 결정을 내린다.하지만 특유의 인명경시로 유명한 일본군 답게 시간이 갈수록 나이와 성별의 제한은 무색해졌다. 어린이, 노인, 여성 할 것 없이 많은 인원들이 징집됐다.
이미 1944년 에 오키나와 현 지사였던 이즈미는 현 내의 민간인들도 군을 돕는 것이 좋다고 하며 중학생들까지 징집한 후, 남학생들은 통신대에 여학생들은 간호대에 배속시킨 상태였다. 사실상 이미 이때부터 나이제한은 무의미 했던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이즈미 본인은 무책임하게도 본인은 보신을 위해 본국으로 튀었다.)
결국 일본군은 3만 명의 민간인을 차출했다. 동원된 사람들도 있지만 참전이 본토로부터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라는 생각을 갖고 자발적으로 자원한 경우도 드문드문 있었다고 한다.(당시 오키나와는 본토에 비해 차별받고 있었다.) 마지막으론 불쌍한 우리 조상님들 1만 명이 현지에서 징용중이셨다가 동원 되었다. 전쟁을 총괄하던 일본군 대본영은 현지 지휘관들에게 오키나와에 비행장을 건설한 뒤에 ‘불침항모’로 만들어 연합군에 저항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시기 제공권은 연합군이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본토에서 이곳에 보낼 비행기와 조종사 역시 넉넉하지 않았던 상황이었기에 이는 결국 막장스러운 구일본군 윗대가리들 특유의 뇌내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일본군 현지 지휘관들은 대본영 윗대가리들의 명령을 들었다는 것을 요식행위로 보여주려고 오키나와에 활주로를 건설하기는 했지만 주로 지형지물을 기반으로 오키나와를 요새화 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자연동굴이 많았던 오키나와의 지형은 요새로 활용하여 싸우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결국 대본영도 이들의 의견을 지지하게 된다.(본토에 불꽃쇼가 계속 터지니 주제파악을 했지)
일본군은 1945년 3월 제24사단, 제62사단, 제44독립혼성여단, 제27전차연대 등의 육군 67,000여명, 해군 9,000명, 오키나와주민으로 구성된 방위대 병력 약 20,000명 등 약 12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된다. 총 지휘관에는 우시지마 미츠루 육군 대장이 선임 되었다. 3)일본군 수뇌부들의 생각.-사석(捨石)작전 이것은 일종의 사석(捨石)작전이었다. 본토방어를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고, 연합군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것 이었다. 사실 이 당시 일본 대가리들은 뒤로는 소련한테 연락하면서 “소련 형님 저 연합군하고 평화협상하고 싶은데 백좀 봐주면 안되나요?”같은 이야길 하고 있었고, 내부에서도 끝까지 저항하자는 파 못지 않게 현실적으로 항복을 준비해야 된다는 파 역시 대두하는 지경이었다. 결전파든 항복파든 오키나와에서 최대한 미군에게 피를 강요해야 시간이건, 항복조건이건 벌어들일 것이 있으니, 오키나와를 곧잘 사석으로 비유하길 좋아했다. 사석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대본영은 오키나와를 본토방어를 위한 희생물 정도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키나와 현민에 대한 차별의식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던 시기이니 말해무엇할까. 오키나와 전투에서 민간인 피해가 상당했던 이유다. 오리지널 본토인 인명도 경시하는 그들이, 2등 국민으로 생각했던 오키나와 주민들을 돌봐줄 리 없었다. 3.전투의 대략적 양상 (사진설명:4월1일 오키나와 해안에 상륙한 미군 ) (사진출처:히스토리 채널, 해안가에 미군이 상륙하고 있다.) 미군은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붙였다. 1945년 3월 24일부터 3월 31일까지 3만발에 달하는 해상 ,공중 포격을 주요 공략지점, 미군 보병, 해병대의 상륙지점에 퍼부었다. 예비포격이 끝난 4월 1일. 미군은 항공모함 40척, 구축함 200척을 비롯하여 각종 수송선, 상륙함으로 구성된 상륙부대를 태운 함선 약 1,300척을 오키나와 해변에 접안시키고 상륙을 시작한다. (사진출처:구글 위성지도 카카즈 고지는 슈리성에서 10km 북부 쯤 위치해 있다.)
미군은 요미탄(讀谷)에서 차탄(北谷)에 이르는 오키나와 섬의 서해안에 상륙하여 오키나와 섬을 남과 북으로 양단한 후. 두 코스로 나누어서 북상과 남하를 개시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주요목표 중 하나였던 비행장 점령을 완료했다. (가데나 비행장, 요미탄 비행장.) 4월7일 사실상 일본해군의 마지막 전력이었던 전함 야마토와 이하 10척의 군함들이 오키나와 섬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모두 미 해군 함재기의 집중폭격을 맞고 격침되었다. 여기까진 미군이 그럭저럭 해냈고 인명피해가 많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4월9일부터 시작된 카카즈(嘉數)고지에서 시작된 격전부터가 문제였다. 결국 본게임은 카카즈를 기점으로 오키나와의 중심부인 슈리(首里)성까지의 전투였다. 거리는 10km인데 이 10km를 돌파하기 위해 약 50일이 소모되었을 정도다. 여기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사진설명:톰슨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미군. 격전의 5월에 촬영된사진이다.) 첫째 카카즈는 우선 슈리를 지키기 위한 방어진지 개념으로 일본군 62보병사단이 전투가 발발하기 이전부터 공을 들여놓은 곳이었다.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수많은 언덕, 바위, 능선을 따라 거미줄 같은 토치카와 박격포 진지가 배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일본군은 당시 카카즈 지역내 마을마다 존재하는 두꺼운 벽돌로된 전통가옥들 마다 트랩을 설치하거나 기관총 진지를 만들어서 지역전체를 하나의 요새로 만들어 두었다. (사진출처:제주미디어 기사, 카카즈에는 지금도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상단은 동굴요새, 하단은 현재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당시 방첨탑. 당시 저 방첨탑 안에는 기관총과 박격포가 있었다.) 둘째 병력의 구성이 달랐다. 북부 점령전에 있어서 미군은 수많은 오키나와 현민들의 항복을 받을 수 있었고, 특히 북부는 현민을 중심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전술하였듯이 본토의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의식도 그렇거니와 오키나와 주민들 자체가 남의 싸움을 덤태기 쓰고, 일본군이 섬에 해둔 막장 짓에 대해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어서 항복의 순간이 왔을 때, 항복결정을 하는 것이 쉬웠다. 반대로 오키나와 남부에 있던 카카즈 고지부터 슈리성으로 이어지는 격전에서 방어를 담당한 일본군 부대들은 주로 일본본토의 주력 방어부대와 지휘관 우시지마 미츠루와 조 이사무 중장등이 엄선한 부대들이었다. (사진출처:http://www.ibiblio.org 당시 미군의 카카즈 고지 지도.) 마지막으로 이 10km에서 미군은 온갖 막장상황들을 다 보게된다. 북부에서의 전투에도 없던 것은 아니지만, 중, 남부에서의 전투는 일본군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막장의 향연이었다. (사진출처:LIFE지 2차대전 종전 55주년 기념 사진 모음. 아이,노약자와 여성부터 구출하는 미군.) 일본군들은 갓난 아이를 업은 여인의 등뒤에 부비트랩을 장착하는가 하면, 어린이와 소년으로 구성된 오키나와 현지주민들을 인간방패로 삼고 사격을 개시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군은 일명 의열 공정대 라는 부대를 편성하여 미군의 비행장에 병사들을 태운 수송기를 강행착륙 시킨 후 병사들이 뛰어나와 미군 항공기와 기지시설을 공격하고 자폭하는 방식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것은 의열공정대를 통해서만 감행된 것이 아니다. 전투 기간 내내 일본군은 현민들을 동원하여 온갖 방법의 자살공격을 하도록 강요했다.
키리코미’(切り込み)라는 기습작전이 대표적인 방법이었는데 이 작전은 민간인들이 폭탄을 들고 전차 밑에 들어가거나 수류탄이나 폭탄 등을 안고 미군과 함께 자폭하는 방법이었다. 14살된 소년에서부터 60-70대 노인까지 연령을 불문하고 이러한 자살공격을 강요받았다. 전투의 난점도 난점이지만, 이런 식의 전쟁양상은 미군장병들에게 극도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미군은 작전 이전에 병사들을 교육할 때, 가급적 민간인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는데,일본의 거짓선동과 선전전(미군이 오면 무조건 너흴 죽인다.)에 속은 수많은 오키나와 현민 들이 미군이 도착해서 도와주기도 전에 집단자살을 해버리곤 했기에 병사들의 심적인 충격은 더욱 컸고, 반대로 일본군에 대한 증오심은 깊어져갔다. 더불어 일본의 반격은 계속되었다. 카카즈 고지 전투 3일전부터 일본은 최대한 미군에 타격을 주기위해 1900여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일명 기쿠스이 작전이라 명명된 카미카제 작전을 진행했고, 미군 5000명이 사망하였다.(기쿠스이 1~8호 작전으로 나누어서 4월 6일부터 6월 22일까지 실행됌. ) 미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결국 열흘 남짓한 전투 끝에 카카즈 고지의 일본군을 격멸하고, 뒤이어서 각종 주요 고지와 전략거점들을 장악하는데 성공하고 나하에 진입하게 된다. 나하는 지금도 오키나와의 현청 소재지이며, 과거 오키나와가 류큐국으로서 독립국이었던 당시 왕궁이던 슈리성이 소재한 곳이기도 했다. 중심지이기에 당연히 점령해야함은 물론, 총 지휘관인 우치시마 미쓰루를 필두로 하여 오키나와를 방어하기 위한 일본군의 잔존병력들이 총집결해 있는 곳이었기에 어떻게든 점령해야했다. 이미 원뿔고지(나하 근처에있는 원뿔모양의 고지.. 나하를 수비하기 위해 일본군이 끝끝내 버텼지만 미국의 압도적인 화력앞에 떡실신.)를 사전 점령한 미군은 나하를 점점 옥죄기 시작했고, 육군과 해병대+폭격을 중심으로 나하에 돌입했다. 나하는 하나의 도시였고, 카카즈에서의 전투처럼 일본군은 나하의 곳곳을 요새화+민간가옥들을 요새화+민간인은 고기방패 크리를 시전해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틈틈이 박혀있는 박격포 토치카와 일본군 저격병들에 의해 수많은 미군 장병들이 전사했다. (사진출처:히스토리 채널. 당시 미군종군기자가 찍은 처참한 시내사진. 상당한 격전이 이루어졌음을 알수 있다. 이와 별도로 슈리성에 대한 공략역시 같은 시기에 진행되고 있었다. 미군의 총지휘관인 버크너 중장은 슈리성을 공략할 동안 나하시내의 일본군이 슈리성을 돕지못하도록 공세를 강화할 것을 주문했고 이 과정에서 당시 미군의 보병 대대장이었던 호라시오 우드하우스 중령이 일본군 저격수에게 사망하게 된다. 5월31일을 기점으로 나하의 주요 전투는 사실상 종결되었다. (사진출처:구글이미지 검색: 슈리 시내를 순찰하는 미 해병대원들) (사진설명: 슈리성 함락 직후의 상황. 빨간선이 일본군의 방어선이다. 한눈에봐도 사실상 일본군이 끝장났다는걸 알 수 있다.) 동시에 진행되었던 슈리성과 시가지 점령 작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 작전은 미 해병대가 주축이 되어 진행됐다. 이미 미군은 슈리성을 직접 타격하기 위해 5월13일부터 꾸준히 슈리성 근처를 장악하는 전투를 치루었다. 그러나 갑자기 폭우가 내리기시작하자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미군으로서 슈리성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접수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오키나와 방어를 총괄했던 일본군 주요지휘관들 및 일본 제32군 사령부가 슈리성 지하에 있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엉망진창 내리기 시작한 폭우는 작전계획에 차질을 주었다. 병사들의 탄약과 식료품을 보급해야하는 지프는 흙에 가라앉기 시작했고, 참호에는 물이 새들어왔으며 , 일본군과 미군의 썩는 시체에 뿌려진 빗줄기들은 냄새는 물론, 병사들의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병사들의 복장과 장비는 언제나 젖어있었다. 미드 <퍼시픽>으로 유명한 당시 참전 용사 유진 슬레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저 당시 병사들이 단순한 전투 외에도 스트레스와 위생상태 등으로 병들거나, 자살하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미군 지휘관들은 이 상황에서의 공격이 유효하지 못하다고 판단 며칠정도 공격을 쉬게된다(....) 그러나 반전이 생겼다. 5월26일경 약 3000여명의 일본군이 남부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해병대원들이 상부에 보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군은 이에 발빠르게 대처했고, 악천후 속에서도 정찰기 파일럿들은 일본군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해상에 대기하고 있던 미군의 전투함들은 해당좌표에 일격을 가했다. 그 결과 일본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 다음날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기세를 탄 미군은 슈리성,시내에 본격적인 총공세를 가하게 돼고 결국..! (사진출처:라이프지, 엉뚱하게 남부기가 꽂힌 사연이있는데, 당시 슈리성을 함락시킨 부대에 성조기가 없었다고 한다. 이때 남부 출신의 두젠버리 해병대 대위가 남부연맹이 쓰던 남군 깃발을 꺼내다 꽂았고, 얼마 뒤에 이 소식을 들은 미군수뇌부가 성조기로 바꾸게 했다. 가벼운 헤프닝~ 2차대전 참전 남부출신 미군들은 종종 남부연맹 깃발을 간지템이랍시고 갖고다닌 사례가있다.) 이와 같이 승리의 천조기(?)를 나부끼며 5월31일부로 슈리성과 시내를 장악하게 된다. 후퇴한 일본군 제32군은 사실 이미 전술했듯 병력을 남부로 미리 보낸 것 처럼 토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부회의결과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이미 오키나와 방어하긴 글러먹은 듯해서(....) 물론 의견이 양립하긴 했지만 결론은 지금 이 상황에선 항전을 지속할 수 없다는데 에는 합의에 도달했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잔존한 일본군들의 야간기습과, 잔당소탕 등으로 시간을 보내던 미군은 6월10일부터 18일까지 구니시 능선에서 저항하는 일본군 제32군을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으로 제압한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버크너 중장은 오키나와 전투외에도 알래스카 방어전을 비롯한 타 전장에서 활약했다. 위의 남부기에 이은 역사의 우연일까? 버크너 중장의 아버지도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군인 이었다고 한다. ) 이 과정에서 미군 총지휘관 버크너 중장이 일본군의 포격으로 전사했다. 본 능선이 상당히 위험했기 때문에 부하들이 시찰을 반대했으나 직접 전선을 시찰하고 장병을 독려해야 된다고 갔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그의 사후 미국은 버크너 중장의 업적을 기려 훈장을 내리고, 그를 대장으로 추서하였다. 버크너 중장의 평소 안배대로 후임에 가이거 해병 소장이 임명되었으며(버크너 중장이 많이신 뢰했고 전투 중 자신이 전사할 경우 가이거 해병 소장을 임명하라고 했었음.) 일본군은 최남부 방어선을 중심으로 저항을 계속했지만 결국 미국의 압도적인 전투력앞에 붕괴되었다. 총 지휘관이던 우시지마 미츠루와 죠 이사무는 6월22일 할복, 자결했다. 그리고 잔당소탕과 치안유지 등 뒤처리가 끝나자 7월1일이 되었고 미국은 공식적으로 전투의 종결을 선언했다. 4.전투의 결과
1)미군의 피해, 그리고 향후 판단
연합국 측은 전사 1만 2500명 부상 3만 8900명 등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다. 연합군은 오키나와 같은 작은 섬을 점령하는 것에도 격렬한 저항과 인명피해가 수반되는데 만일 본격적으로 연합군이 본토상륙을 추진할 경우 입게 될 피해는 어떨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당시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일명 ‘Downfall’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Downfall 즉 파멸이라고 명명된 본 작전의 요는 일본의 본토에 100만명 이상의 대규모 연합군을 상륙시켜서 최종적으로 일본을 장악하고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는 본토상륙전에서도 격렬한 저항이 뒤따르게 된다면 ‘downfall’ 작전의 핵심인 “본토상륙”이 얼마나 큰 인명피해를 낳을지를 고민하게 됐다.
당시 미 육군 장관 이었던 헨리 스팀슨(Herny stimson)은 적게는 170만 많게는 400 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추측하였다.(물론 이는 모든 연합군+현지인들 피해 등등 총합산) 이러던 차에 1945년 7월16일의 핵실험 성공은 미국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굳이 많은 인명피해를 감수하지 않고 핵 몇발 만으로도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3)일본의 인명피해
본토출신 6만5000명의 군인이 대부분 전사하였으며 3만 명의 징집병과 일반민간인 약 12만 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오키나와 현의 인구가 약 45 만 명 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거의 현민의 4분의 1이 전쟁으로 희생되었던 셈이다.
4)희생된 조선인들
대부분의 조선인 징용자(약 1만 명으로 추정)들이 사망하였으며 당시 오키나와에 존재하였던 약 140여개의 위안소중 40여 군 데에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대부분 사망하였다. 5.당시 전투에 대한 증언 다음은 시중의 오키나와 전투사 서적 등에 나와 있는 당시 피해현민 들의 당시 전투에 대한 증언 중 인상 깊은 것을 발췌한 것이다. 1)쿠니요시 신이치(國吉眞一)씨의 증언-학생의 동원
당시 만14세로서 나하(那覇) 시립 상업학교 3학년 이었던 쿠니요시 씨는(현재 80살) 이른바 ‘철혈근황대원’으로 선발되어 전쟁에 동원 되었다.
“우리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급우 2명이 전장에서 죽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쿠니요시 씨는 6월 25일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자신의 상업학교 한곳에서 차출된 학생만도 99명이 넘었으며 이중 70명 이상이 전사했다고 한다.
이런 학생의 동원은 나하 시립상업학교 한곳에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다. 오키나와 사범중학교 학생들의 경우에도 남, 여 학생을 막론하고 2000여명 이상이 동원됐다. 남학생의 경우 일명 ‘철혈 근황대’의 대원으로서 여학생의 경우 ‘히메유리 간호대’로서 동원되었다. 2)나카소네 히테(中宗根ヒデ)씨의 증언과 나카무라(中村)씨의 증언- 집단자살의 배경
“동굴 안에서 일본군은 아기가 울면, 그 울음소리 때문에 미군에게 들키니까 찔러 죽이겠다고 했어요. 또한 미군에게 항복하면, 여자는 강간당하고 남자는 탱크에 깔려 죽는다고 일본군에게 들었지요.”
-나카소네 히테(2004년 인터뷰 당시 86세) 할머니의 증언.
“사이판에서 남자를 줄지어 세워 놓고 탱크로 밀어 죽였다고 일본군이 발표했습니다. 미군이 여자는 모두 강간한다는 말을 듣고 스무 살이었던 누나도 죽겠다고 했죠.”
-나카무라 다케지오(2004년 인터뷰 당시 80세) 씨의 증언. 이런 거짓 위협 속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결을 택할 수 밖 에 없었다. 이런 식의 집단 자살로 죽은 오키나와 인 들은 파악된것만 무려 1000명이다. 본토출신의 일본군 장교들은 오키나와 현지인들이 미군에게 항복하는 것을 방지하고 끝까지 자신들과 항전하게 만들기 위해 “미군에게 항복하면 여자는 강간하고 남자는 죽인다.”라는 선전을 반복적으로 행했다. 3)스파이를 죽여라-마녀 사냥 식으로 이루어진 스파이 사냥
당시 일본 헌병대들은 오키나와 시내에서 이적행위자 처단이라는 명분하에 미군 스파이 용의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처형하였다. 그러나 처형당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구중회씨 처럼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본군의 스파이혐의 처형은 진짜 스파이를 처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민들의 강제적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공포분위기 조성이 주 목적이었기에 당연한 것 이었다. 이중엔 조선인들도 많은데, 현재 오키나와 평화박물관 희생자 추도비석에는 수많은 조선인 이름이 적혀있다. (이에 대해 궁금한 훌리들은 <오키나와 현민사> <나하 시사>등 당시 상황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서적들을 볼것.) 6.왜 오키나와 전투는 잔혹한 살육전이 되었나?-인명경시의 일본군 vs 민주주의의 미군
1)구 일본군 특유의 인명경시 오키나와라는 단일 전장에서만 양측 군인, 민간인 등 도합 28 만 명이 죽었다. 이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본의 무지막지한 현지 주민동원과 세뇌 때문이었다. 인간방패, 인간 몸에 트랩설치, 키리코미로 대표되는 사실상의 전차자폭조, 스파이 마녀사냥, 거짓 선전 등은 애초에 대량의 인명피해를 당연히 알고 감수한 그들의 ‘사석작전’이었다. 2)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는 구 일본군의 자살공격 하늘의 카미카제, 수중의 가이텐 등등. 각종 자폭병기들... 일본의 2차대전시 수많은 자폭공격무기들은 이렇게 해서라도 전쟁을 더 끌어봐야 한다는 발상에서 나왔다. 하지만 수많은 군사전문가들에게 구 일본군의 자살공격은 유례가 없는 막장행위로 평가받는다. 첫째 구 일본군의 자살공격은 정규군 상부의 전파에 의해 체계, 조직 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명시적인 명령전파체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인류의 전쟁사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를 모두 살펴보면 불리한 상황에서 자살적인 공격을 행했던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대개 전투 중에 벌어진 순간적이면서도 우발적인 판단들이거나, 전황이 불리할 때 독립적인 개별 부대 지휘관의 판단으로 부대주력을 보존하기 위해 부대일부의 희생을 요청하는 양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현대의 자살공격은 주로 테러리스트들, 테러단체들이 감행했한 것이고. 이렇게 일본군 처럼 조직적으로 상부부터 하부까지 자살공격시스템을 체계화 한 사례는 전무후무 하다는 것이다. ex)육탄 10용사, 전차를 몸으로 막아냈던 다른 한국군 참전용사들.
둘째 일본군부가 오키나와 전투를 비롯하여 당시의 전쟁 상황에서 감행했던 자폭과 자살공격들은 이와 다른 본질인 차이점이 있다. 애초에 군 최고사령부인 대본영의 명령으로 전투원의 죽음이 100% 보장된 전술과 장비를 택하고, 그에 따른 인원을 선발하고 작전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위에 예시로 든 육탄 10용사나, 기타 한국군의 참전용사들의 경우 국군 최고수뇌부가 처음부터 저 참전용사 할아버지들 더러 자살할 생각하고 육탄돌격 하라고 교본 만들고, 자살용 수류탄이나 무기 만들어 쥐어주고 훈련 시킨게 아니다. 예를 들어 카미카제 공격의 경우에서도 수송기나, 전투기에 출발하여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분량의 연료는 비행기에 주입하여도 복귀하는 연료는 주입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개개별로 일본의 자폭무기들은 어떻게 자살하며 상대를 죽이는지 훈련과 교본을 통해 계획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물론 한국군의 경우도 6사단장 김종오 장군이 평소 병사들에게 전차를 육탄으로 막는 법에 대해 훈련한 적은 있지만, 이는 전차에 뛰어들어 무작정 자살하라는 식의 교육이 절대아니었다. 어떻게 전차의 진격을 저지하고 보병들이 전차를 쌈싸먹어야하는 지에 대해 가르치는 교육이었지. 도리어 이렇게 훈련받은 6사단은 한국전쟁 당시 혁혁한 전과를 세운다.)
마지막으로 구 일본군은 자기들이 테러집단도 아니고 버젓이 정규군임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을 끼워 넣는 막장 짓을 했다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그러나 일본 극우세력들은 이러한 역사를 부정하고 7년 전 엔 오키나와 현민들의 피해사실을 교과서 기술에서 삭제하려다가 오키나와 현민들에게 항의를 받았으며 근래 2011년의 새로운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단순히 “미군이 온다는 것을 두려워 했던 현민들이 집단자살을 했다.” 라고만 서술하여 현민들의 염장을 제대로 질렀다.
3)그래도 인권을 생각했던 미군 (사진출처:히스토리 채널: 미군에 의해 구출된 아이. 발견 즉시 미군이 수용소로 옮겨 보호했다고 전해진다. 전쟁의 파편은 가장 약한 사람들부터 맞게된다는 점이 마음 아프다.) 애초에 미군은 일본군이 인명경시 병신들 이란걸 알았기에 전투를 앞두고 걱정을 안할 수 가 없었다. 더군다나 오키나와 섬을 점령한 이후 미국은 군정을 실시할 계획이었는데, 이는 일본 본토에 사실상의 첫 군정이기 때문에 민간인에 대한 미군의 이미지는 더욱 중요했다. 미군은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고 최대한 심리전을 이용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약 600만장의 전단지를 인쇄했다. 전단지의 내용은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 구체적인 항복방법에 대한 것들이었다. 또한 소형 라디오도 준비했고, 탱크와 정찰기에 메가폰과 스피커를 달고 밤낮으로 투항을 권유했다. 전투에 투입하기전 교육시간, 미군의 수많은 지휘관들은 미군장병들에게 민간인들을 최대한 보호해야하며, 포로가 발생할 경우 학대하지말라는 걸 지속적으로 주지시켰다. 구체적으로 민간인들을 돕고, 일본군 포로들을 심문하기 위해 약 80여명의 통역관을 미리 준비했다. 시기가 여름시기인지라 격전을 치르고 나면 현지주민들이 각종 전염병과 위생불량, 식량난에 허덕일 것을 염려하여 충분한 식량과 의약품의 보급을 준비해두었다. (사진출처:daviddallpoet.net 오키나와 전투 50주년 기념 사진 자료. 이렇게 같이 담배까지!친절한 미군의 태도에 주민들은 거짓선전의 진실을 알게된다.) 전투가 끝나자 오키나와 현민들은 미군의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그동안 일본군의 거짓선전에 완전히 낚였다는걸 깨닫게 된다. 미군은 부상당한 현민들을 성심성의껏 치료했고, 전후복구 노역에 동원할 때 그에 맞는 임금과 식량을 제공하였기에 현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소수라도 살아남았던 조선인들과 위안부 할머니들도 모두 미군의 보호를 받았다. 물론 개별적인 미군들이 전장의 스트레스로 인해 현지현민이나 일본군 전쟁포로 들을 폭행하거나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미군은 당시의 군대치고는 굉장히 민주주의와 민간인의 인권을 생각했던 군대임은 인정해야 한다. 항상 일본극우들은 저때 미국도 마찬가지로 사람 죽였고, 민간인도 죽었다고 자신들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역사의 순간에서 똑같이 손에 피를 묻힌 두 국가, 두 사람을 보고 판단할 때 둘중 좀 더 올바른 정의와 미래를 위해 손을 더럽힌 사람과 국가에게 승점을 주는 법이다. 고로 일본우익들의 개소리는 X까고 무시해도 된다. 6.끝으로 일본군이 당시 주장했던 옥쇄전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전투기도 했다. 이 전투는 단일전투에서 일본군이 가장 많이 항복했던 전투로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일본군 내부에도 이미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이 전투 이전에 이렇게 대단위로 항복한 케이스가 없어서 미군이 첨엔 함정인가 라고 오해했을정도라고 한다. 총 항복자는 1만 5천명.) (사진출처:두피아 포토 커뮤니티. 오키나와 전투 50주년 기념비. 제막 당시 전쟁을 경험했던 현민들과 그들의 가족부터, 참전미군노병까지 참여했고 무라야마 일본 수상이 직접 평화연설을 했다.) 현재 오키나와에는 당시의 전투의 희생을 추모하자는 취지로서 오키나와 평화박물관이 있고. 저 비석도 박물관에 있다. 현민 희생자, 연합군,일본군 희생자, 조선인 희생자들 중 이름이 파악되는 당시 희생자 23만 4천여 명의 이름을 새긴 114기의 석비가 있다. 다신 이런 전쟁이 있어선 안될 것이고, 경망스러운 역사인식으로 주변국을 긁어대는 자민당과 일본우익세력들은 똑똑히 그들의 죄과를 돌아보고 참회해야할 것이다.(물론 이 새끼들이 할턱은 없겠지.)
7.+@ 각종 사진들 (사진출처:라이프지, 미군의 고지 점령전에서 항복하는 일본군.) (사진출처:라이프지 5월 중 왔던 폭우로 진흙창에 박혀버린 트럭. 당시 미군은 오키나와의 바위,동굴,자연환경,악천후와 맞서싸워야 했다.) (사진출처:라이프지. 부상당한 일본군을 치료하는 미군 의무병들) (사진출처:라이프지 폐허가된 나하시내를 바라보는 미군이 쓸쓸해 보인다. 전투 기간 동안 나하에는 수 만발의 포탄이 투하되었다.) (사진출처:라이프지. 한 미국의 해병대원이 오키나와 전투 중 동굴진지에서 노획한 일본군의 깃발이다. 당시 일본군은 승리를 기원하는 문구나 천황,국가, 가족을 축원하는 내용을 곧잘 깃발에 쓰고 부적처럼 갖고 다녔다.) (사진출처:라이프지. 승리를 기념하는 미군. 사령부에서 기념식이 이루어졌다.) (사진출처:라이프지. 버크너 중장은 이 사진이 찍힌뒤 얼마 안되어 일본군의 포격에 전사한다.) (사진설명:나하시내에서의 격전을 끝낸 미군과, 항복한 일본군 포로,군속, 징용자들. 케바케긴 하지만 성격이 온순한 미군들은 무장만 해제하고 곧잘 저렇게 사이좋게 같이 쉬었(...)다고 한다.) (사진설명: 종군기자 어니파일. 그는 2차대전 내내 많은 전장을 다닌 유명한 종군기자였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 중 일본군 저격수에게 죽게된다. 현재 이 자리에 그를 기리는 위령비가 있다.) 드디어 왔다! 군인도 영웅도 없는 이 광대한 모험 놀이터, 검은 화산 바위섬 오키나와로. 전쟁이 계속되는 비극의 땅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내가 왜 여기있는거지? 하고 자문한적은 한번도 없다. 이미 나는 그것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야. 이 '일부'라는 것은, 전쟁과 관련하여 후회하는 유일한 것.마지막으로 쓸 이유가 많다는 의미이기도해. 최대의 전쟁속에서 비인간성을 경험한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과 고통, 회한, 환멸 그리고 전쟁에서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하루동안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인류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야. <어니 파일의 수첩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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