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찰스 라일 주교(John Charles Ryle) 의 영성
존 찰스 라일 주교(John Charles Ryle) 소개
출처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존 찰스 라일(1816년 5월 10일~1900년 6월 10일)은 영국 리버풀Liverpool 교구의 첫 번째 성공회 주교였다. 라일은 맥클레스필드Macclesfield에서 태어났으며 이튼Eton 학교와 옥스포드에 소재한 그리스도 교회Christ Church, Oxford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뛰어난 육상선수였으며 옥스포드에서 크리켓을 즐기기도 하였다.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이기도 했던 그는 서품 사목으로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그는 정치가로서 입문할 계획을 갖기도 하였다.
1838년 성당에서 에페소서 2장을 듣던 때 영적으로 거듭남을 경험했다. 1842년에 윈체스터Winchester 교구의 섬너Sumner 주교로부터 서품을 받았다. 햄프셔Hampshire에 소재한 엑스베리Exbury 교회에서 보좌사제로 훈련받은 뒤, 그는 윈체스터 성 토마스 교회St Thomas's, Winchester 의 주임사제(1843), 서포크의 헬밍햄 교회Suffolk, Helmingham의 주임사제(1844), 스트라드브로크Stradbroke 교회의 관할사제(1861), 노르위치Norwich 교회의 명예 법정사제(canon)(1872), 그리고 솔즈베리Salisbury 대성당의 주임사제(1880)를 역임하였다. 1880년 당시 64세의 나이로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수상의 추천으로 리버풀 Liverpool 교구의 주교로 축성받는다. 83세인 1990년에 은퇴하였으며, 같은 해 별세하였다.
교구 안에서 그는 열정적이면서도 직설적인 사목을 하였고, 서품 피정 때에 특별한 배려를 베풀면서 교구 성직자들에게 충직한 목자로 남아있었다. 그는 자신의 교구 안에서 성직자 연금 제도를 도입하였고 주교 재임기간동안 40개의 성당을 세웠다.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교구 안에 주교좌성당을 건축하기에 앞서 성직자 사례비를 올리기도 했다.
라일 주교는 개인적으로 은혜로움과 따스함의 인간적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당당한 위치와 자신의 신학에 대한 열정으로 생명력 넘치는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많은 남자와 여자 노동자들이 그의 특별한 설교 모임에 참석하였고,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께로 이끌렸다.
그는 영국성공회 내에서 복음주의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신학적인 에세이들로 유명하다. 라일은 복음주의파의 강력한 지원자이자 의식주의에 대한 비판가였다.
그의 긴 작업들 가운데는 ‘18세기의 기독교 지도자들Christian Leaders of the Eighteenth Century (1869)’, ‘4복음서 강해Expository Thoughts on the Gospels (전7권, 1856-69)’, ‘신앙인의 원칙Principles for Churchmen (1884)’ 등이 있다.
신학적으로도 철저한 복음주의자이자 원칙적으로는 타협하지 않았던 라일 주교는 다작의 작가이자, 열정적인 설교가, 그리고 신실한 목자였다.
거듭남(Born Again)
존 라일 주교의 복음주의 영성의 핵심은 바로 ‘거듭남’이다. 이 ‘거듭남(재생, regenartion)은 신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 은혜로 말미암은 영혼과 성품의 변화를 의미한다. 라일 주교는 재생의 교리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새 마음이 일도록 해 주리라.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 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에제 11:19, 36:26)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요한 1:13; 3:3,6)
그러니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 오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사도 3:19)
또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로마 6:13)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2고린 5:17)
라일 주교는 우리의 본성 자체가 죄성으로 넘치고 부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런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1고린 2:14)
모든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보존할 수 있으며 잃어버릴 수도 있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리스도께서 한번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1베드 3:18).
그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대리인의 자격으로 죽으신 것이다. 이를 인하여 우리의 엄청난 죄과는 지불되었으며 모든 믿는 자들이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만드셨다. 죄의 멍에를 느끼거나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는 선포되었다.
존 라일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그 모진 고통을 갈바리아 언덕에서 당하셨습니까? 왜 거룩하신 하느님이 범죄자로 취급되며, 죄인으로 간주되어 그렇게도 무자비하게 죽으셨는지요? 누구를 위하여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히셨으며 옆구리를 창에 찔리셨습니까? 그 누구를 위하여 귀중한 피를 그렇게도 아낌없이 흘리셨으며 무슨 까닭으로 이 모든 고통을 감당하셨습니까? 이는 당신때문이었습니다. 죄인! 바로 그 죄인을 위하여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충동이 아닌 죄인을 사랑하는 발로에서 기꺼이 그리고 자발적인 행하신 대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확신하기에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할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수단들
우리 성공회 신앙 안에는 기도, 말씀, 성사와 같은 은혜의 수단들이 있다. 그런데 라일 주교는 영국성공회의 복음주의 전통 안에 머무면서 성사들이 때론 신앙인의 깊은 신앙적 동기나 준비가 없이 베풀어지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기도
기도하는 습관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확실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의 특징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은혜, 믿음, 소망, 지식등이 모두 헛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신앙에 있어서 공기도도 중요하지만 개인기도만큰 그렇게 무시되고 있는 의무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하지만 한마디도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을 향하여 전혀 대화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교는 놀라고 있다.
진심이 없는 기도문만 가지고 외는 기도를 주교는 비판하고 있다. 기도는 가장 크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는 신앙의 행동이다. 열심히 기도한다는 것은 두드러지게 거룩하게 되는 비결이다. 영적으로 타락하는 것은 개인기도를 소홀히 하는데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기도는 행복과 만족함을 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기도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존 라일 주교 개인 자신은 무척 불행한 삶을 살았다. 평생 네 번에 걸쳐서 결혼생활을 했다. 그런데 연달아 부인들이 오래살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바쁜 사목활동 중에도 남은 아이들을 돌보고 키우면서 그는 철저하게 경건한 삶을 살았다.
기도하는 사람은 존경과 겸손한 마음으로, 영적으로, 규칙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열렬하게,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기도해야 한다. 또 충분히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도할 때 중보기도(대도)도 중요하다. 인간은 원래 천성적으로 이기심을 타고 났다. 그러나 기도자는 우리의 마음속에 전인류를 품도록 노력해야 한다. 감사기도를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신중하게 해야 한다. 믿음을 떨어지게 방해하는 장소, 모임, 회합 등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영적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과 거리가 먼 사람, 지역, 장소, 모임등은 피하여야 한다고 주교는 권면하고 있다.
성경읽기
성경을 읽는 사람은 모든 자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가 성경을 어떤 자세로 대하고 있는가? 성경은 “예언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느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한 것입니다.”(2베드 1:21)라고 말한다. 오로지 성경만이 절대적으로 완전한 책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당신은 성경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는 결코 경시할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영혼을 하느님께로 회심하게 만드는 중요한 도구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회심 이후에 믿음을 쌓아올리고 믿음으로 자리잡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우리가 유익없이 성경을 읽을 때 그 잘못은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는 결코 가볍게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항상 신앙인은 율법에 비추어서, 성경적 증거에 의해서 시험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날에 성경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심판되어 질 것이다. 성경을 읽지 않고 무시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존 라일 주교는 성경읽기에 대하여 이렇게 조언한다.
첫째, 바로 오늘부터 성경을 읽으라.
둘째, 성경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열망으로 읽으라.
셋째,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겸손함으로 성경을 읽으라.
넷째, 순종과 자기 적용의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라.
다섯째, 성경을 매일 읽으라.
여섯째, 모든 성경을 순서대로 읽으라.
일곱째, 성경을 공정하고 올바르게 읽으라.
여덟째,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면서 성경을 읽으라.
우리의 가족들 안에서도 성경을 더욱 존중되도록 하자. 성경을 우리의 자식과 식구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읽어주며 성경을 읽는 우리를 남들이 보는 것에 개의치 말자.
세례
그래서 라일주교는 교회 안에서 세례의 진정은 의미가 다시금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내적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회심이 없이 그저 관습적으로 베풀어지는 세례성사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그래서 라일주교가 보는 성사의 관점은 성사의 겉모습이 아니라 성사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인 태도가 중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유다와 같은 사람도 세례를 받았겠지만, 구원받지 못하였고, 회개한 강도는 한번도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회심하여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구원에 있어서 필요한 핵심은 그리스도의 대속하시는 보혈과 영혼과 삶을 통한 성령의 현존이라고 말한다. 이 두가지 요점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면 세례를 받더라도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성찬례
라일 주교는 주님께서 교회에 당신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려고 성만찬을 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사교 모임도 아니다. 그래서 이 성만찬이 교회의 생활 안에서 바른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나 부주의하게 준비없이 습관적으로 예배자들이 받아들이고, 주일미사가 끝나면 바로 세상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모습을 안타까와 하고 있다. 또한 교회도 성만찬이 지닌 의미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해설해주지 않고 마치 사교모임처럼 취급해서는 아니된다고 한다.
또한 지나친 의식주의의 장식에 가려 성만찬을 주신 그리스도의 뜻이 왜곡되는 것도 그는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이미 그리스도께 회심한 신자가 영혼을 강화시키고 새롭게 하기 위하여 성체를 영하는 본래의 목적으로 성만찬이 돌아와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은혜의 수단을 형식적으로 받았다고만해서 안심해서는 아니된다. 우리의 내적인 진정한 신앙이 없이 받는 성사는 무의미하며, 신앙이 없이 그것만으로 우리의 영혼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의 만찬을 잘 모실 때 얻는 영적 유익이 있다.
첫째, 주님의 성만찬을 올바르게 수용하는 것은 영혼을 겸허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둘째, 우리의 영혼은 고양된다.
셋째, 우리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넷째, 영혼에 절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아울러 주님의 만찬을 소홀하게 행해서는 아니된다.
첫째, 주님의 성만찬을 소홀히 하지 말자.
둘째, 주님의 성만찬을 경솔하거나 불경스럽게, 형식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셋째, 주님의 성만찬을 우상화하지 말자.
넷째, 주님의 성만찬을 부정기적으로 행하지 말자.
다섯째, 성찬례에 참여하는 자로서 당신의 신앙고백에 누를 끼칠만한 어떠한 일도 하지 말자.
여섯째, 만약 당신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님의 성만찬에서 그리 큰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느껴진다 해도 의기소침하거나 낙담하지 말자.
거룩함에 대하여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며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시오. 거룩해지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 히브리서 12:14
여기서 라일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참된 성결이 무엇인지, 왜 그것이 필요한지를 말하여주고 있다. 사실은 존 라일 주교가 말한 ‘거룩함’이란 주제 한 가지만 꿰뚫어도 그의 영성의 핵심은 거의 다 짚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실로 실제적인 성결은 무엇인지, 어떤 종류의 사람을 사람을 하느님은 거룩하다고 부르시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첫째, 거룩함은 성경에서 묘사된 하느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에 따라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자의 마음 상태의 습관을 이룬다. 하느님의 심판에 동의하는 습관이요, 그분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고 그분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의 표준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보는 습관이다. 이런 것을 통하여 하느님과 가장 완전히 일치하는 이가 거룩한 이라고 말한다.
둘째, 거룩한 사람은 알려진 모든 죄를 피하려고 노력하며 동시에 알려진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마음의 중심이 하느님을 향하여 바로 서 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세상보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더 애쓴다.
셋째, 거룩한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지려고 분투하는 사람이다. 그는 늘 그리스도를 믿는 삶을 산다. 날마다 평화와 능력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이끌어낸다. 또한 그리스도안에 있는 마음을 갖고자 수고하고 “그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로마 8:29)”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하여 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참는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이기적이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으로 행하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칭찬하지 않으신 것처럼 스스로 낮추는 낮은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해서 신실한 증인이셨으며, 그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히고,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계속 부인하셨으며, 왕들보다 경건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생각하셨고, 죄인들에게 사랑과 자비가 넘치셨으며, 공공연한 죄에 대해서는 완고하셨고, 칭찬을 받으셨을만 했어도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지 않으셨으며, 선을 행하기에 힘쓰셨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물러나셨으며, 그 즉시 기도를 계속하셨으며,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는 그의 가장 가까운 인척일지라도 그의 길에 끼여들 수 없게 하셨던 것들을 기억한다. 이것들이 거룩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들이라고 라일 주교는 이야기한다.
그래서 거룩한 사람은 삶 속에서 그가 거룩해지는 과정의 모습을 이루도록 노력한다.
네 번째, 거룩한 사람은 온순함, 오래참음, 온유함, 인내, 상냥함, 자기 혀를 제어함 등을 축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많은 것을 참고 견딜 것이며, 많은 것을 너그럽게 보아줄 것이며, 자기의 권리를 내세우는 말은 천천히 할 것이다.
다섯 번째, 거룩한 사람은 절제와 자기부정을 따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고, 그의 육신을 그의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며, 그의 정욕을 억제하며, 그의 육욕적인 경향들을 억누르려고 노력할 것이며, 어느 때라도 그런 마음에서 이탈되지 않고자 노력한다. 고린토 9:27에서 사도 바울로가 “나는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언제나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내가 남들에게는 이기자고 외쳐 놓고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사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여섯째, 거룩한 사람은 자애와 형제다운 친절을 좇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행해주기를 바라는대로 행하며, 사람들이 자기에게 말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말하라고 하는 황금율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는 자기의 형제들을 향해서 그들의 몸과 재산과 성격과 감정과 영혼들을 향해서 애정을 가득 쏟을 것이다. 사도 바울로가 “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 13:8)고 말한 것 같다.
일곱째, 거룩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자비와 인정의 마음을 따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선을 행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런 예는 “한편 요빠에는 다비타라는 여신도가 살고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이스말로 도르가, 곧 사슴이라는 뜻이다. 그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사도 9:36)라고 하던 도르가의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여덟째, 거룩한 사람은 마음의 청결을 좇는 사람이다. 그는 모든 더러운 것과 영혼의 깨끗지 못함을 두려워한다. 자기를 그런 곳으로 빠지게 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피하고자 노력한다. 자신의 마음이 부싯돌과 같은 것임을 알기에 부지런히 유혹의 불꽃들을 치우고자 한다.
아홉째, 거룩한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두려워한다는 말은 벌받을 것을 염려하여 단지 일한다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자기 아버지를 사랑하는 까닭에 그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항상 살아가고 행하기를 바라는 한 어린아이의 두려움을 의미한다.
열번째, 거룩한 사람은 겸손을 따르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기기를 바란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먼지요 재”라고 말하고, 야곱이 “나는 주의 자비가 필요한 모든 자 중의 가장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자”라고 말하며, 욥이 “나는 무가치한 자”라고 했을 때, 또한 사도 바울로가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말했을 때와 같다.
열한번째, 거룩한 사람은 모든 의무와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것들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는 조금이라도 남을 도우려고 한다. “무슨 일이나 사람을 섬긴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듯이 정성껏 하십시오.”(골로 3:23).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 12:11).
[신앙인의 삶에는 늘 열심히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라일 주교의 지론이다.]
열두번째, 거룩한 사람은 영적으로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이 있는 마음을 좇는 사람이다. 그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 자와 같이 살아가는데 삶의 목표를 둘 것이며, 이 세상은 나그네로서 순례하는 자와 같이 지나쳐버린다. 그래서 그에게는 기도와 성서와 하느님의 사람들과의 회합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것이 거룩한 사람의 가장 주요한 흥밋거리가 된다. 그는 자신을 하느님께 보다 가까이 있게 하려는 것과 비례하여 모든 일과 모든 장소와 모든 단체에 가치를 둘 것이다.
존 라일주교는 이것이 바로 자신이 스케취하려고 한 성결의 아우트라인이며 ‘거룩하다’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따라야할 성격들이라고 말한다. 또 거룩한 사람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존 라일주교에게 있어서 이러한 거룩함은 단번에 성숙하고 완전하게 오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점진적인 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작은 것도 경멸해서는 아니된다. 아직 그 목표에 도달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항상 목표를 염두에 둔다. 아직 그들의 것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그 성화가 결국 그들의 것이 되도록 분투하고 수고한다고 했다.
그는 담대하게 진실한 거룩함은 위대한 사실이라고 전한다. 그것은 결코 뜬구름잡기가 아니다.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 의해 어떠한 사람 속에서 보여질 수도 있고, 알려질 수도 있으며, 표시되어질 수도 있고 느껴질 수도 있다고 했다.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빛이요, 그 자체로 보여질 것이다. 만일 그것이 소금으로 존재한다면 그 맛이 느껴질 것이다. 그것이 만일 고약과 같은 것으로 존재한다며 그 모습을 결코 감출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실제적으로 거룩함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가를 라일주교는 그 이
유를 말하고 있다.
그는 역설하기를 거룩함 자체가 죄를 제거하고, 불의를 덮으며, 범과를 보상해주며, 하느님께 진 우리의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우수한 성인도 모두 “무익한 종”에 불과하다고 전한다. 우리의 가장 깨끗한 일도 하느님의 거룩한 율법의 빛에 비추어보았을 때 더러운 걸레조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흰 옷과 믿음, 그것만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며,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우리의 신뢰가 되며, 어린양의 생명책만이 우리가 하늘에 들어갈 자격을 준다는 틀림없는 사실을 복음주의 신앙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가 에페소서 2:8,9에서 말한 내용을 보자.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9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함이 왜 그렇게 영성인의 삶에서 중요한가? 왜 사도들은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하리라”고 말하고 있는가?
첫째, 하느님의 음성을 성서에서 분명히 그것을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 그의 사람들에게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 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 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하신 말씀과도 같다. 그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로는 데살로니카 교회의 사람들에게 “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데살 4:3)라고 하였고, 베드로 사도도 “ 또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위에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성서에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 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1베드 1:15,16)고 말했던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한 가지 장엄한 목표와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해져야만 한다.
에페소교회에는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그리스도께서는 물로 씻는 예식과 말씀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에페 5:25-26)라고 하신 것과 같다.
셋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구원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유일한 소리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해져야만 한다. 살아있는 믿음을 한 나무가 열매로 분별되는 것과 같다. 즉 입술의 고백만 있고 사람의 성격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믿음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넷째, 우리가 거룩해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진심으로 주 예수를 사랑하는 유일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모든 고난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불확실하다면 그는 고난을 겪는 중에도 아직 죄에 밀착되어 있음에 틀림없다고 한다.
가시관을 엮을 것도 죄요, 우리 주님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찌른 것도 죄요, 그분을 겟세마니와 갈바리아와 십자가와 무덤에까지 데리고, 혹은 끌고 간 것도 죄다. 만일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오른손을 찍어내버리고, 죄를 범하는 오른쪽 눈을 뽑아낸다 해도 우리의 마음은 냉랭할 것이 틀림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다섯째, 우리가 거룩해져야 하는 이유는 또 우리가 하느님의 진실한 자녀라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자녀들은 부모를 닮아간다. 하물며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은 자가 없다고 한다면, 그의 “자녀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헛된 일이다.
만일 우리가 거룩함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면 자기 스스로를 마음내키는 대로 떠벌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받지 못하였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우리는 선한 회심으로써 우리가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의 자녀니 신자니 하는 권세는 헛된 이름을 뿐이다.
거낼(Gurnell)의 말을 인용하면서, “당신이 거룩을 사랑함으로써 당신의 혈통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당신이 아무리 정맥 속에 왕족의 피를 가졌다고 해도 하느님의 자녀로 난 것은 아님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고 했다.
여섯째, 우리가 거룩해져야 하는 이유는 또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에 가장 적당하기 때문이다. 그 삶은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침묵의 설교이다.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모욕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고 했다.
일곱째, 우리가 거룩해져야 하는 이유는 또 우리의 현재의 위로가 그것에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와 슬픔, 성결과 행복, 성화와 위로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면서 의회를 물러 나왔다.”(사도 5:41)
주님을 배반하여 떠났던 사도들이 이렇게 담대하게 복음 전하고, 그리스도를 시인하였으며, 곧이어 감옥으로 끌려가 매를 맞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가 있다. 진실로 거룩한 사람만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외칠 수있다.
여덟째, 우리가 거룩해져야 하는 이유는 땅 위에 사는 동안 거룩함없이는 천국을 즐길 준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늘은 거룩한 곳이다. 하늘에 계신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천사들도 거룩한 피조물들이다. 거룩함은 하늘 어느 곳에서나 쓰여져 있다. 요한 묵시록은 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그 도성으로 들어 가지 못하고 흉측한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도 결코 들어 가지 못합니다. 그 도성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는 다만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뿐입니다.”(묵시 21:37)라고 말이다.
우리가 만일 거룩하지 못한 채 죽는다면, 천국에 가서 과연 집에 있는 것 같은 행복을 얼마나 느낄 것인가?라고 호소한다. 천국에서의 삶은 끊임없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도다 주 전능하신 하느님”라며 어린양을 찬양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기업에 어울리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영광의 축일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은혜의 양성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경건하여야 하며 하늘의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이 세상에부터 그것은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진정 거룩한가?” 거룩한 사람은 날마다 하느님의 심판대(Private Judgement)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다.
이것인 내가 교회에 규칙적으로 출석하는지, 영세를 받았는지, 영성체를 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불리우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묻는 게 아니다. 그것들보다 남들보다 ‘나’자신 개인에게 묻는 질문이다. 성서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함에 도달하기 원한다면 그리스도께로 가야한다. 가서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찬송의 말로 그에게 말씀드려야 한다.
“내 손에 가진 것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당신의 십자가만 붙듭니다.
벌거벗은 자, 주께 피하여 옷을 구하고
도움없는 자, 은혜를 바라고 주를 봅니다.“
확신의 삶
라일주교는 영국성공회 병자 방문기도서에 이렇게 아름다운 표현이 들어있는 것을 인용한다.
“전능의 주님은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요새가 되시니 지금과 또 영원토록 그대들의 방패가 되시며, 또 그대들로 하여금 그를 알고 느끼게 하시니, 하늘 아래 어찌 다른 이름이 있겠습니까. 건강과 구원을 주시는 이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입니다.”
이 기도서의 편찬자는 놀라운 지혜를 보여주고 있다. 눈이 희미해지고 마음이 약해졌을 때, 또 그들의 영혼이 떠날 기약이 다가왔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알고 또 느끼게 하여야만 했으며 그 밖에 다른 완전한 평화가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확신의 삶은 성경적이고 실재적인 것이다. 우리에게 확신이 요청되는 이유는 그럼으로 말미암아 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원의 확신이다. 자신의 공로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서 구원받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확신 속에 참 기쁨이 있다.
하지만 확고한 소망이 없는 신자는 그 자신의 내적 신앙상태를 탐색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신경증이나 우울증 환자와 같이 그는 자신이 만든 병, 의심, 의혹, 그리고 갈등과 좌절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확신에 차 있는 신자는 이런 사소한 문제에 시달리지 않는다. 비록 감옥에 있을지라도 바울과 실라처럼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가까이 하느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평화를 맛보며 살 것이다. 가장 전적으로 주님을 따르고 가장 높은 거룩을 지향하는 자가 최상의 확고한 소망을 늘 누릴 수 있을 것이며, 구원에 대한 뚜렷한 확신을 가질 것이다.
존 라일 주교의 어록 중에서
의로운 마음이란
의로운 마음이란 정직하고, 일편단심이며 진실한 마음입니다(루가 8:15; 역대상 12:33; 히 브 10:22).
그러나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루가 8:15),
이싸갈 후손 가운데서는 수령 이백 명이 일족을 모두 거느리고 왔다. 이들은 시세에 밝아 이스라엘이 해야 할 바를 잘 아는 현자들이었다.
(역대상 12:33),
우리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서 나쁜 마음씨가 없어지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겨 깨끗해졌으니 이제는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히브 10:22)
여기에 허위나 위선, 기회주의적 행동 따위는 전혀 섞여있지 않으며, 이중적인 성격을 띠거나 분열되어 있는 마음도 아닙니다. 의로운 마음은 '예면 예, 아니면 아니요' 라고 말합니다.
행복하십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양심은 평화롭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용히 앉아서 자신의 영혼에 대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세상과 완전히 독립된 행복의 원천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올바른 위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난할지라도 행복할 것입니다.
자신이 질병에 시달리는데도 불구하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공공의 재난들이 그에게 닥친다해도 그는 행복할 것입니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저는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행복이 더 촉진되고 증가되기 위해 몇 가지 충고를 하겠습니다.
신자들이여, 만일 당신들의 그리스도께 봉사함으로써 행복을 증가시키기를 바란다면 은혜 안에서 자라기 위하여 항상 수고하십시오.
해마다 더욱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 4:4)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잘 알게되도록 기억합시다.
해마다 더욱 더 많은 선행을 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타협하고 배회하는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완전한 평화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가장 믿음이 확고한 그리스도인은 항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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