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알기

성공회 신앙의 역사적 이해의 문제들(주낙현 신부)

유테레사 2012. 1. 20. 13:57

성공회 신앙의 역사적 이해의 문제들

주 낙 현

목차

서론

1. 성공회 신앙의 역사

1) 종교개혁기 : '아디아포라'(adiaphora)론

2) 리차드 후커의 교회 이해를 통해서 본 'via media'

3) 세 분파 (복음주의, 성공회 가톨릭주의, 자유주의)

4) 람베스 회의의 진행 - 교회 이해의 확대

2. 성공회 신앙의 세 덕목

1) 성서 : 프로테스탄트의 원리

2) 전통 : 가톨릭적 본질

3) 이성 : 신비적 영성 / 성사적 신학, 성육신 이론

결론 - 성공회 신앙과 삶의 신학

참고도서

 

서 론

성공회 신앙 (Anglicanism)의 정체성(Identity) 문제는 영국의 종교개혁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영국의 개혁이 루터나 칼빈과 같은 신학자들의 명쾌하고 치밀한 신학적 작업에 바탕을 두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리스(F.D. Maurice)와 같은 이들은 성공회의 신학적 특징은 '입장'(position)이 아니라 '태도'(attitude)에 있다고 했다. 뚜렷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고 '경향' 혹은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지적은 그동안 역사적으로 성공회가 보여준 몇가지 문제들을 설정하여 이를 이해하고 정리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글에서 성공회 신앙의 역사적 면모를 모두 밝힐 수는 없다. 다만 앞서 말한대로 성공회 신앙이 지닌 몇가지 특징적인 경향과 태도를 성공회사(史)를 통해 드러내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전개 또한 체계적인 사적 논증의 전개가 아니라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단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 단편적인 주제 또한 필자의 개인적인 선택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이 소고는 좀더 나은 토론의 자료와 토론의 제기로서 한계를 두기로 한다.

 

1. 성공회 신앙의 역사

 

1) 종교개혁기 : '아디아포라'(adiaphora)론

헨리 8세에게서 성공회의 종교개혁적이고 신학적 특징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다만 그가 임명한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Archbishop Thomas Cranmer)의 노력에서 영국 종교개혁의 성격을 찾아보아야 한다. 특히 그가 독일에서 루터주의적인 사상을 학습하고 자신의 종교개혁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대륙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여기서 아주 특징적으로 성공회 신앙의 사고 방식으로 자리잡은 주장이 유입된다. '아디아포라'론이 그것이다.

'아디아포라'(adiaphora)란 '대수롭지 않은 것들'(things indifferent)이라는 뜻의 희랍어에서 파생된 말로서, 루터의 동역자였던 P.멜랑히톤과 관련이 깊다. 1548년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대표들의 참여로 만들어진 "아우그스부르그 잠정 협정"(Augsburg Interim)에 대하여, 이를 좀더 개신교적인 내용으로 수정한 "라이프지히 잠정 협정"(Leipzig Interim)에 대해 멜랑히톤과 그의 추종자들이 동의함으로써 논쟁이 시작되었다. 즉 멜랑히톤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adiaphora)의 구별을 통해, 본질적인 것, 특히 복음의 핵심인 믿음에 의한 의인(義認)은 타협할 수 없는 것이지만, 비본질적인 사항을 타협하는 것은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따금식 필요한 것이며, 비본질적인 것을 낱낱이 주장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부인하게 되며 행위에 의한 의인(義認)으로 되돌아가게 될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서 멜랑히톤이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얻었던 성과는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 성직자의 결혼, 미사를 더 이상 공로적인 희생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이었다.

이러한 멜랑히톤의 태도에 대한 루터란들의 비판은 거셌지만, 영국에는 바로 이러한 멜랑히톤의 '아디아포라'론이 유입되어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토마스 스타키(Thomas Starkey)는 하느님의 율법과 진실한 문화적 자각을 통해 한편으로는 미신과 다른 한편으로는 분파 논쟁과 반역들의 양 극단을 피하여 중간의 길을 택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역설하면서, '아디아포라'론을 이용하여 성서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믿음 생횔, 예배 형식 등은 구원에 밀접한 상관이 없으므로 인간의 양심을 속박하거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중도적인 입장이 이후 엘리자베스 1세 치세 동안에 이루어졌던 영국 성공회의 정착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2) 리차드 후커의 교회 이해를 통해서 본 'via media'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적 안정을 구가하며 성공회 신앙의 틀을 잡을 수 있도록 기여한 이가 바로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 1554-1600)이다. 그는 자신의 Of Laws of Ecclesiastical Polity (1593)에서 로마 가톨릭과 청교도들의 대립적인 교회 이해를 지양하고, 교회를 신비적 교회(mystical Church)와 가시적인 교회(visible Church)로 나눈다. '신비적 교회'는 오직 하느님에게만 알려져 있고, '가시적 교회'는 하느님께서 창조 때로부터 부르셨던 모임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유대인들의 교회와, 그 이후의 그리스도교회도 이 모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교회의 외적인 신앙 고백이 교회를 규정한다. 후커는 청교도들에 반대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구원 자체의 본질적인 문제를 거부하는 과오는 범하지 않았다고 보고, 그 적용, 즉 인간의 공적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했다. 이와 함께 후커는 로마 가톨릭과 청교도들이 일으키고 있는 혼란을 바로 잡았다. 첫째로 '신비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의 구별이다. 둘째로 건전한 가시적 교회와 타락한 가시적 교회의 구별이다. 이런 점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신비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를 구분하지 못하고 이를 하나로 생각했으며, 청교도들은 '건전한 가시적 교회'와 '타락한 가시적 교회'를 구분하지 못하고 가시적 교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로만 빗대어 가시적 교회의 실재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교제(episcopacy)와 관련하여 후커는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 이를 교회의 필수적인 내용은 아니라고 보면서, 사도적 직책의 계승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에 대한 계승의 상징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따랐다. 한편 청교도들에 대해서도 주교제는 로마 가톨릭의 유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전수된 중요한 권위이자 교회 치리를 위한 사도적인 형식이라는 점을 들어 주교제를 옹호했다.

후커는 교회의 구성원은 세례를 통하여 외적인 신앙 고백을 표명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이단적 개념이나 분파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교회가 그들에 대하여 공식적인 견해를 선포할 때까지는 그 교회의 구성원으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로마 가톨릭과 청교도들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이를 포괄하는 중도적인 태도(via media)였다.

 

3) 세 분파 (복음주의, 성공회 가톨릭주의, 자유주의)

18세기 이래 영국 성공회 내에서 제기된 성공회의 정체성에 관한 몇가지 갈등은 성공회 신앙의 태도들이 갖는 몇가지 특징들을 보여 주게 되었다. 우선 18세기 흥성한 복음주의자들은 종교 개혁 전통을 강조했으며, 19세기 옥스퍼드 운동은 사도적 계승에 따른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과 성사적 신앙에 대해 강조했다. 한편 18세기 성서 비평과 신학적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자들은 신앙의 본질과 권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가했다.

 

가. 복음주의

복음주의적 부흥의 형태는 개인의 회심, 성서의 최우위성, 그리고 당시 만연하던 합리주에 대항한 복음의 설교에 강조를 두었으며,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의 교리를 더욱 강조하였다. 이들의 교리는 칼빈주의에서도 예정론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완화한 '온건한 칼빈주의'(moderate Calvinism)의 형태로 전적인 타락, 이에 따른 회심의 필요성, 신앙의 의인을 통한 구원, 그리고 성령의 구속과 성화에 대한 강조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은총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들의 견해는 칼빈의 [그리스도교 강요]에 따른 논리에 의존하기보다는 성서와 그동안 성공회에서 발전시켜온 신학적 경향들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성공회 복음주의의 황금기라고 할 18세기 초반의 30년 동안의 이러한 움직임은 중상층의 사회 계층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리스도교적 사회개혁의 한 일환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했던 윌리암 윌버포스(1759-1833)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나. 성공회 가톨릭주의

18세기에 고교회주의자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고교회주의자(High Churchmen)라 함은 가시적 교회의 사도적 질서와 권위를 강조하면서 교회의 의식과 예전에 큰 가치를 두었던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러한 태도들은 사제들 개개인의 특징으로만 유지되었을 뿐 큰 흐름으로 형성하지 못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고교회주의자들은 더욱더 완고하고 정서적인 면모가 없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이후 옥스퍼드 운동가들은 이를 두고 '완고하고 메마른'(high and dry) 태도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고교회주의자들에게 프랑스 혁명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이른바 급진주의와 비종교적 사고의 위협이 닥치자 다시금 질서와 권위에 대한 강조가 다시 일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의 대표적인 결과가 옥스퍼드 운동으로 나타났는데, 케블(J.Keble), 뉴만(J.H.Newman), 푸지(E.B.Pusey) 등이 대표적인 주자들이었다. 이들은 교회-국가의 일치를 노리는 자유주의자들에 맞서 영국 성공회의 영적인 독립성을 강조하였으며, 그 근원을 고대교회에서 찾고자 하였으며, 이에 따라 주교제를 역사적 계승의 본질(esse)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가톨릭적 부흥의 태도는 종교개혁의 내용을 고대교회를 근거를 통해 비추어 받아

들이는 태도로 성공회적인 신앙과 실천의 양태를 규명하려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의 여파는 성공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로써 로마 가톨릭과 관련된 예전 행위와 성사신학, 수도생활의 부흥, 그리고 사제의 직무에 대한 강조 등이 되살아났으며, 오랜 동안 이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통해 성공회 신앙은 공교회성(catholicity)과 성사적 영성(sacramental spirituality)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이 영향은 주교제를 채택하지 않는 교회들과의 연합에 큰 장애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다. 자유주의

자유주의자들은 교회의 형태와 예전, 그리고 그 밖의 논쟁적인 교리에 대하여 대체로 '대수롭지 않은 것들'(things indifferent)라고 취급하며 이러한 종교적 논쟁과 현안에 매우 자유롭고 관용적인 태도를 취한 이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18세기 초 옥스퍼드 오리얼 칼리지의 '지식인들'(Noetics)이라는 별명의 자유주의적인 성직자들로 이루어졌으며, 이후에는 캠브리지의 자유주의적 신학의 경향을 아우르게 되었다. '광교회'(Broad Church)라는 말은 1850년부터 쓰이기 시작한 말로, 영국 성공회를 국민 전체가 믿는 그리스도교의 한 표본으로 높이면서 이러한 포괄적인 사고방식을 협소화시키는 모든 시도들을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태도를 반영한 말이다. 코울리지(S.T.Coleridge)나 모리스는(F.D.Maurice)는 이러한 자유주의자들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이들은 보다 교부시대의 전통과 17세기 플라톤주의의 영향 하에서 자유주의적 태도를 심화시킨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코울리지는 성공회에서 강조하는 '이성'의 덕목을 다루면서 '이해와 이성'의 구별을 두며 이성에 대한 이해와 성서적인 영감을 발전시킨 인물이었다면, 모리스는 성공회 안에서 여러 분파적인 주장이 존재하며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이를 두고 삼위일체의 신비와 관련시키며 성공회의 소명이 지닌 바를 이해하려 했다. 특별히 모리스는 성공회에서 발전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의 신학적 실천적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그의 신학은 현대 에큐메니칼 신학의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4) 람베스 회의의 진행 - 교회 이해의 확대

18세기의 선교시대를 거쳐 영국 성공회는 영국이라는 나라에 제한된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세계 속에 존재하는 교파 교회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 성공회 내에 있던 여러 분파적인 성향들과 태도들에서 비롯되는 갈등은 선교지역에서도 성공회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전세계의 성공회가 참여하여 그 정체성을 확인하며 교제를 이루는 모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로부터 람베스 회의(Lambeth Conference)가 시작되었다.

람베스 회의는 '성서가 제시하고, 초대 교회와 영국 종교개혁의 교부들이 주장한 신앙'을 함께 나누는 '가시적 친교'(visible communion)를 누리면서도, 강제적이고 물리적 권한을 가지지 않으며 단지 서로에 대한 권고안을 결의할 수 있는 모임으로 그 성격을 규정하면서, 성공회 내 세분파들의 성격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람베스 회의는 자발적으로 어떤 물리적인 강제가 없이 모이는 순수한 교제의 모임이므로 사도적인 전통에 따라 지역 교회의 자치권과 독립권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다양성 가운데서도 람베스 회의를 통해서 세계 성공회는 일치된 가시적인 친교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세계 성공회가 람베스 회의를 통해서 일치의 기준으로 제시한 [람베스 4개조항](Chicago-Lambeth Quadrolateral)은 새로운 교회의 표지로서 작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성서와 성사(세례와 성찬례), 신조와 역사적인 주교직으로 요약되는 이 일치의 조건은 이후 세계 그리스도교 일치의 조건으로 세계 성공회가 제시하고 호소하였던 근거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던 교회의 표지를 느슨한 형태로 유지하고 있으며, 교회의 가시적인 일치를 위한 주교직의 강조, 혹은 이에 합당한 권위의 강조가 드러나 있다.

람베스 회의의 발전 속에서 거듭된 관심사는 지역 관구 교회의 독립성에 대한 인정과 교회의 일치였다. 모순되는 듯한 이 해결책을 람베스 회의와 세계 성공회는 "가시적 친교"라는 소명 속에서 '교제' (fellowship)와 '상호 친교'(intercommunion), 그리고 '상호 책임'(mutual responsibility)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고, 이를 위해 구체적인 협의 기구를 형성하여 일치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1867년부터 1988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친 회의는 세계 성공회의 일치와 타 전통교단들과의 교제와 일치 등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그 특징은 가시적이고 포용적인(visible and comprehensive) 태도, 민족적이고 자치적인 (national and autonomous) 태도, 그리고 일치를 지향하는(toward unity) 태도라고 할 수 있다.

 

 

2. 성공회 신앙의 세 덕목

성공회 신앙(Anglicanism)의 전통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는 권위와 그 신앙을 바라보는 관점을 독특하게 발전시켰다. 이 세 가지 덕목을 우리는 성서와 전통과 이성이라고 일컬어 왔다. 하지만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상당히 피상적이거나 자기변증적인 논리로 들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앞서 살핀 성공회 신앙의 역사적인 전개와 특징들을 통하여 이 세 덕목에 대한 실질적인 해석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 해석의 내용은 필연적으로 발제자의 태도에 의존하는 것이니 만큼 해석의 한 예를 보이는 것으로 만족한다.

여기서는 세 덕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거듭하지 않고 앞서 역사적으로 살펴보았던 것처럼, 성공회 내의 세 분파의 갈등과 연관하여 이를 설명해보려고 한다. 특별히 성서와 전통의 관계를 보는 관점을 제공해주는 실마리로는 폴 틸리히(P.Tillich)의 가톨릭적 본질과 프로테스탄트의 원리라는 내용을 빌리기로 한다.

 

1) 성서 : 프로테스탄트의 원리

성서는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었다. 즉 전통을 통해 굳어진 실체를 진리로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과, 진리의 회복으로서 종교개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의 원리는 전통과 교리에 빗대어 신학적 궁극성이나 절대적 원리를 내세우는 모든 주장을 상대화하려는 비판적 원리이다. 따라서 교회의 비판을 위하여 종교개혁 전통의 개신교는 교회의 원천 특히 신약성서에로 돌아 갈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원리에도 약점은 있다. 즉 역사적인 발전을 간과하여 환상적인 원리적 신앙을 추구하기 쉽다는 것이다. 성공회의 역사상 이러한 프로테스탄의 원리가 복음주의적 부흥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그러한 움직임에서 주장하던 내용들은 앞서 살펴보았다.

 

2) 전통 : 가톨릭적 본질

틸리히에 따르면 가톨릭적 본질의 내용, 즉 전통은 '영적 임재의 구체적인 형체'와 관계해야 한다. 즉 가톨릭적 실체는 주어진 것이지만, 형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기원을 두고 있고 교회 안에서 계속 성장하고 심화되도록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자신의 가르침을 통하여 명백히 밝혀진 것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고 또 거기서 자연적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많은 문제들에 있어서 직접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고, 무엇이 교회 안에 기원을 둔 것인지를 확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전통은 신앙의 역사적인 축적이라는 가치를 갖는 동시에 인간에 의해 변질된 것이 첨가되어 고착된 형태로 섞여 있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전통은 가시적인 것과 교회의 가시

적인 역사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이러한 역사적인 전통이 없이 단절된 '순수한' 교회란 생각할 수 없다. 전통은 교회의 실체를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권위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물음을 통해 항상 점검받을 필요가 있으며 여기서 성서의 원리, 즉 프로테스탄트의 원리를 필요로 한다. 옥스퍼드 운동의 성과가 현재의 세계 성공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만큼 그 성과와 한계를 이러한 관점으로 비판적으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3) 이성 : 신비적 영성 / 성사적 신학, 성육신 이론

성공회에서 이성(reason)의 내용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방향은 다양하다. 흥미로운 것은 복음주의자들이나 성공회 가톨릭주의자들에게 이성은 하나의 위협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공회에서 말하는 이성을 근대성의 한 표지인 인간중심주의의 무기로서의 '합리적 이성'이라고 해야 불러야 할 지는 의문이다. 특히 성공회 신앙이라는 종교적 전통과 경험주의라는 철학적인 전통에서 이해한 '이성'과 대륙의 계몽주의가 말하는 '합리적 이성'을 동일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한편 성공회의 코울리지(S.T.Coleridge)는 이성이 대두하는 시기에 색다른 '이성'에 대한 색다른 이해를 표명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성이란 "보편적이고 확신을 가져다 주는 능력으로서, 인간의 감각과 증거 너머에 있는 진리의 원천이자 실체"이다. 그에 따르면 이성은 얼핏 명상과 그에 따른 경험에 가까운 것이다. 즉 이성을 활용함으로써 '우리 마음에 충만한 신앙이 살아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이성'은 인간의 지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깊이에서 나오는 신비한 경험 혹은 영적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옥스퍼드 운동가들도 이후에 이러한 종교적 이성과 관련하여 시적인 깨달음이라고 표명한 바 있다. 또한 18-19세기의 과학적인 진보를 받아들였던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삶의 도덕성과 관련하는 영적 진리의 깨우침과 함께 이성을 말했다. 그러나 명확하게 성공회에서 이성이 역할과 위치가 어디에 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것은 여전히 인간이 적극적 사유 행위로서의 이성을 말하는가 하면, 코울리지와 같은 이들에게서는 인간 속에 있는 하느님의 참된 진리의 원천이라고도 말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경험과 함께 하는 '신비적 이성'이라는 조어(造語)를 통해 그 모순된 성격과 의미를 오히려 차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후에 성공회에서 발전되었던 성사적 신비의 영성과 성육신 이론(kenotic theory)의 신비에 대한 관심 등이 바로 신비와 이성의 관계에 대한 한 이해로서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 성공회 신앙과 삶의 신학

앞서 거칠게 살펴본 바와 같이 성공회 신앙은 자기 이해의 다양성과 아울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아는 방법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물론 이러한 관용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자"의 자기 변명이 될 여지가 많고 그랬던 역사 또한 깊지만, 성공회가 역사적으로 보여준 그러한 태도의 실체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아니라, 그 전통과 신앙의 교훈이 현재 성공회라는 교회로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는 물음이 될 것이다.

성공회 신앙의 역사적 전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라면, 어떤 형태의 고착된 규범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공회 신앙은 자신의 전통을 출중한 한명의 신앙적 신학적 영웅의 저작에서 찾지 않고, 상대적으로 평범한 신학자들과 신앙인들의 저작과 개인적인 글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고자 했다. 성공회의 전통이라 함은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신앙인들의 고백에서 나오는 흔적들의 축적인 바, 이러한 전통 속에서 우리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신앙의 흔적들을 발견하고 축적하는 일이 과제로 남는 것이다. 한 일면으로 해석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을 복잡성이라고 한다면, 성공회 신앙 아니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는 바로 이러한 복잡성 속에 있다. 그 복잡성 안에서 다만 우리가 축적한 신앙적 전통과 경험에 비추어 진리의 일면 혹은 일리(一理)를 깨달을 뿐이다.

 

참고도서

Avis, Paul D., Anglicanism and the Christian Church,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9.

Dickens, A.G., The English Reformation, Collins Clear-Type Press, 1964.

Macquarrie, John, Christian Unity and Christian Diversity, London: SCM Press, 1975.

Stephenson, Alan M. G., Anglicanism and the Lambeth Conferences, London: SPCK, 1978.

Sykes, Stephen ed., The Study of Anglicanism, London: SPCK, 1988.

Wolf, William J., The Spirit of Anglicanism, Harrisburg: Morehouse Publishing, 1979.

 

주낙현. "세계 성공회의 교회 이해 - 람베스 회의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4.

copyright (c) 1997,주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