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알기

과학과 종교의 대화: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신학적 응답

유테레사 2012. 1. 20. 13:24

과학과 종교의 대화: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신학적 응답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

2008.5. 19. 성공회대

 

1. 리차드 도킨스가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무신론을 전개하고 있는 방식에 대하여 언급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로서 이 주제로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국을 방문하는 일은 커다란 특전으로서 저는 오늘 서울에서 여러분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 강연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최근 2006년에 영어로 발간한 책, 『하느님에 관한 망상』 (원제: The God Delusion)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한국판 번역은 2007년도에 나왔는데, 제목이 『만들어진 신』이라고 조금은 다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마주대하게 된 것은 그의 첫 번째 주요 저서인 『이기적 유전자』(원제: The Selfish Gene)를 읽은 지난 1977년입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신학자가 되기 전에 자연 과학자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옥스퍼드대학 생화학부의 죠지 라다경 교수님, 이분은 나중에 의학연구위원회의 회장이 되셨습니다만, 그의 지도아래 박사과정 연구를 마쳐가는 중이었습니다.

2. 저는 생물학적 세포막들이 어떻게 그렇게 성공적으로 일할 수 있는지 연구하는 중이었는데 그것은 세포막들의 움직임에 대한 연구로서 새로운 물리적인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는 인기 있는 자연과학적 저술의 하나로 간주되는 훌륭한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도킨스가 종교를 취급한 방식은 만족스럽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찰에 대한 나름의 분석적이고 증거를 제시하는 근거도 없이 ‘신앙’에 대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몇 가지 혼란스러운 시도를 하였습니다. 저 자신은 이에 대해 황당함을 느꼈고 때로 그에 대한 반응으로 몇 자 주를 달았습니다. 25년이 지나서, 저는 그 메모들을 적어냈는데 여러분들은 『도킨스의 하느님』(원제: Dawkins' God)이란 저의 책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전자들, 밈(Meme)과 삶의 의미 같은 것들입니다. 한편 도킨스는 계속해서 탁월하고도 도발적인 일련의 책들을 냈는데, 저는 그 모든 것들에 관심과 경탄을 갖고 읽어보았습니다. ‘이기적인 유전자’에 이어 도킨스는 ‘눈 먼 시계공’(1986), ‘에덴으로부터 흐르는 강’(1995), ‘무지개를 풀며’((1998), ‘악마의 사도’(2003), 그리고 최근에 ‘만들어진 신’(2006)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논조와 초점은 변했습니다. 철학자 미카엘 루즈가 ‘악마의 교목’에서 지적했듯이 ‘도킨스는 대중적 독자들을 위한 과학에 주의력을 기울이기 시작하다가 지금은 기독교에 대한 총공격에 쏟게 되었습니다.’ 뛰어난 과학적 대중주의자는 혹독한 반종교적 논쟁자가 되었는데, 실은 논쟁을 한다기보다는 그의 경우에는, 적어도 제겐 그렇게 보입니다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하느님이란 망상이다’에서 명백한데, 이 책은 증명하기 위해 흔히 수사학적인 과장법을 강도 있게 선택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종교에 있어서 항구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지만 가장 나쁜 것에 집중하는 방식으로서 즉 지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많은 분이 아시겠지만, 저는 도킨스에 대한 두 번째 응답에서 그의 가장 최근의 반종교적인 저술 안에 들어있는 증명들과 논증들의 신빙성에 도전하였습니다. 도킨스는 복잡한 그의 분야를 확실하게 섭렵함으로써 그의 박식함과 지적 세련함을 갖고 진화적 생물학에 관한 문제들에 관하여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과 관계된 그 무엇을 다루게 될 때, 그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즉 증거를 바탕으로 한 세심한 합리적 사고는 팽개쳐지고, 피상적으로 그럴듯한 관점을 만들기 위해 현저하게 지나친 단순화 그리고 가끔은(추측컨대, 단지 우연이겠지만) 허위진술로 흥취를 돋우면서 오히려 과열되고 열광적인 과장으로 대치되는 것 같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도킨스가 무신론에 대한 과학적 필연성을 증명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무신론 자체는 증명될 수 없는 하나의 신앙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강연에서 제가 채택하려는 방식은 간단합니다 : 저는 도킨스의 저술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연과학과 무신론 간의 지적 고리에 도전하려는 것입니다. 도킨스는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확고한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나가고 있는데, 그로써 그는 흔히 메시아적 열광과 논쟁의 여지가 없는 확실성을 가지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적 고리는 확실합니까? 제가 강조하는 것은 저의 의도가 도킨스의 과학을 비판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연과학계 전반에 대한 책임입니다. 오히려 저의 목적은 도킨스가 때로는 전제하고, 또 때로는 방어하고 있는 과학적 방법과 무신론 사이의 심히 해결하기 어려운 고리를 탐구하려는 것입니다. 이 강연은 도킨스에 대한 비판적 작업이므로 제가 그의 어떤 분야에 대하여 존경, 심지어는 경탄함을 갖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써 시작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첫째로 그는 뛰어난 의사소통자입니다. 제가 1977년, 처음으로 그의 책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었을 때, 그것이 분명히 굉장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중대한 그러나 흔히는 어려운 과학적 개념들을 언어로써 그렇게 확실하게 설명하는 그의 놀라운 방법과 능력에 감탄했습니다. 그것은 대중적인 과학서적으로서는 최상의 것이었습니다. 당시 뉴욕 타임즈가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천재인 것처럼 느끼게 되는 그런 대중적 과학 저술에 속하는 책’이라고 논평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무리 호머라고 하여도 실수한다지만, 한결같은 설득력과 명쾌함이 그의 문체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남아있습니다.

 

둘째로, 증거를 바탕으로 논쟁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그의 관심에 저는 탄복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체 저술을 통하여 전개되고 있는 진술들이 과연 정당한가 아닌가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판단되어야만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주장이란 편견이나 전통 또는 무시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가 주장하는 무신론에 그토록 넘치는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믿고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입니다. 도킨스의 저술들을 통틀어 볼 때, 종교적인 사람들은 부정직하고, 거짓말쟁이들이고, 바보들이며 또한 악한들이며, 실재 세계에 솔직하게 반응하는데 무능하며, 또한 경솔하고 어리고 순진한 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허위적이고 해롭고 망상적인 세계를 꾸며내기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악마화 되어 있습니다. 더글라스 아담스는 도킨스가 언젠가 했던 비평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 '나는 자신이 교만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러나 사실들 앞에서 나와 같이 겸손하지 않는 사람들을 참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는 복음서에서 자기 의를 내세운 것으로 그려진 바리새파들을 연상시키는 이와 같이 호언장담하는 진술에 주춤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이 말 속에는 중요한 통찰이 함축되어 있는데 그것은 증거의 기준에 대한 논쟁의 필요성입니다. 저는 이 강연에서 도킨스의 저서 속에 들어있는 4개의 중요한 주제들을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그것들은 '신이란 망상이다'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데 모두 과학과 종교사이의 대화와 관련된 것들로서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연과학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불필요하거나 또는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2. 종교란 신앙에 근거한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자연 과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엄격하고도, 증거에 기반을 둔 관심으로부터 물러서는 것이다.

 

3. 종교는 메마르고 맥 빠진 세계관을 제공한다. '조직화된 종교가 제시하는 우주란 초라하고 왜소한 중세적 우주이며, 지극히 제한된 것이다.' 이에 비하면, 과학은 우주를 위대하고, 아름답고, 경외에 찬 것으로 보는 대담하고 찬란한 비전을 제공한다.

 

4. 종교는 악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마치 악성 바이러스와 같이 인간의 마음을 감염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하게 볼 때, 과학은 선하고 악한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킨스가 흔히 지적하듯이 과학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과학은 윤리적인 것을 결정하는 방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 문화와 역사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종교에 대한 근원적으로 도덕적인 거부로서 대단히 심각하게 취급되어져야 할 문제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올바르게 인식할 것으로 확신합니다만 우리는 각각의 질문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자세히 탐구해 볼 시간은 없지만, 도킨스가 가진 관심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기독교 신학자라면 그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여러분에게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자연과학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도킨스의 견해에 의하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과학에 의하여 파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문화의 주변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망상적 광신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이러한 관점에는 분명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도리어 많은 과학자들이 하느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진 신'이 2006년에 출판되자, 같은 해 지도적인 과학 연구가들에 의하여 3권의 다른 저서들이 출판되었습니다. 저명한 하바드의 천문학자인 오웬 진저리치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면서 하느님의 우주를 그려냈습니다. "우주는 뜻과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어 왔다. 그리고 이 믿음은 과학적 기획과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프란시스 콜린즈는 '하느님의 언어'를 출간했는데, 거기에서 그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관점과 훨씬 일치되게 기적과 자연의 질서는 창조자 하느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콜린즈는 자신이 무신론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하였음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진정한 과학자는 무신론자라는 도킨스의 경직된 주장과 도저히 맞아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몇 달 후에, 우주학자인 폴 데이비스는 '골디락스 수수께끼'를 출간했는데 우주에 있어서 "미세 조정"이 존재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데이비스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우주의 친생물성이 우주로 하여금 생명과 정신이 있는 발전으로 향하도록 떠미는 중대한 원칙임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물론 도킨스는 우주에 목적이나 계획에 대한 어떤 증거가 있다는 생각은 아예 집어치웁니다만, 데이비스는 생각이 다릅니다. 우리가 관측하는 것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으로서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있다고 봅니다. 최근 암으로 죽기 전까지 미국의 저명한 진화론 생물학자였던 스테판 제이 구드가 지적했듯이 과학은 (자신의 합법적인 수단에 의지하여) 하느님이 자연을 감독하실 수도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간단히 판결을 내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과학자로서 그것에 대하여 단순하게 언급할 수 없습니다. 구드는 주장하기를 과학이란 오직 자연적인 설명으로써만 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신을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구드의 결론은 다윈주의는 사실상 하느님의 존재라든가 혹은 성질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드가 관측할 수 있는 사실은 진화론 생물학자들은 무신론자이기도 하고 유신론자라는 것으로서, 그는 인본주의적 불가지론자인 G. G. 심프슨과 러시아 정교회 신자인 테오도시우스 도브찬스키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나의 동료들 절반은 엄청나게 어리석거나, 그렇지 않다면 다윈주의라는 과학은 전적으로 전통적인 종교적 신념과 모순이 없기도 하지만 또한 무신론과도 동일하게 모순이 없다. 만일 다원주의자들이 종교에 관한 일을 교리화할 것을 택한다면, 그들은 과학적인 방법이라는 조리가 서고 한정적인 길을 벗어나서 철학적인 황무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관해서는 하나의 결론이 내려질 수 없든가, 아니면 다른 지면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고드가 견지하고 있는 근본적인 관점은 논의가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자연과학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의학부문의 자기 전공에서 노벨상을 받은 옥스퍼드의 면역학자인 피터 메도우어경(1915. 87)과 같은 많은 저명한 과학자들로부터 되풀이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아이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들, 예를 들면, '모든 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우리는 여기에 모두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처음이자 마지막 일들과 관련된 것들에 대하여 과학이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과학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2. 신앙은 증거를 외면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증거 없이, 맹종에 맡기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도킨스가 1976년에 처음 설정한 것으로서 종교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핵심적 신조들' 중의 한 표현입니다. 1989년에 들어서서 그는 자신의 견해를 강화시켰습니다.

신앙은 이제 '정신적 병의 일종'으로 규정되었습니다. 도킨스는 신앙에 대한 이러한 정의들- 종교적인 (또는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 말들과 관계가 거의 없는 -에 대해서 어떤 방어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의견에 있어서 대표할 만한 것이라는 것에 그는 그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지지함에 있어서 어떤 권위도 인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신앙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그러나 이것을 심각하게 여기는 한 신학자를 만나보았습니다. 어느 기독교 교단의 신앙에 대한 공식적 선언으로부터도 이것은 방어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도킨스 자신의 정신 속에 있는 의제로부터 형성된 그만의 정의로서 마치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들의 특징인양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도킨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는 있지만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은 단연코 아닙니다. 신앙은 유치한 것이라고 도킨스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민감한 어린 아이들의 정신에 주입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어른들의 경우에는 터무니없지만 사라지지 않고 기억될 수 있으며 또한 지적으로는 웃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 컸고 계속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일들을 믿어야 합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도킨스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마치 산타클로스와 이의 요정을 믿는 것과 같아서 여러분이 자라게 되면서 그것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초등학생이 어른이 되면서 우연히 해답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도킨스의 비유는 납득이 될 수도 없거니와 또한 서투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산타클로스와 이의 요정과 같은 범주로 간주한다는 어떤 실험상의 근거도 없습니다. 저는 여섯 살쯤 되었을 때, 산타클로스와 이의 요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후 몇 년간 무신론자로 있다가 18세가 되었을 때 하느님을 발견하였는데, 이 일을 어린아이가 후회하는 그런 종류의 일로 여긴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제가 알게 된 바로는 '무신론의 여명'을 읽다가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자라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킨스의 논리대로라면 자라서 어른이 되어서 산타클로스나 이의 요정을 믿게 된 사람을 제가 만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도킨스의 꽤나 단순한 논리가 그럴듯하다면, 하느님과 산타클로스 사이에 진짜 유사성이- 명백하게 그렇지 않지만-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누구라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이러한 아이스러운 신앙들과 같은 범주에 넣지 않습니다. 물론 도킨스는 둘 다 존재하지 않는 실체에 대한 믿음을 나타낸다고 논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논의의 결론과 가정에 대하여 아주 기본적인 혼돈을 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도킨스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그리고 어찌해 볼 수 없이 비합리적입니다.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하여, 도킨스는 종교적 신앙의 근원적으로 퇴보된 속성을 입증해줄 것으로 믿어지는 일련의 기독교 신학자들을 찾았습니다. 초기 저술들에서, 그는 3세기의 기독교 저자인 터툴리안이 특별히 어리석을 것들을 말했다고 주장했는데, '믿는 것은 전적으로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이다'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종교적으로 대표적인 넌센스로 일축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맹종은 거짓말을 하게 된다’고 그는 논평합니다. 제가 터툴리안이 실제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후에 그는 이제, 기쁘게도, 더 이상 이 말을 인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잘못된 인용은 특히 논쟁적인 무신론적 저술들에서, 흔히 터툴리안의 것으로 돌려지지만 그는 결코 '믿는 것은 전적으로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인용이었으며, 수십 년간 그렇게 알려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도킨스 자신이 터툴리안을 읽지도 않고서, 신뢰성이 없는 제 2자료로부터 이것을 인용했으리라는 것을 합리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이런 일들에 있어서 그가 얼마나 믿을만한가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킨스는 그의 자료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앞서 나온 무신론 저자들이 말한 것들을 단순히 반복하는 덫에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근 몇 년 동안의 무신론의 특징적 성격이 되어 버린, 시대에 뒤떨어진 논쟁으로서 끝없이 되풀이 되는 따분한 또 다른 예입니다.

터툴리안의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도킨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 잡하고 변증적인 것입니다. 터툴리안을 인용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예를 들어 볼 텐데 여러분은 어떤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성은 하느님의 속성이므로, 모든 것의 창조자인 하느님은 이성으로 미리 알아보지 못하거나, 미리 예정하지 못하거나, 결정하지 못한 것이 없으십니다. 더욱이, 하느님은 이성으로 연구되거나 이해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도 없습니다.

터툴리안에게 있어서, 생각할 능력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신 바로 그 하느님은 세계를 탐구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성이 쓰이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거대하게 많은 수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오늘날 서 있고, 또한 과거에 죽 그러했던 지점입니다. 이제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그러나 도킨스는 그 예외들이 마치 법칙인양 예외들을 다루기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도 매우 문제가 되는 이러한 결론을 지지함에 있어서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말입니다.

도킨스는 나아가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합리적인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에 침입해 들어오는 전염성이 높은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기에 이릅니다. 1990년 대에 도킨스는 하느님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강한 정신을 감염시키는 정신적 바이러스의 일종과 같은 분으로 하느님에 대한 사상을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이미지로서 인체면역바이러스에 의한 신체 감염이나 컴퓨터 바이러스에 의한 소프트웨어 감염의 위험에 대한 대중들의 증대해가는 인식과 맞물려 호소력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이러스들은 고역스럽고 파괴적인 것으로서 정확하게 도킨스가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대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였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그야말로 비합리적(도킨스의 핵심 신념들 중의 하나)이기에, 실제로 세계 인구 중 그토록 많은 부분인 수많은 사람들이 왜 그러한 망상에 희생물이 되는지, 설명이 될 수 있는 어떤 방식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도킨스는 그것은 전체 인구에게 퍼지는 것으로서 전염성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바이러스 같다는 유비는 그렇다면 존재론적 실체를 가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정신의 바이러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물학적 바이러스들은 단순히 가정되는 것이 아니라 식별되고, 관찰되고 그리고 그 구조와 작동 방식이 한정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가정되어야 할 ‘정신의 바이러스’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논쟁적인 구성이므로, 신뢰할 수도 없는 개념으로서 도킨스로서는 좋아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마음의 바이러스들이 모두 다 그런 개념들일까요? 도킨스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증거에 근거한 사상들과 그리고 종교적 신앙들과 같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명제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구별을 두고 있습니다. 그에게서는 전자가 아닌, 후자가 정신적 바이러스로 여겨지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지 누가 결정합니까? 도킨스는 이것을 문제로 보지 않는데, 그는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런 개념들을 쉽게 범주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의 방식대로라면 모든 것은, 훌륭한 사고가 갖추어야 할 간단함과 정밀성을 잃게 되면서, 끔찍하게 복잡한 것으로 됩니다. 예를 들어서 그것이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간에, 정확하게 말해서 모든 세계관은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신앙의 시스템’으로 범주화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세계관을 갖느냐의 문제이며 또한 모든 이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먼저 세계관을 가진 다음에 전적으로 그에 따른 통합적 사고로서 행동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도킨스의 생각은 무엇이 합리적이고 진실한지에 대한 판단을 자신의 주관적 결정에 희생시킴으로써 자멸하게 됩니다. 그것은 과학적 세계에서 볼 때 진지하게 고려되어진 생각이라고 볼 수 없으며 따라서 안전하게 무시될 수 있습니다.

 

 

3. 종교는 우리의 세계관을 피폐하게 한다.

 

도킨스가 종교에 대하여 갖고 있는 끝없는 불평 중의 하나는 종교란 심미적으로 볼 때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주에 대한 종교의 세계관은 한정되어 있고, 메마르며 또한 과학에 의해 알려진 놀라운 실재를 무가치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우주는 진정으로 신비롭고, 웅대하며, 아름답고, 경이롭다. 전통적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지녀왔던 우주관은 우주 자체가 실제로 지니고 있는 방식에 비한다면 보잘것없고, 감상적이고, 빈약한 것이다. 조직화된 종교들에 의해 제시된 우주란 작고 시시한 중세의 모습으로서 지극히 제한적이다.' 이러한 대담한 주장의 논리는 좀 따라가기가 어렵고 또한 그것의 사실적 기반이 몹시 미약합니다. 누른베르그 클로니클(1493)은 우리에게 이 당시의 일반적인 상들에 관한 좋은 그림을 제공해줍니다. ‘중세기적’ 우주관은 실로 현대의 생각보다 더 제한되고 한정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인이든 결과이든지 간에, 종교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크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늘에 관한 논문에 근거한 것으로서 당시의 과학을 반영했습니다. 만일 중세 시대의 종교적인 사람들이 생각한 우주가 실로 ‘시시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당시의 가장 나은 우주학자들이 우주가 어떠한지 가르쳐준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과학적 진리라고 안심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과학 교과서가 말해주는 것이 옳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할 만큼 소박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과학과 과학자들에 대한 신뢰는 도킨스가 그토록 무비판적으로 기리고 있는 것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누군가 다른 사람의 우주관을 중심으로 하여 자신의 신학을 엮어내도록 이끌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은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경외감이 일어나는데 이 때, 세 가지 방식으로 규정됩니다.

1.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즉각적인 경이감입니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일어납니다. 이러한 ‘심장의 고동’은 윌리암 워즈워드가 하늘의 무지개를 보고서 묘사한 것으로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어떤 의식적이고 이론적인 성찰이 있기 전에 일어납니다. 심리학적인 범주로써 말한다면 이것은 인식이라기보다는 지각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 이러한 경이감을 줄인다고 암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도킨스의 주장은 증거도 없이 너무 확정적이지 못하며 또한 전혀 믿기 어려워서 제가 그의 말을 오해한 것이 틀림없지 않나 싶습니다.

2. 실재에 대한 수학적이거나 논리적인 설명을 대했을 때 파생되는 경이감입니다. 도킨스 역시 이러한 두 번째의 ‘사로잡힌 경이’의 근원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는 종교적인 사람들이 그것이 설명되어질 때 ‘미궁에 빠지고 속임을 당한 것으로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경이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3. 한 층 더한 경이감으로서 자연 세계가 가리키고 있는 것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의 중심 되는 주제 중의 하나는 창조 자체가 조물주에 대한 증거라는 것으로서, ‘하늘들이 주의 영광을 선포한다!’ (시 19:1)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창조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보는 기적이며 표지이고,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소중하게 여깁니다. 도킨스는 이와 같은 자연적인 세계 내로부터 초월하는 그 어떤 언급도 배제합니다. 도킨스는 세계에 대한 종교적인 접근은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지개를 풀어헤치고’와 ‘신은 망상이다’를 읽은 후에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풀지 못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세계에 관한 독서를 할 때, 실재는 자연과학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에 제한되어 있다는 자연주의자의 도그마를 제외한다면, 자연과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중 그 어느 것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만일 기독교인이 자연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 무엇인가를 더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킨스의 사물들에 대한 설명에서 빠져있는 풍요로움으로서 그것은 자연을 연구하는 새로운 동기를 제공해줄 것입니다. 결국, 존 캘빈(1509-64)은 자신이 물리학과 우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를 평했는데, 이러한 학문을 통하여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경이로움을 직접 깨닫게 되기 있기 때문입니다. 볼 수 없고 만져볼 수없는 하느님은, 그가 지적하는 바에 의하면, 자연의 경이로움을 공부함으로써 감지될 수 있습니다.

 

 

4. 종교는 인간을 해롭게 한다.

 

드디어 저는 도킨스의 저술들에 배어있는 것으로서 종교는 나쁜 것이라는 핵심적 신념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적이면서도 또한 도덕적인 면, 양쪽의 판단임은 분명합니다. 도킨스는 종교는 악한 것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생각하기를 거절하는 것으로서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고찰하였습니다만 이것은 매우 문제성이 있는 것으로서, 증거가 가능하냐 아니냐의 측면에서 인정될 수 없는 견해입니다. 도킨스가 믿지 않는 하느님은 ‘신은 망상이다’로부터 인용하자면, ‘열등하고, 불의하며, 용서 않고 지배하는 변종이다; 보복적이고, 피에 주리고 종족 차별적 제거자이다; 여성혐오자, 동성애혐오자, 인종주의자, 유아살해자, 대량살육자, 자식살해자, 해악자, 과대망상자, 가학피학성애자, 변덕스러운 포악자’이다. 저 역시 그와 같은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어느 누구도 그런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도킨스는 적어도 감사하게도 다음의 관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사랑하는 하느님은 도킨스에 의해 ‘재미없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것은 ‘나약하고 부드럽기만한 점잖은 예수’가 ‘몹시 역겨운’ 상이라는 것으로 종합되는 것입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러한 묘사에 대하여 공격을 취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러한 것은 이 책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서 그나마 종교에 대한 온건한 비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도킨스가 종교적인 폭력에 대하여 폭로하고 도전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여기서 제가 바라기는 ‘신은 망상이다’에 잔재해 있는 많은 것들이 우스꽝스러운 오류로 말해지고 있는데 이로써 그의 폭력에 대한 관점이 흐려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의 분노가 원칙적으로 이슬람교의 근본주의, 특별히 지하드 방식들을 겨냥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계로부터 종교적 폭력이 끼치는 해악을 제거하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이 점에서 도킨스와 저는 일치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에 있어서 필요한 주안점입니까? 여기서, 저는 우리가 많든 적든 모든 종교가 같은 것들을 말하고 있지만 그러한 시대에 뒤진 생각들을 포기할 것을 주장해야만 되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분명히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 기독교인으로서 하느님의 면모와 뜻 그리고 성격이 전적으로 나사렛 예수 안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견지하면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킨스도 알고 있지만, 나사렛 예수는 어느 누구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폭력의 대상이 되었지, 그것의 행위자가 아니었습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분노에 분노로 맞서는 대신, 기독교인이라면 ‘다른 편의 뺨도 돌려라’, 그리고‘해가 지기 까지 화를 품지 말라’는 것을 요청받습니다. 이는 폭력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한 것으로서 전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윤리의 중요성을 북미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서 볼 수 있는데, 2006년 10월‘신은 망상’이 출간된 지 일주일 이내에 벌어진 일입니다. 흥미롭게도, 그 에피소드는 종교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양면을 보여줍니다. 일종의 종교적 원한(‘신에게 화가 난’)을 가진 한 총기를 가진 사람이 펜실베니아에 있는 아미쉬 학교에 쳐들어가서 일단의 여학생들을 총으로 위협하여 5명의 여학생이 죽었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개신교 종교 단체로서 남의 도덕적 권위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하여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이 불행한 학생들이 살해되었을 때, 아미쉬 공동체는 용서를 촉구했습니다. 폭력도, 복수도 없었으며 거기에는 오직 용서에 대한 봉헌만이 있었습니다. 총기를 사용한 사람의 과부는 이러한 일이 어떻게 자신과 세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치유’를 안겨주었는지를 감사함으로 그리고 감동적으로 말하였습니다. 도킨스는 아미쉬 사람들에게 혐오스럽게도 겸손한 체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미쉬 사람들이 보복하지 않고 물러서는 보다 중요한 의미를 도킨스가 은닉함으로써 놓치고 있다고 느낍니다. 만일 세상이 좀 더 나사렛 예수와 같다면, 폭력은 실로 지나간 일로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킨스가 편안히 여기는 답은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북 아일랜드에서 자라난 사람으로서, 종교적인 폭력에 대해서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종교는 폭력을 발생시킵니다. 그러나 종교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20세기의 역사는 어떻게 정치적인 극단주의가 똑같이 폭력을 야기할 수 있는 지에 대하여 우리에게 놀라운 인식을 줍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우파 정치인들과 민병대들이 가차없는 폭력적 구호를 내세운 결과 수백만의 사람들이 ‘실종’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캄보디아에서는, 폴 포트가 수백만의 백성들을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제거했습니다. 소비에트 유니온의 출현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레닌은 종교의 제거를 사회혁명의 핵심으로 간주했으며, 적소에 ‘장기간에 걸친 폭력의 방법’으로써 종교적인 신앙을 근절시키기 위한 조치를 강구했습니다. 어두운 시대를 산 인간의 역사에 일어났던 가장 큰 비극들 중의 하나로 종교적 신앙을 폭력과 압제로써 제거하려고 했던 자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국가보다도 더 높은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무신론자인 도킨스는 좀 더 이상스럽게도 신조에 해당하는 진술들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에서 주장하기를 무신론이 체계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일을 하도록 영향을 준다는 그 ‘어떤 조그마한 증거’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놀랍고, 속기 쉽고, 어쩌면 슬픈 진술로서 도킨스는 분명히 20세기의 적나라하고 피비린내 나는 현실과 동떨어진 무신론자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신론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소련 당국자들은 1918-41년에 걸쳐 조직적으로 수많은 교회들을 파괴하고 또한 수많은 성직자들을 제거하였습니다. 통계는 읽기가 두려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폭력과 진압은 ‘종교의 제거‘라는 무신론자의 의제를 따르면서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또 다른 도킨스의 신조적 진술과도 도저히 맞지 않습니다: ‘나는 메카나 샤르트르 대성당, 요크 대성당, 노트르담 성당을 강압적으로 어떻게 할 무신론자가 세상에 있다고 믿지 않는다.’ 슬프게도 이러한 고상한 감정주의는 그의 개인적 신조라고 볼 수 있는 진술이지, 현실은 아닙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는 수없는 교회들을 불태우고 폭파시키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종교와 관련해서 무신론이 폭력과 억압에 대하여 무고하다는 그의 변론은 단순히 이치에 닿지 않고 또한 심각한 맹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도킨스의 논의는 혹독하게 편향된 기담과 입증될 가망이 없는 일반화된 것들로 흩어져있습니다. 웅변이 주의 깊은 관찰과 분석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영향력을 다루는 증거-그것이 개인들이나 공동체들에 대하여 총칭적으로든 아니면 신앙의 특별한 형태로 고려되었든지 간에-를 근거로 삼은 일단의 거대한 문학으로 본문을 이루고 있습니다.

종교를 일종의 병리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 한때 유행이었지만, 이 관점은 종교의 많은 형태들이 실제로는 여러분에게 유익을 준다는 것을 (결정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제시하는 산더미 같은 경험적 증거들 앞에서 지금 물러나고 있습니다. 확실히 종교의 어떤 형태들은 병리적이며 파괴적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여러분에게 오히려 유익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증거에 근거한 과학이, 도킨스의 교조적인 주장에 맞선 것으로서, 역량을 발휘하고 이 중대한 문제에 빛을 던져주는 곳입니다.

2001년도에 100명들로부터의 증거들에 기초하여 종교와 인간의 행복간의 상관관계를 체계적으로 조사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79명이 적어도 종교적으로 연루되는 것과 행복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긍정적으로 응답했습니다. 13명은 종교와 행복의 연관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7명은 종교와 행복의 연관성이 섞여 있거나 복합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1명은 이 둘의 연관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도킨스가 전적으로 갖고 있는 세계관은 종교와 인간의 행복의 관계가 실험의 결과상으로 볼 때, 명확하게 이 1%가 긍정한 것에 그리고 명확하게 79%가 부정한 것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결과들은 적어도 한 가지를 충분하게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인 증거를 가지고 이러한 주제에 접근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개인적인 편견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도킨스에게 있어서 문제는 간단합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그 가치를 건강에 두느냐 아니면 진리에 두느냐’라는 것입니다. 종교란, 그의 저술들 전반에 걸쳐서 되풀이 되어 나오지만, 논쟁이 가능하지 않는 속마음에 있는 거짓된 것이므로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든지 간에 믿는다면 그것은 부도덕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을 믿는 것이 거짓이라는 도킨스의 주장들은 오직 그 자체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는 종교가 여러분에게 나쁘다는 부가적인 주장을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실제로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증거가 늘어나는 것이 이제 그에게는 대단히 곤란해집니다. 무신론은 헤럴드 G. 쾨니히와 하베이 J. 코헨의 종교와 건강에 관한 비판적이고 기능적인 주장을 뒤집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주장하는 진리들에 관하여 매우 곤란한 질문들을 또한 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연구는 종교와 건강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정신신경면역학과 신앙적 요인. 옥스퍼드: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 2001, 101. 이 강연에서는 리차드 도킨스의 저술들에 의하여 야기되는 일련의 매혹적인 질문들을 피상적으로만 다루었습니다. 이 질문들 중 더러는 직접적으로, 또 다른 것들은 간접적으로, 그 성격상 종교적인 것입니다.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당연히 그래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자세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질문들은 앞으로의 논의로 미뤄놓음으로써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중요하고 흥미로운 것들임에 분명합니다. 도킨스는 모든 올바른 질문들을 하고 또한 더러는 재미있는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답들은 확실히, 여러분이 혹시나 종교적인 사람들은 과학을 미워하는 바보들로서 ‘맹신’과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는 언급할 수 없는 다른 일들에 빠진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신다면, 특별히 신뢰할 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도킨스는 ‘하느님은 망상’에서 자신의 변천에 있어서 마지막을 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동의하지 않지만, 제가 1970년대 옥스퍼드 대학에서 연구 과학자로 일하고 있을 당시 제가 알고 존경하는 도킨스는 진리에 대하여 열정적인 관심을 가진 과학자였습니다. 한 가지의 증거라도 가치가 생각되어지고 소중히 여겨져야만 했습니다. 진리를 위한 물음은, 비록 그것이 한 사람의 이론들에게 중대한 어려움들을 야기시킬 경우에라도, 증거를 위해서는 전적인 충성이 요구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은 망상이다’에서 만나는 도킨스는 교조주의적인 무신론자로서 폐물과 같은 종교로 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정당한지에 대한 증거를 평가하는, 특히 이것이 불편한 경우에, 그 어떤 시도도 없습니다. 적어도 저의 견해로는, 과학을 통속화하는 사람(이 둘을 우리는 사랑하지만)에서 종교를 비웃는 사람으로 떨어지는 마지막의 모습이 도킨스에게서 보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반론할 시간의 여유도 주지 않고 자신만의 교조적 확실성으로 확신을 고수하는 무신론적 근본주의이며, 교조주의적이고 공격적인,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신앙이 하는 일입니다. 만일 문명의 미래에 대한 진정한 도전이 근본주의라면, 도킨스는 그것의 또 다른 형태를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도킨스가 제시하고 있는 논의를 진행하여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설명에 구별을 해야 될 때입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그 신이 어떠한 분인지에 대한 질문은, 과신하고 있는 다윈주의자들의 예견에도 불구하고, 다윈 이래로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또한 주요한 지적인 문제로 그리고 중요한 개인적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증거와 토론이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 참고할 문헌>

For further reading Davidson, Luke. "Fragilities of Scientism: Richard Dawkins and the Paranoid Idealization of Science." Science as Culture 9 (2000): 167- 99. Dawkins, Richard. The Selfish Gene. 2nd 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Dawkins, Richard. The God Delusion. London: Bantam, 2006. Gould, Stephen Jay. "Impeaching a Self-Appointed Judge." Scientific American 267, no. 1 (1992): 118-21. Koenig, Harold G., and Harvey J. Cohen. The Link between Religion and Health : Psychoneuroimmunology and the Faith Facto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McGrath, Alister E. Dawkins' God: Genes, Memes and the Meaning of Life. Oxford: Blackwell Publishing, 2004. McGrath, Alister E., and Joanna Collicutt McGrath, The Dawkins Delusion? Atheist Fundamentalism and the Denial of the Divine. London: SPCK, 2007. 21 Poole, Michael. "A Critique of Aspects of the Philosophy and Theology of Richard Dawkins." Science and Christian Belief 6 (1994): 41-59. Sterelny, Kim. Dawkins Vs. Gould: Survival of the Fittest. Cambridge: Icon Books,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