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사마리아의 유전(遺傳)

유테레사 2020. 11. 23. 00:23

사마리아의 유전 (遺傳)

고세진 교수 (이스라엘 예루살렘대학 성서고고학 교수)

 

우리는 신약시대의 사마리아 지방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설교자들은 흔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지방에 살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라고 지칭하며 천대했다고 설교 중에 말하기도 한다.

다른 곳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 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개 취급을 했다지만, 예수께서는 몇 번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 다니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 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예로 들어서 가르침을 베푸신 경우도 있었다. 예수님의 승천 후에,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사마리아 사람이나 사마리아 지방에 대하여 이해를 제대로 하려면 [사마리아]라는 말에 얽힌 몇가지 이름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와 의미를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 이름들 중에는 [사마리아 도시][사마리아 지방][사마리아 사람]이 있다. 그 말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먼저 [사마리아]라는 이름의 근원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그 기원은 구약성경시대에 까지 올라간다 (왕상16:24).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각축을 하던 중에 북조 이스라엘의 [오므리] (기원전 885-874)[셰메르]라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산( )을 사서 왕도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는 [셰메르]의 이름을 따서 새왕도의 이름을 [숌론]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라틴어와 헬라어로 [사마리아]가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셰메르]라는 개인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숌론]이라는 도시의 이름으로 발전한 것이 라틴어와 헬라어 발음으로 [사마리아]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우리가 첫째로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은 [사마리아]라는 도시이다. [사마리아] 도시 는 세겜에서 보면 서쪽으로 약 20 km 떨어져 있다. 북조의 오므리가 사마리아를 사서 새로운 도읍을 이룩한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새로운 도읍을 이룩한 것과 비견할 만한 일이었다. 이곳은 해안고속도로와 연결하기 좋은 장소이며 좀 더 국제적으로 국가를 경영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왕도 [사마리아][오므리]의 국가경영 솜씨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므리]는 집권하고 나서 처음 6년 동안에 국가의 힘을 기르고 적극적으로 시리아 ([아 람-다메섹])와 대결할 차비를 차렸다. 그는 페니시아와 동반자 관계를 맺고 아들 아합을 두로 왕 [에토 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시켰다. 그는 또 남조 유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손녀 [아달리야]를 남조 여호사밧 왕의 아들 예호 람(요람)과 결혼시켜서 (왕하 8:26) 남쪽에 안정을 취함으로써 그의 북방 정책을 실현하는데 걸림돌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 하였다. 오므리는 그러한 자기의 원대한 꿈들을 새로 구성한 [사마리아] 도시에서 하나씩 실현하여 나아갔고 그의 아들 아합도 사마리아를 본거지로 삼아서 국가를경영하였다.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사마리아 지방]이라는 확대된 지역 이름이다. 원래 세겜, 사마리아 (도시),이블르암, 티르짜, 므깃도 같은 도시들이 있던 곳이 므낫세 지파의 영토가 되었다 (17). 이 므낫쎄 지파의 땅을 대충 어림잡아서 [사마리아 지방]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물론 [사마리아]라는 도시가 북조 이스라엘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해내게 되었기 때문에 된 일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사마리아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그 근처에 있는 도시나 마을들이 [사마리아 지방] 의 대중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신 일이 있듯이 (4:5), [사마리아]라는 이름이 신약시대 에도 한 지방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써 쓰였다.

세 번째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이 말은 사마리아 도시에 사는 사람이나 사마리아 지방에 사는 사람을 뜻하며 또한 북조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을 대충 일컬을 때에도 쓰일 수 있는 말이었다. 우리가 네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사마리아] 왕도와 [사마리아 지방]이라는 이름들이 변천을 겪게 되어 새로운 뜻을 품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확실한 전환기는 아씨리아가 북조 이스라엘을 침공 하여 [사마리아] 도시를 멸망시킨 기원전 722년에 시작되었다(왕하 17:3-6). 아씨리아는 사마리아 지방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 일부를 잡아서 아씨리아로 이주시켰다. 사마리아 도시를 중심한 사마리아 지방 사람들이 많이 잡혀 갔겠지만, 북조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들이나 마을들에서도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씨리아는 사마리아 지방의 빈 공간에 아씨리아 제국의 여러 곳에서 데려온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아씨리아 총독 관할 하에 두었다. 괴스타 알스트룀 같은 학자는 아씨리아 관할 하의 사마리아 지방은 [사메리나] 지방이라고 구별하여 불러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씨리아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가 이스라엘을 차례로 석권하게 될 때에 사마리아는 그 부침(浮沈)에 늘 영향을 받았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아씨리아 사람들이 섞여서 혼혈하게 된 기원이다. 이 혼혈인들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사마리탄]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를 것이다. [사마리탄]들은 꾸준하게[사마리아 지방]에서 번성하면서 신약시대 에까지 이어져 내려 오고 있었다. 그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그리심산 위에서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한글 성경에는 이 사람들 을 "사마리아" 사람들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영문 성경들에는 "사마리탄"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 선 한 사마리탄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10:33) 또한 수가라는 마을 근처에서 사마리탄 여자에게 진리를 깨닫게 가르치셨다 (4: 9).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은 시대를 막론하고 사마리아 지방이나 사마리아 도시에서 온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긴 하겠지만, 반면에 "사마리탄"을 가리킬 때도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을 경멸하였다. 근동의 여러 곳에서 온 족속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이 혼혈하여 생긴 잡족이라는 것이 그 이유의 밑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따지고 보면, 이것은 하나의 구실일 뿐이고 남조와 북조의 불협화음은 그 보다 훨씬 전에 이미 반목과 갈등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좋은 예가, 솔로몬이 죽은 후에 통일왕국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쪼개지는 큰 불행이 세겜에서 일어난 것이다. 세겜의 중요성이 나중에 사마리아로 옮겨 갔을 뿐이 며, 그들은 다 같은 사마리아 지방 혈족이었다. 그 만큼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 사이의 지파간 반목과 불신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이러한 반목은 남조 유다가 멸망하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이 돌아 와서 예루살렘을 재건할 때에도 잘 드러나 있다 . 즉 사마리아 지방 사람(사마리탄)들이 그 일을 못 하도록 방해하였다 (3:33-4:2). 그러니 남쪽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 을 더욱 싫어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여간 이스라엘 밖에서 사마리아 지방으로 다른 족속들이 들어 와서 섞여 살게 되었다 는 그 사실은 남쪽의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을 경멸하는데 무척 좋은 자료를 제공하게 된 셈이었다. 예수 시대의 사마리아 지방은 이렇게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던 지방이었다. 그 지방에 있는 여러 도시/마을들 중에서 신약성 경에 언급되고 있는 이름은 [사마리아] (헤롯이 [세바스테]로 개명)[수가]가 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을 여러번 지나 다니셨다 (참조: 2:13; 3:22; 4:4; 5:1; 7:1-10; 11:54). 헤롯왕은 사마리아를 유럽 풍으로 재건하고 자기의 후견인인 로마 황제 어거스터스의 이름을 헬라어표기로 [세바스테]라고 개명하였다. 발굴된 유적을 중심으로 생각하건대, 신약시대의 사마리아 도시는 무척 번성하고 화려한 도시이었다. 사마리아의 중 심부에는 어거스터스 황제를 기리는 신전을 웅장하게 건립하였다. 헤롯이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을 위한 성전을 건립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시세(時勢)에 민감한 정치꾼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께서 활동하던 때의 도시 사마리아 (세바스테)는 아직도 헤롯 대왕의 자취가 역력하던 시대이었다. 그곳은 이방 문화의 집산지로써 로마 황제를 신으로 떠 받들고 잡신들을 섬기던 곳이었다. 무당 시몬이 예수를 믿는 신자로 개종하는 과정이 그런 사회 상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행전 8:4-25). 그런 곳에 빌립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러 가서 유다지방 밖에 선교 거점을 이룩하였으니 그의 신앙이 담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

고세진 목사/ 서울신학대학 (Th.B.)과 대학원 (M.A.)을 졸업하고 미국 Wesley Biblical Seminary에서 수학한 후에 이스라엘 예루살렘대학을 졸업 (M.A.)하였고, 미국 University of Chicago에서 근동고고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M.A., Ph.D.) 를 취득하였다. 예루살렘대학의 Academic Dean을 역임하였고, 지금은 성경고고학 교수 겸 고고학 연구소 소장이며, 예루살렘 대학의 게헨나 탐사단 단장과 히브리대학교의 텔레호브 발굴단 임원으로 있다.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스라엘의 역사  (1) 2020.10.16
신양성경 주요내용  (0) 2020.09.23
구약성경의 주요내용  (0) 2020.09.23
구약성경 장별정리(39권, 929장)  (0) 2020.07.15
신약성경 장별정리(27권,260장)  (0) 2020.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