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분별
- 에르나 슈밑 수녀(독일인으로 천주교수녀로 한국에서 오랜기간 기도와 영성지도를 하셨고 지금은 독일에 들어가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삼위일체이신 주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 주셔서 감사드리고 지금 아직도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근심, 걱정, 여러 가지 이 강의를 잘 듣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면 주님 이 자리에서 당신의 성령의 불로써 몰아내 주시고 우리 마음을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빛으로 채워 주소서. 좋으신 주님 우리 당신을 사랑하고 싶고, 당신을 향해 걷고 싶고, 지금 우리 손을 붙잡아 주시고, 주님께로 가까이 이끌어 주소서. 성모님도 모든 천사와 성인들도 주님과 함께 계시는 모든 우리 조상들도 오늘 특별히 이 순간에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저의 제목은 영의 분별이라는 제목입니다.
마르코 복음 1장 21절부터 28절까지 먼저 읽어 드리겠습니다.
『악령 들린 사람을 고치신 예수
예수의 일행은 가파르나움으로 갔다.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 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 소리로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그래서 예수께서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서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 』
여기에 예수님께서 분별의 은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일어나 큰 소리로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당신이 누구이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나쁜 말 아니었지요? 좋은 말이었습니다. 거기 모여서 듣는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아니 이 사람 지금 일어나서 왜 그렇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을 꽤 뚫어 보시고 즉시 그 사람의 영의 뒤에 있는 것은 바로 마귀라는 것을 알아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그 사람 안에 있는 악령을 보고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더러운 악령에 이 사람은 사로 잡혔습니다.
이 영의 분별 은사는 무엇입니까? 영의 분별 은사는 어떤 사람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 뒤에 있는 영을 분간하는 것입니다. 이 은사를 통하여 어떤 사람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의 원천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뒤에 있는, 사람의 말 또 생각, 또 행동에는 행동뒤에 있는 움직임, 감동 그 충동을 분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냐 아니냐를 순간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입니다. 또 어떤 상황, 사건, 장소를 볼 때는 빛이 즉 하느님이 있는지, 어두움 즉 악령이 있는지 분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이기 때문에 이 은사를 배울 수도 없고 남에게 가르쳐 줄 수도 없습니다. 이 은사는 아주 귀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를 위해서 중요하고 특히 성령 쇄신을 통해서 얻은 은사의 등장 때문에 분별 은사를 하느님께로부터 많이 청해야 합니다. 기도회마다 이러한 은사를 가진 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예언 분별을 합니까? 누가 심령기도 분별합니까? 이상한 언어 해석의 분별, 누가 구마기도에 의한 분별을 합니까? 누가 환자들의 여러 가지 병의 원천을 누가합니까?
분별 은사 아주 중요합니다. 분별하지 않으면 많은 영혼들이 혼돈에 빠지고 길을 잘못 선택할 것입니다. 여러들, 이 분별 은사에 대해서 이미 많이 들으셨다고 믿고 그리고 예언 분별과 구마 관계의 분별은 다른 강사들이 자세히 설명하리라 믿습니다. 또 근래에 책도 나왔습니다. 예언에 대한 책, 거기 예언의 분별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또 ‘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좋은 책이 드디어 번역되었기 때문에 구마 기도할 때에 필요한 그 분별도 거기서 자세히 나옵니다. 제가 오늘은 이 은사적인 분별에 대해서 더 이상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다.
제가 다루는 제목은 영의 분별 은사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은사 아니라 우리 모두 다 열심히 노력해서 경험에 의해서 얻어야 할 영의 분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이 테마는 아주 어려운 테마입니다. 그리고 봉사 활동에 들어가는 테마보다 영적 심화에 들어가는 테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깊은 신앙심 하시는 분들이 저의 말을 금방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금방 주님께 되돌아 와서 이제야 신앙 생활하시는 분들은 저의 말의 뜻을 조금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 영적으로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성장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하고 또 주님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서 영혼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영혼의 움직임을!!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분별은 정확했습니다. 아까 들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령과 완전히 상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이었고 무질서한 애착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베드로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 사탄에 의해서 인도될 때도 있었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께 물어 보실 때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 성령의 움직임에 따라,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셨어요. 그렇지만 다음 순간에 예수님 그 다가오는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것을 거부하고 그 때에 예수님께서 ‘너의 생각은 사탄에서 오는 것이다. 나한테서 물러가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처음 대답했을 때 성령에 의해서 대답했다고 칭찬했고 다음 순간에 사탄에 의해서 대답했다고 꾸중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성장했습니다. 성경을, 특히 사도행전을 통해서 베드로의 아름다운 성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차츰 차츰 영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자기 자신을 성령께 더 깊이 내 드리고, 성령께 맡기고, 마침내 성령 안에서 목숨까지 내 놓을 수 있었습니다.
영이 분별하기 위한 기본 자세가 어떠한 것입니까? 기본자세는 겸손이며 자비심이며 용감입니다.
겸손은 십자가 요한의 성인의 말씀에 의하면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자각할 수 있도록 내적인 성장의 확실한 표시라고 하였습니다. 한번 어떤 봉사자가 저를 보고 나는 몇 개월 동안 고해 성사를 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별로 죄 없습니다. 우리 주님 안에 깊이 성장할수록 우리 정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데, 정함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을 깨닫고 있는데 따라서 적어도 한 달의 한달 먼저를 털고 씻을 려고 하는데, 어떻게 봉사하는 분은 나는 고해할 것도 없어서 몇 개월 동안 성사를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자기 의심, 남으로부터 지도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 순종과 겸손은 성숙함의 표시입니다.
두 번째 자비심이라고 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 약점, 자기 죄, 자기 기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을 판단한다는 아주 조심하고 자기와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 것을 사랑과 자비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용기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건전한 자기 의심 때문에 소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잘 분별하기 위하여 필요한 이 세 가지 기본자세 겸손, 자비심, 용기 있어야 합니다.
분별이란 여러 가지 좋은 일 중에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깐 어떤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 양심으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움직임으로써, 여러 가지 좋은 일 있는데, 그 좋은 일 중에서 가장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가장 주님께서 마음의 뜻이 있는 것 어떤 것인지 우리 영혼의 움직임을 통하여 선택하고 배워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신학생은 가난한 가족과 그 가족의 많은 자녀들의, 맏아들이라고 합시다. 그래서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신학생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 신학생은 신부가 되고 싶고 또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럼 신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와서 돈 벌어야 되는가. 지금 선택해야 할 두 가지 일 있는데 두 가지 다 나쁜 일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가장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분별해야 하지요. 또 다른 예를 젊은 부부는 애까지 있는데, 살아가는 동안 그 남편이 정신환자라고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결혼하기 전에도 그 병이 있었는데, 그 부인에게 감췄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인제 고민을 하고 있죠. 내가 교회의 재판을 받고 혼배를 풀을까. 법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하기 위해서 그러한 중요한 것을 미리 말해야 합니다. 감췄기 때문에 교회법에 따라서 그 혼배를 풀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냥 그 환자인 남편과 죽을 때까지 살까. 거기 인제 먼저 분별을 해야지요. 하느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하느님께서 가장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길은 어떠한 것입니까?
하느님의 뜻은 알기 위해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세 가지 조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결심! 정말 내 뜻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결심. 어떤 경우에 이 내 뜻이 서있고 하느님께서 저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착각하고 있죠. 그러나 참된 분별하기 위해서 하느님 두 가지 길 다 주었습니다 이혼하는 것도 좋고, 함께 사는 것도 좋고, 신부 되는 것도 좋고, 그만두고 집에 와서 가족 위해서 돈 버는 것도 좋습니다. 이 마음의 자세 제일 먼저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이 마음을 열고 자기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자기 생각에서 떠나야 합니다. 첫째와 비슷한 것입니다. 어떤 때 저의 생각은, 이미 결정된 생각은 하느님의 계시 하느님의 음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의 도취와 집착 때문에 또 선입감, 편견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써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 조건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 있어야 합니다. 제가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내가 하느님의 마음을 어떻게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지, 그 하느님 자체를 좀 알아야돼요. 하느님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적을수록 체험이 많은 분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체험이 부족하고 잘 모를 때 영적인 지도자에게 찾아가야 돼요. 이것이 영적 지도의 뜻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조금 더 주님의 마음을 깊이 알고 체험했기 때문에 나의 문제에 대한 좋은 의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영적인 지도자는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영적 지도자는 우리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대신에 문제를 결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때 형제나 자매님들이 저에게 찾아와서 ‘내가 수도자 될까, 아니면 내가 신부 될까 말씀만 하시면 내가 거기에 100%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거 틀립니다. ‘자매는 수녀되고 싶으면 자매님 결정해야지, 내가 어떻게 결정합니까? 그러나 자매님께서 자매님의 마음의 움직임을 깨닫기 위해서 거기 제가 도와 주와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대신에 절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언 잘하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 다음 거기 가서 ‘수도자들아 신부들아 예언하라’ 예언을 들으려 합니다. 또 예언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을 통해서 혼란에 빠지고 괴로워지는 형제 자매님을 많이 봤습니다.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이제 다시 저를 찾아와서 ‘이러한 예언 들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예언을 통해서, 우리 가야할 길을 결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예수님 하시는 방법 아닙니다. 예수님 방법은, 먼저 저의 마음 안에, 예를 들어 수도자 되려 하면, 저의 마음 안에 수도 자원에 대한 수도생활에 대한 갈망을 주십니다. 어떤 매력을 느끼게 해 주십니다. 수도자 볼 때마다 만나고 싶고 나도 이렇게 되고 싶은 그런 마음을 주십니다. 그 다음 어떤 때. 예언을 통해서 그러한 확신. 마지막 확신을 주시지만 예언을 통해서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결정. 우리의 자유스런 결정을 원하시고 남들이 우리에 대한 결정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그 신학생, 아니면 정신 환자와 함께 사는 그 부인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먼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마음의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그들의 집착과 선입감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기도 속에 하느님의 뜻과 지식과 지혜를 알기 위해서, 영혼 움직임에 대해서 민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머리로써, 이성으로써만 분별하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 안에 느끼는 움직임, 갈망, 충동, 감동을 통해서, 우리가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는, 우리를 움직이는 그 감정을 우리가 잘 봐야 합니다. 우리가 잘 관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움직일 수 있는 영은 세 군데에서 올 수 있다고 여러분은 다 들으셨을 것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올 수 있고 악령으로 올 수 있고 또 우리 인간의 영에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마음에 평화를 느끼실 때 하나의 느낌이죠? 그것은 대부분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충동과 불안과 초조감은 결코 하느님의 음성 아닙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6장에서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은 성령은 우리에게 기쁨과 사랑과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생의 문제, 정신환자와 함께 살고 있는 그 부인의 문제 어떻게 분별합니까? 이 자리에서 해결책을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기도 속에서 또 아까 말씀드린 그러한 조건 안에 주님의 음성을 듣도록, 또 그들이 혼자 못하면 영적인 지도자를 찾아가서 또 도움을 받음으로써, 차츰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일을 분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영의 분별의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께서 이 영의 분별에 대해서 가장 권위있게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규범을 썼습니다. 영의 분별에 대한 규범은 이미 450년 전에 적었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 성 요한’께서는 이 기도에 특별한 카리스마를 받고 기도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한 것처럼, ‘이냐시오’ 성인은 분별에 대한 특별한 은사를 받으시고, 분별에 대해서 규범을 쓰셨습니다. 이 분별을 자기 자신에게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러한 체험 그러한 영혼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기록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체험했습니다.
‘이냐시오’는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명예욕과 출세욕이 강한 야심만만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꿈은 깨졌습니다. 그는 뜻밖에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누워 있는 동안 성경책과 여러 성인에 대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감동을 받고 회개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세속의 왕을 위해서 훌륭한 군인 아니라 이제부터 하늘의 왕을 위해서 훌륭한 군인이 되려고 결심했습니다. ‘이냐시오’는 회개하는 시기에 우울과 기쁨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떤 때 기쁨이었고 어떤 때 우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관찰해보니까 어떠한 생각으로 인하여 우울함이 생기고, 어떠한 생각으로 인하여 기쁨이 생겼다는 것도 관찰했습니다. 따라서 자기 영혼안에 두 가지 영은 자기를 움직이고 있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즉 성령 또는 악령이 자기를 움직이고 있다고 알았습니다.
이 마음 안에는, 또 영혼 안에 있는 움직임은 두 가지이라고 합니다. 그 움직임을 따라서 두 가지 영혼의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영적인 위안의 상태, 또 하나는 영적인 고독의 상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안에 이러한 것을 많이 체험하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때 영적으로 아주 위안을 느끼고, 어떤 때 영적으로 아주 고독함을 위안의 반대이지요 고독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적인 위안이 무엇입니까? 거기에 ‘이냐시오’ 성인이 규범을 쓰셨습니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영신적 위안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일종의 내적 감동이 일어나서, 영혼이 자기와 창조주의 사랑으로 불타기 시작하고, 따라서 영혼의 지상의 아무 물건도 그 물건 자체를 위해서는 사랑할 수 없고, 오직 그 모든 것들의 창조주 안에서만 사랑하게 되는 때를 말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죄에 대한 통회에서나, 우리 주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아픔에서나, 또는 직접 하느님 봉사에 대한 영광에 관한 것에 대해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타게 하는 눈물이 쏟아지는 경우를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신적 위안이란 신덕, 망덕, 애덕을 더하는 모든 것과 사람의 천상의 일들과 자기의 구령 사정에로 부르고 이끄는 모든 마음의 기쁨을 말합니다. 이 결과로는 영혼이 자기 창조주 안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럼 영혼의 위안은 무엇입니까? 금방 들으셨죠? 강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즉 사랑으로 불타는 것, 또 사랑 안에 눈물이 쏟아지는 것 그리고 천상적인 안식과 고요함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느끼는 것입니다. 이 공통적인 것은 주님 안의 평화입니다.
지난 주 어떤 자매님 놀러왔는데 아주 걱정을 하면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화끈한 것을 느끼고 몸의 뜨거움을 느끼는 데 내가 열심히 기도해도 별로 느끼는 것을 느끼는 것이 없습니다. 내 마음이 돌 같은 것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들어 보니까 열심히 기도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매님 마음 평안 느낍니까?’, ‘평안 느낍니다. 내 마음에는 평화가 말할 수 없고 기쁩니다.’ 아니 하느님, 예수님의 평안을 느끼실 때 아니 화끈한 것 뜨거운 것도 느끼고 싶습니까? 마음의 평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화끈한 것 뜨거운 것 여러 가지 지나친 감동 주님께서 주시면 감사하고, 주시지 않으면, 평화를 봐야 합니다. 이 영적인 위안 있을 때, 우리가 우리 신덕과 망덕과 애덕이 증가되고, 또 주님께로 이끄는 마음의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면 마음으로 영적인 고독 무엇입니까? 거기도 ‘이냐시오’ 성인이 규범을 만드셨습니다.
[세째 규범의 반대되는 것, 위의 규범입니다. 위의 규범의 반대되는 모든 것을 영신적 고독이라 한다. 영혼의 어두움과 어지러움과 비열하고 세속적인 것으로 기울어짐과 또 희망도 사랑도 없이 영혼을 실망에로 밀어 넣는 여러 가지 흔들림과 유감에서 마음의 불안 따위를 말함인데, 결국은 영혼이 게으르고 냉담하고 비통해서 마치 조물주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낄 경우를 말함이니, 그 이유는 마치 위안이 고독의 반대됨과 같이 위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도 고독에서 일어나는 생각들과는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영혼 안에 혼동을 느끼고, 어두움을 느끼고, 또 미지근,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통적인 것은 평화의 상실입니다.]
우리 영혼 안에 큰 두 가지 움직임 있습니다. 그 움직임을 따르는 위안의 상태가 고독의 상태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다 체험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위안의 상태 때, 기도도 잘 되고, 묵상도 한없이 할 수 있고, 주님께 그렇게 좋으신 분이라고 또 가까운 분이라고 알게 되고, 또 우리 마음 안에 사랑이 불타는 것을 느끼고, 또 옆의 사람에게 가서 전달할 수 있는 마음 생기고, 그리고 마음 안에 큰 변화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눈물까지도 기쁨으로써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때에 꼭 반대입니다. 내 마음 안에 어두움을 느끼고, 불안 느끼고, 초조함 느끼고, 장래에 대한 희망 안 보이고, 그리고 슬픔 있고, 주님과 멀리 있는 것 느끼고, 주님과 멀리 있는 것 느끼고, 그리고 기도도 잘 안되는 그것은, 그 상태는 영적인 고독의 상태라고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 따라 이 고독의 상태는 결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악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 그것은 나쁜 표시도 아닙니다. 오히려 정화와, 하느님에 대한 기쁨 깊어지기 위해서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바로 욥기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또 모든 주님께 봉헌되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두운 밤, 영혼의 어두운 밤, ‘십자가 요한’ 성인이 그 어두운 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또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 모두 다 이 어두운 밤을 체험하고 있고, 이것이 바로 우리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어두운 밤에는 역시 고독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체 몇 가지 단계를 거치는 동안 큰 고독을, 영적인 고독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두 가지 분별의 규범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는 신심생활의 초보자들과 하나는 신앙의 성숙한 자들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성인의 말씀에 의하면 신앙의 초보자들에게는 영적인 고독은 많습니다. 악령은 자주 그 영혼을, 그 고독으로써 시험을 하고 있고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낙심하고, 불안을 느끼고, 초조감 느끼고, 두려움과 게으름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초보자라고 하면, 우리생활의 전환점도 포함하게 되고 또 우리 살아가는 데 큰 변화 있을 때도 이 소위 초보자들에 의한 고독의 상태가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결혼 생활 시작할 때, 또 수도생활 시작할 때, 또 죽음이 다가올 때 이러한 생활의 전환점에서도 고독을 많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영적인 고독함을 느낄 때 우리가 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이냐시오’ 성인이 무엇이라고 하냐 하면, 결코 어떠한 변경이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위안 상태 때 시어머니를 모시겠다는 결정을 했다면, 내 영혼 안에 불안과 낙심과 우울 있을 때, 그 결심을 변경하면 안 됩니다. 또 아까 말씀드린 그 정신환자를 데리고 있는 그 부인은, 위안 상태 있을 때 그냥 죽을 때까지 같이 살겠다고 결정했다면, 그럼 고독의 상태 때, 그 결심을 변경해선 안됩니다. 왜냐하면 고독 상태 때 악령의 책동하고 있고, 또 그의 영향을 받아 결심을 내린다면, 악령으로부터 지도 받는 것입니다. 물론 변경 하나도 하지 말라고 변경 하나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고독의 상태 때 변경하지 마십시오. 변경해야 된다면, 영혼의 위안의 상태 때 다른 결심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고독을 느끼는 그러한 어려운 시기에 이 ‘이냐시오’ 성인은 몇가지 제안을 해 줍니다. 악령은 기도와 묵상생활에 충실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자기 연민과 초조함으로써 채우려고 합니다. 그 때 우리 기도시간을 아주 지루합니다. 아주 길다고 느낍니다. 오히려 그 지루한 기도대신에 다른 사람 위해서 많은 활동하고 싶은 마음 생깁니다. 악령은 아주 유능한 심리학자입니다. 각 영혼마다 그의 성격 따라 유혹을 합니다. 조용한 사람들은 좌절하게 하고, 또 활동하는 사람들은 초조하게 합니다. 이러한 감동을 따라서 우리가 살면 안되고 그럴 때 거부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여러분 매일 30분 동안 기도하는 결심하셨고, 또 위안을 느낄 때 그 30분 동안 그 30분 잘 넘어 갑니다. 그러나 고독의 상태 때 되면 그 30분 동안 너무 지루하기 때문에 5분마다 시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한 20분 됐을 때 ‘아 오늘 20분 됐으니까 20분만 하지 뭐. 그냥 10분 동안 괜히 앉아 있는가’ 그럴 때 20분 후에 그만 두지 말고 오히려 악령의 뜻을 거부하는 뜻으로 30분 하지 말고 31분 동안 기도하세요.
여러분, 악령의 입장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유혹하는 사람 30분 기도를 20분 단축하는 데 성공했다면, 다음 날 와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20분만 기도하지 말고 15분만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좀 우리가 웃고 있지만 우리 다 경험했다고 생각합니다. 마귀는 정말 바보 아닙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또 하나의 규범은, 고독한 때는 전에 결정한 것을 바꿔서는 안되지만, 고독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바꾸는 것은 퍽 좋은 일이다. 예를 들면 더욱 기도하고, 묵상하고, 성찰하고, 고행같은 것을 더욱 행함으로써, 고독함을 극복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넉넉한 은총을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 위안의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독한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또 고독 상태 다시 지나갈 것이라는 것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우리 감정은 혼동되고, 악령이 우리에게, 부정적인 원망하는 생각을 일으킵니다. 그때 아까 뭐라 했습니까? 반대하는 것을 노력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고, 또 원망 대신에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또 절망과 낙심 대신에 희망을 가지고 있고, 또 주님의 은총이 나에게 넉넉하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럼 하느님께서 왜 고독의 상태를 허락하십니까?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세 가지 원인을 말합니다.
[영혼이 고독하게 되는 때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영심 수련에 있어서 염증을 내거나 게으르거나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탓으로, 영신적 위안이 우리를 멀리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련하시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하느님께 봉사와 찬미를 드리게 되는데 있어서, 풍부한 위안이나 은총에 의지함이 없이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것인지 어느 정도의 진보를 할 수 있는 시험을 해 보시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신 사정에 대한 진실한 이해와 인식을 주시기 위함이니 큰 열심과 강한 사랑과 눈물 그리고 또 다른 영신적 위안을 일으키거나 보전하기는, 우리 자력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이라는 것을 알리시는 동시에, 또 혹시 우리가 그러한 열심이나 영신적 위안이 우리 자신에게 오는 것 같이 생각하고, 오만이나 허영심을 일으켜서, 구령에서 다시 일으켜서 두려운 길에서 탈선함이 없도록 하십니다.]
즉 고독 느끼는 첫째 원인은 우리의 태만과 부주의와 미지근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측정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안의 보상 없어도 주님께 얼마나 찬미 드리고 얼마나 봉사하는가, 보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것으로는 은총이나 위안은 하느님의 조건 없는 무상의 선물 우리의 공로로써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위안이나 고독을 조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 사람들이 저를 찾아와서 이 고독에 대해서 의견을 듣고 싶을 때, 이 세 가지 원인을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이 즉시 첫째 경우만 생각합니다. 내가 이제 기도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불안해졌다. 물론 어떤 때에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가 소홀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고독 상태를 허락하셔도 이것을 하나의 벌로써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주님께서 잠에서 깨어나셔서 회개의 부르심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너무 많은 일 때문에 기도를 소홀히 합니다. 아니면 어떤 우정 때문에, 거기에 집착함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집니다. 아니면, 차츰 세속적인 가치관에 동화되는 경우에는 하느님은 사탄에게 고독을 일으키는 작업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마귀의 목적은 우리를 파괴하는 데에 있지만, 하느님께서 이러한 고독을 허락하시는 목적은, 우리에게 자극을 주시고 우리의 소홀함을 깨닫고 다시 본래의 좋은 상태로 되돌아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고독을 통해서 우리 능력으로 위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위안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 어떤 수단, 방법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 TM도 하고, 마인드 콘트롤도 배웁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조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영혼은 그 체험을 되풀이하고 싶어하는 사람 많지요. 제가 ‘아그네스 샌포드’의 책을 한번 읽었는데 그분이 한번 하느님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즉 태양 빛에 있는데서, 편안하게 눕히고, 태양 빛을 받음으로서, ‘주님 그 빛을 통해서 당신의 빛과 사랑을 저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을 때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적 있었습니다. 그러한데 한 달 두 달 후에 또 그러한 체험을 하고 싶어서, 또 이렇게 눕고 태양 빛에 가서 또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다시 그런 정도, 체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조절할 수 없습니다. 다 선물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작년에 산기도 하러 갔을 때, 거기서 체험했는데 그래서 그 체험을 받기 위해서, 자꾸만 산기도 다니고 또 받고 싶은데 또 되풀이한다면, 우리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러한 체험을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인정하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우리 하느님은 우리 하느님 아니실 것입니다.
아까 읽어 드린 대로 우리 고독의 두 번째 원인은 하느님께서 우리 사랑을 시험하기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이 강해지고 완전해지기 위해서 불의 단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불의 단련은, 우리 이기심과 자애심을 정화시켜 주는 것이며, 우리 영혼과 주님의 영과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 안에 위안만 있다면 우리 생활은 약하고 나태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주님의 선물이라고 알게 되면, 우리가 겸손해지고, 주님을 신뢰하게 되고, 모든 선물을 주시는 주님께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아주 교활합니다. 우리 영혼을 낙심케 하고 또 파멸시키고자 합니다 그래서 많은 속임수를 쓰면서 성공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혹을 당할 때, 우리 그 유혹에 강하게 대항하면 악령이 약해지고 도망갑니다. 그렇지만 유혹을 당하는 우리들이, 겁을 내고 용기를 잃는다면 원수인 악마는 강해집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마귀는 자기를 숨기고 발각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를 유혹할 때, 자기의 말이나 그 권멸이 비밀에 부쳐지기를 원합니다. 가끔 상담하러 오신 분들을 보면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무슨 환상을 보고 환청을 듣고 있는데 그러나 그 내용은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느껴집니다. 이러한 말에 귀를 기울이고 기울이는 사람은, 반드시 나중에 이상한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런 말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도록 유도하고 있지요.
그제께 우리 상담하는 날에 어떤 자매님이 와서 ‘자꾸만 많은 활동하라는 충동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집안에 자녀 4명이 있고 집안에 일이 많아서 어떻게 내가 활동 많이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조용히 기도할 때 또 무슨 이상한 강한 충동으로 막 자유스럽게 자연스럽게 쓰게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나중에 한국말도 나오지만 모르는 말도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절대로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이러한 것까지 손으로 쓰이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쓰는 것은 ’영서‘ 라고 하는데 절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누구의 세력으로 이런 것 쓰려고 하는 것을 거부하십시오. 제가 2년전에 여기 미국에서 오신 성령쇄신 강사들에게 그 문제에 대해서 물어봤습니다. 그 분별의 은사 많이 받으신 ’엘리사벳‘ 여사는 그것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악령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지요 악령은 비밀 지키는 것 원합니다. 그 은밀한 데에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환상 볼 때 어떤 주님의 말씀들을 때 ’남에게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말하면 거기에 벌써 악령의 꼬리를 볼 수,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안에서 자녀 4명 있고, 남편에게 잘 봉사해야지요, 어떻게 많이 돌아다니며 봉사할 수 있습니까? 그 받은 충동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충동 아닙니다.
또 예를 하나 든다면 며칠 전에 본당의 회장님이 의사선생님을 데리고 왔습니다. 제가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강의 준비하는 동안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근데 ‘급한 문제라서 만나야 된다’고 해서 오라고 했더니 그 의사는 다른 도시의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자녀들의 학교 문제 때문에 서울로 이사 왔습니다. 그런데 이사온 지 2달 밖에 안되어서 아직 잘 안되죠. 자기도 그것을 각오했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예언 잘 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무슨 예언을 들었냐 하면 ‘금방 여기 서울에 있는 병원을 그만 두고 다시 전에 있던 그 도시에 돌아가라. 너는 이것을 안 한다면, 석 달 후에 큰 문제 생길 것이다.’ 그 순간부터 그 의사는 너무 불안해지고 어쩔 줄 모르고 정말 그 도시에 다시 되돌아가서 병원 다시 개업하는 장소까지 봤습니다. 그래도 일이 잘 안되고, 기도도 잘 안되고, 그래서 본당회장님을 찾아가서 회장님과 함께 저를 찾아 온 것이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예언은 주님으로부터 온 예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우선 ‘예언을 통해서 이러한 생활의 중요한 문제를 변경시키는 것은 주님의 음성이 아니다’라고 제가 처음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또 한가지 예언하신 분은 ‘절대로 수도자나 신부님에게 그러한 예언의 내용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역시 악령의 꼬리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선 비밀 지키라고. 하느님의 음성이라면 얼마든지 드러낼 수 있지 않습니까? 평화스러운 좋은 일이기 때문에!
두 번째 내가 물어봤습니다. ‘형제님, 그 전에 계시던데 몇 개월 동안 생각하고 분별하셨을 텐데, 형제님 무엇을 느꼈습니까? 평화스럽고 정신이 맑았습니까?’, ‘그렇죠. 자녀들 때문에 서울로 가야한다’고, ‘아주 평화스럽게 느꼈고, 아주 좋은 판단이다’라고 해서 여기 서울에 왔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와서 아주 열심해졌습니다. 아주 본당도 열심히 나오고, 성령세미나도 하고, 아주 주님과 가까이 갔으니까 주님께 아주 가까이 가는 도중에 악령이 이러한 방해를 놓은 것입니다.
악령은 우리의 육체적인 심리적인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약점을 통해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예를 들면, 쉽게 겁내고 소심한 사람은, 더 겁내고 소심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또 허영심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아첨을 듣게 합니다. 또 감정적 감상적인 것을 원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감정에 둔 신앙심을 체험케 합니다. 여러분 호기심 누가 호기심 많고 명예와 인기를 좋아한다면, 이것을 체험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기를 받을 수 있게 다른 사람을 유도합니다. 또 여러분, 환상 보는 것 환청 듣는 것을 좋아하면, 각자 환상과 환청을 체험할 수 있게 해 줄 수도 있습니다.
악령은 모든 은사를 흉내낼 수 있습니다. 각자 환상, 각자 탈혼, 빛의 천사로써 가장해서, 우리에게 빛을 주고 뜨거움도 체험케 할 수 있습니다. 또, 악령으로부터 일으킨 병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 눈에서 보는 사람이나 물건을 안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눈을 속이는 것이죠. 실제적으로, 사람이나 물건이 우리 눈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한다면, 또 우리 약점을 알고 인정한다면, 또 다른 사람에게 도움 청하고, 우리 비밀 지킬려고 하지 않는다면, 악령의 활동이 드러나므로 악령이 떠나고 맙니다.
이제 마지막 위안에 대해서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독은 항상 악령으로부터 온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럼 위안은 항상 하느님으로부터 옵니까? 불행히도 아닙니다. 그것이 그렇다면 분별은 아주 쉽습니다. 영적인 지도자의 역할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악령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의 이끔과 속임수는 끝없습니다. 자기가 필요로 하면, 주님의 흉내내는 것도 망설이지 않습니다. 영혼을, 우리 영혼을 고독의 수단으로써 괴롭히지 못하면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을 모방하는 시도를 합니다. 위안을 통해서 속임수를 씁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어떠한 위안을, 주님으로부터 오는지 악령으로부터 오는지, 우리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지력과 의지의 활동으로, 위안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해지는 아름다운 하늘을 그런 장면을 바라볼 때, 우리가 창조주의 위대하심을 보고 우리 영혼의 감격되고 주님의 찬미하고 위안을 느낍니다. 아니면, 어떤 우정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 더 커집니다. 우리 위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어떤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또 어떤 성경에서 나오는 장면을 상상으로써, 묵상함으로써, 그러한 좋은 생각과 상상을 통해서, 우리 영혼이 위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러한 위안, 위안은 우리 감각과 상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요한’ 성인은 이러한 감각을 통해서 오는 위안은 양쪽에서부터 올 수 있다고 합니다. 악령과 성령에서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오는, 성령만 주는 위안이 있습니다. 그러한 위안은 우리에게 갑자기 오고, 어떠한 상상과 생각과 묵상을 통해서 오지 않고, 갑자기 우리에게 오는 위안은, 틀림없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착한 사람은 오해를 받고 남으로부터 좋지 않은 판단을 듣고 있습니다. 본인이 잘하려고 하는 데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잘못 판단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아프죠. 그래서 아픔과 자조를 느끼면서, 성체 앞에 무릎을 꿇고, 아주 비참한 상태로써, 아주 희망없는 상태로서, 주님 앞에서 기도하려고 합니다. 고독의 상태이지요. 그때 갑자기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너는 이 사람 때문에 아니면 나 때문에 이러한 생활을 선택했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너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냐!’ 그리고 고통 속에서 이렇게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큰 기쁨을 평화를 느낍니다. 이 체험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체험입니다.
그래도 훌륭한 영적 지도자는 이러한 말을 들을 때 ‘,아 이것 주님이 주신 것이다’라고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그 사람의 행동을 보실 것입니다. 그 사람을 그 영혼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더 겸손한지 겸손해진지 더 사랑을 잘 실천하는지 보고 나서 주님으로부터 왔다고 확신을 해 줄 것입니다.
다른 규범도 하나 꼭 읽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악신의 특성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처럼 가장하고서 영혼의 들어갈 때는 열심을 가지고 들어 가서 나올 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다. 즉, 마귀는 흔히 착한 영혼의 심리에 맞춰서, 처음에는 선하고 거룩한 생각을 선동하고 나서는, 차츰 그 영혼을 은밀한 계교와 흉악한 음모에 빠지게 하여,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악령은 선의 탈을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선하고 거룩한 것으로 선동하려고 합니다. 처음에 선하고 거룩한 생각을 주고, 그 다음에 사람이 그것을 따라간다면 차츰차츰 그 선하고 거룩한 목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가는 동안 항상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릴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악령의 성화의 수확을 파괴하려고 할 것입니다. 십자가 ‘요한’ 성인의 말씀 따라 우리가 성장할수록, 우리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수록, 마귀는 이 성화를 파괴하려고 자기 능력을 총동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귀의 입장 있다면, 우리 모든 노력은 어디서 집중하겠습니까? 미지근 사람에게 아니면 열심한 사람에게 집중하겠습니까?
‘이냐시오’ 성인은 위안의 시작과 중반과 끝을 봐야만, 그 위안을 분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위안의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분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구분 중에 한 부분이 좋지 않으면, 그 뱀의 꼬리를 볼 수 있다면, 그 위안의 체험 전체를 의심하고 거절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시작의 부분에, 원수의 꼬리를 발견하는 예를 하나 든다면, 가족은 모처럼 모여 있습니다. 그 때 내가 갑자가 강한 충동을 느끼고, 내가 모인 가정을 놔두고 기도해야 된다. 여러분 어떻게 느끼십니까? 또는, 매일 사교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활동을 하는데, 그래서 저녁마다 가정을 혼자 놔둬야 합니다. 그 활동하고 싶은 충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또 대학생이면, 바로 시험치는 그 때오면, 공부 안하고, 더욱 더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는 충동이 있다면, 그것이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자체는 좋지만, 자기 생활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악령의 꼬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중간 부분에 악령의 간섭을 발견하는 예를 든다면, 기도 중에 큰 위안을 느끼시고 그러나 그 위안을 느끼는 가운데서, 아주 교만하고 허영 같은 생각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럼 그 위안을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니면 기도 중에 나는 얼마나 거룩하고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나쁜지, 그런 생각 자꾸만 떠오르면, 아니면 내가 빨리 성인되야 된다는 그런 위험한 생각이 자꾸만 떠오른다면, 그 중에 위안을 느낀다면, 그 위안은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아니면, 기도 중에, 묵상 중에, 어떤 사람이 와서, 어깨를 두드리고 좀 도움 청합니다. ‘좀 도와달라’고 하고, 아니면 전화 오고, 아니면 어린아이 울기 시작하면, 그 때 막 화를 내고, ‘나는 20분도 20분동안도 제대로 기도 못하고 묵상 못하게 됩니까’ 화를 낸다면, 그건, 주님께서 주신 위안 아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위안이었다면, 누가 잠깐만 와서 방해해도, 기꺼이 따라가서 도와줬을 것입니다.
또 위안의 끝을 본다면, 어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열심히 기도하고 피정한 그 때에 기도 속에서, 이제 장래를 위해서 여러 가지 주님께 약속을 드려야 된다고. 이를테면 ‘이제부터 매일 묵주신경 5번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일년동안 15기도 하겠습니다’ 그 다음 나중에 그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함으로써 낙심하고 불안해 진다면, 피정 끝에서 지키신 그 위안은, 그 결정해야 할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영의 분별은 큰 기술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도와 주시지 않으면 않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강의를 들으신 여러분들이 그 전보다 그 모든 것이 더 복잡해진지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씀 드린대로 무슨 말인지 조금 이해하고 조금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 초대 교회 때에도, 영의 분별을, 중요한 우리 크리스챤 영의 요소로 보았습니다. 우리 영의 분별을 통해서, 성장되고 또 성화되고 또 우리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주님과 일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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