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9월4일 여성선교주일
예렘18:1-11, 시139:1-6, 갈라3:26-29, 루가24:1-10
< 안전한 교회를 향하여 >
오늘은 대한성공회가 15차 여성선교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특별한 주일에 여성선교와 우리의 문화와 관습, 그리고 안전한 교회를 지향해가는
가치와 신학적 근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안전하지 못한 여성
예전에 우리나라 대가족제도 시대에는 가정 안에 위계질서가 엄격했습니다.
밥상 차리는 순서가 있는데 제일 높은 권위자로부터 시작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계급이 있고 그 다음 할머니하고 남자들 계급, 그 다음 여자들 계급, 아이들 이런 순서대로 밥상차리고 식사했습니다.
아니면 여자들은 밥그릇을 상위에 얹어놓지도 못하고 밥상 아래 바닥에 놓고 먹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속담에서 대표적인 것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하고 북어는 사흘마다 패줘야 한다.’
지금은 진부하게 들릴 수 있는 이런 속담을 흔하게 말했고 들으면서 사는 사회었습니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축이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등장하는 속담이 많은데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라이벌처럼 대립하는 상대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대결은 언제나 시어머니 완승이고 며느리는 만만하고 상대하기 아주 쉬운 존재로 속담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설을 보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미워하고 구박 끝에 죽었다가 한을 품고 꽃이나 새로 다시 태어나서 생전의 억울함을 소리나 모양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들이 다수 있습니다.
봄 나물철에 태백산주변에서 나물을 캐면 듣게되는 검은등뻐꾸기란 새가 있습니다.
비명처럼, 네 마디를 토해내는 소리같이 웁니다.
그 전설은 이렇습니다.
며느리가 밥을 먹는 것이 아까운 시어머니가 밥하라고 쌀을 퍼서 내줄 때마다 바가지를 작은 것으로 바꾸면서 쌀을 퍼주었어요. 시어머니가 주는 쌀로만 밥을 하던 며느리는 점점 쌀이 적어지더니 먹을 밥이 없어서 굶어죽었는데 새가 되어서 울 때마다 “쪽 박 바 꿔” 그러면서 한을 토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며느리 밥풀꽃은 남편이 시어머니 몰래 남겨준 밥을 숨겨두었다가 주먹밥을 만들어서 뒤 곁에서 먹고 있는데 시어머니한테 발각되면서 ‘뭘 먹고 있냐?’ 소리에 놀라 밥이 목에 걸려 죽었는데 시체를 갖다 버립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시체에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어 다음해에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습니다. 꽃의 모양이 혀에 밥알두개를 물고 있는 것 같아서 죽은 며느리다. 이 것이 ‘며느리밥풀꽃’의 전설입니다.
속담이나 전설이 사실적인 일이라기 보다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을 담고 있다는 것에서 문화적인 비유인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것을 가치로 여기고 있는지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속담과 전설을 이루는 바탕은 힘의 정치적인 구조입니다.
가장 힘없는 사람, 며느리는 인격적인 대우나 관계를 찾기 어려웠고
참고 견디는 것이 미덕이 되다보니 억울해도 그것을 누르며 살아야했습니다.
2. 캔터베리 대주교의 안전에 대한 신학적 근거
이런 전통적인 문화와 가치관의 흐름은 조선시대에만 국한 된 것으로 그쳤으면 좋으련만 21세기인 현대사회에서도 그 본질은 여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데이트폭력이나 여타의 폭력으로 하루 피해를 입는 여성이 113명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데이트와 가정 폭력 등으로 남성에게 죽는 여성이 한 해에 천만명에 이릅니다. 남편이나 애인, 남자친구에게 피해를 입는 경우가 절반이 넘습니다.
이것은 힘이 약한 여성이 남성의 폭력으로 겪는 피해입니다.
이런 폭력은 사회에서도 있고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폭력이 어떻게 있느냐? 할 수 있겠지만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을 이제 빛 가운데 드러내고 명확하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합당하게 처리하고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2012년 세계성공회 협의회 ACC 15차 총회와 16차 총회, 17차 총회에서 안전한 교회를 위한 권고 사항을 만들고 그에 따른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습니다.
캔터베리 저스틴 웰비 대주교는 안전에 대한 신학적 근거로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닮고 있어 귀중한 존재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어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희생과 사랑의 극치를 보이지 않는 모든 행위는 옳지 않다.
둘째,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서 갓난 아기로 태어나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고 우리도 ‘보호가 필요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
셋째, 예수님은 약자를 해친 사람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것보다 스스로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하셨다.(마태18:6, 마르코9:42)
3. 첫 번째 근거- 하느님의 형상
첫 번째 신학적 근거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남성과 여성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남성과 여성의 화합과 조화로 하느님의 형상을 닮게 만드셨습니다. 남성만이 아니고 여성만이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하는 모습 가운데 하느님의 형상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인간은 그래서 귀중한 존재입니다.
서로 말이나 행동으로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만약 힘 있는 사람에 의해 폭력을 받는 다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하느님의 형상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서로 상함을 입게 됩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수난을 겪으신 그리스도는 나와 너,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속담이나 전설, 유교의 문화와 관습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우리 의식 깊이 이런 사고와 가치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올바르지 않고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ex) 20대 여성이 술에 취해서 밤 12시 반에 귀가하다가 지나던 남성에게 폭력을 당해서 전치 2주의 상해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코뼈도 부러지고 얼굴을 상하고 돈도 뺏겼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을 접할 때 대부분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여자가 일찍 일찍 집에 들어가야지 술에 취해서 밤 늦게 돌아다니니까 그렇지, 하면서 맞을 짓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의 행동을 탓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2차 가해라고 합니다.
이 피해자가 당한 상황은 지나쳐버리고 여자가 술먹고, 밤 늦게, 돌아다니니까 그렇지, 하면서 그런 피해를 입은 것은 전부 그 여자가 밤 늦게 돌아다닌 것이 잘못이다, 여자가 술머고 취해서 돌아다닌 것이 잘못이다.
그 여자의 잘못이라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면 피해자인 이 여자는 이미 받은 피해에다가 사람들의 판단과 비난이란 피해를 더 입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가 밤 늦은 시간까지 술먹고 다니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명제가 성립하는 사회관습과 가치아래에서 힘있는 사람, 남자는 얼마든지 그런 여자에게 폭력을 입혀도 된다. 그런 여자는 맞아도 된다. 이런 명제가 가능한 사회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여자에게 필요한 건 위로와 폭력으로 입은 공포와 두려움 정신적인 피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리적 상처와 육신의 상처를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피해를 많이 보게되는 사회구조입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연약하고 힘없기 때문에 생각없이 2차 가해를 입히게 되는 행동과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우리는 여성선교주일을 맞이해서 그동안 폭력의 피해로 고통과 상함을 입은 약자, 여성들에게 아무런 생각없이 2차 가해를 주었을 우리의 행동과 말에 대해서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와 관련한 복음이 요한복음 8장입니다.
유대인들이 음행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성을 붙잡아 예수님께 데려와서 현행범이다. 이제 어떻할래? 예수님께서는 아뭇소리 안하시고 있다가
“너희 가운데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그때 나이 많은 사람부터 들었던 돌을 내려놓으면서 그 자리를 떠납니다. 다 떠난 후 그 여성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이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유대사회에서 이런 경우에 처한 여성들은 막무가내로 돌에 맞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아무런 보호도 없이 그의 처지와 형편에 대한 입장을 들어보는 이 하나없이 억울하게 죽어갔을 이들을 예수님께서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 감정이 극에 달해있는 그들과 이 공포에 사로잡혀있는 이 여성 사이에 침묵하심으로 분리시키고 그들에게 질문을 던져 그들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정이 격해진 그 상황 속에서 침착하게 보여주신 이런 모습이 2차 가해로부터 그 여성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방법이자 해결책입니다. 또한 이것이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케하고 존중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4. 두 번째 근거- 안전과 보호가 필요
이어서 두 번째 신학적 근거인 안전과 보호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아기로 오셨습니다.
아기는 완전 무방비상태입니다.
헤롯왕이 베들레헴에 두 살이하 사내아이를 찾아 학살할 때
자칫 목숨을 잃을 그 위기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를 데리고 나귀롤 타고 한 달정도 걸리는 이집트로 피신시겼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를 데리고 가다 발각될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두 사람은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모든 것이 생소한 이집트에서 동방박사들이 주고 간 선물인 황금과 유향과 몰약, 값진 것들을 팔아서 생활 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나자렛에 정착해 살면서 요셉은 목수 일을 하면서
어린 예수를 돌보고 양육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자랐을 때 그에게 목수 기술도 가르쳤습니다.
요셉은 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는 가장의 역할을 성실하고 든든하게 했고
예수님은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성경에서 힘없고 약한 사람을 구약에서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신약에 이르러서 공생애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은 병자, 장애인, 귀신들린 사람, 어린 아이, 그리고 과부와 소외된 여성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눈에 띄였고, 그들의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체휼하시면서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눈 먼 사람들은 보게 하시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수난을 겪을 때 끝까지 주님을 따른 여성들은 대부분 삶의 질곡을 겪으며 살아온 여성들, 소외된 여성들입니다.
권력에서, 물질에서, 공동체에서 외면당한 소외된 여성들입니다.
이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이도 없고 얘기할 곳도 없는 여성들입니다.
강한 힘으로부터 함부로 여김을 당했고, 함부로 정죄받고 비난을 받아도
가만히 있어야하는 힘없는 약자들입니다. 억울하기가 이를데 없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성들의 얘기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이 여성들이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차별과 무시와 냉대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성들은 사는 동안 어디에서도 누구에게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경청과 공감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위로 받았습니다. 늘 주눅들고 위축되기만 했던 여성들은 비로소 예수님을 통해서 힘을 얻었고 인격적인 대접과 관계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리떼 가운데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갈 바를 알지 못해 방황하듯 살아야했던 이들의 삶에 안전함과 평안 그 이상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자유이고 해방입니다.
여러분,
하느님은 교회에 약자와 소외된 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책임을 맡기셨습니다.우리는 힘없는 사람들,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안전한 장소까지도 제공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하고 삶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안전한 교회 신학적 근거입니다.
5. 세 번째 근거- 지도자의 책임을 촉구
세 번째 신학적근거인 마태복음 18장 6절, (마르코복음 9장 42절)
또 나를 믿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세 가지 신학적 근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또한 안전한 교회가 나오게 된 동기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지도자의 책임에 대해서, 책임 질 것을 촉구합니다.
사회의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큰 책임이 있습니다.
권한도 크지만 책임을 져야하는 위치입니다.
책임은 이후의 심판을 말합니다.
교회의 지도자, 교회 성직자에게 있는 권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 땅에 펼쳐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가도록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맡기신 직분입니다.
그렇게 맡기신 권한으로 이기적인 사욕을 채우느라 힘없는 사람, 약자에게 위력으로 어떤 부당함을 행했을 때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대부분 쉬쉬 넘어가고 사람들이 모르게 하는 것이 미덕이다.
교회에서 일어난 일인데 외부에서 알면 큰 일난다. 교회 선교에 지장이 있다.‘
하면서 눈 감고 아웅하는 식으로 덮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일이 하느님 앞에서 공의롭고 정의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교회에 어둠을 허용하는 큰 묶임으로 성령께서 더 이상 활동하실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걸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세상의 방법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을 잃어버린 채, 공허하게 허공을 마냥 바라보는 생명없는 기관으로 전락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해 왔다고 하겠습니다.
그간 성희롱, 성추행 등 성폭력을 자행한 경험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사과한 적이 없다면, 이제라도 하느님과 당사자에게 사과를 하는 책임자가 되기를 권고합니다. 사과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6. 교회는 안전한 공동체 지향
교회는 안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 공동체는 안전하게 돌보고 따뜻하고 정성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세 가지 신학적 근거를 다시 읽어드리며 마무리합니다.
첫째,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닮고 있어 귀중한 존재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어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희생과 사랑의 극치를 보이지 않는 모든 행위는 옳지 않다.
둘째,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서 갓난 아기로 태어나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고 우리도 ‘보호가 필요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
셋째, 예수님은 약자를 해친 사람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것보다 스스로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하셨다.(마태18:6, 마르코9:4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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