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 “종교개혁적 신앙고백하라” 강요… 시민 불만 폭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1489∼1565)은 어떠한 사람일까? 파렐은 칼뱅이 1536년 여름 제네바로 오기 전에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제네바는 1536년 5월 21일 전체 시민회의를 통해 “오직 복음서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겠다”는 서약을 했다. 가톨릭 주교의 도시에서 개신교를 유일한 신앙으로 받드는 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제네바가 개신교 도시로 된 것은 파렐의 열정적이고, 선동적인 설교 덕택이었다. 그의 설교는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지만 과격했다. 에라스무스는 파렐을 “일생 동안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뻔뻔하고 과격한” 사람으로 평했다. 파렐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데리고 막무가내로 가톨릭교회로 쳐들어가 미사를 방해하고, 강단에 올라가 설교를 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 하여 교회에서 그림들을 내다 버리게 했고, 미사를 폐지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제네바에서 가톨릭 세력을 쫓아내고 종교개혁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성공 다음이 문제였다. 그는 과격한 행동가였지, 창조적 혁명가는 아니었다. 행동만으로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젊은 칼뱅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당시 제네바의 상태에 대해 칼뱅은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처음 이 교회에 왔을 때, 거의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교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이 우상숭배와 관련된 그림들을 불태웠지만, 진정한 종교개혁은 없었다. 그곳에서는 혼잡한 무질서 외에 어떠한 것도 없었다.”
칼뱅은 원래 제네바에 정착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 유산 정리 문제로 파리로 갔다가 동생들을 데리고 스트라스부르로 여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가톨릭 세력의 수호자인 카를 5세의 영향권을 벗어나 안전하게 제네바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도중에 파렐을 만난 것이다. 파렐은 1534년 칼뱅과 비슷한 목적으로 ‘간결하고 간명한 해설’이라는 책을 출판했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강요’를 읽은 다음 칼뱅의 탁월함을 깨끗하게 인정했다. 그는 칼뱅을 붙잡고자 협박도 마다하지 않았다. 칼뱅은 1557년 ‘시편 주석’의 헌정사에서 파렐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개인적 공부에 헌신하기 원한다고 말하며 아무리 요청해도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다음과 같은 저주의 말을 하였다. ‘만일 당신이 이 위기 가운데서 나를 돕기를 원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평안함에 나의 저주를 보내실 것이다.’ 나는 파렐의 말로 인하여 놀라게 되었고, 계획한 여행을 포기하였다.”
과격한 행동가였지만 파렐은 사람을 알아보는 뛰어 난 안목이 있었다. 그는 칼뱅을 만나고 나서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그를 평생 지도자이자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칼뱅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칼뱅에게 협박과 저주를 퍼붓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종교개혁의 길로 내몰았다.
파렐로 인해 칼뱅은 제네바에서 ‘성경 교사’로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미미했다. 제네바 시의 서기는 그의 이름조차 몰라 월급 명부에 ‘그 프랑스인’이라고 적을 정도였다. 그러나 칼뱅은 타고난 치밀한 기획자이자 이론가였다. 그는 무질서한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무질서한 제네바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교회행정에 관한 규칙과 시민교육용 신앙고백서를 만들 생각을 했다. 그는 1537년 1월 ‘교회행정에 관한 조례’를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조례는 바울의 가르침대로 시편 찬송을 부를 것, 성찬을 매월 시행할 것, 어린이를 위한 교육을 실시할 것, 결혼법을 개혁할 것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칼뱅은 젊은이들을 위한 교리문답을 출판했는데, 나중에 여기에 21개 조항으로 된 간단한 ‘신앙고백서’를 추가 발간했다. 그는 모든 시민들이 이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이고, 맹세할 것을 시의회에 요구하였다. 시의회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제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은 곧 바로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칼뱅은 야심차게 제네바에서 모범적인 신앙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했다. 제네바 시민들은 초등학생처럼 10명씩 관원 앞으로 나와 오른손을 들고 그가 만든 신앙고백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인 시도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불평을 샀다. 공개적인 신앙고백 방식은 루터가 주장한 ‘기독교인의 자유’와 ‘개인의 양심’과 충돌하는 것이 된다. 신앙고백을 하지 않은 사람이나 부도덕한 행위를 한 사람은 성만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성만찬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은 시민으로서도 끝장이었다. 그에게 물건을 사거나 팔아서도 안 되었다. 공적인 참회를 거부하면 그 사람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칼뱅은 이런 성만찬을 매주 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시 당국이 성만찬을 1년에 네 번으로 제한했지만, 성만찬의 위력은 대단했다. 제네바 시민들은 성만찬에서 배제될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했다. 단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고 즐거워서 노래를 하다가 또는 너무 화려한 옷을 입었다가, 칼뱅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제네바 시민들은 칼뱅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평을 쏟아냈다.
“프랑스에서 흘러들어 온 외국인에게 마치 거리의 도둑처럼 우리가 책망을 받아야 하는가?”
1537년 11월 시의회는 신앙고백에 서약하지 않는 사람을 추방시키도록 한 결정을 문제 삼았으며, 1538년 1월 4일에는 누구도 성만찬에서 제외될 수 없다고 결정을 내렸다. 칼뱅과 그를 지지하는 목사들의 과도하고도 성급한 종교개혁적 시도는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시민들의 불평만 샀다. 그런 와중에 공개적 신앙고백과 성만찬을 권징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칼뱅을 비판한 장 필립이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새로운 시 당국은 칼뱅과 추종자들에게 교회 규칙의 시행을 목사에게만 맡기질 않고, 시 정부의 관료에게 맡기도록 하는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엘리 코랄이라는 목사가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공격하다 체포되었다. 칼뱅과 파렐을 포함한 목사들은 부활절에 성만찬을 집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시의회는 그들에게 설교를 금지했다. 부활절이 다가오자 칼뱅은 이 금지를 무시하고 성피에르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그는 강단에서 성만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성스러운 육체를 개들에게 던지기보다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칼뱅에게서 개들로 취급받은 시당국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다. 최고회의인 200인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시당국의 명령을 무시한 칼뱅과 목사들을 해임할 것인지 의결에 부쳤다. 압도적인 다수가 찬성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칼뱅과 그 추종자들은 직위에서 해제되고 사흘 안에 도시를 떠나라는 선고를 받았다. 칼뱅이 18개월 동안 수많은 시민을 위협했던 추방의 벌이 자신에게 떨어졌다. 1538년 4월 23일 아침 그들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칼뱅은 추방된 지 몇 년 되지 않아 제네바 시당국으로부터 돌아와 달라는 간청을 받게 된다. 1541년 9월 13일에 제네바에 도착한 추방자 칼뱅을 시당국은 특별한 예우를 갖춰 영접하였다. 그 사이 어떠한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동희(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