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토마스 크랜머 (중)

유테레사 2012. 2. 4. 12:17

 

[크리스천 인문학] 오른손 불태우며 죽어 간 종교개혁가 영국의 토머스 크랜머 (中)

 


강직한 개혁의 길… 공동기도서·42개 신조 작성 영국국교회 기반닦아

메리 여왕이 제일 먼저 복수를 다짐했던 토머스 크랜머는 어떤 사람일까? 헨리 8세를 캐더린과 이혼시키고 앤 불린과 결혼시키는 데 앞장섰던 그의 행태를 볼 때,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최고위 성직자인 캔터베리 대주교였지만, 교만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선했으며 관대했다. 폭스의 ‘순교자 열전’을 보면 그의 품성을 짐작케 하는 일화가 나온다.

“한 무지한 사제가 크랜머를 여관의 마부라고 부르며 그의 학식에 대해 심한 경멸감을 내뱉었다. 그러한 일이 크롬웰 경에게 흘러들자 그 남자는 플리트 감옥으로 보내졌고, 그 사제의 친척이자 식료품 장수인 처트시가 그의 처지를 대주교에게 이야기했다. 그 범죄자를 부르러 보낸 대주교는 그를 설득하며 자신에게 그 어떤 학문적 주제에 대해서라도 질문을 해보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주교의 훌륭한 인간성에 탄복하고 자신의 뻔한 무지를 잘 알고 있는 그 사제는 이를 거부하고서 제발 용서해 달라고 그에게 애원했다. 이 애원은 그의 교구로 돌아갔을 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더 좋은 일에 쓰라는 명령과 함께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크랜머는 부드럽고 유했지만, 종교개혁적 신앙을 지키는 일에는 강직했다. 1539년 6월 헨리 8세가 ‘6개 신조’를 선포했을 때, 그는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6개 신조는 화체설, 사제의 청빈 및 독신 강조, 비밀고해성사 등 가톨릭의 교리와 규율을 담고 있었다. 이것은 1636년 독일의 종교개혁 내용을 담은 10개 신조로부터 후퇴한 것이었다.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과 결별한 후, 크랜머의 친우인 토머스 크롬웰을 내세워 종교개혁을 급진적으로 추진했었다. 크롬웰은 부패한 수도원을 폐쇄시켜 수도원의 재산을 대부분 왕실에 귀속시켰고, 성경 번역과 보급을 지원해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게 하는 한편 영어 성경을 교회당에 비치해 놓도록 하였다. 이런 급진적인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과의 적대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공격을 두려워했던 헨리 8세는 6개 신조를 선포해 로마 가톨릭의 적대감을 무마시키고자 했다. 그는 중립적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루터교도 세 명을 화형에 처했고, 로마 가톨릭교도 세 명을 참수하기도 했다.

크랜머는 헨리 8세의 가톨릭 복고 정책에 반대했다. 사실 헨리 8세는 교회의 수장이기 때문에 크랜머는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그리고 영국 국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크랜머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종교개혁적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헨리 8세에게 목숨을 걸고 충심어린 간언을 했다. 그때 그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다. 그의 후원자였던 앤 불린이 아들을 낳지 못해 간통죄로 몰려 처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와 보조를 맞추어 종교개혁을 진두지휘했던 크롬웰도 1540년 7월에 처형됐다. 헨리 8세는 네 번째로 결혼한 클레브스 앤과의 이혼 처리에 크롬웰이 늑장을 부리자 그를 이단과 반역죄로 처형한 것이었다.

크랜머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사람들은 크랜머가 국왕의 비위를 거슬러 곧 목이 잘릴 것이라 기대했다. 때맞추어 그의 적대자들은 그를 파멸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며 왕에게 보고했다. 헨리 8세는 면밀하게 조사를 시켰지만, 크랜머의 충직함과 결백만이 드러났다. 왕은 그것이 크랜머에 대한 음모인 것을 알았다. 왕은 크랜머를 신뢰해 나중에 그에게 그를 음해하는 문서를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그때도 크랜머는 그런 적들을 용서와 관용으로 대했다. 오히려 왕이 분노해 크랜머의 적들을 정죄했다.

크랜머의 노력으로 헨리 8세는 말년에까지 종교개혁적 입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왕은 ‘대 성경(Great Bible)’의 번역과 출판을 후원했고, 미사 폐지에도 뜻을 같이 했다. 크랜머는 ‘대성경’ 서문에서 성경 중심의 개혁을 피력했다. 그는 성경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배울 수 있고 인간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성경을 통해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자, 개혁 세력이 국정을 장악했다. 헨리 8세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르자, 크랜머를 지지했던 섭정 세이모어가 다스렸다. 세이모어의 집권으로 종교개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크랜머는 교회개혁을 위해 대륙의 종교개혁가들을 영국으로 초빙해 대학에서 가르치게 하였다. 이탈리아의 피터 마터, 폴란드의 라스코, 스트라스부르그의 마르틴 부처 등이 초빙되어 왔다.

부처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흠정교수로 임명받아 개혁주의 신학을 소개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하여’라는 책을 집필해 에드워드 6세에게 헌정하면서 교회개혁에 관심을 갖도록 촉구했다. 크랜머는 츠빙글리, 불링거, 칼뱅 등 종교개혁의 글들도 소개했다. 이런 크랜머의 노력으로 영국은 크게 개혁되었다. 그는 1547년에 6개 신조를 백지화했다. 1548년에는 교회당에서 성화를 제거하였고, 1549년에는 성직자의 결혼을 승인했으며, 라틴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여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

그는 여러 신학자들을 참여시켜 ‘공동기도서(Book of the Common Prayer)’를 작성했다. 이 공동기도서는 복잡한 예배의식을 통일시킨 것이다. 에드워드 6세는 1549년 통일령을 선포하여 영국의 모든 백성들은 이 공동기도서에 따라 예배드릴 것을 명령했다.

크랜머가 주도해 만든 공동기도서는 전반적으로 가톨릭의 교리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예배 때 사용하던 고전 라틴어 대신 영어를 사용한 점과 성경을 읽을 것과 예배의 주체로서 회중의 참여를 강조한 점이 달랐다. 공동기도서는 예배의식을 단순화하고 통일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가톨릭의 예배의식을 따르고 있었고, 전통적인 사제 복장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종교개혁가들은 공동기도서를 비판했다. 부처는 1551년에 ‘검열’이라는 책자를 써서 공동기도서의 신학적 문제를 지적했다. 다른 개혁자들도 기도서의 수정을 요구했다. 이에 크랜머는 종교개혁가들과 함께 공동기도의 개정 작업에 들어가 ‘제2의 공동기도서(Second Book of Common Prayer)’를 완성하였다. 제2의 공동기도서에는 가톨릭의 예배의식이 대부분 폐지되었다. 대신 칼뱅주의적 요소들이 많이 도입되었다. 예를 들어 비밀고해성사, 성체 예배 등이 폐지되었고 미사라는 단어가 삭제되었으며, 사제는 목사라는 칭호로 바뀌었다. 이 제2의 공동기도서는 에드워드 6세의 신통일령에 의해 영국 교회의 예배지침서가 되었다. 또한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약간 수정되어 오늘날까지 영국국교회(성공회)의 예배지침서로 사용되고 있다.

크랜머는 1552년에 심한 학질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는 학질에 시달리면서도 리들리, 존 낙스와 같은 신학자와 함께 영국교회가 지켜야 할 신앙고백으로 ‘42개 신조’를 작성하였다. 1553년에 에드워드에 의해 선포된 42개 신조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39개 신조’로 개정한 후 영국국교회의 교리가 되었다. 이처럼 크랜머는 영국국교회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 지 6년 만에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사인은 매독과 결핵이었다. 그러나 소년 왕의 죽음을 두고 의문이 많았다. 소년 왕은 후사도 남기지 못했다. 헨리 8세의 장녀 메리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제일 먼저 그녀는 어머니 캐더린의 원수인 크랜머에게 복수하고자 했다. 그녀가 생각한 복수극은 크랜머가 행했던 모든 종교개혁을 자기 손으로 뒤집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