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성서, 영어 번역하고 화형당한 영국의 루터 윌리엄 틴데일 (中)
[2012.01.02 18:32] | |
![]() 런던 주교 턴스텔 “영어 성경은 이단의 책자, 불태우라!” “성경을 불태우라!” 수거해 놓은 성경 더미에다 런던 주교 턴스텔은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교회의 지도자인 주교가 성경을 모아 놓고 불태우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주교가 불태우라고 한 성경은 윌리엄 틴데일이 번역한 영어성경이었다. 성경이 불타오르자 신자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그러자 주교는 그것이 성경이 아니라, 거짓되고 오류투성이의 괴이한 이단의 책자라고 주장했다. 주교에게서 이단으로 낙인 찍힌 월리엄 틴데일은 독일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에서 함부르크를 거쳐 루터가 활동하던 비텐베르크로 갔다. 1524년 5월 27일에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 ‘잉글랜드 출신의 길렐무스 달티시’라는 익명으로 등록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 루터의 성서 번역을 직접 보고 싶었고 영어성경 번역도 하고 싶었다. 그는 루터처럼 신약 성경을 라틴어가 아니라 에라스무스가 펴낸 그리스어 원전에서 직접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위클리프의 영어성경은 당시 사용되던 라틴어 번역을 대본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스어 원전으로부터의 성서 번역은 틴데일이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이었다. 1525년에 신약 성경의 번역을 끝내자 그는 인쇄업이 발달한 쾰른에서 성경을 인쇄하고자 했다. 그러나 밀고자의 고발로 쾰른에서의 성경 인쇄 작업은 중단되어야 했다. 앞 편에서 말한 대로 다급하게 창문을 넘어 그는 동료 월리엄 로이와 함께 보름스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보름스는 가톨릭교를 옹호하는 독일 황제의 도시였으나 당시에는 종교개혁의 진영으로 넘어 와 있었다. 틴데일은 성서 번역과 인쇄 작업을 다시 해야 했다. 그는 인쇄를 하기 전에 성서를 더 많이 확산시키기 위해 고민했다. 그는 전략적으로 성서를 읽기 쉽도록 하기 위해 생생한 민중의 언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당시에 대부분의 민중은 문맹자라 누군가 성서를 읽어주어야 했다. 그는 그 점도 고려했다. 영어 성서를 낭독할 때 운율과 리듬감이 살아나도록 문장을 번역해 성경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하고, 들은 내용을 잊지 않도록 했다. 또한 그는 더 많은 민중들이 성경을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성경 인쇄본을 최초로 핸드북 형태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어 성경 6000부가 마침내 인쇄되었다. 이 영어 신약성경은 암시장을 통해 영국과 스코틀랜드로 몰래 유입되었다. 때마침 영국은 흉작이라 대륙에서 밀과 곡식을 수입해야 했다. 틴데일이 번역한 영어성경은 밀이나 곡식을 담는 통 속에 담겨 섬나라 영국으로 전해졌다. 영어성경은 암시장을 통해 급속하게 확산될 수 있었다. 영어성경에 대한 수요가 많은 탓도 있지만, 성경사업이 출판업자들의 이익과도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어성경은 고부가가치 상품이었다. 출판업자들은 고부가가치 제품인 성경을 찍으려 했고, 장사꾼들은 높은 수익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성서를 유통시켰다. 이렇게 영국에서 틴데일의 영어성경이 확산되자 누구보다 그러한 사실에 분개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런던 주교 턴스텔과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였다. 그런데 런던 주교 턴스텔이 영어성경을 유포시키는 데 결정적인 일조를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턴스텔 주교는 틴데일의 성경 화형식을 거행한 뒤로도 그가 번역한 영어성경을 보이는 족족 입수해 불태워 버리곤 했다. 틴데일은 성경을 많이 보급하고자 했지만 성경에는 많은 돈이 들어갔다. 그는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그 때 틴데일과 친분이 있던 오거스틴 팩킹톤이 좋은 계략을 짜냈다. 그는 턴스텔 주교를 이용해 자금난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는 주교를 찾아가 비용을 대면 틴데일의 모든 성경을 구해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주교는 반가운 마음에 모든 비용을 대주겠다고 약속했다. 팩킹톤은 틴데일을 만나 모든 성경을 넘겨받기로 하고 주교에게서 돈이 오는 대로 대금을 치르기로 했다. 턴스텔 주교는 약속대로 팩킹톤이 성경을 가져오자 기뻐하며 대금을 지불했다. 팩킹톤은 이 대금을 틴데일에게 전달했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틴데일은 이 큰 돈으로 더 많은 성경을 새롭게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틴데일은 신약을 다시 수정하고 새롭게 인쇄해 초판의 3배나 되는 1만8000권의 성경을 영국으로 보냈다. 턴스텔은 팩킹톤에게 사람을 보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따졌다. 그러나 팩킹톤은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들이 활자와 인쇄기를 가지고 계속 찍어내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습니까? 이번에는 활자와 인쇄기마저 사시는 것은 어떤지요?” 토머스 모어는 턴스텔이 당한 것을 알았다. 그가 조지 콘스탄틴이라는 사람을 체포해 심문하면서, 틴데일 일당에게 돈을 대주는 사람이 누군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를 도운 사람은 런던의 주교요. 그가 신약을 불태우기 위해 그 값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돈을 주었소. 과거에도, 또 현재도 그가 우리의 유일한 후원자이며 위로자요.” 그런데 왜 턴스텔과 토머스 모어는 틴테일과 그의 영어성경 번역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고 적개심을 품게 된 것일까? 모어는 틴데일의 성경 번역에 대해 이렇게 비난한다. “교회라는 단어를 회중이라는 단어로 속되게 번역했다. 그리고 사제를 장로라고 번역하고 자선을 사랑으로 번역했다. 또한 고해를 회개로 번역했다. 틴데일은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함으로써 악한 죄를 지은 것이다.” 틴데일의 성경 번역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교회와 신앙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를 ‘교회’(church)로 번역하지 않고 회중(congregation)으로 번역했다. 회중은 가톨릭 제도로서 교회가 아니라, 믿음을 지닌 모든 사람들의 모임을 뜻한다. 이렇게 에클레시아를 ‘회중’으로 번역하면, 교황제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내세우는 교황들이 근거로 삼은 구절이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구절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회중‘으로 번역되면서 제도로서의 교회라는 말이 무의미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에 대한 교황의 지배권도 근거가 없어지게 되었다. 틴데일은 그리스어 ‘아가페’를 자선이 아니라 사랑(love)이라는 말로 바꾸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유명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말은 틴데일 이전에는 ‘믿음, 소망, 자선’으로 번역되었다. 틴데일은 자선을 사랑으로 번역해 시혜적 기부와 선한 행위를 연결시켰던 가톨릭 교회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제 사랑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교류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어 ‘프레스뷔테로스’를 ‘사제’가 아닌 ‘장로’로 번역해 사제 권력을 부정했다. 그리고 또 ‘고해’를 ‘회개’라는 말로 바꾸었다. 이제 사제 앞의 고해 성사가 아니라 신 앞에서의 회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당시 ‘고백 성사’는 면죄부 판매와 연계되어 교회에 상당한 금전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이었지만, 그러한 일도 불가능해졌다. 이렇게 틴데일의 성경 번역은 기존 가톨릭의 교회 질서와 교회 권력을 내부에서 폭파시키는 폭탄이었다. 이 폭탄의 위력을 일찌감치 알아 챈 사람이 바로 토머스 모어였다. 그래서 토머스 모어는 틴데일과 루터를 이단으로 반박하는 ‘이단에 관한 대화’를 집필하며, 틴데일을 ‘골수 마귀 지옥의 자식’으로 부르며 저주했다. 틴데일도 가만있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불꽃 튀는 설전과 논쟁이 오간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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