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냉혹한 열정의 종교개혁가-쟝 칼벵

유테레사 2012. 1. 19. 18:58


엄격한 교회규율 적용 화형까지… ‘관용없는 개혁’ 비난받아

“이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차라리 100번 이상이라도 다른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1540년 3월 29일에 파렐에게 보낸 글이다. 파렐이 제네바로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을 때, 왜 칼뱅은 차라리 100번 이상 죽는 게 낫다며 거부했을까? 파렐과 칼뱅이 떠난 후 제네바는 다시 구교의 회유와 공세에 시달렸다. 명망 높은 추기경 야고보 사돌레토는 1539년 5월 제네바 시민들에게 편지를 보내 “가톨릭교는 오류가 없으니, 교황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선동했다. 제네바 시의회는 마땅한 대응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칼뱅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6일 만에 칼뱅은 ‘추기경 사돌레토에 대한 응답’을 작성했다. 이 서신은 짧고 정확하게 교황청의 부정을 지적하면서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설명해 구교의 공세를 무력화했다. 이 사건 이후 제네바의 목회자들은 칼뱅에게 여러 차례 제네바로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칼뱅은 그때마다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가 제네바에 다시 온 것은 이 서신을 작성한 후 2년이 더 지난 1541년 9월이었다. 칼뱅은 사실 제네바에 돌아갈 마음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자로서 그리고 신약성경을 강의하며 행복하고 만족한 생활을 보냈다. 항상 존경하던 마르틴 부처와 함께 일하면서 하게나우, 보름스 종교회의에 스트라스부르 대표로도 참석해 종교개혁운동에 앞장섰다. 한편 그는 ‘기독교 강요’ 제2판(1539년), ‘로마서주석’(1540년) 등 여러 저술을 집필하고 출판했다. 1541년에 기독교 강요 제2판을 프랑스어로도 출판해 프랑스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했다. 물론 프랑스 당국은 즉각 이 책을 금서목록에 올리고,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 불질러버렸다. 칼뱅은 제2판에서 초판의 내용을 훨씬 확대시켰다. 초판은 6장이었으나, 2판은 17장으로 확대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신약과 구약의 유사성과 차이성, 예정과 섭리, 그리스도의 생애 등 새로운 내용이 들어갔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쓴 이래 죽을 때까지 이 책을 계속 수정 보완해 나갔다. 최종판은 1599년에 나왔고, 초판에 비해 5배 정도 늘어났다. 내용은 늘어났지만 초판에서부터 최종판까지 그의 입장은 시종일관했다. 저술 작업 이외에도 칼뱅은 인생에서 중요한 성과를 스트라스부르에서 얻었다. 페스트로 사망한 사람의 부인이었던 이들레트 드 뷔르와 결혼을 한 것이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보낸 시간은 칼뱅에게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모두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런 스트라스부르에서 수많은 십자가가 당연히 기다리는 제네바로 돌아가기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열정적인 파렐은 이번에도 칼뱅을 하나님의 저주로 협박하며 몰아붙였다. 칼뱅은 못마땅했지만 ‘주님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심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칼뱅은 돌아오자마자 권징을 포함한 교회 규율의 제정을 요구했다. 칼뱅이 초안을 작성한 교회 규율은 시의회에서 수정을 거쳐 채택됐다. 교회 규율에 의하면 교회직제는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네 가지 직분으로 구분된다. 목사의 직분은 공적인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 그리고 상담이다. 교사는 참된 가르침에 대한 책임을 담당하며, 신학적인 교육뿐 아니라 교회와 관련된 모든 학교 영역을 관장한다. 장로는 성도의 삶을 감독하는 사역을 한다. 집사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사역을 한다. 칼뱅은 12명의 장로와 목사로 구성된 종교국을 만들어 교회규율을 담당하게 했다. 이 종교국은 직접 처벌은 할 수 없지만, 권징은 할 수 있었다. 종교국의 권징은 세속 권력의 처벌로 그대로 이어졌다. 칼뱅은 이 종교국을 통해 신정정치를 구현했다. 그의 신정정치는 엄격했고 가혹했다. 처음 5년 동안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리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이 화형당하고, 76명이 추방당했다. 오죽하면 감방마다 죄수로 가득 차서 간수장이 시당국에 단 한 명의 죄수도 더 받을 수 없다고 통보할 정도였다.

제네바는 엄격한 개신교 도덕과 율법주의가 지배하는 모범도시로 찬양도 받았지만, 더 이상 활기찬 도시는 아니었다. 신성한 노동 이외에 노래, 춤, 카드놀이 등 모든 쾌락을 금지했다. 당연히 칼뱅에 대한 불만도 증가했다. 처음에 칼뱅의 지지자였던 사람들도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카드놀이 금지로 피해를 본 카드 제조업자 피에르 아모는 칼뱅을 “제네바를 프랑스인이 지배하도록 만든 자”라며 비방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속옷 차림으로 횃불을 들고 시내를 순회하며 칼뱅에게 용서를 구하라는 처벌이 내려졌다. 존경받던 제네바 시민이 굴욕당하는 광경을 목격한 시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당국은 성 제르베 교회 앞에 교수대를 세웠다. 그러나 반항과 충돌은 줄지 않았다.

칼뱅의 신학론에 대한 반발도 이어졌다. 칼뱅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따른다고 하는 예정론을 주장했다. 제롬 볼섹은 칼뱅의 예정론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복사판이며, 하나님을 죄의 근원이자 폭군으로 만들 뿐이라고 비난했다. 제롬 볼섹은 체포되었고 심문을 받은 후 추방됐다. 이후 장 트롤리에가 볼섹과 유사한 비난을 칼뱅의 예정론에 퍼부었다. 그런 와중에 칼뱅에게 ‘냉혹한 독재자’의 인상을 심어준 결정적 사건은 1553년 10월 27일에 있은 세르베투스의 화형 사건이었다. 세르베투스는 소 혈액순환을 발견한 유명한 의사이자 신학자이었지만, 삼위일체를 공공연하게 부정했다. 칼뱅은 그가 온다면 산 채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별렀다.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 와서 예배를 보는 도중에 체포되었고, 심문을 거쳐 화형을 당하였다. 이를 놓고 인문학자 카스텔리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성서에 나오지 않는 교리’ 때문에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다고 칼뱅을 맹비난했다. 카스텔리오를 옹호하며 독일의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쓴 ‘폭력에 대항한 양심’은 냉혹한 독재자로서의 칼뱅의 인상을 현대인에게 심어주었다.

이렇게 칼뱅은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고 나서도 적대자들에게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칼뱅의 단호하고도 관용 없는 개혁이 없었다면 제네바는 단시간에 성서에 따라 사는 종교개혁의 도시로 탈바꿈하지 못했을 것이다. 칼뱅은 죽기 전에 제네바에 아카데미를 세워 수많은 개혁주의 학자들을 배출해 개신교의 가르침을 유럽 전역에 전파했다. 존 녹스는 이런 제네바를 보고 “사도 시대 이후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로 찬양하기도 했다.

칼뱅은 자신의 적대자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결코 관용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평생 칼뱅은 서너 시간의 잠만 잤고 하루에 단 한 번의 검소한 식사를 했다. 그것도 일을 하면서 재빨리 해치웠다. 그의 몸은 온갖 병을 달고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그래도 그는 4000번이 넘는 설교를 했고, 270회의 결혼주례를 했고, 50회의 세례를 거행했다. 또 죽을 때까지 가르치며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칼뱅이 말년에 과로로 쓰러지자 동료들이 휴식을 권했다. 그때 칼뱅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내가 게으름 피우고 있는 것을 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런 칼뱅의 눈으로 볼 때 제네바 시민들은 나태하고 연약했다. 칼뱅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권징, 즉 채찍질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식 율법주의이지 사랑의 권고는 아니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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