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관상,기도에 관한)

[스크랩]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유테레사 2015. 1. 28. 21:18

제 1 장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제1절  관상 기도(Contemplation Prayer)

1. 관상이란 무엇인가?

  관상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contemplation은 라틴어 contemplatio에서 유래된 것으로 “실체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contemplatio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테오리아(θεωρ?α)로 데오레인(θεωρε?ν)에서 유래 되었다. 데오레인(θεωρε?ν)은 “의도적으로 어떤 사물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직접적인 경험을 명시하는 용어를 데오로기아(θεολοϒ?α)라고 했다. 이러한 어원적인 유추로 볼 때 관상이란 사고에 의한 분석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임재체험과 관련된 말이다.1)

  하나님께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어 성서는 히브리어의 da'ath를 번역하면서 gnosis(靈智)를 사용하였다.2) 이 히브리어는 “하나님 정신이 아니라 전인격을 포함하는 아주 친밀한 지식”이라는 강한 뜻을 갖는다. gnosis는 하나님의 신비적 지식이지만 결코 논리적이거나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이다.

  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갖는 하나님의 지식을 뜻하기 위하여 gnosis라는 단어를 사용(고전 12:8, 고후 6:6, 8:7, 엡 3:2~12, 골 1:25~28)하였다.3) 사도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신비적 지식을 말할 때 gnosis의 동사형인 Ginosken을 사용(요 14:7, 요일 4:8, 2:3~4, 요 14:6, 등 요한복음에서 56번, 요한서신에서 26번 사용)하고 있다.4)

  마지막으로 관상기도의 가장 모범적인 분은 예수님이시다. 관상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목적으로 한다. 즉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에서 그와 아버지와의 친밀함보다 더 인상적인 면은 없다.5) (요 5:19, 30, 14:10, 눅 6:12, 9:28~29, 막 14:36, 마 4:1, 마 14:13, 눅 22:42,)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다. 예수님의 관상의 전통은 완전하고 극히 아름답다.6)

  그리스 교부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와 니사의 그레고리 등은 신플라톤파에서 theoria(관상)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이것의 원뜻은 지식의 지적 시각(視角)을 뜻하며,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theoria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최고의 활동으로 간주하였다. 이 기술적인 용어에다 교부들은 사랑을 통하여 얻어지는 일종의 경험적 지식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da'ath의 뜻을 가미하였다. 이 theoria를 확대 이해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라틴어 contemplatio(관상)으로 번역하였고 이 뜻이 기독교 전통으로 내려왔다.7)

  관상기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기도의 단계들을 3단계로 나눌 수 있다.8)

  1). 구송 기도(Vocal Prayer)가 있다. 이 기도는 입술의 기도라고도 하며, 말을 강조하고, 읽거나 노래로 한다. 기도의 내용은 미리 만들어 놓은 것으로서, 보통으로 아름답고 영감을 주는 것이다. 자유로이 하는 구송기도도 있다.

  2). 묵상 기도(Meditative Pryer) 또는 명상(Meditation)이 있다. 이 기도는 정신이 중심이 되어 하는 기도이다. 정신은 하나님과 그의 경이로우심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성찰하고 숙고한다. 정신은 이해와 통찰을 추구한다. 묵상에서는 입술은 조용하고 정신은 활동적이다.

  3).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 또는 관상(Contemplation)이 있다. 이 기도는 마음과 의지의 기도이다. 마음과 의지는 하나님의 현존을 향하여 나아간다. 입술과 정신은 쉰다. 마음은 말없는 기도로 주님께로 나아가고 의지는 주님의 의지와 하나 되기를 추구하면서, 다만 단순히 주님을 응시한다.

  묵상기도가 어떤 주제에 대한 이성적인 추리를 강조한 것이라면, 관상기도는 이성적 사고보다는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자체를 의미한다.

  관상기도를 구송기도와 비교해 보면, 관상기도는 말들이 의미하는 것들이 진정으로 실제로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는 이 말을 초월해서 그분이 우리에게 현존하시고, 우리 안의 깊은 곳에 계시고, 우리는 그분의 현존 안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말 자체는 하나의 종소리처럼 우리를 잠에서 깨워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9)

  관상기도를 묵상기도와 비교한다면, 진리를 성찰하면서 달리는 묵상기도 대신에, 관상기도는 내재하시는 그분의 현존에 깨어 머물면서 그분을 응시하는 것이다. 묵상은 그림을 그리는 활동이라고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관상적 기도는 완성된 그림을 조용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화가가 묘사한 화가의 생각의 실체를 의식하고 알아들으면서 그림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다.10)

  관상은 “사람의 존재의 중심에서 알려지고 사랑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다”11) 우리가 이러한 자각을 신앙으로 추구할 때, 이것을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 pl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자각을 실질적인 체험으로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이것을 주부적 관상(ifused contemplation)이라고 한다.12) 그러므로 관상기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

        믿음과 희망과 열망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향해 나아갈 때. 이 관상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이 진정으로 현존하심을 아는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그분과의 접촉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다.

  2) 주부적 관상(ifused contemplation)

     그분이 대가 없이 거저 주신 은총으로 기도할 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현존에 대한 진정한 자각을 주신다.

  예를 들면, 그분은 사랑, 평화, 기쁨과 같은 성령의 열매(갈 5:22)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분의 현존을 참으로 자각하게 해주신다.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또는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자각하게 해주신다.

"구하시오,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열어 주실 것입니다." (마 7:7~11, 눅 11:5-13.)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2)

 

2. 관상(Contemplation)의 정의

  1). 무지의 구름에서 관상이란?

  무지의 구름의 저자(원저자가 저자를 숨김)는 저서 “무지의 구름”에서 관상은 천계(天界)의 일몰을 감상하는 유쾌한 신선놀이가 아니요. 끝임 없이 지저귀는 천상의 새소리도 아니다. 관상은 결코 강렬한 정서가 아니다.  “관상은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깨달음이다”.13)

  이같이 깨달음에는 아름다운 색조가 조금도 엿보이지 않고, 만족스러운 응답 같은 것도 전혀 없을 수 있다. 적어도 어떤 영성생활 단계들에서는 그렇다. 이 깨달음은 너무나도 생생해서 넋을 잃고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는가 하면, 오랜 기간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할 수도 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네 감정을 통해 전달된 경우에 두려움에 젖고 겸손해지는가 하면 무아경에 빠져 들뜨기도 하고 위압당해서 어리벙벙해하는가 하면 매료되고 환희 밝아지기도 한다. 이것이 때로 부드럽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유는 실제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살아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발적인 영혼을 단단히 거머쥐어서 삶 전체를 형용할 수 없고 필요불가결한 자질로 가득 채우며, 그리하여 영혼은 자신의 참된 목적으로 향하게 되었음을 느끼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란 언제나 영혼이 자기 고향으로 향하듯이 향하는 이 '타자(他者)' 에 대한 원초적인 감각이요, 영혼은 이것 없이는 생명을 지탱하기 불가능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관상에서 오는 황홀한 기쁨은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 본성상 말로 묘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설령 이 기쁨을 이야기하도록 허용한다 하더라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기 불가능하다. 그래서 신비가들은 대체로 이 환희를 암시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관상의 환희가 인간의 표현 능력을 철저히 넘어서는 것이라면 관상생활은 그렇지 않아서 무지의 구름 68-70장을 보면, “전부(all)”이신 “무(無 nothing)”가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은 신적 존재”이시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창조된 존재로서 온전히 영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본성상 창조된 인간 조건 속에서 사고할 수밖에 없다. 달리 사고하기는 불가능하다. 적어도 그 모든 조건을 한편으로 걷어치우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정화되고 준비된 상태에서 우리가 여행 끝에 마주치게 된 ‘무’와 ‘어디도 아닌 곳’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현존임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렇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무엇도 아닌 분’이요. ‘어디도 아닌 곳’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보이지 않고 완전히 어둠 컴컴한’ 바로 그 ‘무지’야말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앎이요. ‘풍성한 신적 빛’에서 비롯되는 무엇이다. 그리고 관상생활은 바로 무지의 앎, 보이지 않는 봄, 감지되지 않는 현존으로써 장차 도달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환희의 전조(前兆)인 것이다. ‘그러므로 은총으로 이 선물을 얻어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얻어 누릴 것이다!”14)

  2) 관상의 여러 가지 견해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관상은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깨달음이다."고 밝혔다.

  성 빅토르 리차드(Richard of victor. 1173년 사망)는 관상을 정의하기를 "지혜의 나타남에 대해 놀라움으로 정지된, 마음의 자유롭고 보다 통찰적인 응시"15)라고 한다. 그는 다시 명상과 대조하여 정의하기를 "관상은 지각된 사물 안으로 확장된 통찰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응시인 반면에, 명상은 사물에 대해서 열심히 추구하는 마음(지성)의 주목이며, 진리를 열심히 추구하기 위해서 사용된 영혼의 주의 깊은 응시라고 했다.

  십자가의 요한이 정의하는 관상은 “하나님의 은밀하고 사랑스럽고 평화스러운 느낌이 일어나게 하는 영감”16)이라서 일단 정착을 하기만 한다면 영혼을 불살라 버린다. 관상에서 "하나님은 영혼을 정화시켜 주고 비추어 주면서 영혼의 능력과 필요성에 따라 사랑과 지혜를 부어 주신다."17)  또한 관상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영혼에게 자신을 드러내며 통교를 시작하는 높은 곳에 (영혼이) 놓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관상의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조차 은밀하고 감춰진 것이다.18)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관상이란 그분의 지혜와 깨달음의 선물을 통하여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각별한 배려로써 길러 주시고 완성 시키시고자 우리 영혼 안에서 작용하시는 성령의 하시는 일"19)이라고 한다. 표현을 바꾸면 우리의 영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선물인 지혜와 이해를 통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도록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관상이라 한다.

  토마스 키딩(Thomas Keating)이 말하는 관상기도는 하나님이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이다. 진정한 기도는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하심과 중단 없이 우리를 고무하신다는 확신에 바탕을 둔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란 자기의 성찰 없이 성령의 영감이 우리의 영에 직접 주어지는 기도를 말하며, 다른 말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우리는 그 기도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기도(성령 안에서의 기도)가 전통적인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라 한다.20)

  토마스 키딩은 “관상기도와 관상 생활과를 구분한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주는 일련의 경험이라면, 관상생활은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그 상태 자체를 의미하며, 이때에는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서 움직여진다.”21) 이 말은 관상기도를 통해서 여러 기도 경험들을 한다고 해도, 그 열매는 관상생활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관상기도는 자신만의 개인적인 영역에서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기도의 열매는 일상의 삶 속에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관상기도는 내적인 변형의 과정이며,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관계이며, 우리가 동의만 한다면 하나님과의 일치로 인도하는 과정이다.”22)

  리차드 포스트(Richard J. Foster)는 관상기도를 “무언의 기도”라 했고,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23)라고 말한다. 또 무언의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24)이라고 한다.

  장로회 신학대학교 영성신학교수 유해룡은 관상기도란 하나님께서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오도록 자유롭게 자신을 열어놓는 상태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신비가 자기 자신의 내면에 부딪혀 옴으로서 기도의 주체자와 객체자가 하나가 되는 일치경험 상태이다. 그 상태는 지성적인 냉냉함이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heart-felt) 경험이요, 정감적인(affective) 경험이요, 분석적인 경험이 아니라 직관적인 경험이다.25)

  한해 두 차례씩 관상 수련회를 통하여 관상기도를 보급하고 있는 한신대학교 강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겸임교수 권명수는 관상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하는 보통의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이지요. 그런데 관상기도는 정반대의 기도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영혼 가운데 들어와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침묵 중에 묵상기도하면서 깊은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 가운데서 들어와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하신 말씀, 즉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는 말씀의 차원이지요. 주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나를 대신해서 기도하시는 것, 그것이 곧 관상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는 감정의 근원은 순수한 욕구나 순박한 의지”26)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순수한 믿음과 사랑을 통한 하나님과의 마음의 대화27)이며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명의 기도이고 믿음으로 받는 은총의 선물이다.

   관상기도란 기도의 신비를 단순하게 나타내는 기도이다.  관상기도란 예수님께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말없이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는 기도이다.  관상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는 것인 만큼 그리스도의 기도와 합쳐지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교리서 2724항)

  ?기독교 대백과 사전?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이거나 신비로운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 관상은 기독교적 체험의 모든 평범한 수준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상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극치이며, 다른 영성생활과 묵상과도 구별된다.28)

  ?기독교 영성 사전?에서는 "관상(Contemplation)을 기독교에서 사용될 때에,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정신이 추론적으로 기능하지 않으며 한 가지에 초점을 두고 단순하게 주의를 집중하는 상태가 되는 기도를 지칭한다."29)고 한다.

  지역교회 차원에서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으로도 충분히 관상을 행할 수 있으며, 오랫동안 기도를 지배해온 상상력이 없이 해석된 청원과 중보에의 집착에서 해방될 수 있다. 현제 중보 기도는 관상의 형태로 간주되고 있다.

  기독교적 관상에는, 그리스도, 그의 진리,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각되고 발언되고 행해진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기독교적 묵상이 필요하다. 묵상이 없으면, 관상은 특별히 기독교적인 활동이  되지 못하며, 신앙의 체계와 관련이 없는 듯이 보이는 초월명상과 더 가까우며, 영적 실재에 대한 의식의 증가로 이어지지 못하고, 실천하는 사람의 지적 감정적인 삶과 관계를 갖지 못한다.

  토머스 키딩은 "침묵이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이다. 그 나머지 언어는 잘못된 번역일 뿐이다." 라고 했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 속에서 이 말씀을 듣는다." 라고 했다.

  이러한 서방의 개념과 부분적으로 대등한 개념을 동방 정교회에서 찾아본다면 정교회 저자들은 이 상태를 '깨끗한 기도'(pure prayer)라고 묘사한다. 죄악된 생각들만 아니라 모든 생각을 깨끗이 씻어낸 기도를 말한다.

  은둔자 테오판(Theophan the Recluse)은 "관상의 상태란, 정신과 시각이 지극히 압도적인 영적 대상에 의해서 완전히 사로잡혀, 표면적인 일을 완전히 망각하며, 의식이 완전히 부재하게 되는 상태이다. 정신과 의식이 관상하는 대상 안에 완전히 몰입되므로, 의식이나 정신이 전혀 없는 것처럼 된다"30)고 말한다. 테오판은 이 관상의 상태를 '몰아의 기도' (prayer of ecstacy)31)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가 관상에 이르기가 쉽지 않은 것같이 관상을 이해하고 정의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 견해들을 정리해보면, 관상은 가장 높은 형태의 기도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이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 중심에서 기도하고 계신다.(롬 8:26)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동의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 기도자가 성령에 완전히 몰입되는 기도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일으키는 기도이다. 하나님에 대한 애정 어린 정신집중이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다.  등이다.

  이제 부족하지만 관상을 정의하고자 한다. ??관상이란 우리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동의함으로서 하나님과 연합(일치)을 이루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다.??

  이것을 다시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랑의 집중기도'(prayer of loving attention), 또는 '단순한 관심의 기도'(prayer of simple regard)라 할 것이다.

 

3. 관상 기도 (Contemplation Prayer)

  관상기도는 하나님이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이다.32) 그 영역 안으로 들어감은 대단한 모험이다. 그것은 무한으로 여는 것이므로 무한한 가능성으로 여는 것이다. 나 개인의, 자기가 만든 세상은 끝나고,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매일 매일의 경험으로 된다. 그러면서도 기도가 나타내는 세계는 평범한 생활의 사건들 속에서 잘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장은 하나님께서 초월 가능성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우리 자신의 기본적인 선(善), 즉 존재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다. 이 존재라는 선물은 우리의 참 자아인 것이다. 믿음으로 하는 우리의 동의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내 안에 태어나시고 그리스도와 우리의 참 자아는 하나가 된다. 우리가 내 안에 계시는 현존과 성령의 활동을 자각하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드러내는 것이다.33)

  모든 진정한 기도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과 그분이 중단 없이 계속적으로 우리를 고무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갖는 데에 바탕을 둔다. 이러한 뜻에서 보면 모든 기도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이다. 그렇지만 성령 안에서의 기도라는 용어는, 우리 자신의 성찰에 따른 중재나 우리 의지의 행위 없이, 성령의 영감이 우리의 영에 직접 주어지는 기도를 뜻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우리는 그 기도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에 대한 전통적인 용어가 관상(觀想, contemplation) 이다.34)

  우리는 관상기도관상생활과 구별해야 한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 주는 일련의 경험을 말한다. 관상생활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그 상태 자체를 말하며 이때에는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 움직여진다.

  1).  기도의 뿌리는 내적 침묵이다.

    사람들은 기도를 생각과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도 형태의 하나일 뿐이다. 에바그리우스(Evagrius)에 의하면 "기도란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기도 속에 생각들이 끼어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관상기도는 사고의 공백이라기보다는 사고로부터 이탈이다. 그것은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언어와 사고와 정서와 같은 심리적 상태를 넘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몸과 정서를, 즉 우리의 전 존재를 열어 드리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 의식(意識) 속에 있는 것을 거부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단순히 받아들이고는 그것들을 노력함으로써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서 그 너머로 가는 것이다.35)

  볼티모어 교리서에 보면 "기도는 마음과 가슴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다. 이 기도의 옛날 의미를 사용할 때 마음을 들어 올리는 이는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기도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들어 올리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의 감동에 의한 기도에서는 우리는 그저 들어 올리는 움직임에 우리를 맡겨 드리고 모든 성찰을 떨쳐 버린다. 성찰이란 기도의 중요한 전제 요소이기는 하지만 기도 자체는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내적 행위를 바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것이다.

  관상기도의 수련은 성령께서 인도하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 과정에 우리가 참여한다 함은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자기 부정(自己否定)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막 8:34)고 말씀하신다. 자기 자신의 부정은 우리가 자신의 지력과 의지의 기능에 의존하는 습관으로부터의 결별(訣別)도 뜻한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 중에 일어나는 평범한 생각은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께로 가는 데에 필수라고 여겼던 깊은 성찰과 영감조차도 떨쳐버릴 것을 요구한다.

  인간 정신은 생각하는 것을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고라도 아주 풍부한 성찰로써 이루어질 수도 있다. 사고 자체는 하나의 현존이 되는데 이 현존은 이해하는 행위가 아니고 주의 집중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 원리를 예수의 인격에 적용하면 이러한 주의 집중이 결코 예수의 인간성을 제외시키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주의 집중은 예수의 인격의 어느 특정 세부로 분산시키지 않고 그의 신적-인적 존재로서 예수의 인격 전체의 현존에 주어진다.

  2).  관상기도는 인격 관계를 통하여 형성되는 역동적 과정의 일부이다.

    관상기도는 전략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 관계를 통하여 형성되는 역동적 과정의 일부이다. 동시에 그의 기도와 삶의 방식에 어느 정도 적당한 양의 조직적 요소를 가미하면 그 과정을 진전시킨다. 그것은 마치 어린이가 잘 배합된 음식과 운동을 통하여 육신이 성숙해 가는 것과 같다.36)

  관상기도의 첫번째 효과는 무의식 속에 있는 에너지의 방출이다. 이 과정은 두 가지 다른 심리 상태를 유발하는데 그 하나는 영적 위안, 성령 은사, 심령 능력에서 오는 개인의 발전 체험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서(자아 지식)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부터 오는 인간적 약함의 경험이다. 자아 지식은 자신의 인격의 어두운 면을 의식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전통적 용어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무의식 에너지를 방출할 때에는 하나님께 헌신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오랜 신앙 습관이 있어야 안전하게 보호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만일 영적 위안이나 발전을 체험하게 되면 자만심으로 들뜨게 되며, 만일 영적으로 피폐한 자신을 깨달아 처참함을 느끼게 되면 용기를 잃어버리거나 심지어는 절망으로 빠져 들기도 한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계발해가는 것은, 자기 현양이나 자기 비하와 같은 정서적 생각에 부딪칠 때에 자신의 정신을 안정시켜 주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법이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자신의 영적 수련을 오로지 하나님께 바치도록 함으로써 발전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는 동정심으로 움직인 가슴이 밖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자신이 자신만의 영적 여정과 그 현상에만 집착하게 되는 우리의 뿌리 깊은 경향을 중화(中和)시켜 준다.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는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며,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시작하여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한 동정심을 실천함으로써 발전된다. 다른 모든 이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막 12:13) 하신 계명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남의 짐을 져 주는(갈 6:2) 실제적 방법이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판단하지 않는 것은 "저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요 13:34)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요 15:13) 것이다.

  하나님께 헌신하며 다른 이를 위하여 봉사하는 습관은 우리가 정서적 혼란에 빠질 때, 우리의 정신이 그 홍수 속에 빠지지 않으면서 무의식의 에너지를 방출하도록 도와주는 두 가지 둑이다. 그리고 이러한 에너지가 헌신과 봉사라는 두 둑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흐를 때 그 에너지는 영적 지각, 이해, 비이기적 사랑의 수준을 더 높은 수준으로 올려 줄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안정화 요소(헌신과 봉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의 빛을 신경 조직과 신체가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이것들은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일어나 그것들에 집착이 되고 강박적으로 되기 전에, 이 생각과 정서를 분별하게 해준다. 습관적 생각과 욕망의 속박에서부터 독립할수록 우리는 더욱 고요한 마음으로 관상기도에 들어갈 수 있다.

  3).  이탈(離脫)은 자기 부정의 목표이다.

    이것은 모든 현실에 대하여 무소유(無所有)의 태도(어느 것에나 마음을 두지 않고 초연하고 객관적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태도 : 역자) 인데 거짓 자아 체제(fllseself Wstem)의 뿌리를 꺾어 주는 속성이다. 거짓 자아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착각으로서, 뇌나 신경 조직 속에 저장되어 있는 습관적 행동 형태와 정서적 습관들이 쌓인 것이다.37)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그것들은 인생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어떤 상황에 부딪칠 때 컴퓨터 단추를 누르면 일어나듯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거짓 자아는 자기의 반응이 신앙적 동기를 가진 것처럼 교묘히 위장하기도 한다. 진정한 신앙적 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거짓 자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관상기도로 성령은 자아 중심적성향의 뿌리를 치유해 주며 우리의 의식 활동의 원천이 된다. 거짓자아가 아니라 성령의 영향 아래 자발적으로 행동하려면 과거의 정서적 프로그램은 지워지고 대치되어야 한다. 덕의 수련이라는 말은 이러한 낡은 프로그램을 지우고 복음적 가치에 따라 새 프로그램을 만들어 넣는 것을 지칭하는 전통적 용어다.

  4).  예수의 신성이 관상의 원천이다.

    거룩하신 분의 현존이 감싸 주시는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내면으로 관상하도록 이끌린다. 이것은 예수의 인성을 통하여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타볼 산에서 본 제자들이 겪은 상황과 같다. 그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러나 하나님 체험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체험이 아니다. 하나님 스스로는 경험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영적으로 체험될 수 없다. 그분은 어떠한 종류의 체험 이상이시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분이 신성한 체험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고 그 경험들을 초월시킨다는 말이다. 이러한 내성(內省)을 다르게 표현하면, 그분은 신성한 체험의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공허(空虛,  emptiness)의 체험으로 이끌어 주신다.38)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각(知覺)도 단지 그분의 현존의 섬광을 지각할 뿐이며 결코 그분 자신을 지각할 수는 없다. 거룩하신 빛이 인간의 마음에 부딪치면, 하나의 빛줄기가 프리즘에 부딪쳐서 여러 색깔로 나뉘듯이, 여러 가지 많은 양상을 떤다. 절대 신비이신 분의 여러 가지 다른 양상을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그것들을 볼 수 없는 빛이신 분 자신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자유로 활동하시도록 받아들이기 위해, 영적 위안을 털어 버리도록 마음이 끌리는 것은 성령의 끊임없는 끌어들이심이다. 더욱더 털어 버릴수록 더욱더 성령의 현존이 강해진다. 이리하여 절대 신비이신 분은 절대 현존이신 분이 된다.

  5).  성령은 성서와 일상생활의 사건을 통해 우리 양심에 말씀하신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부딪치는 이 두 가지 원천을 묵상하며 과거의 정서적 프로그램을 깨뜨림으로써 우리의 정신이 더욱 세련된 수준에서 듣게 해준다. 그러면 성령은 우리의 참 자아인 내면의 깊은 원천에서 우리의 양심에 말씀하시기 시작한다. 이것을 적절히 말하자면 관상이다.39)

  이러한 형태가 거룩한 변모에서 예로 제시되었다. 예수는 관상의 은총을 받아들일 준비가 잘되어 있는 세 제자를 데리고 가셨는데 이들은 내심의 변화에 가장 앞서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산에서 환시라는 감각으로 그들에게 접근하셨다. 처음에 그들은 위압당하였으면서도 또 매우 기뻐했다. 베드로는 그곳에 영원히 남아있기를 바랐다. 갑자기 구름이 덮이더니 그들의 환시가 감춰지고 감각에 공백이 오고 고요해졌지만 아직 주의 집중과 감각의 민감성은  살아 있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것은 실제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경배와 감사와 사랑이 한데 어우러진 자세였다. 하늘에서 들려 온 목소리는 성령의 현존에 대한 그들의 의식을 각성시켰다. 이 성령은 언제나 그들 안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 때까지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 내면의 공간은 신성의 빛으로 오신 현존으로 가득 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자 그들은 정상적 지각 상태로 돌아와 예수를 그전과 같은 모습으로 보았지만 이제는 의식이 변형된 믿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더 이상 인간으로만 보지는 않게 되었다. 그들의 수동적인 그리고 능동적인 지각 능력들은 성령으로 일치하여 하나님의 내적 말씀과 외적 말씀이 이제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의식을 얻은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은 계속적이고도 증가하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그들이 성서와 전례 때에 듣는 말씀들은 관상이라는 기도를 통하여 배운 것을 확인해 준다.

   "당신은 하나님을 발견하셨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 안에 당신의 현존(darshan)을 주실 때까지, 우리는 관상기도 중에 애타는 사랑으로 그분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자라시도록, 우리의 전 존재를 가득 채우시도록 해드린다. 또한 관상기도와 성령은사 쇄신운동(Charismatic Renewal Movernent) 사이의 밀접한 연관도 지적할 수 있다. 성령은사 쇄신 기도 그룹에서와 마찬가지로 침묵의 기도 안에는 사랑과 평화와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의 성령께 완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형태의 관상기도들 속에는 다 같이 우리를 성부께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성령의 열매와 은사에게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열어 주는 개방성이 있다.40)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영적인 실체, 우리 자신의 영의 실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의 실체이다. 관상적 기도가 성령과 그분의 행동과 그분의 은총에 우리를 개방한다는 의미에서, 또는 '그분의 현존을 자각하는 가운데 성령에 의한 우리 영의 정화와 치유로 우리를 남김없이 열어 준다'는 의미에서, 관상기도는 '참된' 기도이고, '영적'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관상기도를 성령기도(pentecostal prayer,)라 부르고, 성령기도를 관상기도라고도 부르는 이유를 지적할 수 있다.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위로자로 주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로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관상기도를 성령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요 14:16), 성령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영적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산(山)을 향할 뿐이다. 우리 각자는 모두 자신의 두 발로 순례를 시작해야 한다.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는 것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를 정말로 앞으로, 위로 이끌어 주는 것은 성령의 숨결이다. 우리를 계속해서 앞으로, 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비록 흐릿하게 보이지만 목적지에서 빛나는 주님의 영광이다‥‥ 그리고 때때로 안내서를 읽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가르멜의 전통에서는, 이 기도의 첫 단계를 '습득적 관상'이라고 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노력하는 어떤 선한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기도이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이 기도를 '잠심의 기도(거둠의 기도)'라고 했다.41)

        보수에는 이 기도를 단순성의 기로라는 이름으로 일반화시켰고, 탕퀘리(A. Tanquerey)도  이 이름을 채택했다.42)

        이 기도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들도 있다. “침묵의 기도”, “쉬는 기도”, “단순한 하나님 현존의 기도”, “사랑의 집중기도” 그리고 “마음의 기도” 등이다.43)


4. 마음의 기도

        "마음과 마음이 말한다."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마음의 기도는 친밀한 기도이다. 그 기도는 어린아이가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기도요, 애정이 깃든 기도이다44). 암탉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모으듯이, 우리는 마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에게로 모아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따뜻하게 돌봐 주시며 사랑해 주시도록 할 수가 있다(눅 13:34)

  1). 마음의 기도는 "아바" 기도이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부르게 하셨느니라" (갈4: 6)고 했다. 마음의 기도의 시금석은 예수님의 '아바' 체험이다.45)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현저하게 눈에 띄는 것은 예수님께서 체험하셨고 가르치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깊고 개인적이고 친밀한 우리와의 관계이다. 물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시 103 13).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아버지로 묘사한다. 자식을 품에 안은 아버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 로 자식들을 이끄시는 아버지 , 그리고 허리를 굽혀 자녀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아버지로 묘사되어 있다(호 11:1-4).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모습으로만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머니라는 말도 사용하신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사66: 13).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깜짝 놀라는 것은 하나님의 부모 같은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새로운 개인적이고 친밀한 방법으로 부르라는 권유이다. 제자들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그들의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반응에 말문이 막혔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저 이렇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눅 11:2).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했던 충실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같이 친근하게 하나님을 부른 것이 엄청난 충격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바( abba )와 이마( imma ) -아빠와 엄마- 는 유대의 어린이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다. 그리고 아바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친근한 용어이기 때문에 온 우주의 위대하신 하나님을 지칭할 때 그 누구도 그 말을 감히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하신 것이다.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유대문학을 다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아바로 부른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놀라운 친밀함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열두살 때 이미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의 육신의 부모님께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2 : 49)라고 말씀하셨다. 18년 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 다시 변화산 위의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막 9:7)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변화 산에서의 놀라운 변화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친밀감을 체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겟세마네의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체험하셨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 14:36)

   이것들은 물론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실제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깊고 친밀한 관계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사역 속에 깃들어 있다. 존 달림플(John Dalrymple)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계속적인 아바 체험이었다."

   존재론적으로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절대적으로 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으로 계시는 동안 아셨던 아버지 하나님과의 그 친밀한 관계를 우리도 똑같이 누리도록 초청 받는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무릎에 앉아 그의 사랑과 위로와 치유와 힘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웃을 수도 있고 마음대로 공공연하게 울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 품에 안길 수도, 위로를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경배할 수도 있다.

  2). 우리 안에 내주하신 성령께서 하시는 기도

    마음의 기도란 과연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여 기도하시는 것이다.46) 옛 사람들은 기도의 세 단계를 말하였다. 입술의 기도, 지성의 기도, 마음의 기도가 그것이다. 이러한 범주화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마음의 기도에 도달하게 되면 성령이 기도의 주도자가 되시는 수준에 이미 들어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음의 기도를 만드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고, 그것을 계속하게 하시는 분도 바로 성령이시다.

   마음의 기도에 들어서면 우리는 우리 능력의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해도 말문이 막히고 만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애는 쓰지만 그 표현이 실재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을 뿐이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개입하시는 곳이 바로 여기다.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양자의 영을 받아 그 영을 통해  '아바 아버지' 라 부른다(롬 8:17-26).

   조지 버트릭 (George Bunrick)의 말대로 우리는 마음의 기도를 통해  '존중하는 친구 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과 가장 깊고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되면 "마치 태양 빛을 완전히 반사할 수 있는 고요한 연못의 물같이" 된다

  3). 마음기도의 다양한 표현

    마음의 기도를 표현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마음만큼이나 무한하고 다양하다.47) 그러므로 성령의 이러한 역사를 너무 세심하게 분류하거나 구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성령께서 마음의 기도를 통해 자기 백성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보다 일반적인 몇 가지 방법을 언급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주시는 특별 계시의 느낌과 말씀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종종 '레마'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저 '말' 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실 때, 바로 레마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마4 : 4). 마찬가지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할 때, 역시 레마라는 단어를 사용했다(엡 6:17).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은 흔히 '말씀 속에 있는 특별한 말씀'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말씀 속에 있는 어떤 특별한 구절이 개인의 상황에 새롭게 적용되는 경우를 말한다. 때때로 나는 그런 경험을 할 때 과연 하나님께서 두뇌의 창조적인 요소를 통해 여러 가지 사상과 통찰력을 훌륭하고 새롭게 결합하여 의식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시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하나님 말씀의 생동력' 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서 우리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특별한 레마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오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된다. 이런 경험을 자주 하다보면 우리의 마음이 점점 더 하나님의 마음속에 깊이 이끌리게 된다.

    (1) “방언(Glossolalia)”은 마음의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

    이 경험은 매우 흔한 것이며 20세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1세기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세대, 거의 모든 모임이 어느 정도는 성령의 이 은사를 경험해 왔다.

   방언를 사용해야 할 이유와 용도는 많이 있다. 그 중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성령 안에 놓임을 받기 위함이다. 그것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영이 영을 감동시킨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적인 능력을 손상시키지 않아야 이성적인 것을 초월한다. 우리는 천상의 언어를 통하여 천상의 것들에 참여한다. 그러나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우리의 연악하고 더듬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기도 언어'라고 했다.

    (2) “입신”도 마음의 기도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에 붙잡히는 체험으로서 잠시 동안 의식을 잃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무아경에 들어가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바닥이나 마루에 조용히 눕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이러한 체험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짓된 것이 많다) 언제나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체험의 결과로 영적 교제가 깊어지고 거룩한 사랑이 증가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깊은 내적 치유를 체험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은사를 받아 보지 못했지만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다. 

   바닥에 넘어지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매번 그들은 아주 평안하고 매우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평화가 그들에게 임하는 것 같았다. 분명히 영혼의 기도는 그 시간 계속해서 진행된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영이 영과 통하는 기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3) “거룩한 웃음” 도 마음의 기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성령의 기쁨은 높고 거룩한 환희의 웃음이 퍼져 나을 때까지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저 샘솟듯 솟아나는 것 같다. 때때로 이 기쁨은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중에 체험하기도 하지만, 모인 회중에게 임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것은 마땅히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웃음이란 것은 결국 공동체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웃는 사람들이 술 취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 그들은 취한 것이다.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한 것이다 이 체험은 중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중단되기를 원하겠는가? 그것은 성령께서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것이다. 종종 어떤 사람을 오랫동안 짓눌러 왔던 슬픔과 애통함이 은혜를 받고 즉각적으로 치유되는 경우도 있다.

  거룩한 웃음은 좋은 의미의 전통적인 가가대소와 종류가 다르다. 하지만 먼 사촌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진정한 웃음, 진정한 기쁨은 다른 것들을 희생함으로써 생기는 값싼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늘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것은 우리를 치유하고 온전케 하며 우리의 기쁨을 위해 주어진다. 절대로 두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웃음의 심리와 현상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 거룩한 차원은 단지 그 실재를 강화시키고 심화시킬 뿐이다. 그것은 기쁨과 감사로 받는 은혜인 것이다.

   나는 마음의 기도가 오직 무아경의 상태에서만 일어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종종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영적으로 뜨거워지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더 사모하게 되며, 하나님의 길을 더 배우고 싶어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날그날의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더욱더 준비를 잘 갖추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다리거나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기대하거나 자녀나 배우자와의 시간을 몹시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의 기도의 일상적인 재료들이다

   (4). 사랑의 반응

   마음의 기도는 사실상 우리의 마음에 대한 성령의 선행적 사역에 대해 우리가 반응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의 민감한 반응 또한 중요하고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마음의 기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나누면서 나는 방법이나 기술을 말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은밀한 역사를 더 발전시키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더 증진시키자는 것이다.  귀용 부인은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마음의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 기도하는 어떤 고상한 방법을 가르쳐 주지 마세요. 인간이 꾸며 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

   마음의 기도에 들어가는 첫 번째 방법은 단순한 사랑에 의한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들어와 꾸밈없이 정직하게 하나님께 말하라.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너무나 두렵고 너무나 사랑으로 충만한 나머지 말이 안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브레넌 매닝 (Brennan Manning)이 말한 대로   '수용된 사랑의 지혜'를 경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일 당신의 생각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지면 당신이 불렀던 하나님의 그 특별한 이름을 단순히 부르기만 하라. 그러면 혼란했던 생각들이 없어질 것이다.

   기도하다가 잠이 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안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마음 바로 옆에 있다는데, 잠자기에는 너무나 좋고 안전한 장소가 아닌가! 「무지의 구름( The cloud of Unknowing )」을 쓴 익명의 저자는 "만일 기도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했다.

   "아바, 저는 아버지의 것입니다" 하는 기도는 완전한 신체 리듬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불과 네 어절로 되어 있어서 단숨에 쉽게 기도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비슷한 기도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

   우리는 물론 마음과 혼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이 차가워지고 굳는 것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도 감동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에도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을 때 과연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 가지 먼저 당신이 하나님을 초청하여 당신의 마음속에 사랑의 불을 붙여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고통을 드러내어 달라고 요청하라. 그러면 당신이 잠깐만이라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될 때 그 고통은 다시 시작될 것이며,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 앞으로 다시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당신에게 충분한 처방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또 있다. 당신에게 존단(John Donne)의 기도를 소개하고 싶다. 그 기도는 "삼위 하나님이시여, 제 마음을 두들겨 주옵소서"라는 기도다. 이것은 그가 쓴 소네트의 첫 행이다. 존단은 이 시구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온유하심으로도 자기를 회개시킬 수 없었다는 점을 안타까이 묘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 우격다짐을 해서라도 자신을 사로잡아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주님, 주님의 능력으로 저를 깨뜨리고, 때리고, 태워서 새롭게 하여 주소서." 분명히 이것은 강력한 기도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도이다.


제2절 관상이 아닌 것

   사람들 마음속에는 관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잘못된 인식이 많다. 그러므로 관상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무엇이 관상인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관상은 긴장 해소 훈련이 아니라는 것이다.

   관상을 통해 긴장이 해소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수 효과인 것이다.  관상은 일차적으로 관계성이므로 지향(指向)성을 갖는다. 관상은 하나의 기술이 아니고 기도이다.48)

    우리가 "기도합시다."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갑시다." 혹은 "우리가 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합시다."라든지, 혹은 "하나님과 가진 관계를 실습합시다."라는 뜻이다. 향심 기도49)는 발전하고 있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수한 믿음의 수준으로 옮겨 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순수한 믿음이란 정신적 자아 수준에서 하는 논리적 묵상의 수준을 넘어서 직관적 수준의 관상으로까지 옮겨 가게 하는 믿음이다. 향심 기도(Centering payer)는 환각제를 주입했을 때 일어나는 것과 같은 "뜬 기분 상태"를 유발하려고 구상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최면의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관상기도로 이끌어 주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에 향심 기도는 관상기도라는 사다리의 첫 단이라 볼 수 있다.

2. 관상기도가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열거한 성령의 은사들이 이 시대에 다시 쇄신되어 왔다. 이러한 선물은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쓰여지기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관상적인 동시에 또한 은사를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관상적이 아니면서도 하나나 둘의 은사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50) 관상기도는 믿음, 희망, 사랑의 성장을 깊게 해주며, 영혼의 실체와 그 기능들의 정화, 치 , 성화를 도와준다. 은사는 지역 공동체의 건설에 쓰이도록 주어지기 때문에, 영적 여정에 진보되지 않은 사람에게도 주어질 수가 있다. 방언의 은사는 일차적으로 그 사람의 개인 성화를 위해 주어질 수 있는 은사라 볼 수 있다. 방언으로 기도할 때 기도하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은사를 관상기도의 서곡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른 은사는 성령 안에서의 쉼(testing in the Spirit)의 경험을 의사소통하는 능력이다. 만일 관상의 경험을 조금 가지고 있다면 이 쉼을 주입된 평정(平靜)(i recollection)이나 정적(靜寂)의 기도(prayer of quiet)(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구분하는 기도의 단계들 : 역자 주)의 선물로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쉼에 저항하고 싶으면 저항할 수 있다. 그러나 받아들였을 때에는, 정상적인 감각 기능이 일시 가볍게 정지되어 자신의 몸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듯한 상태를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 관상적 경험을 전혀 가져 본적이 없는 사람은 아주 큰 기쁨을 느끼며 넘어지고는, 오랫동안 누운 상태로 머물 수가 있다. 마치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는 것처럼 수평으로 뒤로 넘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작은 벤치에 부딪친 뒤 바닥에 아주 심하게 넘어졌지만 전혀 다치지 않고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방언의 은사와는 달리 다른 은사들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서 주어진다. 은사들 중에는 방언의 해석, 예언, 치유, 지혜의 말씀, 영감적 가르침, 사목의 선물들이 있다. 예언은 전혀 거룩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질 수도 있다. 고전적 예가 "발람" 선지자로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는 말씀을 하는 대신 임금이 듣기 원하는 예언을 했던 것이다. 구약 시대에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다. 요즘에 많은 성령 은사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사람들이 그 은사들에 흥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은사들이 그 사람의 성덕이나 기도 단계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 은사들은 관상기도와 같지 않으므로 그 은사를 가진 사람을 자동적으로 거룩하게 해주지 않는다. 그와는 오히려 반대론 그 은사에 집착하게 되면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된다. 은사를 행사하는 데에 정서적 요소가 작용하기도 한다. 가톨릭 전통에 따르면 곧고도 좁은 관상기도가 성덕에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길이다. 은사는 관상의 길을 가는 데에서 우발적으로 혹은 이차적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만일 이 은사를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이 은사들을 자신의 영적여정에 잘 조화시켜 넣어야 한다. 이러한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영적인 여정이 진보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이유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변형의 과정은 믿음, 희만 사랑의 성장에 의존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그 성장의 열매이며 또 그 성장을 지속시켜 주는 것이다. 지금은 바로 성령 쇄신 운동이 관상기도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령 기도 그룹들이 그들의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 갈 것을 크게 요구하고 있다. 그들의 기도 모임에 침묵하는 기간을 도입하여 기도의 나눔이 내적 침묵과 관상에 기초를 두도록 하여야 한다.51) 지금 많은 기도 모임에서 이렇게 하려는 움직임들이 있다. 만일 이러한 새로운 시도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 그룹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적인 여정에서는 머물러 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룹들은 관상기도의 수련이 가져다주는 진보적인 성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3. 관상기도는 초감각 심리현상과 같은 의사(疑似) 심리현상이 아니다.

  관상기도는, 어떤 현상이 생기기 전에 그 현상을 미리 알게 된다든지,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안다든지, 심장 박동이나 호흡과 같은 신체 과정을 조종한다든지, 육체 이탈(肉體離脫)경험이나, 몸이 떠오른다든지, 기타 다른 초감각 심리 현상과 같은 의사(疑似) 심리 현상이 아니다. 의식의 심령 수준은 정신적 자아 단계보다 한 수준 위에 있고 이 정신 자아 단계는 현재 인간 발달의 일반적인 수준인 것이다.52)

  어쨌든 간에 위와 같은 심령 현상은 케이크 위에 얹는 프로스팅(케이크 장식용 크림 : 역자 주)과 같은데 우리는 이 프로스팅만으로는 생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령 선물을 과대평가하거나, 성덕(聖德)이 초심리 헌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떠오름이나 음성을 듣거나, 여러 가지의 환시는 어떤 성인들에게서 나타나기도 하였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러한 경험들을 하였다. 이러한 선물을 가지게 되면 겸손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기독교 전통에서는 가능한 한 이러한 선물을 피하도록 권하고 있다. 과거 경험으로 보면 그 선물이 비상할수록 그것을 털어 버리기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러한 특별한 선물을 주셨다는 은밀한 만족감에 사로잡히게 되며, 특히 이 선물이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뜨일수록 더 그렇게 된다.

   근래에 와서 심령 선물을 경험한 사람들이 눈에 뜨이게 늘어나고 있다. 육체 이탈 경험을 한 사람 즉, 그들은 잠을 자거나 기도 중에 자신의 몸을 떠나서 집안을 떠다니는 경험을 하였다. 콜로라도에 살고 있는 어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매사추세츠의 옛집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의사 심리 현상이 아무리 강력하다 하여도 우리 자신이 이것들로 해서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리거나 우리의 기도 시간이 산란하게 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인내하면서 기다리면 이 현상들은 지나가 버린다. 만일 향심 기도 중에 이러한 일이 생기면 즉시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가야 한다.

  세상에는 호흡, 심장 박동, 체온과 같은 생리적 기능들을 직접 조절하도록 개발하는 방법들이 실제로 있다. 나는 전에 호흡 조절법에 관하여 읽은 어떤 젊은 남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호흡을 중단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어떻게 다시 호흡을 시작하는가에 관하여는 읽지 않았다. 그는 다시 깨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독자가 만일 심령 현상에 관심이 있다면 인정된 지도자의 감독하에 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비상한 심리적 혹은 심령의 힘은 어떤 규율에 따라 수련함으로써 개발될 수 있는 인간적인 능력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성덕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무슨 커다란 영성 발전의 표지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프란치스코 수도승인 쿠페르티노의 요셉 성인은 이 세상에 알려진 부양(浮揚, levitation)자 중에서 가장 놀랄 만한 사람이다.53) 그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여서 그의 일생 중 어느 시기에는 하나님이란 단어만 들어도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교회 안에 있을 때에는 천장까지 오르곤 하였는데, 이것은 같은 수도원의 동료 수도자들에게나 경배에 참여하는 방문객에게도 정신을 산만케 하는 일이었다. 그에 관하여 여기에 믿을 만한한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언젠가 수도자들은 100피트나 되는 성당 첨탑에 커다란 십자가를 설치하려고 하였다. 보통 부양자들이 하는 것처럼 요셉은 기쁨으로 큰 소리를 지르며 떠 올라갔다. 그는 반 톤도 넘는 그 십자가를 붙잡고 첨탑으로 떠올라 정해진 자리에 얹고는 땅으로 돌아왔다. 그의 장상들은 초능력행위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요셉에게 중단하도록 명령하였다. 가장 영성적인 선물을 포함하여 어떠한 종류의 놀라운 선물의 행사에는 어느 정도의 자아(自我)가 끼여 들게 마련이다. 요셉이 부양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고는 깊은 우울에 빠졌었는데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분명한 영혼의 밤이었다. 그를 성인으로 만든 것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따른 순명에 있었던 것이며 그가 날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일이라면 비행기도 새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의사 심리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시는지 아닌지는 우리 인간이 분별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

   14세기의 빈센트 페레라는 사람은그 당시에 유명한 기적 연출가였는데 그는 세상이 끝날 때가 되었다고 설교하고 있었다. 한번은 장례를 치르려고 운반하던 시신을 사람들이 그에게로 데리고 왔다. 빈센트는 의례대로 마지막 날에 대하여 설교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이 때를 이용하여 세상이 곧 끝난다는 것을 경고하는 증거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고의 증거로 그 사람을 죽음에서 살리겠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죽었던 사람은 다시 일어났지만 세상 종말은 결국 오지 않았다. 모든 예언은 조건에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경고에 대하여 꼭 그대로 따르실 의무는 없으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개선할 때에 자신의 계획을 바꾸어버리실 수도 있으신 것이다. 예언자들은 페레처럼 뒷일을 혼자 뒤집어쓰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것이 그들 직분에 따라오는 위험성인 것이다.

4. 관상은 신비 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비적 현상이라고 하면 신체 탈혼, 외적 혹은 내적 환시, 외적 말씀, 상상으로 주시는 음성이나 사람의 영(靈) 안에 새겨 주시는 말씀 등과 같이 그 사람에게 특별히 은총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일들을 말한다. '가르멜의 산길'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극단적으로 외적(가시적)인 것에서부터 극단적으로 내적인 것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영적 현상을 거부하도록 제자들에게 훈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순수한 믿음만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가장 지름길인 것이다.54)

  외적 음성이나 환상은 잘못 이해될 수 있다. 성인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잘못 이해하기도 한다. 지적 내용들을 가진 하나님의 의사 전달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심리와 문화적 조건을 통하여 여과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여과 과정을 거치는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의사 전달은 약 80퍼센트는 믿을 만하고 약 20퍼센트는 믿을 만하지 못하다. 어느 특정한 의사 전달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확실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만일 누가 사려 깊은 분별을 거치지 않고 이것을 따르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어떤 사람이 받은 어느 특정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에 대하여는 보장이 없다. 만일에 그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상상, 선입견, 정서 체계에 의해 왜곡될 것이 거의 확실한데, 상상이나 선입견이나 정서 체계는 그 메시지를 수정하거나 상당히 바꾸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순교자적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는 어느 성녀의 예를 들어 보자. 그 성녀는 정말로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순교하지 않고 병상에서 죽었던 것이다. 그 성녀는 죽어 가면서 "하나님께서 과연 약속을 지키시지 않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유혹을 받았다. 물론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충실하시다. 그러나 우리가 그 메시지를 받을 때에 우리의 상상으로나 이성으로도 그것을 올바로 이해할 것을 그분은 보증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 성녀에게 피의 순교를 할 만큼의 사랑을 가지고 죽을 것이라고 뜻하셨는지 모른다. 그 성녀의 순교자적인 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피의 순교와 같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메시지를 받는 사람의 자구(字句)적 해석에 얽매이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이해한 것이 바로 하늘에서 들려 온 소리가 분명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자신을 속일 가능성을 그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향심 기도 중이었다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서 문제를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든 성사(聖事)는 어떠한 환시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십자가의 요한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참다운 하나님의 의사 전달은 한순간에도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환시에 대하여 지나치게 생각하면 처음에 뚜렷하게 받았던 의미를 손상시킴으로써 더 나빠지게 할지언정 더 좋게 만들지는 못한다. 숙고하는 것보다는 진지한 영적 지도자와 상의하여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다루거나 너무 가볍게 다루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에 그 메시지가 무엇을 하라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기에는 너무 중요하므로 제일먼저 경험을 가진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 분별을 하도록 해야 한다.

   환시나 음성이나 유추의 과정보다는 기도 중에 성령이 암시하는 내적 인상이 더 신뢰성이 높은데, 이 암시는 부드러우면서도 끊임없이 마음이 끌리는 그러한 것이다. 그 상황이 더욱 중요할수록 우리는 더욱 타당한 이치에 귀를 기울이고 또 영적 지도자와 상의해야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므로 관련된 모든 표지들을 살펴본 다음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55)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확실한가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걸림이 되는 자신의 내적 장애가 무엇인가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이제 신비적 은총의 문제를 살펴보자. 그것들은 우리의 심리와 너무 복합되어 있어서 가장 분별하기 힘들다. 신비적 은총이란 우리의 기능들 안으로 하나님의 현존이 유입되거나 그분의 현존의 광채가 우리를 감싸는 것을 말한다. 신비적 기도의 수준에 관하여서는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이 잘 기술하였다. 여기에는 주입된 평정, 정적의 기도, 일치(주님과)하는 기도, 온전한 일치의 기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형으로 이루어지는 일치(transforming unirnl) 등이 포함된다. 나는 여기에서 관상이라는 용어와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신비적 은총을 신비적 기도의 요소와 분간하고자 한다.56) 관상적이면서도 앞서 기술한 신비적 은총의 경험을 거치지 않고도 변형으로 이루어지는 일치가 가능한 것인가?

   이것이 몇 년간 나를 궁금케 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관상에 있어서 하나님 은총이 유입하는 경험을 체험하면, 이것은 관상기도의 선물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시로 일반적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여정에 앞서가면서도 하나님의 체험과 같은 관상기도의 은총을 전혀 가져 보지 못한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 되었다. 관상적이 되기 위하여 삼십 년이나 사십 년 동안 수도원에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그들 중에는 자신의 삶이 엄청난 실패였다고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육십이나 칠십대가 되어서도 그러한 체험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아주 잘못된 것으로 믿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으면서도 가장 작은 신비적 은총 하나라도 받았다는 내적인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경험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아마 그 사람들이 관상기도에 관하여 잘못 가르쳐졌거나 혹은 그들이 초기 신앙생활 중에 이미 은총 체험을 하였지만 잊어버렸거나 몸에 배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 뒤 내 마음을 바꾸었다. 나는 관상기도의 체험을 관상기도 그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57) 나는 하나님 현존의 광채를 경험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살아온 루드 버로우라는 한 가르멜 수녀의 글에서 나와 똑같은 경험을 보고 기뻤다. '신비적 기도의 지침서'라는 책에서 그 수녀는 신비주의로 오는 빛과 신비주의에서 나오는 빛을 구별하도록 제안하였다. 이것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전 관상 여정이 어떻게 하여 그들이 마침내 변형할 때까지 감추어져 왔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그 수녀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다. 하나는 원기가 왕성하고 활동 수도 단체에 속해 있었다. 다른 하나는 사십 년간 관상기도의 규율을 성실하게 지켰으나 관상기도의 어떤 경험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봉쇄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둘은 결국에 변형적 일치를 경험하였다. 루드 버로우는 신비적 은총은 하나의 선물로서 다른 사람에게 영적 길을 설명해 주기 위해 어떤 특정 신비가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어떻든 그의 가설은 신비주의의 기본은 순수한 믿음의 길에 있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었다. 십자가의 요한에 따르면 순수한 믿음이란 그 영혼에게 하나의 어둠의 빛줄기이다. 그것을 감지할 인간의 기능은 없다. 그것은 그것을 감지할 인간 기능들을 넘어선 아주 깊은 곳에서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자신의 삶 안에 맺어진 열매를 보고 그 현존을 짐작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그 빛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분의 어둠의 빛을 비춰 주시는 것이다. 어쨌든 나의 경험으로는, 아주 열정적인 관상 생활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했거나 아니면 사목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토마스 키딩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는 관상 봉쇄 수도자 중에 데레사나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신비 체험을 한 수도자는 5퍼센트도 안 된다.”58) 그들은 일반적으로 감각의 어두운 밤이나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한다. 그들에게 위안은 잘 찾아오지 않고 또한 멀리 있는 것 같다. 세속에 있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생존하기 위하여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수도자들이 수도회로부터 봉쇄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받고 있다고 판단하시어, 봉쇄 수도자들을 세속에 있는 사람들만큼 돕지 않으시는지도 모르겠다.

   관상기도의 기본은 무엇인가? 순수한 믿음의 길이다. 그 외 아무것도 없다.59) 당신이 꼭 그렇다고 느낄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을 수련해야만 한다.



제3절 무지의 구름과 관상

  14세기 말의 고전인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60)에서는 집중기도에 대해 강력하게 언급하며, 그 기도의 기초를 기독교의 관상적 전통 안에 둔다. 버젤 페닝턴(Basil Pennington)은 『무지의 구름』의 주요 주제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61)

  · 만일 우리가 다른 것은 모두 잊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면(이것이 바로 관      상의 일이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하나님 체험을 하게 하신다.

  · 활동적인 봉사 생활의 소명을 받은 신자들도 이따금 활동을 중지하고 묵상과 하나      님의 교제에 힘써야 한다.

  ·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무지의 구름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의 임재를 믿을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 사랑 안에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그 사랑은 다른 모든 소원과 애착      을 버리고 하나님의 불가해성이라는 암흑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게 만들만큼 강해      야 한다.

  ·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은 지금까지의 당신이나 현재의 당신을 보시는 것이 아니      라, 당신이 장차 되고자 하는 모습을 보신다.

  · 우리 영의 굶주림과 동경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로 변화된 영은 사랑에 의해 하나님을 포용할 수 있다.

1. 간단한 단어 사용과 이탈(detachment)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기도하는 동안에는 간단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생각, 모든 개념, 모든 심상을 "망각의 구름"(cloud of forgetting) 밑에 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62)

만일 당신의 모든 소원을 정신이 보유할 수 있는 하나의 간단한 단어 안에 모아들이기를 원한다면, 긴 단어보다는 짧은 단어, 한 음절로 된 단어를 선택하라. 하나님이나 사랑 등의 단어가 적절하다.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 단어를 선택하여 정신 속에 담아두어, 어떤 일이 있어도 그곳에 머물게 하라. 당신이 갈등할 때나 평화로울 때에, 그 단어가 방어물이 되어줄 것이다. 주위에 있는 어두움의 구름을 물리치기 위해서 그 단어를 사용하라. 모든 분심을 억제하며, 그것들을 당신 밑에 있는 망각의 구름에게 맡기라.

그 단어가 분명한 생각이나 현실적인 소리가 없는 완전히 내면적인 것이면 좋다.

  그 단어로 기도할 때에는, 그 단어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며, 그 단어가 어떻게 들리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말라. 다만 그 단어와 함께 거하라. 저자는 무지의 구름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과 다른 모든 것을 망각의 구름 속에 집어넣는 것을 구분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어떤 피조물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물질적인 것이거나 영적인 것이거나, 그것들이 처한 상황이거나 행동이거나, 선한 것이거나 악한 것이거나 어떤 피조물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일을 하는 동안에는 그것들을 모두 망각의 구름 밑에 묻어야 한다.

  이것이 관상적인 영적 여행을 하는 동안에 요구되는 이탈의 정신이다.

어떤 생각이 계속 당신을 괴롭히면서 당신이 행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오직 한 단어로 대답하라. 만일 당신의 정신이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그 단어의 가치는 단순성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라. 그렇게 하면, 그러한 생각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생각들을 발전시키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즉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을 인정하고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집중기도와 관련하여 크게 도움이 될 놀라운 통찰들이다. 집중기도의 세번째 지침은 "어떤 생각을 의식하게 될 때마다 부드럽게 가만히 그 거룩한 단어를 상기하라"이다. 여기에서의 통찰은 부드러움, 하나의 단어, 그리고 이탈의 중요 점에 있다.63)

  예를 들어 보자 : 만일 내가 방 안에 있는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 밖으로 나가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나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정중하지 못한 태도일 것이다. 나는 그저 대화를 추진한다. 거룩한 단어의 역할도 이와 같다. 그것은 우리의 의도를 하나의 일에 집중시켜주며, 다른 모든 것을 지나치거나 당분간 한쪽으로 밀어두게 한다.

  『무지의 구름』에서는 기도의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교사가 학생에게 방법을 가르쳤었고, 그 방법에서 파생된 것들은 항상 기록되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상세하게 설명된 방법론을 알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가르칠 때, 많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질문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과거에 방법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는 관습 배후에 놓여 있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특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책을 대한다. 저자는 독자들의 사고방식이나 질문들을 모두 예상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워크샵이나 개인적인 발표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2). 자아의 상실, 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의식

   '자아의 상실' (loss of self)이라는 개념은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 될 수 있다.

우리는 관상 작업과 그것들의 모조품들. 예를 들면 백일몽이나 환상의 차이점을 다루려 한다. 이것들은 호기심이나 낭만적인 정신에서 생겨나는 데 반해, 사랑의 동요는 성실하고 겸손한 마음에서 솟아난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대답하려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의도이다. 만일 의도가 호기심, 또는 하나님 안에 쉬는 것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최종 결과는 진정한 관상이 아니라 모조품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의도가 진지하고 겸손한 마음에서 생겨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요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이것은 참된 관상이다. 우리는 어떤 메시지나 사상이나 개념을 얻으려 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원한다.

  이제 저자는 우리의 감정들과 접촉하는 것의 중요성을 제시한다.64)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만이 슬픔의 깊고 보편적인 이유를 이해한다. 이 외에 다른 동기들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뿐만 아니라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진정한 슬픔을 느낀다. 이러한 슬픔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진심으로 울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참 모습을 경험할 때, 자신의 피조성을 의식하게 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하다. 이 자의식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막연한 느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고독, 우울, 분노 등은 대체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는 느낌에서 생겨나는데, 그것은 막연한 느낌일 뿐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떨어져 계시다는 강력한 집합적이고 개인적인 망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분리는 종종 건조함이라고도 불린다. 우리가 이러한 분리를 경험할 때, 그리고 그 건조함과 슬픔과 시련을 하나님 부재로 해석할 때, 우리는 매우 강렬하게 이러한 정상적인 감정들을 경험한다.

   그것은 고아가 된 것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다소 적대적인 우주에서 고독함을 느끼며, 보살펴 줄 사람을 원한다. 우리의 여행의 일부는 우리의 내면에 이 작은 아픔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내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 전에는 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 여행의 목적지가 없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어딘가로 가야하며, 현재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예리한 분리를 느낀다.

   자아의 상실은 거짓 자아의 죽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완전함에 대한 욕구와 분리되었다는 느낌을 경험한다면, 우리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의 상실은 결코 정체성의 상실을 초래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존재가 되어간다.65)

3). 그리스도의 위치

  세번째 요소는 그리스도의 위치이다. 여행하는 도중에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된다. 『무지의 구름』에서 유익한 예를 들어보자.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본 것이나 자신에 대한 비난에도 움직이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난 사랑으로 예수를 의지했다." 마리아는 마르다의 부산함과 소음을 무시했다. 마리아는 마르다의 부산함에 개의치 않았다. 마리아는 마르다를 제어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아있는 동안에 마르다의 비방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마음의 비밀, 그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무지의 구름에 몰두하는 즐거운 사랑을 가지고 완전한 정적 속에 앉아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세상에서 지극히 순수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관상에 깊이 몰입하여 고귀하고 놀라운 무지의 구름을 통과하여 하나님께 다가가지 않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 "이 구름 속에서 마리아는 사랑하는 마음의 숨겨진 동경을 하나님께 보냈다." 마리아는 다른 것은 모두 포기하고, 주님과 함께 있었다.

   여행하는 동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관상적 여행을 시작했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용어나 이름을 초월하는 신에게로 부르신다고 느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무시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이름을 망각하며, 하나님에 대한 광대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에게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갔다가 돌아올 길이 필요하다. 이 움직임을 일으키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빛이요 생명이요 모범이시다. 이 여행에서 예수가 우리의 동료요 인도자가 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지도를 가지고 계시다.66)

관상을 갈망하는 사람은 연구와 깊은 성찰과 기도에 힘써야 한다.

   저자는 기초를 확립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영적 독서는 이 여행을 위한 틀을 마련해 준다. 우리는 그저 "복종하며" 관상의 상태로 흘러 들어가서 그 안에 머문다. 영적 독서의 순환 리듬은 우리가 터를 잡고 머무는데 도움이 된다. 예수는 우리의 인도자이시며, 성경은 우리가 이 여행 안에 머물게 해준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하심 및 삶에서 발생하는 것을 분별하는 과정에 필요한 지혜를 제공해준다. 우리는 보다 완전한 이해와 책임감에 이르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도움을 필요로 한다.

4). 사랑의 우월성

   마지막 차원은 사랑의 우월성(primacy of love)이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부드러운 사랑의 동요를 가지고 마음을 주님께로 들어올리며, 하나님의 선물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바라라.

  이것은 순수한 믿음으로 기도하기 위해 필요한 깨끗한 의도이다.

우리 참 사랑 안에서 피조물보다 하나님만을 사랑한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을 사랑 한다.

   관상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사랑을 받는다. 이 일의 중심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향하는 꾸밈없는 의도이다.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다. 사랑의 소원이라는 화살로 두꺼운 무지의 구름을 공격하라. 어떤 일이 닥쳐도 쉬지 말라.

  그리하여 우리가 기도 안으로 이동하는 것은 순수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작성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우리의 주의 집중의 중심적 단계이다. 관계의 초기에는 해야 할 일이 많지만, 관계가 성숙해지면 행동보다 사랑이 우선적인 것이 된다.67)

  결혼한 사람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즐긴다. 천정에 금이 갈 것에 대해 상대방에게 말할 시간이 없다. 그 시간은 서로 함께 지내는 시간이다. 이것은 하나님에게도 적용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상기시킬 필요가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신다. 그 분을 신뢰하라. 해야 할 것들의 시키는 일은 다른 기도 시간에도 넉넉히 할 수 있다. 지금은 단순히 주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무지의 구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68)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견고히 서려면, 당신이 가고 있는 길에서 벗어나지 말라. 당신의 갈망으로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놓인 무지의 구름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라.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정복할 수 없으며,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날카로운 사랑의 화살로 그 구름을 꿰뚫으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을 걷어차며,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일을 포기하지 말라.

  관상자에게 있어서 사랑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치유를 행한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관상기도는 죄의 근원을 제거하며, 보다 깊은 치유의 과정을 시작한다. 우리는 병의 근원을 그대로 둔채 증상들만 다루면서 표면적인 일에 평생을 보낼 수 있다. 그것은 잔디밭에서 잡초를 뿌리채 제거하는 것과 잔디를 깎아 주는 것의 차이이다. 그러나 이 비유도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뿌리채 제거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거룩하신 정원사가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69)

  우리가 사랑하고 신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관상을 시작하면, 우리는 무지의 구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며, 동시에 내면적으로 거듭 치료를 받는다.

5). 관상에 해당되지 않는 것

   관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는 무척 어렵다. 관상이 아닌 것에 대해서 여러 저자들이 말한 것의 목록을 소개해 보겠다.

  (1). 관상은 긴장 해소 운동이 아니다.

      혹 관상을 행하는 동안 긴장이 해소되는 것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부수  적인 효과일 뿐이다.

  (2). 관상은 카리스마적 은사가 아니다.

      카리스마적 은사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관상의 은사를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주는 카리스마적인 은사는 방언의 은사이다. 이 은사를 받으면, 우리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해하려는 욕구를 포기한다 : 우리의 찬양은 우리가 알고 있으며 사용하는 단어들을 초월하는 것이다.

  (3). 관상은 신비한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황홀함, 환상, 상상속의 말 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영적 작가들은 그런 것들을 얻어도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라고 충고한다. 그것들에게 지나친 관심을 기울을 염려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여행을 방해할 수 있다. 그것들은 귀중하기보다는 골칫거리이다. 자칫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신비한 현상들을 의지하기 쉽다.

  (4). 관상은 초심리학의 현상이 아니다.

      관상은 멀리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것, 심장 박동이나 호흡 등의 육체적 기능의 통제, 공중부양(空中浮揚), 체외유리(體外遊離)경험 등 초심리학의 현상이 아니다.   

  (5). 관상은 "영적 황홀경"(spiritual high)이 아니다.

      특별한 느낌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6). 관상은 빈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실체를 차단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기대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비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포기하기 위해서 필요한 은혜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일을 성령께서 행하실 것이다.

  (7).  관상은 덕이나 탁월함에 대해 주어지는 진기한 상이 아니다.

       관상은 우리의 업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선물이며, 누구에게나 임할 수 있다.

  (8). 관상은 우리가 관상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나 승인의 표식이 아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신실한 사람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발달하는 것이다.

  (9). 관상은 영성생활에서 선택할 수 있는 호화로운 대안이 아니다. 그것은 여행의 일부이다.   

  (10). 관상은 어떤 공허함 속에 합병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동방의 묵상 형태에 대한 지식을 대충 알고 있으며, 너무 오랫동안 묵상을 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믿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완화해 준다.

  (11). 관상은 물 한 방울이 하나님의 존재의 바다에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인격이 와해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흡수되어 인격을 상실하지 않는다.

  (12). 관상은 변화된 의식 상태를 소유하기 위해서 영을 몸으로부터 이탈시키는 것이 아니다.    

  (13). 관상은 고차원의 의식이 아니다.

  (14). 관상은 고통이나 욕구의 부재가 아니다.

  (15). 관상은 자기 인식이 아니다.

  (16). 관상은 하나님을 닳은 선한 상태가 아니다.

  그렇다면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토마스 키팅은 그것을 간단하고 권위 있게  표현한다. :

"관상기도는 내적 변화의 과정이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대화이며, 우리가 동의할 경우에 신적 연합으로 이어진다."70)

  그렇다면 집중기도(향심기도)란 무엇인가?

    "집중기도는 관상기도의 은사와 협력 할 수 있도록 우리의 기능들을

     준비시킴으로써 관상기도의 발달을 촉진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다."71)



1) 유해룡, ?하나님 체험과 영성 수련?, (서울 :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9), pp,90~91.

2) Tomas Keating, 하나님과의 친밀, 엄무광 역 (서울:성바오로출판사, 1998), P. 50.

3) T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엄무광,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서울 : 가톨릭출판사, 2003 ), P.35

4) 이덕근, ?관상기도의전통과 마음의 기도?,  신학전망 52호, (1981. 봄) p. 114.

5) 리차드 포스트,  박조앤 역, ?생수의 강?,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9), p. 22.

6) ibid p. 24

7) T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엄무광,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서울: 가톨릭출판사, 2003 ), P. 36.

8) 신앙생활과 같이 기도생활도 그 성장과 강도에 따라 단계를 정할 수 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자기성찰의 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의 3단계로 나누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구송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의 3단계로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수덕 단계와 신비적 단계로 나누고, 수덕 단계를 구송기도, 묵상, 정감의 기도, 단순함의 기도로 나누며, 신비적 단계는 주부적 관상, 정적의 기도, 일치의 기도, 순응일치의 기도, 변형일치의 기도로 나눈다.

   영성 신학자 리처드 포스트(Richard J. Foster, 기도, 두란노, p.184.)는 그의 저서 기도에서 “옛사람들은 기도의 세 단계를 말하였다. 그것은 입술의 기도, 지성의 기도, 마음의 기도이다.”라고 하였다.

9) Abhishiktanan, ?Prayer(기도)?, ISPCK, 1972 참조.

10) 르네 봐욤 신부는 이 기도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또한 다음을 참조할 것. Dom Vitalis Lehodey, UR,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본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본다. 우리의 사랑은 '봄으로써' 살찌고 불타오른다."(The Ways of Mentnl Prwer, Cill, Dublin, 1960, pt. II. ch. ix, par. 2). 그리고 "관상기도는 아주 단순하고 고도로 애정적인 직관을 통해 하나님께로 영혼을 들어 올리는 것"이라고 말한 레르카로 추기경(Cardinal Lercaro, "Methods of Menual Prayer," London,         Bums & Oates, 1957, Ch. 14)의 정의도 참조할 것.

11) Clifton Wolters가 자신이 번역한 현대 영어판,「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             Penguin Books, 1961, p.36)의 서문에서 한 말.

12) Jim Borst, ?A Method of Contemplative Prayer?, 박금옥 역, ?관상?, (서울 : 성바오로, 2004), pp.    26~27.

13) Clifton Wolton, ?The Cloud of Unknowing?, 성찬성 역, ?무지의 구름?, (서울, 바오로        딸, 2004,) p. 44.

14) Clifton Wolton, ?The Cloud of Unknowing?, 성찬성 역, ?무비의 구름?, (서울, 바오로 딸,             2004).  pp. 46~47.

15) Richard of St. victor, ?The Mystical Ark?, trans and intro. Grover A. Zinn, "The                  Classics of Western Spirituality'(New Yo가; Paulist Press, 1979). Book I. ch iv. p. 157.

     유해룡, ?하나님체험과 영성수련?,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5), p, 92.

16) 십자가의 요한, 방효익 역, ?어둔 밤?, I. 10. 6. (서울; 기쁜소식, 2005), p, 74.

17) 십자가의 요한, 방효익 역, ?어둔 밤?, II. 12. 2. (서울; 기쁜소식, 2005), p, 167.

18) 십자가의 요한, 방효익 역. ?어둔 밤?, I. 9. 6. (서울; 기쁜소식, 2005), p, 65.

19) Thomas Merton, ?What is Contemplation?, 오무수, ?명상이란 무엇인가?, (서울: 가톨릭출판사,        2004), p, 11.

20)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엄무광 역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서울; 가톨릭출   판사, 2003), pp, 27-28.

21) ibid, p, 28.

22) Thomas Keating, ?Intimacy with God?,  엄무광 역, ?하나님과의 친밀?, (서울:성바오로, 2003), p,    54.

23) 리차드 포스트, ?기도?, 송준인 역, (서울: 두란노 출판사, 2000), P. 213.

24) ibid, p, 215.

25) 유해룡, ?하나님체험과 영성수련?,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5), p, 92.

26) 베네딕트 J. 그뢰셀, ?심리학과 영성?, 김동철 역,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9), p. 300.

27) 엄무광, ?수도생활의 향기?,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8), P. 213.

28)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저, ?기독교대백과사전?, 제6권 (서울; 기독교문사, 1982), p, 519.

29) Gordon S. Wakefield ?A Dictionary of Christian Spirituality?, 엄성옥 역, ?기독교 영성 사전?, (서   울: 도서출판 은성, 2002), pp, 52-54.

30) Igumen Chariton of Valamo, ?The Art of Prayer?, 엄성옥 역, ?기도의 기술?, (서울: 도서출판 은    성, 2005), p, 25.

31) ibid, p, 25.

32)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엄무광 역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서울; 가톨릭출   판사, 2003), p, 27.

33) ibid, p, 27.

34) ibid, p, 28.

35)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엄무광 역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서울; 가톨릭출   판사, 2003), p, 28.

36) ibid, p, 30.

37)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엄무광 역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서울; 가톨릭출   판사, 2003), p, 31.

38) ibid, p, 32.

39) ibid, p, 33.

40) 참조. The New Blacfriars(Cambridge), 1969-1971에 실린 SimonTugwell, OP의 글들.       이 글들은 1972년에 「당신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Did you Receive the Spirit?)」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41) 완덕의 길, 28장.

42) A. Tanqueny, The Spiritual Life, par. 1363 ff.

43) Cardinal Lercaro, ?Method of Mental Prayer?, London, Burns & Oates, 1957, Ch.          14.

44) Richard J. Foster, ?Prayer?,  송준인 역, ?리차드 포스트의 기도?, (서울; 두란노, 2003),      pp, 177~191. )

45) ibid,  p, 181.

46) Richard J. Foster, ?prayer?, 송준인, ?리처드 포스터 기도?, (서울, 두란노서원, 2003). p, 184.

47) ibid, pp, 185~189

48)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엄무광 역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서울; 가톨릭출   판사, 2003), p, 17.

49) 향심기도(Centering payer)는 관상기도에 이르는 기도의 방법으로 토마스 키딩의 방법이라 하겠다. 이   방법에 대한 다른 이름들은 “집중기도” “구심기도” 등 번역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50)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엄무광 역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서울; 가톨릭출   판사, 2003), p, 18.

51) ibid,  p, 19.

52)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엄무광 역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서울; 가톨릭출   판사, 2003),p, 20.

53) ibid, p, 21.

54) ibid, p, 23.

55)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엄무광 역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서울; 가톨릭출   판사, 2003), p, 24.

56) ibid, p, 24.

57) ibid, p, 25.

58)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엄무광 역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서울;    가톨릭출판사, 2003), p, 26

59) ibid, p, 26.

60)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본인의 이름을 숨기고 있다. 지금 우리가 연구하는 관상의 기본이 무지의 구름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관상은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성찬성 역본을 2권을 추천하고 싶다. ?사랑의 탐색?은 ?무지의 구름?의 참고서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1). 성찬성 역, ?무지의 구름?, (서울; 바오로달, 2004, 12쇄). 저자와 개념을 잘 소개하고 있다.

  2). 성찬성 역, ?사랑의 탐색?, (서울; 바오로딸, 2002, 2쇄). 무지의 구름의 참고서(?)이다.

  3). 엄성옥 역, ?무지의 구름?, (서울; 도서출판 은성, 2000). 개신교 용어로 순화된 편이다.

61) Cal J. Arico, ?A Taster of Silence?, 엄성옥 역, 집중기도와 관상여행, (서울; 도서출판 은성,   2000), p, 181.

62) ibid, p, 182.

63) Cal J. Arico, ?A Taster of Silence?, 엄성옥 역, ?집중기도와 관상여행?, (서울; 도서출판 은성,        2000), p, 184.  집중기도의 지침은 p, 247이하에 설명되어 있다.

64) ibid, p, 185.

65) ibid, p, 186.

66) ibid, p, 187.

67) Cal J. Arico, ?A Taster of Silence?, 엄성옥 역, ?집중기도와 관상여행?, (서울; 도서출판 은성,        2000), p, 189.

68) ibid, p, 189.

69) ibid, p, 190.

70) Cal J. Arico, ?A Taster of Silence?, 엄성옥 역, 집중기도와 관상여행, (서울; 도서출판 은성,   2000), p, 192.

71) ibid, p, 192.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이다.
글쓴이 : 愛している. 조회수 : 2907.04.24 22:34 http://cafe.daum.net/hananimswin/64zF/3182주소 복사

악령이나 죽은 뒤에 형벌을 받도록 저주받은 영혼들이 거주하는 장소나 존재상태.

<지옥의 문>, Henry의 <Psalter>에 실린 채식화
감추다' 또는 '덮다'라는 뜻의 앵글로색슨어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지하세계의 뜨거운 지역을 가리키는데, 일부 종교에서는 지하세계를 차갑고 어두운 곳으로 믿는다.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 혹은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존재상태나 장소가 있다는 생각은 대부분의 세계 종교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인과 원시인의 종교에서 죽은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는 영혼의 종착지이다. 어두운 지하세계나 외딴 섬(그리스 하데스), 사람들의 영혼들이 형벌을 당하는 지하세계의 깊은 심연(그리스 타르타로스), 선하거나 악한 영혼들이 끊임없는 갈증을 느끼는 유령들로 지내는 지하세계의 어두운 곳(고대 이스라엘인의 셰올), 차갑고 어두운 지하세계(노르웨이인의 니플헤임 또는 헬),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거하는 천상의 장소(푸에블로족 인디언들이 죽으면 즉시 구름이 되어 비의 전달자로 지낸다고 믿는 장소), 영혼이 쇠잔해지다가 결국 소멸하는 어두운 장소(수렵생활을 하던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죽은 뒤 가게 된다고 믿는 장소)이다.

지옥은 최후 심판이 끝난 뒤 저주받은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거주하게 될 장소라는 견해는 조로아스터교·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등 서양의 예언종교들이 견지하고 있다. BC 6세기 이란의 예언자이자 개혁자 자라투스트라가 세운 조로아스터교는 영혼이 죽으면 심판을 받기 위해 3일 밤을 기다리다가 4일째 되는 날에 '보응(報應)의 다리'로 가서 생전의 행위들을 평가받는다. 선행이 악행보다 많은 영혼은 점점 넓어지는 보응의 다리를 건너 하늘로 가며, 선행보다 악행이 더 많은 영혼은 점점 좁아지는 다리를 건너다가 결국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고 악취가 나는 지옥에 떨어져 부활의 날까지 고통과 징벌을 겪는다. 선행과 악행이 균형을 이루는 사람들에게는 하메스타간('잡다한 사람들의 장소')이 준비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그 영혼들은 더위와 추위를 번갈아가며 고통받는다. 하메스타간은 그리스도교의 연옥 개념과 비슷하다.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유대교는 지옥을 '게헨나', 즉 악인들이 징벌을 받는 무시무시한 지역으로 보았다. 유대교의 지옥 개념을 토대로 삼은 그리스도교는 지옥이 죄된 생활을 한 사람들과 하느님을 부인한 사람들에게 내린 영원한 저주의 장소, 마귀와 그 휘하의 악한 천사들이 지배하는 불타오르는 지역이라고 보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지옥이 영원하다는 견해와 지옥이 뜨겁게 타오르는 내세(來世)의 장소라는 문자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대다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지옥이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형벌을 받는 상태라고 가르쳤다. 어떤 현대 신학자들은 문자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지옥은 적어도 악인과 선인이 구별되어 있는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

조로아스터교·유대교·그리스도교에 토대를 두고 지옥, 즉 '자한남'개념을 발전시킨 이슬람교에서 지옥은 모든 영혼이 낙원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건너야 할 좁은 다리 밑에 있는 뜨겁게 타오르는 거대한 분화구로 묘사된다. 저주받는 사람들은 다리에서 떨어져 알라(신)가 뜻을 바꾸기 전까지 고통을 겪는다.

힌두교에서 지옥은 영혼의 도정 가운데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행위에는 결과가 따르며 환생(還生)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승 밑에 있는 21곳의 지옥들 중 한 곳 또는 여러 곳에서 보낸 시간은 궁극적인 의미가 없다. 결국 영혼은 '세계(또는 궁극)의 영혼'에게 돌아갈 것이며, 그렇게 될 때까지 윤회의 인생을 보낸다. 자이나교에서 지옥('브후미스')은 죄인들이 생전에 쌓았던 악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마귀들에게 고통을 당하는 곳이다.

중국에서 도교는 사후의 형벌과 속죄가 일어나는 장소에 관한 불교의 관념을 받아들여 이를 수정했다. 일반인들의 지옥관은 〈서유기 西遊記〉·〈악비전 岳飛傳〉 같은 허구적인 지하세계 여행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지하세계에서 벌인 자비의 여행기들을 전하는 불교 경전에 근거한다. 그 내용에 따르면, 사람은 죽은 직후에 사자들에게 이끌려 성벽과 해자(垓字)의 신 성황(城隍) 앞으로 가며, 성황은 죽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예비 증언의 기회를 준다. 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은 불교의 낙원들 가운데 한 곳, 즉 도교의 불멸자들이 살고 있는 쿤룬 산으로 곧바로 가거나, 환생을 위해 지옥의 10번째 궁전으로 갈 수 있다. 죄인들은 49일 뒤에 메루 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지옥으로 내려온다. 10왕전은 주요도시 펑두에 자리잡고 있다. 죄인들은 정해진 기간 동안 한 곳 또는 여러 곳의 지옥에서 지내는데, 그 기간은 자비로운 지장(보살)의 중재로 조정될 수 있다. 죽은 사람들은 환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망각(忘却)의 국을 마시고 윤회(輪廻)의 바퀴에 오르는데, 이 바퀴는 각 사람을 다음 차례의 삶으로 데려다준다(다른 이야기들에 따르면, 죽은 사람들은 고통의 다리에서 내던져져 강물에 휩쓸리며, 강물을 타고 새로운 목적지로 간다고 함).

불교는 지옥이 모든 생물이 윤회하는 육도(六道:하늘·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다고 가르친다. 구사론(俱舍論)이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8대 지옥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① 살생의 죄를 진 사람이 가는 지옥인 등활(等活), ② 살생·절도의 죄를 진 자가 가는 흑승(黑繩), ③ 사음의 죄에 적용되는 중합(衆合), ④ 살생·절도·사음·음주의 죄에 적용되는 규환(叫喚), ⑤ 규환에 해당하는 죄에 추가하여 헛된 말을 퍼뜨린 죄까지 추가된 경우에는 대규환(大叫喚)에 적용되고, ⑥ 위의 ④·⑤에 추가하여 사견(邪見)의 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초열(焦熱)에 해당되고, ⑦ 위의 ④·⑤·⑥에 추가하여 니(尼)를 범한 경우에는 대초열(大焦熱)에 해당하며, ⑧ 부모를 살해하거나 부처에게 상처를 입힌 자가 가는 아비(阿鼻)가 있는데, 무간(無間)이라고도 한다. 각각의 지옥에는 다시 16개의 지옥이 있으므로 크고 작은 지옥을 모두 합치면 136개의 지옥이 있다. 그밖에 8대 지옥 이외에 8한(八寒) 지옥이 있어 중생이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게 한다.

고대 인도의 베다에 의하면 지옥에 있으면서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사자(死者)의 왕은 야마라고 한다. 이 야마의 한역(漢譯)은 염마(閻魔)가 되는데 불교와 함께 중국에 전해져 전적으로 중국적인 존재가 되었다. 명계에 있는 10인의 왕 중 하나인 염마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지옥의 개념은 원시불교의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에 비하여 정토(淨土)의 개념은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고 난 이후 생겨났다.
 
지옥은 여러가지로 묘사된다. 타나타 노트란 책을 읽은적이 있다. 그곳에 지옥은 햇빛이 쨍쨍 비취는 사막한 가운데를 걷고 있다. 매우 고통스럽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사막이다. 먹을 물도 없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통스러운 곳이 지옥이라고 묘사한 내용을 보았다.
 
과연 지옥을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난 죽어서 가는 사후세계가 있다고 본다.  난 10살때 교통사고가 나서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뇌를 심하게 다쳐 보름정도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있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내가 죽는다고 했었다. 그런데 난 그때 이상한 경험을 했다.
꿈인지 실제인지 모르겠지만 난 어떤 터널에 있었다. 나의 옆에는 금발의 하얀옷을 입은 소녀가 나를 항상 따라다녔다. 난 터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마음데로 할 수 있었지만 터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난 터널 밖으로 나가려고 애를 썼지만 나갈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 애를 쓰고 있는데 내가 안스러운지 터널 위에서 금발의 어떤 분이 고개를 내밀고
나에게 엄마라는 말을 하면 바깥으로 보내준다고 하였다. 애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하는 말이
"엄마"라는 말이다. 난 엄마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입속에서만 맴돌뿐 엄마라는 말을 할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계속 애를 쓰고 있으니 옆에 있던 금발의 소녀가 나를 도와주었다.
 
"엄마"라는 말을 하기 위해 난 무수히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엄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몇일을 노력하다가 나의 옆에 있는 금발의 소녀덕분에 엄마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난 엄마라는 말을 하는 동시에 터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터널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터널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또 마음데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보다 나가기가 어려웠다. 터널밖으로 나가려고 노력을 하였지만 되지 않았다.
마치 나를 어떠한 기운이 나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도 금발의 소녀는 나와 함께 했다.
그렇게 한동안 노력을 했다.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함께 하는 금발의 소녀가
나를 포기 못하게 하였다. 난 그렇게 노력한 끝에 다시한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터널 위에서 엄마라는 말을 해보라하던 분이 다시 나타나 나에게 이번에는 "아빠"라는
말을 하면 터널 밖으로 보내준다고 하였다. 난 엄청난 노력 끝에 아빠라는 말을 하게 되었고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깨어나서 첨음 한 말이 엄마라는 말이고 엄마라는 말을 하고 난뒤 한달만에 한말이
아빠라는 말이었다. 난 병원에 8개월정도 입원해 있어야 했고 2년여 동안 통근치료를 받아야
했다. 경북문경에서 대구로... 
 
사람들은 내가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나같이 뇌를 다쳐서 살아날수 있는 확률이
1000분의 1이라고 했다.  살아난다고 해도 반신불수가 되었던지 아니면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난 사고가 난뒤 4년뒤 거의 회복을 하고 텔레비전 보는데 사후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의
경험담이 나오는데 나와 같이 터널을 왕례했다는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여호와 증인들은 죽으면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로 된다고 한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태어나기도 전의 상태로 간다고
 
불교에서는 윤회사상을 가르킨다. 사람이  죽어서 나무가 될수도 있고 동물도 될수 있다고
히틀러는 죽어서 분재목이 �을 거라한다. 분재목은  순리되로 자라지도 못하고 늘 가지가
꺾이는 고통을 느끼며 살아야 하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많은 일들이 발생한다. 좋은 일만 생기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좋은일 보단 우리를 슬프게 고통 스럽게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통이다. 이 고통에 길들여져서 우리는 고통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공기로 뒤덮여 있고 기압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기압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이 처절한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은 아닐까..

출처 : 매혹된 영혼
글쓴이 : 존재의 마법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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