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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04.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

유테레사 2018. 8. 22. 00:20

 

04.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

 

 

 

 

 

3. 유럽의 노예무역과 식민지배

 

1) 아프리카 전통사회의 노예제도

노예제도는 아프리카 전통사회에서 농경사회가 발전하면서 인구 부족으로 자연스럽게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아프리카 전통사회 대부분은 순수혈통 공동체사회로서 전혀 다른 종족과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에 수적으로 제한된 공동체 구성원으로 확대된 공동체를 유지하고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자신들과 다른 종족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전통사회에서 노예제도는 극히 소규모였으며 외부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공동체 자체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일부 노예는 정복과정에서 노획한 부산물로서 대부분은 병사든 종이든 사회구성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프리카 전통사회에서 노예제도는 고대 로마나 중세유럽사회에서 있었던 노예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프리카 전통사회의 노예제도는 한 사회가 발전해 가는 과정의 일부였을 뿐이다.

 

2) 유럽의 노예무역

 

16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유럽인들의 노예무역을 전혀 새로운 현상이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유럽인에 의한 노예무역이 부분적으로 존재했으며, 7세기 이슬람의 침입으로 아프리카인들은 노예로 팔려나가기도 하고,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15세기에 유럽이 신대륙 개발 붐으로 노동력의 부족에 허덕이고 있을 때, 서아프리카와 교역을 했던 포르투갈인이 재빨리 노예무역 중계상인으로 나섰으나 점차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 지면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합류하여 대서양에 인접한 서아프리카 연안은 광활한 노예시장을 방불케 했다. 어림잡아도 약 5,50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를 떠났다. 아프리카에 엄청난 인구 손실을 초래한 노예무역은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유럽을 잇는 삼각무역형태를 이루었다. 유럽 인들은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를 사들여 식민지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노동자로 공급하고, 아프리카인들에게는 각종화기, 모직, 유리 구술, 장신구, 술 등 비생산적인 물품들로 지불했다. 결국 아프리카는 비생산적인 물품의 수입과 엄청난 규모의 경제적 인적자원의 유출 등 비생산적인 무역체제에 300여 년 동안 묶이는 상태가 되었다. 공급이 넘치자 수요가 줄어들고 가격이 하락하면서 노예 수입의 경제성도 떨어졌다. 이미 북미와 브라질에서는 노예를 더 이상 수입하지 않았다. 노예시장의 큰 부문을 차지하고 있던 미국이 노예해방을 선언함으로써 노예무역은 1900년대 말에 불가능해졌다.

 

 

유럽인들은 노예무역이 아프리카에 준 부담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인들 사이의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져 온 것으로 유럽 인들이 노예무역을 조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노예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본 사람은 유럽 상인들이 아니라 아프리카 노예상인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노예무역이 일부 아프리카 왕국들의 성장과 국가체제를 갖추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서양을 횡단하는 노예무역은 유럽인의 요구와 동기제공이 있었기에 계속될 수밖에 없었고, 노예무역으로 인한 피해는 길어지면 길어진 만큼 증폭되어 고스란히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그러나 300여년을 걸쳐 자행된 노예무역이 아프리카에 미친 영향은 유럽 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휠씬 심각하다. 가장 큰 피해는 경제적인적 손실이다.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 인구는 점차 줄어들면서 생산력이 급속히 감소하였다. 자신들의 공동체와 혈통을 지키기 위한 수단은 이웃국가나 부족을 공격하여 노예를 획득하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에 노예무역으로 인해 아프리카에서는 노예제가 더 확산되고, 이웃 국가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아프리카에서 노예제는 필요악이 되었고 일부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백인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강화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손쉽게 권력을 찬탈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대다수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유럽 인들을 굳이 쫒아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서구사회는 노예무역을 발판으로 산업화를 거치면서 부유해졌지만 300년이라는 고통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는 암흑이었다. 인류의 자원을 침탈당한 아프리카는 현재까지도 노예무역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3) 유럽의 식민지배와 아프리카의 혼란

 

 

노예무역과 달리 아프리카 중계인을 통한 무역은 더 이상 수지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무역회사들은 앞을 다투어 식민지 개척에 나섰고, 유럽 무역상인들의 경쟁은 결국 국가 간의 마찰과 경쟁으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콩고지역이다. 프랑스는 1876년부터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가 사제를 털어 콩고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거나 벨기에 영토로 귀속하려는 것이 아니라 레오폴드 자신의 제국으로 만들려는 계획에 위협을 가했다. 영국은 여러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포르투갈(콩고지역의 구종주국이었음)의 권리를 인정해주었고, 국제분쟁의 조짐이 보이자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가 개입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콩고문제를 통해 아프리카에서 독일을 식민지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했다.

 

비스마르크의 중재로 18841115일부터 1885225일까지 약 4개월간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14개국이 참여한 베를린회의가 개최되었다. 미국도 포함된 이 베를린회의에서 문제의 콩고지역에 대한 벨기에와 프랑스 권리를 인정해주고, 적도지역에서의 자유무역도 보장되었다. 게다가 기존의 점령지역을 기점으로 아프리카를 40여 개의 지역으로 분할함으로써 유럽국가의 영토팽창이 어느 정도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베를린회의에 아프리카 원주민의 참여는 없었다. 오히려 아프리카의 인종문화적 공통성과 자연적 경계를 무시한 인위적인 아프리카 분할로 12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종족간의 분쟁의 불씨를 남기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베를린회의를 기점으로 유럽정부는 아프리카원주민의 공격과 다른 유럽 인들의 위협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령(Protectorate) 선포를 남발하였다. 베를린회의에서 확정되지 않은 지역은 유럽국가들 간의 보호령 선포와 조약을 통해서 또 다시 분할되었다. 케냐는 영국령이 되었고, 탄자니아는 독일령이 되었다.

 

크든 작든 국가적 체제를 갖춘 아프리카 국가들과 사회혈연적 공동체인 소규모사회들은 자신도 모르게 유럽 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그 일방적인 통치에 거세게 저항하였다. 유럽의 입장에서 아프리카의 점령은 한 국가가 아니라 여러 국가가 경쟁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프리카 원주민의 저항을 막지 못하면 다른 유럽국가와의 식민지 쟁탈에서 우위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아프리카 원주민과 다른 유럽 인들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우세한 무기와 군사기술, 하나로 통일된 지휘체계를 갖춘 유럽에 대해서 통합되지 못한 여러 종족이 열악한 무기로 맞서야 했던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으며 20세기 초 아프리카는 완전히 유럽 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만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패전국 독일의 모든 식민지령은 국제연맹의 감시 하에 정리되었다. 아프리카에 대한 문명화(Civilization)’라는 구실로 국제사회도 유럽의 식민통치를 눈감아준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엘리트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조직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과 국제사회는 아프리카인들이 자치적으로 통치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능력을 가질 때까지 - 그 기한은 명시된 적이 없음- 국제연합의 감시 하에 신탁통치를 받도록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아프리카국가들은 최소한 15년 이상의 식민 지배를 또 다시 감내해야 했다.

 

유럽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본토의 수십 배에 달하는 식민지 영토와 다양한 문화와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을 통치해야 한다는 쉽지 않은 과제를 지녔다. 유럽 인들이 아프리카에 적용한 통치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영국은 톡특한 영국식 간접통치(Indirect Rule)를 실시하여 나이지리아와 같이 식민지역의 추장이나 부족장에게 고유의 권한을 부여하고 부족민을 직접 다스리게 하였다. 또한 영국의 간접식민정책은 백인 정착민들의 힘을 키워주는 역할도 했으며, 그 결과 아프리카 원주민과의 갈등과 분쟁을 야기하였다. 동아프리카에서 백인 정착민-영국정부-아프리카 원주민들 간의 갈등은 매우 심각하였다. 백인 정착민들은 간접식민정책을 교묘히 이용해 본국정부를 위협하며 식민 행정관료와 함께 원주민의 토지를 강제로 탈취했다.

 

근본적으로 영국의 간접식민통치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영국인과 동일한 정치적 평등을 부여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인들이 영국의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그 대신 식민지령에서의 입법 활동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특히 2차 대전이후 늘어나는 민족주의자들을 회유하는 방법은 독립을 시켜주는 것이지만 유럽의 전후 재건을 위해서 아프리카의 독립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아프리카 독립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던 영국 식민정부는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이 과격해지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이 용의하지 않을 경우 식민정부는 민족주의 운동을 무력으로 억압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허락했던 민족주의 정당까지도 강제로 해산했다. 그러나 백인 정착민이 많은 동아프리카(케냐, 탄자니아,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아프리카 민족주의정당과 백인정당 간의 세력다툼이 종종 발생하여 식민지에서 손을 떼려는 영국정부에 많은 부담을 주었다.

 

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한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매우 체계적인 직접식민통치를 실시하여, 식민행정부가 집중적으로 식민지를 관리하도록 식민지 행정조직을 재정비하였다. ()단위에 해당하는 세르클르(Cercle)의 장()은 프랑스 관리가 맡았다. 그 밑에는 면()에 해당하는 깡똥(Canton)이 아프리카원주민들을 통치했다. 그러나 깡똥은 부족이나 씨족회의를 통해 선출된 것이 아니라 식민정부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식민관료와 보다 밀착되어 있었다. 이처럼 프랑스는 문명화라는 구실 하에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자치를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으면서 프랑스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행사케 하여 아프리카인들을 프랑스식으로 개화시키는 동화정책(Assimilation)을 원칙으로 하였다. 다만 교육에 있어서는 프랑스어 교육을 의무화함으로써 사회문화적인 동화정책을 꾸준히 실시했다. 2차 대전이후 프랑스는 동화정책보다는 연합정책을 통해서 프랑스와 아프리카 식민지령을 제도적으로 묶어 놓았다. 194610월 기존의 헌법을 과감히 개헌하여 프랑스 연합의회를 창설한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를 포함한 모든 식민지령을 해외 영토부()에 편입시키고 프랑스인과 식민지령의 국민이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갖게끔 하였다. 또한 각 식민지령에서 1~2명의 원주민을 선출하여 프랑스 의회에 보냄으로써 법률제도적으로 모든 식민지령과 프랑스를 하나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한 행사에 있어서는 아프리카 의원과 프랑스 의원이 동수인 프랑스 연합의회보다 프랑스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프랑스의회가 실질적인 권한행사를 했다. 프랑스 연합의회는 정치적인 동화라기보다는 정치적 연합(Association)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자민족중심에 빠진 프랑스인들은 이러한 배려가 아프리카인들 스스로에게 이익이 된다고 보고 있었다.

 

프랑스 문명화정책의 목적은 아프리카인들의 독립이 아니라 서구문명의 선두자라는 자부심을 가진 프랑스 문화를 통해서 프랑스 제도권에 묶어두는 것이었다. 이러한 통치방법은 195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의 독립 요구로 더 이상 실효성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프랑스-아프리카 공동체를 창설하여 아프리카 독립을 무마시키려고 했다. 이 공동체는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독립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치권만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즉 아프리카 외교, 국방 및 치안에 대한 권한은 프랑스가 보유하고 공동체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는 입법, 사법, 행정권만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와 지속적인 독립의 요구로 프랑스-아프리카 공동체는 실시한지 2년 만에 막을 내리고, 프랑스령 식민지는 하나하나씩 독립 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프랑스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아프리카의 조기 독립을 지연시켜나갔다. 1954년 알제리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프랑스는 50만 명의 프랑스 군인을 동원하여 알제리 독립운동을 진압하였다. 결국, 알제리는 8년이 지난 1962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식민지령에 대해서 프랑스는 그들 식민지의 독립 이후를 생각하여 민족주의 정당보다는 프랑스의 지지를 받아 온 보수주의 온건정당을 지지했고, 이들 지도자에게 정치적 권한을 넘겨주는 준비를 진행시켰나갔다. 때문에 프랑스령에서 급진적 민족주의 정당의 활동은 용이하지 않았다.

 

프랑스나 영국처럼 고유한 식민정책을 갖지 못했던 벨기에와 포르투갈은 대의제도 등 아프리카인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주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친 벨기에는 할 수 없이 나중에는 직접 통치방식을 취했다. 이에 반해 포르투갈은 식민지령 원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다. 남아공의 백인정치로부터 해방된 짐바브웨(1980), 나미비아(1990), 남아공(1994)을 제외하고 기니비사우(1974), 앙고라(1975), 모잠비크(1975) 같은 포르투갈 식민지령이 제일 늦게 독립했다.

 

아프리카인들이 300년간의 노예무역을 어느 정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처럼 식민지배는 인위적인 국경 안에서 서로간의 왕래 없이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간직한 여러 종족들이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민족투쟁의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한 긍정적인 측면도 지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인위적 국경 안에서 여러 종족이 하나로 연합된 조직을 통해 민족주의 운동으로 독립투쟁을 벌이기는 거의 어려웠다.

 

반면 경제적으로 식민경제는 오로지 수탈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본국 식민경제정책의 기본은 식민기업과 상인들에게 맡겨졌으며, 본국정부는 장기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낼 수 있도록 정착민의 안전을 위한 군사적 조치와 통제, 식민행정 재정의 원천인 세금을 충분히 거둘 수 있는 조직된 행정체제와 하부구조에 집중했다.

 

19세기말 노예무역이 끝나가는 시기 쯤 재빠르게 플랜테이션을 통해 상업적 이익을 얻는 유럽 상인들로 인해 서아프리카에서는 보다 일찍 해외시장을 위한 생산이 이루어졌다.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는 백인 정착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지 않았다. 19세기부터 일부지역에서는 유럽인들과 아프리카인들 간의 간단한 물품교환 -정향유, 카카오, 땅콩 등 -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그렇지 않는 곳에서는 유럽 상인들이 생산할 작물을 원주민들에게 의무화시켜 환금작물 생산체계를 만들어 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아프리카 사업가, 부족장, 유럽 식민관료들이 돈벌이가 되는 플랜테이션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서아프리카 지역은 일찍부터 해외수출을 위한 전초기지적인 역할을 해왔다. 서아프리카에서 수출용작물 재배의 이익은 경작하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돌아가기도 하였던 반면 식품용 농산물 재배는 거의 중단되거나 점점 감소해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반면 동아프리카에서는 플랜테이션경제가 주를 이루었는데 이는 백인 정착제도와 맥을 같이 한다. 특히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이 지역에 파견된 많은 영국군들이 귀국하지 않고 정착하여 백인이주가 보다 수월했다. 아프리카인들의 토지를 헐값에 강제로 사들인 백인들은 모국에 수출하기 위한 독점적인 작물재배를 하였다. 대부분 동아프리카 인들은 임금노동자로의 전락을 강요받았다.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무역중심의 경제체제는 아프리카인들에게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소모적 경제에서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경제활동이 변화했다. 수출무역에 맞추어져 있는 아프리카 경제로 인해 아프리카인들은 특화된 상품의 생산자로서 세계경제에 자연스럽게 통합되었다. 1930년대의 경제위기를 제외하고 아프리카 경제는 실제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인해 겨우 세계경제에 맞추어져 있는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독립을 했어도 유럽에의 경제적인 종속을 하루아침에 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기계류, 철강, 자본재를 외국에 의존해야하는 신생독립국들은 식민경제가 구축해 놓은 수출경제체제에서 특화된 환금작물의 수출 외에는 별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서구시장 수출을 위한 몇 가지 산품에 특화되어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무역구조로 말미암아 아프리카 국가 간의 보완경제도 이루어 지지 않았고 각 국가들은 농산물과 광물 수출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해서 살아남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출처 : 오디오와 컴퓨터
글쓴이 : 관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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