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최근까지 마르꼬에 의한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마르꼬는 베드로의 동반자로서 베드로가 전한 예수님에 관한 가르침과 행적을 적은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이 복음서의 내재적 형태나 포함하고 있는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현실적으로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 요즈음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복음서의 저자는 단순히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해 나갔다고 보기 보다는 창의적 저술을 할 수 있는 이로 판단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꼬의 복음서를 저술한 저자는 누구였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아마도 실제 저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저자였을 것이고 이 복음서의 저자가 마르꼬라는 확언을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저술장소
전승에 의하면 이 복음서는 로마에서 저술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은 전승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렇다고 이 주장을 번복시킬 수 있는 구체적 증거 또한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단지 이 복음서가 지닌 내재적 증거로 보아 이 복음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을 겨냥하여 쓰여졌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사실은 이 복음서의 저자가 유대인, 특히 팔레스티나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라면 이미 잘 알고 있을 법한 것들을 새롭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방인들을 상대로 썼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해준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 본다면 아마도 예수님 사후 30 - 40년 사이에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널리 퍼져있던 지역과, 예수님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이 갈릴래아 아라메아어로 통용되던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이 있는 지역에서 이 복음서가 쓰여졌다고 본다. 이 곳을, 팔레스티나의 해안지역, 예컨데 체사리아 지역을 상정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듯 하다. 마르꼬 복음서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주된 활동지역이 갈릴래아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곳은 예수님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러 상황을 감안한다면 갈릴래아 지역과 가까운 시리아 남쪽지역 어느곳에서 쓰여졌으리라는 가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술 시기
서기 64년과 70년에는 대 사건이 일어난 때이다. 즉 64년 로마에서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최초로 대대적 박해속에서 처형을 받았고 또한 70년대에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때이다. 여러 성서학자들은 마르꼬의 복음서가 쓰여진 때를 서기 65년에서 67년 사이로 보고 있는데, 70년의 로마 군대와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가 마르꼬 복음서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있고 또 마르꼬 복음 13장의 이야기는 명확하지 않고 또 정확하게 이를 기술하고 있지 않다는 근거에서이다. 다른 가능한 일자는 65년에서 70년 사이로 보는 견해도 있고 근래에 와서는 70년 후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마르꼬 복음서의 골격
서론 (1:1-13)
I. 메시아에 관한 신비 (1:14 - 8:26)
1. 예수님과 민중 (1:14 - 3:6)
2. 예수님 자신 (3:7 - 6:6)
3. 예수님과 제자들 (6:7 ; 8:26)
대 전환 : 베드로의 고백 (8:27 - 30)
II. 사람의 아들에 관한 신비 (8:31 - 16:8)
1. 사람의 아들의 길 (8:31 - 16:8)
2. 예루살렘의 심판 (11:1 - 13:37)
3. 수난과 부활 (14:1 - 16:8)
[ 부록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 (16:9 - 20) ]
마르꼬 복음서의 부록 : 마르꼬 16:9 - 20
마르꼬 16:9 - 20은 원 마르꼬 복음서에는 없었던 부분이다. 즉 이 부분이 마르꼬 본 복음서에 실제로 포함되었는지에 관하여는 의심의 여지가 많으며, 단지 이 부분은 교회의 공인으로 포함 된 것이다. 아마도 이 부분은 추후에 편집되었을 것이며 그 내용은 다른 복음서를 참고하여 작성되어 첨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긴 부록(16:9 - 20)은 다른 세 복음서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연대기적으로는 제 4복음서 이후에 이 긴 부록이 첨가되었어야 옳을 것이다. 이 부록의 신학적 입장은 실제로 본래 마르꼬 복음서와는 다른 것이며 실제로 이 부분은 네 복음서가 쓰여진 훨씬 후인 주후 150년 경에 정리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 이 부분을 마르꼬 복음서 후에 붙여논 것은 마르꼬 16:8로 복음서가 완결된 것이 부자연스럽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부록(16:20 후반부)은 다른 필사본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것인데, 긴 부록 뒷편에 붙여 결론적 마무리로 사용되었다. 아마 이 짧은 부록은 4세기경 에집트 지역에서 쓰여졌던 것을 따온 것 같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마르꼬 복음서의 원전은 마르꼬 16:8로 끝난 것으로 되어있다.
마르꼬 복음서의 해설
(1) 베드로의 고백 : 대 전환점
지난 50여년간 마르꼬 복음서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다양한 연구 결론들이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가지 모든 학자들이 일치된 결론을 내린 것은 마르꼬 8:27-30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이 마르꼬 복음서의 핵심 분기점이며 이 고백이 대 전환점이라는 사실이다. 즉 베드로의 고백으로 마르꼬 복음의 전반부가 결론적으로 완결되며 동시에 후반부가 시작된다고 본다. 이는 어떻게 보면 마르꼬 복음의 전반부는 베드로의 고백을 결론적으로 내기위한 준비 정지 단계이며, 후반부는 베드로의 고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베드로의 고백은 마르꼬 복음서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시키는 고리인 샘이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우선적으로 베드로의 고백을 간단히 분석해 보자. 이 분석은 마르꼬 복음서가 무엇을 중심주제로 보고 있으며 왜 그렇게 보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르꼬 복음서가 지닌 신학 및 사목적 관심사가 무엇이었던가를 설명하기도 한다. 베드로의 고백은 마르꼬 복음서를 이해하는 열쇠이기에 왜 마르꼬 복음서는 이러한 편집과정을 거쳐서 작성되었으며 또 무엇을 중요시하고자 하였는가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필립보의 체사리아(가이사리아)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 (8:27)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언자 중의 한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8:28). 예수님은 다시 질문하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메시아 이십니다)”라고 대답한다 (8:29).
이 과정을 보면 베드로의 고백은 두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즉 첫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모호하고 막연한 대답이 3가지 대답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둘째로는 베드로가 명확하게 결론을 내린 부분이다. “바로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2) 마르꼬 복음서의 전반부 (마르꼬 1:1 - 8:26)
베드로의 고백을 깃점으로 마르꼬 복음서의 전반부를 역으로 더듬어 가 보기로 한다.
베싸이다 소경의 치유 (마르꼬 8:22 - 26)
베드로의 고백 직전에 마르꼬는 베싸이다 소경의 치유를 배열하였다. 이 치유 이야기는 대단히 특별한 기적 이야기이다. (마태오와 루가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이 기적 사화는 신약성서를 통틀어 보았을때 예수님께서 두단계의 과정을 통하여 치유한 유일한 경유이다. 첫번째는 손을 얹으시자 이 소경은 희미하게 밖에는 보지를 못한다(8:24). 두번째는 다시 손을 대자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된다. 마르꼬는 의도적으로 이 기적 사화를 베드로의 고백 직전에 배열하였다. 베드로의 고백이 두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듯이 이 치유도 두 단계로 되어 있음은 대단한 의도가 개입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두 경우 모두 처음에는 희미하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희미한 답변이 나온것은 첫번 치유과정에서 소경이 희미하게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현상이다. 베드로의 고백으로 모든것이 명확해지듯이 두번째 단계에서 소경은 명확히 보게 된다. 이 두 이야기는 서로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두번째 단계에서 스승 예수님의 신원을 명확히 보게 된 것은 바로 소경이 두번째 단계에서 사물을 명확히 볼 수 있었듯이, 예수님이 베드로의 눈을 뜨게 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소경의 치유 다음에 베드로의 고백을 배열한 것은 육체적 치유와 마찬가지로 영신적으로 치유를 통한 깨달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함이었다.
두번째 빵의 기적 (마르꼬 8:1 - 10)
베싸이다 소경의 치유는 두번째 빵의 기적 마지막 부분에 삽입되어 있다. 두번째 빵의 기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첫번째 빵의 기적이라는 전단계의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정하게 한다.
첫번째 빵의 기적 (마르꼬 6:30 - 44)
첫번째와 두번째의 빵의 기적은 중복된 빵의 기적인데, 첫번째 빵의 기적은 두번째 빵의 기적 처럼 귀먹은 반 벙어리를 고쳐주는 것으로 완결된다 (7:31 - 37)
[종합]
지금까지 보아온 것을 정리해 보면, 베드로의 고백을 끌어내기 위한 배열로 두가지 병렬 배열의 구성을 하였다. 즉 시작은 빵의 기적이고 결과는 치유 - 귀먹은 반 벙어리와 베싸이다 소경의 치유 - 로 되어있다.
마르꼬가 이러한 배열 방법을 쓴 것은 어떤 연유였을까 ? 아마도 두번째 빵의 기적과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사이에 누룩에 관한 말씀에서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누룩에 관한 말씀 (마르꼬 8:14 - 21)
두번째 빵의 기적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 여행을 하시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의 잘못된 영향으로 상징화된 누룩에 대하여 경고로 말씀을 하신다 (8:15). 그러나 제자들은 누룩에 대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여행중에 빵을 가지고 오지 못한 것을 넌지시 귀뜸한 것으로 오해한다 (8:16). 이를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러한 몰이해를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나무라신다. “너희는 눈이 있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느냐?” (이사야 6:9 - 10)
이 이사야서의 인용은 마르꼬가 귀머거리와 소경의 치유를 이렇게 배열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보면 육체적인 귀머거리와 소경의 치유에 관한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귀머거리와 소경 상태의 치유에 촛점이 맞추어 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빵의 기적에 관한 장절 ( 마르꼬 6:30 - 8:26)
두개의 병렬로 배열된 빵에 관한 이야기는 빵의 기적으로 시작되어 치유로 끝나게 되는데 이를 “빵의 기적에 관한 장절”로 부를 수 있다.
이 장절은 마르꼬 복음서를 이해 하는데 관건을 쥐고 있는 것으로 좀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명확한 것은, 마르꼬나 이 복음서를 읽는 독자, 심지어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이 빵의 기적은 주님이 행하신 최후의 만찬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거행하던 성체성사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이해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한편,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이 사건들을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했던 이들은 이를 어떤 징표로 받아 들였던가 하는 점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들은 아마도 이들 사건을 성체성사와 연결시켜서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사건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위하여 예수님께서 보이신 이 징표들을 구약성서에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신명기 8:3을 보면 “이는 사람이 빵 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귀절은 마태오 4:4 루가 4:4에 그대로 인용된 것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잘 알려진 귀절이었다.
성서에서 “빵”은 단순히 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 더나아가서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로 하는 모든것, 또한 요한이 이야기 하고 있는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이 삶은 한분이신 분, 영원하신 분, 즉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명기 8:3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즉 “사람은 물질적인 빵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이루는 ‘빵’에 의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통하여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은 하느님의 말씀, 즉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빵이 사람을 살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부터 나오는 계시를 나누는 분이셨으며, 그렇기에 그 분은 계시의 전달자이셨다.
예수님은 이 계시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워 온다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마르꼬 1:14-15). 동시에 그분의 사명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데 있었으며 바로 그 분 자신이 하느님 나라임을 알려준 것이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바로 그 분 자신이 사람들의 귀와 (마르꼬 7:31 - 37) 사람들의 눈을 (마르꼬 8:23 - 26) 열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알도록 한 것이다.
[전체 결론]
마르꼬 복음서의 전반부는 “이 분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끌어 내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전반부의 핵심 주제에 대한 전개 과정에서 빵의 기적에 관한 기술 (마르꼬 6:30-8:26)은 이 해답을 이끌어 내는 마지막 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질문은 복음서 시작에 최초로 나타나고 있는데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를 본 사람들이 한 말에서 찾아낼 수 있다. 즉 “이게 웬 일이냐 ? 권위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저 분이 더러운 영들에게 지시하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꼬 1:27)
이와 같은 맥락에서 풍랑을 가라 앉히시는 예수님을 보고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데 바람과 호수조차 이분에게 순종할까” (마르꼬 4:41)라는 귀절에서도 똑 같은 주제의 질문이 던져진다. 이렇게 보면 마르꼬 복음의 전반부 즉 1:1 - 8:26까지의 주제는 “이 분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끌어 내는 부분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첫번째 해답은 더러운 영이 해주고 있는데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입니다.” (마르꼬 1:24) 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마르꼬 5:7에도 더러운 영은 같은 해답을 주고 있는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읍니까 ?”라고 기술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으로 부터 치유를 받은 반 벙어리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본 기록이 있으며 (마르꼬 7:37),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서 치유를 한 후에 (마르꼬 8:23)도 같은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공적인 고백으로 볼 수 없고 오직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공적인 고백으로 간주되기에 마르꼬 8:27 - 30에 나타난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란 선언이 바로 마르꼬 복음서의 전반부 주제인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해답으로 볼 수 있다.
(3) 마르꼬 복음서의 후반부 (마르꼬 8:31 - 16:8)
수난에 대한 예고 (마르꼬 8:31 ; 9:31 ; 10:32-34)
베드로의 고백 직후에 예수님은 이 고백으로 확실하게 드러난 사실이 불러일으킬 결과에 대하여 또렷하게 언급하시기 시작한다. 바로 그것은 수난으로 첫번째 예고(8:31), 두번째 예고(9:31) 그리고 세번째 예고(10:32-34)로 이어진다. 이 예고를 통하여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님 자신에게 가져올 결과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받을 것임에 틀림없고 ...”(8:31).
이 예고에도 복음서 전반부에 우리가 고찰해 본 바 있는 점진적 과정이 유사성을 가지고 드러나 있다. 즉 이 예고는 횟수가 거듭되면서 명확해 진다. 특별히 세번째 예고에서는 대단히 구체성을 띄게 된다 (10:32 - 34).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것은 예수님의 예고 속에 십자가 형에 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단지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이었다.
제자됨에 대한 훈계 (마르꼬 8:34 - 38 ; 9:33이하 ; 10:35-44)
세번에 걸친 수난예고 사이에 베드로의 고백이 불러 일으킬 결과가 제자들에게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예수님이 설명한 부분을 마르꼬는 삽입시켜 놓았다. 즉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8:34).
예수님 자신의 수난에 관한 예고에는 십자가형이란 말이 나타나고 있지 않음을 보았는데 제자들에게 한 말씀에는 십자가형이란 말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고 의아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후자에 나타난 십자가형이란 말이 실제로 예수님이 쓰셨던 말이 었나 하는 점이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즉 “... 자기를 버리고 자신의 짐을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오 11:30, 루가 11:46, 갈라디아 6:5). 이것은 아마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던 베드로와 기타 제자들의 죽음을 알고 있었기에 마르꼬 복음서에는 “짐”대신 “십자가”로 바꾸었을 것이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마르꼬 10:35 - 45)
마르꼬 복음서 8:34 이후 예수님은 계속하여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청을 하는데, “선생님이 영광스럽게 되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 오른편에, 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한다 (10:37) 마르꼬는 이 두 아들들이 (아마도 모든 제자들이 그러 했으리라!) 예수님의 훈계와 부르심이 무엇이었는지를 전연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이래서 마르꼬는 10:35 - 45을 기술한 후에 바르티매오라는 소경의 이야기를 곁들여 대칭적 기술을 하고 있다. 이 두 대칭적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똑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기 바랍니까 ?” (10:36과 10:51). 이는 마르꼬가 우리로 하여금 이 두가지 대칭되는 이야기의 뜻을 알아듣도록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소경 바르티매오 (마르꼬 10:46 - 52)
세차례에 걸친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이와 상응한 제자됨에 대한 교훈 후에 소경에 대한 치유 이야기가 잇따라 나오는데, 이는 전반부의 베싸이다 소경에 대한 치유와 대비시키는 것과 같은 배열이다. 단지 베싸이다 소경에 대한 치유와는 달리 바르티매오의 치유는 절차 없는 간단한 과정을 통한 치유이다. 왜 그랬을까 ?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 치유를 받을 간절한 마음을 애닮게 호소한다. 아마도 그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훈계로 믿음을 강하게 가졌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또 한번 우리는 단순히 육체적인 치유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즉, 이 이야기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멈추어 서시어 ‘힘을 내시오, 어서 일어나시오, 그분이 당신을 부르십니다’ ” (10:49). 이 이야기는 부르심, 즉 제자에로의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이 이야기의 결말을 바르티매오가 눈을 뜬 다음에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 길을 나섰다는 말은 마르꼬 11:1에 나오듯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의미하며 이 길은 바로 십자가를 향한 길이었다. 이 이야기를 보면 국외자였던 바르티매오는 그 어느 기존 제자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제자됨의 훈계를 실제로 행하였던 이었다. 중요한 점은 이 국외자 (“길가에 앉아 있었던”)는 열두 제자중 하나가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점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 있거니와 마르꼬는 바르티매오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대비시키고자 했으며,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추종하겠다고 나섰으나 예수님의 말씀과 의도를 못 알아들은 반면 길가에 앉아 있었던 국외자 바르티매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것이다.
( 어떤 성서학자는 마르꼬 8:22-26의 베싸이다의 소경이야기로 부터 10:46-52의 바르티매오 소경이야기 까지를 한 장절로 보는 이도 있다. 이들은 이 부분을 마르꼬 복음의 중심 장절로 간주하고 있으며 제자됨에 대한 가장 핵심 부분으로 결론짓고 있기도 하다. )
백인대장의 고백 (마르꼬 15:39)
베싸이다 소경의 치유가 또 다른 소경의 치유로 이어지듯이 베드로의 고백 또한 다른 고백으로 이어진다. 또한 두번째 소경의 치유가 첫번에 비하여 보다 쉽게 이루어 지듯이 두번째의 고백 또한 베드로의 고백보다도 더 완벽하게 이루어 진다. “예수를 마주보고 곁에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 분이 그렇게 (외치면서) 숨지시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하고 말했다” (15:39).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책임지고 수행했던 로마 군인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을 그 때 그 자리에서 완벽하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아심이 있을 수 있다. 루가 복음 23:47을 보면 이 사람이 그 순간에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정말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 었다.” 우리가 여기서 잊어서는 아니되는 것은 마르꼬가 이 복음서를 쓴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였다는 사실이다. 이 40여년 세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수 많은 사람들, 즉 이 백인대장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선포되었고 또 받아들여졌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은 수 많은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아마 이렇게 쉽게 고백했을 것이다.
“참으로 이 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셨구나 !” 이렇게 본다면 백인 대장의 고백은 바로 복음을 받아들인 수 많은 이방인들의 고백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르꼬 15:39의 “참으로 이 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말은 마르꼬 복음의 시작 1:1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라는 말을 상기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이 귀절은 마르꼬 복음서의 전체를 이루는 기본 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종합 결론을 내려본다. 마르꼬 복음서의 후반부 (8:31 - 16:8)는 바로 베드로의 고백이 불러온 여러 결과들을 서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단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베드로의 고백은 어떤 결과를 불러 왔는가 ?”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르꼬 복음서를 세 귀절의 단문으로 표현한다면
“이 분은 누구신가 ?”
“선생님은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의미와 결과를 가져왔는가 ?”
마르꼬 복음서에 나타난 주요 주제
마르꼬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의 삶의 핵심 주제는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과 이에 대한 제자들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꼬는 이 주제가 가장 중요했기에 복음서 한 복판에 이를 넣어 복음서 전체 흐름의 대 전환점으로 삼은 것이다.
누구를 향하여 쓰여진 복음서인가 ?
마르꼬의 복음서를 유심히 살펴보면 복음서의 반가량이 “수난과 죽음”에 할애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복음서는 16장으로 되어있는데 8장 이하는 전부 “수난과 죽음”에 관한 부분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복음서의 앞 부분 즉 3:6에 까지 이러한 관점에서 표현되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즉시 헤로데 도당들과 함께 예수에 대한 모의를 하여 그분을 없애 버리기로 하였다 ”(3:6).
이렇게 보면 이 복음서는 확실히 “수난과 죽음”에 촛점을 맞춘것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 복음서가 누구를 향하여 쓰여졌는지를 알 수 있게 하며 아마도 그들은 이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체험을 했던 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 확실히 그렇다. 마르꼬는 계속해서 “박해”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예컨데 4:17, 10:30, 또한 13:11등이 이와 관련된 언급들이다. 이러한 것은 바로 마르꼬 복음서가 겨냥한 사람들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오랜동안 초창기 교회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긴 박해가 있었는데 바로 그것은 주후 64년의 로마의 대 화재 이후 가해진 네로의 박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울 수 있는 가정은 로마에 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하여 대략 64년 부터 70년에 걸쳐 이 복음서가 쓰여졌던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내용은 마태오와 루가에는 나타나나 마르꼬에는 명확히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마르꼬 복음서가 갈릴래아에 유별난 관심을 표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예컨데 16:7) 이 박해는 로마가 아니라 팔레스티나라는 주장도 꽤나 설득력을 지니는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또한 근래에 이르러 예루살렘 멸망(70년)전 몇년 동안 갈릴래아에 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거의 파괴될 정도의 박해가 있었다는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수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이 복음서는 갈릴래아에 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향하여 쓰여졌으리라는 점이 더욱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갈릴래아인들은 누구였나 ?
마르꼬의 복음서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향하여 쓰여졌다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면 이제 우리는 갈릴래아에 촛점을 맞출 필요가 있게 된다. 이미 우리는 갈릴래아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주로 열두제자에 관한 고찰을 해 본다. 열두제자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인데 이들은 “주님,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라는 말을 했던 이들이다 (루가 9:54). 이들 중 하나는 열혈당원이라는 시몬이었다 (루가 6:15, 마태오 10:4). 시몬은 한때 열혈당원이었는데, 열혈당이란 그 당시 팔레스티나의 혁명운동을 하던 조직이었다. (어떤이들은 열혈당이 실제 조직화된 것은 유대전쟁, 즉 66-70년 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른 제자는 이름이 이스가리옷이었는데 그 뜻은 ‘칼솜씨가 뛰어난 전사’라는 뜻이다. 그 당시 갈릴래아 출신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골칫덩이로 인식되어 졌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아마 예루살렘의 빠스카 축제기간동안 갈릴래아인들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갈릴래아인들은 비록 광신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기대를 갖고 추종하는 지도자에 대하여는 특별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또한 틀림없이 권력과 영광에 대한 집착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러한 이들에게 수난과 고통, 십자가라는 복음적 말씀들을 받아들이라고 했을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전형적 갈릴래아인들인 제자들이 매력을 느꼈던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었을 것이며 또한 예수님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이 권능은 기적적인 치유와 부활로 예수님에게 나타났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꼬의 복음서는 명확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우선 마르꼬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공표하는 것을 꺼리신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예수님이 기적을 너무 과시하게 되면 이 갈릴래아인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에 지나치게 집착하리라는 점을 유념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부활로 예수님의 영광이 너무 강조되면 이들은 영광에만 집착하리라는 것을 유념했기에 무덤에 관한 간단한 서술과 함께 부활사건을 단순히 “그분은 부활하시었다”(16:6)로 간략히 기록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이다.
(원래 마르꼬 복음서는 16:8로 끝나고 그 이후는 후대에 붙인 부록인데 그 내용은 다른 복음서를 참고로 작성되었다.)
갈릴래아 사람들이 위에서 설명한 대로 기적과 부활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을 잘알고 있던 마르꼬는 이와 관련된 기술은 가급적 축소하여 기술하고 그 대신 이들이 대면키 원치 않던 수난과 죽음을 더 강조하게 된 것이다.
상황의 중요성을 강조
마르꼬는 성서기술에 있어서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사람들의 관점을 대단히 중요시 하였다. 이 복음서를 접하는 이들은 이 복음서가 수난과 죽음에 대한 기술 못지 않게 기쁜 소식에 대한 기술이 강조되어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이 복음서를 기술한 저자의 의도를 오해한데서 비롯된다. 마르꼬는 그 당시의 사정과 복음서를 접할 당시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했을때, 수난과 죽음에 대한 강조가 더 필요하다는 사목적 판단을 했던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의 죽음과 수난에 당시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가졌었으리라고 판단했다면 마르꼬는 수난과 죽음에 관해서는 짧게 서술하고 부활에 관한 부분을 더욱 강조하여 기술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다른 관점에서 본 복음서
이쯤되면 이제는 마르꼬의 복음서 전체를 다른 관점과 각도에서 고찰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미 우리는 이 복음서의 전반부가 “이 분은 누구신가?”라는 의문에 답을 하는 과정으로 기술되었음을 보았다. 또한 이 답은 점진적인 과정을 밟아 점차로 명확해지는 순서를 택하고 있음도 보았다. 이 점진적 과정은 여러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은 치유를 베풀면서도 자신의 신원을 감추고자 했으며 사람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널리 알리지 말것을 계속 당부하셨다. 이것을 요즈음에 와서는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예수님이 이런 태도를 보이신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원을 명확히 파악하기 전에 성급한 결론의 결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염려하셨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반부의 결론이 가까워 옴에 따라 빵의 기적이 기술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예수님 은 자신이 사람들의 귀와 눈을 열어 “이 분은 누구신가 ?”라는 해답을 깨닫도록 하는 계시의 전달자, 동시에 하느님 자신이심을 점진적으로 알도록 기술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마르꼬가 택했던 이유는 그 당시의 제자들의 눈과 귀를 열어 이를 깨닫도록 하는데 예수님께서 얼마나 어려움을 겪으셨는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데는 두번이나 눈에 손을 얹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 하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반 벙어리와 소경의 치유에 관한 서술을 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사람을 거명치 않고 일반적인 모호한 서술을 했다는 점이다. 즉 “사람들이 귀먹은 반 벙어리 한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7:32) “사람들이 소경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 (8:22) “사람들이”, “한 사람을”이란 표현은 구체성이 없는 표현으로 일반적인 서술이다. 아마도 마르꼬는 이런 일반적인 표현을 씀으로써 독자들이나 우리들을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우리를 여기에 대입시킨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우리의 눈과 귀, 입이 열리지 않아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배대오의 두 아들, 즉 예수님의 제자였던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도 우리의 이야기 일 수가 있다. 오늘날에 와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리도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 보다는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우리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 제삼자일 수 있는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우리보다 먼저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그렇다면 오늘날에 있어서 소경 바르티매오는 누구일까?
예수님에 관하여 권능과 영광만을 생각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한 면만을 보고 있는 것이며 다른 한면인 수난과 십자가를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이해했기에 마르꼬는 제자됨을 수난과 십자가의 측면에서 이해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마르꼬는 이를 극명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십자가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즉 백인대장은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했기에 “예수를 마주 보고 곁에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이 그렇게 숨지시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하고 말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15:39),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으며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아무런 관심과 지식도 없던 이방인 백인대장이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은, 예수님이 처참하게 십자가 형을 받고 숨을 거두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꼬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즉 예수님의 제자됨은 십자가를 제대로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진정으로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증언코자 한 것이다.
메시아의 비밀
마르꼬 복음서의 핵심을 이루는 가장 큰 의문은 소위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며 권능을 가진 치유자이며 스승이셨던 예수님은 권능이 드러날 때마다 제자들이나 사람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하고 계신다. 이미 마르꼬 복음서 시작부분에서 예수님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즉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쳐주신후 치유의 기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것을 “엄히 경고하였다” (1:43).
또한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영광스런 변모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엄명하셨다” (9:9)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이 사람들에게는 물론 제자들에게 까지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예 4:10 - 13), 복음서의 중간부분에 이러한 현상을 여러형태로 마르꼬는 기록을 남겼다. 예수님이 하느님이 보내신 구세주이심을 깨달은 베드로도 이 사실을 즉시 모든이에게 말하지 말 것을 지시받고 있었다 (8:27 - 30).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런 태도를 보이신 것은 이런 사실을 공개적으로 널리 알림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결과를 아시고 이를 경계하신 것이라고 판단된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이루어 가는데 피할 수 없는 것이 수난과 죽음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메시아의 비밀”은 예수님의 신원을 이해하는데 역설적 측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가지신 권능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결과는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제자들에게 까지도 이해키 어려운 부분이다.
[중요 요점]
☞ 마르꼬 복음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을 겨냥하여 쓰여졌다. 저술시기는 서기 65년과 67년 사이, 로마의 대 박해시기 동안이라고 전해진다.
☞ 마르꼬 8:27-30 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이 마르꼬 복음서의 핵심 분기점이며 이 고백이 대전환점이다. 즉 마르꼬 복음의 전반부는 베드로의 고백을 결론적으로 내기 위한 준비 정지 단계이며, 후반부는 베드로의 고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거져오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전반부는 베싸이다 소경의 치유, 두번째 빵의 기적, 첫번째 빵의 기적, 누룩에 관한 말씀등의 사건을 통하여 사람에게는 육체적 치유와 함께 영적치유가 필요하며, 특히 이 영적인 치유는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빵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우리도 예수님께서 치유해주셔야 영적으로 눈을 뜨고 베드로처럼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의 선언은 마르꼬 복음서 전반부 주제인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해답으로 볼 수 있다.
☞ 마르꼬 복음서 후반부는 베드로의 고백이 불러온 여러 결과들을 서술한 것이다. 그것은 수난에 대한 예고, 제자됨에 대한 훈계, 여기에 대한 제자들의 태도와 소경 바르티매오의 따름 그리고 백인대장의 고백 등이다.
☞ 마르꼬 복음서 전체를 세 구절의 단문으로 표현한다면 :
” 이분은 누구신가 “
”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
” 그렇다면 이는 어떤 의미와 결과를 가져왔는가? “라고 할 수 있다.
☞ 마르꼬 복음서는 갈릴래아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쓰여졌을 것이다. 갈릴래아사람들이 기적과 부활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르꼬는 이와 관련된 부분을 가급적 축소하여 기술하고 그대신 그들이 대면키 원치 않던 수난과 죽음을 더 강조하였다.
☞ 마르꼬사가는 예수의 제자됨은 십자가를 제대로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서 진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증언코자 하였다.
[출처/참사람되어 단행본,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 헤르만 헨드릭스]